▲ 유인봉 본지 대표이사

요즘은 누구네 집에 가서 자고 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나는 어린 시절 서울에 사는 언니 집에 다녀오는 일이 늘 기다려지는 소망이었다. 크지 않은 방이지만 살이 닿을 만큼 붙어서 자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만리성을 쌓았던 덕분에 정도 쌓이고 추억이 되곤 했다.

우리 집과는 다른 문화적인 공간에서 알 듯 모를 듯 또 다른 가족의 삶과 문화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이웃 동네에 사는 친한 언니네 집에 가서도 나는 열흘씩이나 묵으면서 밥도 축내고, 우리 집 아버지 어머니와 전혀 다른 성격의 그 집 부모님들과 차분한 가족의 이미지를 배우기도 했다. 물론 그때 쌓인 정으로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그리운 사람들로 산다.

집에는 사랑채가 있어서 누군가가 방문하더라도 하룻밤을 자고 가도 좋았다. 거기는 반듯한 이론은 아니라도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에 대한 따듯한 위로와 사랑이 존재하게 만드는 산실이었다.

과부의 논밭은 이른 새벽 장정들이 일어나 잠시 일해 주고, 보살피며 도우며 살아가는 정이 있었다. 마을길도 수리하고 누구네 집의 고만고만한 사정을 서로 알고 도왔다. 

사람 반기는 아버지와 늘 상을 차려야 하는 노고를 감당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가끔 집에 온 손님들을 살피고 말을 붙이는 재미로 즐겁기만 했다.

행여 무엇인가 어른들에게 잘못 보여 혼이라도 날 것 같으면 얼른 뛰어가는 한 고개 너머의 큰 어머니네 집도 좋았다.

호랑이 어머니의 눈을 피해 도망가면 늘 큰 어머니의 넓은 치마폭이 넉넉했다. 그런데 요즘 같은 구조에서는 간혹 친정에 가더라도 바로 집으로 와서 잠을 자는 것이 편하다. 아파트 그 가족끼리의 문화공간에서 같이 끼어서 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정서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디에 있어도 다 풀리지 않는 응어리들을 가지고 산다.

뉘 집에 가서 그 집 밥맛과 장맛을 본다는 것이 요즘은 참 귀한 일이다. 밥도 먹고, 마음도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된다. 무엇이든지 혼자 다 풀고 삭여야 하는 고단함이 현대인들의 아픔이다.
일전에 사무실에 누군가가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하소연 좀 하고 싶어서 왔다"고.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다 풀어놓더니 얼굴이 달라보였다. 같은 얼굴인데 어쩜 그렇게 달라 보일 수가! 아주 환해져서 돌아가는 그를 보았다.

때로는 내 형제와 자매들에게서 다 풀리지 않는 일들도 의미 있는 이웃에게서 풀어질 수 있다. 행여 다른 가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가정과 위치를 돌아보고 배우고 또 배우는 일이 된다.
아직도 옛날의 그런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남성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다 집으로 같이 가고 싶은데 우리 집은 "아내의 성"이 되어버려서 못합니다. 아내가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싫어해요"

점점 더 이웃과 형제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곳이 우리네 삶의 터전이 아닐까? 그 옛날 친정아버지는 우리를 기르며 말씀하셨다.

"사람의 집에는 사람이 끓어야 한다. 사람이 안 오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집은 되는 일이 없다"고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늘 우리 집에 사람 불러들이고 밥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10분이면 밥이 다되는 솥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다.

밥 나눔, 이이야기 저 이야기 속엔 우리들 삶의 공통점과 더불어 나눔이 저절로 이어졌다. 나의 가장 큰 고민도 상대방의 이야기의 아픔보다 더 크지 않음을 발견하며 사람 사는 세상맛을 공유했다.

사실 몇 십 년 사이 아파트를 방문하고자 해도 여기저기 자물쇠로 꽁꽁 잠가 놓아서 쉽게 접근이 안 되는 곳이 많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옥에 갇혀버린 모습은 아닐까?'라고.
우리가 옷을 입어도 무슨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듯이 사는 공간의 형태도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을 규정한다.

요즘 사람들은 삶이 갇혀있기 때문에 조그만 압박도 견디어 내지를 못한다. 그렇게 괜찮은 모습을 취하다가도 순간에 돌변하는 성격의 소유자도 있다.

아직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넉넉하게 받아주는 자연의 품도, 사람의 품도, 공간의 품도 넉넉한 경험이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때로 우리는 잠시라도 나아닌 다른 타인의 시공간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것이 꼭 돈 주고 사먹는 카페에서 느끼는 낭만의 수위와 비교할 수 없다는 느낌이다.  

어딘가에 가서 쉬고 오는 사랑채 같은 곳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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