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봉 대표이사

조석으로 달라진 가을 날씨, 기분이 밝아지고 이유가 없어도 즐겁다.
오래전 꼭 이맘때 첫아기를 낳았다.

그것도 신 새벽에 아이를 낳고 나서 먹은 첫 미역국의 맛, 결코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꽃과 같은 나날이었다면 아기는 결실의 열매!

남편과 대학 80년대 초년에 만나 7년간을 지루함을 넘어 만남을 지속해서 얻은 딸이었고 대가족 12식구 속에서 태어난 까닭에 온 식구가 "인화초"라 불렀다.
그 딸이 이제  시집오던  내 나이의 세월이 되었다.

지금, 서로가 대화가 되고 하루하루 먼 시공간을 떠나 가장 영향력을 주고받는 생명으로 살아가노라니 남도 다 누리는 복일 터이지만 감개무량하다.

꼭 가을의 이맘때 새벽 3시에 아기를 낳고 나니 첫 미역국이 들어왔다.
그때 "어서 먹어라"는 독촉으로 한 숟갈을 입에 넣는데 "훅!"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를 낳고나니 산고의 고통으로 후들후들 떨렸지만 그 순간, 눈앞으로 친정어머니 얼굴이 확 겹쳐지며 떠올랐다.

"아! 아! 어머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함과 여러 감정이 눈물이 되어 미역국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한 번의 출산의 고통의 시작이었지만 줄줄이 여섯 명의 아이를 배 아파 낳은 어머니는 얼마나 기막힌 아픔을 통해 생명을 세상에 내놓고 키워냈던 것인지!
고통 없이 피는 꽃이 있으랴!

무어라 말이 필요 없는 일치감과 어머니를 이해함이 말이 아닌 몸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보다 완벽한 이해의 시간은 없었다. 그 이후에 단 한 번도 어머니 앞에서 어떤 불만도 불가함을 알았다.

그런데 또 꼭 가을 이맘때 어머니는 먼 나라로 가셨다.

며칠 사이를 두고 나는 예쁜 딸의 생일도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축하하고, 이내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추억하며 눈물이 쉼 없이 흐르기도 한다.

삶이란 그렇게 꽃도 되고 열매도 되고 또한  어떤 슬픈 이유가 다가와도 살아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산길을 걸으며 소리 없이 웃기도 하고, 소리 없이 울기도 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그야말로 바람이 불어 꽃이 피고 또 그 꽃은 져야 열매로 맺어진다.
때로 산다는 것이 고통일 수 있지만 꼭 살아내야 하는 것에는 어떤 근사한 이유를 붙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때로는 격렬한 바람이 분다. 늙기도 한다.
사람이니 태어나고 늙는다. 사람이니 늙고 세월이 가고 헤어짐의 장으로 간다.

그때, 아직 어른은 아닌 딸의 생일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앞두고였다. 경황이 없는 터라 병원 앞 식당에서 어렵사리 밥 한 끼를 먹었다.

딸과는 먹어야 하고 어머니는 며칠째 곡기를 입으로 넣지 못하고 계셨다.
그때도 어머니의 그 생사를 가르는 고통 속에, 살아있는 입에는 밥을 넣어야 하는 것이 참으로 고통이었다.
정이 많은 그 아이는 할머니의 힘겨운 모든 걸음을 다 저장하듯 고집스레 보려했다.
처음에는 말렸지만 어머니가 눈 감으시고 이 세상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머리를 빗겨주고 살결을 닦아주던 장면을 눈물 속에 함께 마주했다.

'그래 언젠가는 기회가 된다면 너도 나의 마지막을 마주하게 될 터이니!'
어머니도 살아생전, 자신의 인생을 나에게 꽃처럼 다 주셨듯이, 나도 언젠가는 딸의 품이 내 작은 어깨보다 더 커 보일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어머니의 딸이었듯이 나는 또 내 딸의 어머니고 이것은 딸들의 역사로 이어질 것이다.  어머니가 강하고 부드러웠듯이 그리고 질기게 살아내셨듯이, 나도 그러할 것이고 내 딸도 그러한 역사를 이루어내며 새 생명을 길러 내리라 믿는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 꽃처럼 즐겁고 열매처럼 탐스럽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사람이니 늙고 병들고 헤어진다.

어제 만난 반가운 이는 최근 가까운 지인을 저세상으로 보내며 한 달 이상의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고 했다.
 
혈육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의 꽃 같은 만남도 헤어짐도 세월은 다 안고 간다.
'고독한 혼자의 결단'과 '악착같이 살아가는 날들'도 수없이 많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래서 인생은 경건함일 수밖에 없다.
이 가을 하나하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돈으로 셀 수 없지만 감히 경건하다.

하루하루, 가을이 철들어 익어가고 있다.

유인봉 대표이사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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