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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에게 끌려가다 도망했어요김문복(79세)/월곶면 조강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월곶면>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도망했어요

전쟁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중 도망 은둔
처남, 인민위원장으로 부역 월북 남하 총살 

   
▲ 김문복(79세)/월곶면 조강리
“인민군은 예성강을 지나서 바로 개성으로 밀고 들어왔어요. 국군보다 더 먼저 인민군이 차타고 먼저 들어왔고 국군 도망병들은 산으로 해서 걸어오는데 더 늦었어요. 황해도 배천은 40리가량 안에 3.8선이 있잖아요. 거기에 국군이 배치되어 있었던 거였거든요.

조강포에는 80호가 있었는데 조강포가 통진, 하성, 대곶, 양촌을 꾸려나간다고 할 정도로 성업 중이었어요. 월곶면 소재지보다 컸어요. 개성이 송도이고 서울이었어요. 이성계 시대에요”

“인천가면 직통코스이지요. 그렇게 조강포가 직통요지로 고기가 많이 나고 서해바다 가깝고 그런 곳이에요. 서해바다에서 밀물이 오면 참이 된다고요. 배가 떴다가 물이 밀리면 마포까지 가는 거예요. 서해 바다의 모든 생선을 운반했는데 장사가 잘되었어요. 썰물에 마포에서 내려오는 거지요.

배가 대기하다가 서해바다로 가는 곳이기도 하구요. 이곳은 번성해서 집들이 많았고 우리 아버지도 상업을 하셔서 돈을 많이 버셨어요. 그런 배경이 있었고요”

“인민군이 오밤중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총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보니 인민군들이고, 인민군하고 같이 피난 온 사람들이 인민군이 국군보다 먼저 왔다고 말해줬어요.

국군들은 뒤쳐졌어요. 그리고 바로 서울이 점령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간 거요. 한강다리 터뜨려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이곳은 인민군 주력부대가 통과하고 잔여 병들만 몰아가 싸움터가 못되었던 곳이에요. 이곳 사는 사람들은 도망간 사람도 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나는 처가가 서암리라서 갔더니 인민군들이 다 갔다고 해서 집으로 도로 왔어요. 인민군들이 몰고 가니 군인들도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었어요.

소련군도 오고, 중공군도 온 것은 1.4후퇴 때야. 나는 당시에 대구에서 훈련받고 며칠인가 27일 만에 전방으로 갔어요. 강원도 화천에 배치되어 있었고, 진치고 인민군하고 중공군하고 전면에서 싸웠어요.

싸우다가 8사단이 망해서 인민군에게 포위되고 옥동리에서 붙잡혀져 중공군에게 넘겨졌어요. 그들이 끌고 가는데 밤중에 도망했어요”

“밤에 행군을 했는데 개성까지 가면 집이 어딘지 아니까 개성을 찾아 다른 군인 한 명과 임한면에 오니까 인민군이 잔뜩 배치되어 있어 상도리에 가서 숨겨 달라 부탁했어요.

주인이 서른여섯 형은 50세 가까이 되었는데 우리 집의 내막을 잘 안다며 숨겨줬어요. 산소처럼 호를 파서 숨었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꽁보리밥, 밀밥을 먹고 그랬는데 어려운 집에서 2명을 먹여줬어요.

대소변도 받아 내줬고요. 6.25때 불러오려고 했는데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어요. 이제 옮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에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요.

그들도 걸리면 총살감이잖아요. 그리고 3일 지나니까 인민군이 철수를 해서 더듬더듬 건너와 악을 쓰니 내 목소리가 크고 똑똑하니 다 들려서 뗏목을 사촌이 가지고와 태우고 해병대 5대대로 갔어요.

그리고 낙오자 수용소로 가서 며칠 있었어요. 그리고 각종 간부후보생에 합격해서 대위가 될까 말까 한 시기에 HID부대 선임하사에게 제대하겠다고 말해 제대 후 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 중간에 청년대를 구성해서 13명이 활동했어요. 월곶면은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월곶초등학교 뒤 골짜기에서 처형들 하고, 농협창고뒤 골짜기 밤나무골에서 죽이고 그랬어요. 바닥 빨갱이들은 인민군 군대 나가는 것, 의용군 나가는 것을 도와주고, 자기네들 말을 안 들으면 일도 더 시키고 그랬어요.

하성면은 많이 죽였다고 이야기 들었고, 서로 많이 죽였다고 들었는데 월곶은 용강리서 몇 명 나오고 귀전리, 옹정리 그쪽과 성동리에서도 죽고 그랬다고 들었어요. 이 마을에서는 총소리 몇 번이지 후퇴하면서 인민군들이 소 끌어가고 이불이니 뭐니 좋은 살림 가지고 갔어요”

“우리 처갓집이 부자였는데 양자를 들였어요. 인민군들이 들어오니 부자들을 지주라고, 반동이라고 몰수를 시켰어요. 안 들어오면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그래서 부역을 하고 인민위원장을 했어요. 우리 처남이요. 그러고 나서 6.25때 이북으로 갔다가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렇게 우리 집에 있다가 붙잡혀서 총살당했어요. 군인이 아니고 순경들과 치안대에 붙잡혀 죽었어요. 아도 호적상 유지라고 적혀 있어서 체크를 해 놓았더래요. 급할 때 잡아 뽑으려고 해 놨더래요”

“1.4후퇴 당시에 유엔군이 들어왔을 때 우리 집을 남겨놓고 다 소개를 해서 다를 천막치고 살았어요. 이곳은 폭격은 있었지만 싸움은 없었어요. 박격포를 거기서 쏘면 80미리가 여기까지 밖에 못와요. 60미리는 강가에 떨어졌어요.

치안대들이 다 점령해서 다른 지역보다 빨리 복귀가 되었어요. 치안대는 민간인으로 경찰소속이었어요. 순경이 모자라니까 차출해서 일할 만한 사람들이 경찰과 합세해서 일했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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