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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눈, 성자의 눈빛
   
▲ 유인봉 대표이사

살포시 하얀 눈이 내렸다. 제법 실하게 내리는 눈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눈 덮인 지상의 아름다운 세계 한 컷을 그리고는 그야말로‘봄눈 녹듯’그렇게 녹는다. 그래도 우수를 기념하는 마지막 눈일까 싶어 마당가를 소리 나게 쓸었다. 쓸 것도 없이 녹는 봄눈은 나뭇가지에 쌓여도 계속 떨어지면서 급속하게 사라졌다.

우리네 고통도 우울함도 피곤함도 그렇게 봄눈 녹듯이 녹아졌으면,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를 사흘 앞두고 어머니를 영원의 세계로 보내드린 일곱 형제자매들이 있다.

“좋은 날 좋은 시에 품위 있게 가고 싶다”고 늘 하시던 말씀대로 요양원이 아닌 수년간 형제자매들이 릴레이를 이어가며  9순의 어머니를 모셨었다.  

봄눈이 내리는 49재, 막내딸은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왔다. 연한 색상이 어우러진 평소 어머니 색을 닮은 영원히 꽃잎이 지지 않는 꽃이다.
책상위에 그 꽃이 곱게 놓여있다. 마지막 순간, 구순의 어머니가 가지고 싶어했던 것이 꽃과‘새 신발’이었다. 품위 있는 죽음을 기도한 구순의 어머니는 열 여섯 봄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었나보다.  

다소 말없는 큰 며느리는 “마음이 태평양 같다. 큰 아이다워 좋다”고 하고 직선적인 둘째 며느리는“시원시원하고, 둘째다워서 좋다”고, 그리고 막내 사위에게는 만날 때마다“너무 좋다.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그 어머니는 누구셨을까!

분명 일곱 자식들의 저간의 사정을 알 만큼 다 알고 있어도 덮어주고 안아주고 믿어준 ‘어머니성자’.
산에 살포시 내린 봄눈처럼, 하얗게 소리 없이 녹아내려준 눈꽃은 아니었을까!

사실 살다보면 점점 더 말이 적어진다.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놓아야 속이 시원한 것만도 아니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일일이 다 따지고 파헤치고 분별하며 정의라고 하기보다는 품고 삭이고 녹이고 그런 과정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그 나이가 되면 저절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긋이 웃어주는 일이 세상에서는 잘 안되는 일들이다.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밀어붙이며 울분에 가득 찬 사회, 자신의 가치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잔인함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고스란히 녹아내려주는 봄눈 같은‘성자의 눈빛’이 그립다.
금방 녹아 없어질 것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그 분이 살던 집이 헐리고 신작로가 난다고 했다.
어머니 장독대의 고추장 된장 간장은  일곱 형제자매의 집으로 나뉘어 이사를 갔다. 자식을 낳고 키우고 살던 고향집을 기억의 공간으로, 어머니의 삶은 봄눈처럼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 오랜 아픔가운데에서도 그토록 품위 있는 마무리까지 눈빛을 흐리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분의 소원대로 훨훨 털고 세상을 건너서 숲이 되고 양지바른 겨울 산이 되셨다. 남은 지상의 가족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봄을 맞이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지상의 탐욕이 다 사라진 봄눈 같은 포근함으로 가득해 그 눈빛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욕심이 모두 사라진 이의 눈빛이 어떠한지 나는 그 어머니의 눈빛에서 분명하게 보았다. 성자의 눈빛이 그렇지 않을까! 혹여 백년인생이라 해도 어찌 보면 잠시 왔다 가는 봄눈은 아닐까?

햇빛의 찬란함에야 어찌 곧 사라지는 봄눈을 견줄 수 있으랴만 잠시 왔다가는 우리네 인생이 봄눈인줄 깨닫고 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많이 가지지 않고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았어도, 수줍은 듯한 봄눈으로 잠시 빛이 날 수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은 한 세대가 오고 가는 것도 억겹의 세월에서 보면 모두 찰나이다. 모든 것은 찰나였고 그 찰나가 곧 영원일 것이다.   

유인봉 대표이사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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