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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생명윤리 논쟁 '생명 윤리의 빛과 그림자'"베아세포 잠재적 인간 규정은 논리비약"

                        글쓴이   최훈동(서울의대 초빙교수  한별정신병원장)
 
 모든 사물에는 빛의 밝은 면과 동시에 그림자의 어두운 면이 있다. 전장에서 포탄을 맞아 피가 콸콸 쏟아지며 고통에 신음하는 사병에게 눈물을 흘리며 방아쇠를 당기는 전우. 그를 믿기에 총을 쏴달라고 부탁하는 친구. 이것을 살인으로 볼 수 있을까?

거기에는 어디에도 살해 충동, 적의, 미움이 없다. 고귀한 사랑과 우정, 신뢰, 연민이 있을 뿐. 적이 밀어 닥치고 있는 마당에 치료도 후송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 손으로 전우를 죽일 수 없다고 거절해야 될까?

지하철에 떨어진 중년 취객을 구하고 죽은 젊고 유능한 사람에게 자신의 신체를 살해한 살해범으로 몰 수 있을까? 자살도 자기 살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로운 자살에는 살의가 없고 사랑과 상대방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만 있다.

자살을 방조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더 이상 회생 불능의 환자를 안락사 시키는 문제는 자살과 타살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해석이 일률적일 수 없는 경우들이다.

 생명 윤리도 한두 가지 잣대로 간단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낙태의 예를 들어보자. 임신 후에 3-4개월 경과된 시점에서 치명적인 기형아임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의학에서는 치료적 임신중절이 있다. 산모의 건강이 임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위태로울 때, 태아가 출생 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일 때, 나이 어린 미성년자가 성폭행으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였을 때, 그것도 에이즈와 같은 성병이 감염되었다면 이런 사실이 2-3주 지나 밝혀진 것이라면 배아가 이미 상당 수준 조직으로 분화한 단계라도 부모의 동의하에 임신을 의학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 경시일까? 모든 정자와 난자의 교합을 무조건 수정란이 되었으니 인간으로 키워야 될까? 무분별한 낙태 수술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하나 모든 낙태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출생하는 과정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인간의 무분별한 성적 욕망의 결과, 술에 취해 난잡한 성교 끝에, 심지어 성폭행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임신되어 출생하는 불행한 경우도 많다.

여하튼 성적 결합에 의해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자궁에 잘 안착되어 모태로부터 모든 수분과 영양분 및 산소 등을 모체의 혈액을 통해 공급받아야만 배아 세포의 분화와 성장이 가능하다.

배아 세포만으로 고정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수없이 세포가 분열되면서 여러 세포로 변화하는 생명의 전환 과정을 거친다. 배아 상태에서 태아로 성장하기까지 모태의 조건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완전할 때는 자연 유산되어 자궁 출혈로 배출된다.

이 과정에서 배아 세포를 잠재적 인간이라 규정하는 것은 논리가 비약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 논리의 결정적 결함은 배아세포를 인간 가능성 하나만으로 인간 생명과 동일시함이다. 생명의 정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세포 차원 이전인 분자 차원과 소립자 차원으로 내려가면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도 사라진다. 전기화학적 변화는 인체 내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포들은 각 세포의 생명주기에 따라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원래의 배아 세포는 역설적으로 사라져야만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 배아 세포든 성체 세포든 그 자체가 그대로 확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 현상은 역동적이고 매순간 변화한다. 고정된 정태적 생명이 아니다.

배아 줄기세포의 경우는 아직 감각 기관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더구나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난자의 핵을 제거한 대신 필요한 체세포를 심어 키우는 것이므로 수정란도 아니다. 실험실과 같은 자궁이외의 인위적 공간은 모태와 구별해야 한다.

완벽한 자궁을 실험 공간에서 갖춘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난자 하나로도 정자 하나로도 수정란 자체만으로도 모체라는 완벽한 환경 없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실험실의 배아세포의 생명까지 인간 윤리를 적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다. 따라서 자궁에 안정되게 뿌리내린 수정란에 국한시켜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봄이 타당하다.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장차 난치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빛은 너무 밝다. 최근에 미국 의회 하원이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의안을 가결시킨 점은 주목할만하다.

그들이 종전의 입장을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학적 이론으로 갑론을박하는 사이 불치병에 대한 연구를 따라잡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닐지. 우리가 막아야 할 일은 학자들의 순수한 연구가 아니라 순수한 연구 목적이 어두운 탐욕의 무리들에 의해 오염되는 경우이다.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대비한 법적 견제 장치와 보완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미리 제도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은 상용화 이후 높은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못하는 경우이다.

일년에 100만 명 이상의 태아가 낙태로 희생되고 있는 현실과, 시험관 수정과 대리모 거래가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생명 경시의 현실은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안락사나 줄기세포 연구의 어두운 측면을 고려해야 함은 당연하나 학문적 논란이 일어날 경우 예를 들면 인간 생명을 언제부터 볼 것인가 또는 안락사를 시킬 상황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의학자들의 의견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

학문적 의견이 반인륜적일 경우 폐기해야 마땅하지만 법적 종교적 논리가 학문적 의견을 앞서서는 안 된다. 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입각해야 바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의 코드는 사랑이다. 그 가운데 고통 받는 자에 대한 사랑. 종교의 구원도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다. 생명에 대한 경직된 해석은 사랑의 활활발발한 생명력을 질식시킬 수 있다.

사랑에는 도그마가 있어서는 안 된다. 도그마의 해체. 사랑앞에서는 어떠한 도그마의 얼음도 녹여버리는 혁명성이 있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혁신성을 사랑은 가지고 있다. 살신성인도 그로부터 나오고 무연자비도 그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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