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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숙종실록(21-30)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21)숙종 23권, 17년(1691 신미/청 강희(康熙) 30년) 9월 1일 임자 1번째기사

●김포 장릉에 전알하다
임금이 김포(金浦)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였다. 특별히 명하여 능행(陵行) 때에 부역(赴役)한 여러 고을의 가을 수미(收米)를 결(結)마다 각각 2두(斗)씩 줄이게 하였다.

【영인본】39책 252면
【분류】*왕실-행행(行幸)/*재정-역(役)/*재정-전세(田稅)

22)숙종 25권, 19년( 1693 계유 / 청 강희(康熙) 32년) 10월 3일 계유 1번째기사

●통진·문수산 등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통진(通津)과 문수산(文殊山)과 강도(江都)7859) 를 요새지라고 하여 성(城)을 쌓아 지키도록 의논하자,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 등이 합사(合辭)하여 이 일을 찬성하였다. 임금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의징(李義徵)에게 가서 지형(地形)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영인본】 39 책 287 면【분류】 *군사-관방(關防)
[註 7859]강도(江都) : 강화(江華). ☞ 


23)숙종 27권, 20년( 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9월 13일 무인 2번째기사

●문수 산성의 배속·희빈 장씨 예우 등을 논의하다. 어영 대장 신여철의 파직에 대한 사론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문수산(文殊山)에 성 쌓는 일이 이미 끝났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에 전속(專屬)시키고, 통진(通津)을 총융사의 관할 밑에 두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통진 관원들을 성 안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병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좁아서 용신하기 어렵습니다.”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물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는데, 성을 이미 쌓고 나서 천맥(泉脈)이 자못 많아지기는 했지만 땅은 진실로 협착합니다. 그러나 단지 관원이 있을 곳만 설치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 총융사를 보내어 가서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뒤에 총융사 이기하(李基夏)가 명을 받고 가서 보고 돌아와 아뢰기를,
 
“성 안에 단지 두 군데의 골[洞]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매우 작아 관거(官居)는 옮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할 수 없다면 먼저 창고(倉庫)를 옮기고 이어 객사(客舍)를【군현(郡縣)에서 사명(使命)을 띠고 온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설치하여 앞날의 주필(駐蹕)에 대비하도록 하고, 민가(民家)는 성 밖 북편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윤지선이 아뢰기를,

“진실로 관거를 옮겨 놓으려고 한다면 어찌 용납할 수 없겠습니까? 성의 밖은 지세(地勢)가 평탄하여 또한 백성들을 거주하게 할 만했습니다.”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조사석(趙師錫)이 이 성을 쌓으려고 했고, 윤지완(尹趾完)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을 적에 또한 구획(區劃)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지선은 관거(官居)를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기하는 옮길 수 없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성을 쌓은 본 뜻은 단지 적인(敵人)들이 점거하여 내려다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땅을 넓게 차지하여 한갓 인력(人力)을 허비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굳게 지키려고 한다면 관거는 의당 옮겨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올해는 비록 옮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용히 해 가야 할 것이다.”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이를 총융사에게 전속시키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강화(江華)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강화에 전속시켜야 한다.’고 합니다.”하니, 임금이 강화에서 구관(句管)하도록 윤허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은 이 산성(山城)의 주인이니, 마땅히 고을 명칭을 승격(陞格)시켜 중요시하여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현(縣)을 올려 부(府)로 만들고, 무신(武臣) 중에 품계(品階)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인 사람을 가려 보내는 것을 일정한 규례로 삼으라.”하였다. 비국에서 이 일을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진주(閔鎭周)에게 물으니, 민진주가 아뢰기를,
“강화는 구관하는 데가 너무 많아 다시 이 성까지 총관(摠管)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남구만이 주청(奏請)하기를,
 
“군문(軍門)에서는 기계(器械)를 관장하고 강화에서는 양향(量餉)8306) 을 주관하게 하며,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그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조치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의논이 결정되지 않아 빈 성만 우뚝하고, 마침내 한 사람의 백성도 살지 않고 하나의 물건을 저장하지도 않았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탄했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전에 박만정(朴萬鼎)이 상소하여, 희빈(禧嬪)을 특이한 예(禮)로 대우하고 또한 따로 궁호(宮號)를 내걸기 청하였는데, 그의 한 말이 지극히 미안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처음 조정에 나왔을 때 우상(右相)이 신에게 글발을 보냈는데 박만정의 말과 비슷하였습니다. 그 뜻이 대개 조가(朝家)에서 새로 폐치(廢置)는 했지만 군하(群下)들의 마음에는 의아스러워하는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대의 역사에 있는 것처럼 딴 궁(宮)에 폐치(廢置)했다면 법대로 공봉(供奉)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희빈은 일찍이 홀로 있었던 일이 없고 함께 한 궁 안에 있으면서 왕후(王后)보다는 1등을 내렸을 뿐이니, 다시 특이한 예모를 차린다면 왕후와 함께 존숭함이 똑같아질 염려가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따로 궁 이름을 내걸 것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논을 만약 통렬하게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의심스럽게 되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 것이니, 마땅히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의 사서(私書)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박만정은 처분이 이미 결정된 뒤에 그런 말을 하였으니, 자못 매우 옳지 못하다. 다시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중률(重律)로 논죄(論罪)할 것이니, 유시(諭示)를 반포하라.”하였다. 윤지선과 남구만이 아뢰기를,

“제도(諸道)에서 무예(武藝)를 몰기(沒技)8307) 로 계문(啓聞)하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한 것은 모두 허위입니다.”하니, 임금이 이 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훈련 도감(訓鍊都監)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사 중에 글씨 잘쓰는 사람이 하나 있기에 신이 서자(書字)의【이례(吏隸)의 명칭이다.】 소임으로 차출(差出)했더니, 대장 신여철(申汝哲)이 ‘그 사람이 사사로이 그 소임을 도모한 것이다.’고 하며, 즉시 그를 강등(降等)시켜 보인(保人)으로 삼았습니다. 신여철이 진실로 옳지 않게 여겼다면 신에게 말을 해야 옳을 것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정승의 직책은 백관(百官)을 진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심하게 모욕을 받았으니, 신이 감히 사직합니다.”하니, 임금이 힘써 위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신여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진실로 신여철의 죄를 청하고 싶었지만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었기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신의 몸을 배척하여 물리치신다 할지라도 신여철을 또한 그대로 대장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저 군문(軍門)에 도제거(都制擧)를 둔 것은 곧 불어지권(不御之權)8308) 을 맡기기 위한 것인데, 대장이 도제거를 이처럼 능멸했으니 아마도 체통이 설 수 없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신여철을 파직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상신(相臣)이 모든 군문을 거느림은 진실로 불어지권(不御之權)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서, 남구만이 말한 바와 같은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졸오(卒伍)에게 사정을 두며 대장을 위협하여 반드시 말을 듣게 하도록 한 것이겠는가?

마침내는 또한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는 데 화를 내어 그만 대장의 파직을 청하고도 도리어 기강(紀綱)을 핑계로 삼았으니, 대체(大體)를 알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세선(李世選)이 아뢰기를,
“어영(御營)의 재력이 성 쌓기에 고갈되었으니, 청컨대,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충시켜 주소서.”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호조와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하는 돈도 또한 외람된 일이 많아 걱정이므로 다시 군문(軍門)에도 허락하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고갈된 것도 염려스러우니 여섯 달을 한도로 주조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39 책 348 면【분류】 *왕실-비빈(妃嬪)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금융-화폐(貨幣)

[註 8306]양향(量餉) : 군량. ☞
[註 8307]몰기(沒技) : 무과(武科)의 시취(試取)에 있어서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蒭) 등 정한 화살의 수를 다 맞히는 것을 말함. 이 말이 전화(轉化)되어 한 기술에 대해서 만점(滿點)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음. ☞
[註 8308]불어지권(不御之權) : 직접 통어(統御)하지 않는 권한. ☞ 


24)숙종 28권, 21년( 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3일 갑자 1번째기사

●대신과 비변사의 재신들을 인견하다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진주(閔鎭周)가 별장(別將)을 골라 임명하여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주관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모든 일이 시작하는 단계에 있으므로 별장의 거처에 필요한 물품들을 갑자기 마련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통진 부사(通津府使)로 하여금 전담해 관리하도록 하였다가, 겨울이 닥치기 전에 고사(庫舍)를 창설하고, 승려를 모집해 절을 만들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용도로 활용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좌윤(左尹) 이세선(李世選)은 자연도(紫燕島)의 행궁(行宮)을 수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홍수헌(洪受瀗)이 논하기를,

“병조 참판 이동욱(李東郁)은 명망이 본래 가볍고 또 비방을 많이 듣는 사람입니다. 중비(中批)에 의한 승진 발탁이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전(前) 집의(執義) 김문하(金文夏)는 겉으로 대신의 말을 핑계대지만 속으로 좌고 우면(左顧右眄)하는 마음을 품어 바야흐로 펼쳐지는 대론(大論)8480) 에 방자하게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39 책 369 면【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사상-불교(佛敎)
[註 8480]대론(大論) : 국가의 대사(大事)를 논의하는 일. ☞ 


25)숙종 29권, 21년( 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9월 16일 을해 5번째기사

●경기 통진 등지에 큰 우박이 내리다
경기(京畿)의 통진(通津) 등지에 우박이 내렸으니, 크기가 비둘기 알만 하였다.
 
【영인본】 39 책 395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6)숙종 31권, 23년( 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6월 3일 신해 1번째기사

●사군 개척 등에 관하여 영의정 유상운이 아뢰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지난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성경도(盛京圖)를 부연하여 바치고 이어서 서북(西北) 지방에 설치해야 할 일의 적합성을 진달하였습니다. 대체로 남구만이 일찍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폐지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하는 일로 경계를 갈라서 정한 바가 있었습니다. 신이 그때에 진달한 것이 있었는데, 신이 본 바로는 남구만과 다릅니다.

남구만의 경우는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것은 그곳에 사람이 없는 데에 말미암는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아무리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가 살게 하더라도 모집해서 들어간 자들이 또다시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한다면, 방어하고 수비하기가 어찌 더욱 어렵지 않겠습니까?

남구만이 또 저들이 급하게 돌아갈 일이 있게 되면 하필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길을 빌리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성(老城)에서부터 영고탑(寧固塔)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천리(千里)라고 말하지만 가까운 편이며, 바로 인가(人家)가 없는 지경입니다.

만약 우리 국경의 강(江)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여 서북 지방으로 길을 통하게 한다면, 식량을 싸지 않아도 갈 수 있는데, 어떻게 다른 염려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여기에서 별도로 마음에 품었던 바가 있습니다. 임진년9291) 에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거둥하였을 때에 영변(寧邊)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강계(江界)로 거둥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며, 명나라 조정에 나아가 하소연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시대와 형세는 옛날과 지금이 다른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단지 강도(江都)뿐이고, 천하(天下)의 사변(事變)은 한이 없으니, 혹시라도 임진년과 같은 일이 있다면 어떻게 외로운 섬으로 거두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강계 한 구역은 땅의 면적이 이미 넓으며, 서쪽으로 의주와 통하는데 험하고 좁은 길이 천리나 되고, 북쪽으로는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 닿는데 중간에는 총령(葱嶺)이 막혀 있으며, 오직 한 면으로 남쪽의 적유령(狄踰嶺)만 지키면 실로 사방이 모두 막힌 험준한 곳으로, 촉중(蜀中)의 동서천(東西川)과 같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 북쪽은 한 줄기의 띠와 같은 좁은 시냇물이 막혀 있는데, 지금 또 사군(四郡)을 개척한다면 특별히 험한 곳에 방비를 설치하는 뜻이 아니니, 이것이 신이 남구만과 다른 점입니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신이 일찍이 강계(江界)를 맡았을 적에 자성(慈城)에 가서 보았는데, 만약 그 묵고 황폐한 땅에다 한 둔전을 설치하여, 전토(田土)가 없는 백성들을 모아 그곳에 들어가 살면서 개간하고 농사짓게 하여 곡식 수만 석을 저축해서, 일이 있으면 때아닌 수요를 삼게 하고 흉년이 들면 진구(賑救)하는 자료를 삼도록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진휼을 베푸는 즈음에는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우며,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고,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신이 비록 확실하게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10년 안에는 국가의 형세를 소생시키기 어려울 듯하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조용히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갑자기 시행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우선 서북의 어사(御史)가 들어갔다가 온 뒤에 품정(稟定)하는 것이 적합하다.”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군(四郡)을 폐지하여 버리고 진(鎭)을 설치하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비록 조종조(祖宗朝)의 한창 왕성하던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지키기 어려운 염려가 있었는데, 더구나 이러한 말세에 거듭 큰 흉년을 겪은 시기를 당하여 아직도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미 설치한 뒤에도 그 이익은 매우 적고 그 해로움이 매우 큰 것이겠는가? 사리에 어두운 남구만(南九萬)의 말이었다.

이는 다만 남구만이 특별히 자기의 지식과 견해를 과시하려고 의사를 진달했을 뿐이며, 기필코 설치하여 시행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쓸데없는 말이 국가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윤지선(尹趾善)의 지식은 비록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적합함을 얻은 것이었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이명(李頤命)이 통진부(通津府)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전속(專屬)하도록 청하였으니,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하고, 요상(僚相)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한 고을에 사는 백성으로 각 아문(衙門)에 구실이 있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 본부(本府)를 문수 산성에 전속시킨다면 구실이 있는 사람으로 교대할 자를 장차 어느 곳으로 이송(移送)하여야 합니까? 당초 성(城)을 쌓을 때에 윤지완(尹趾完)이 성역(城役)을 총융사(摠戎使)에게 위임하도록 청하여 그대로 신지(信地)를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 논의(論議)가 한결같지 않아 마침내 진무영(鎭撫營)에 소속되었는데, 이렇게 편리하지 않은 형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구만(南九萬) 역시 강도(江都)에 소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었으나, 신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일은 진실로 미리 알기가 어려우며, 지금 조정에서 구획(區劃)하는 것은 오직 강도를 뒷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뜻밖의 일을 미리 헤아려 고집하거나 의심을 둘 수는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총융사가 산성(山城)을 주관(主管)하도록 하라.”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박태순(朴泰淳)의 소(疏) 가운데 중강(中江)에서 호시(互市)하여 쌀을 요청하자고 한 한 건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국경에서 개시(開市)9292) 하여 전에 없었던 물화(物貨)를 한 가지 더 보태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리고 또 피중(彼中)의 미곡(米穀)은 틀림없이 먼 지역에서 운반하여 올 터인데, 이미 운반하여 온 뒤에는 역시 교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길을 한 번 열게 되면 아마도 처리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봄 사이에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지만, 단지 의주 부윤[灣尹]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서로 화매(和買)하여 인마(人馬)가 되돌아오는 편에 수송(輸送)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잇따라 들으니, 되돌아오는 무렵에 피중(彼中)에게 잡히게 되어 뇌물을 주고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금번 주청사(奏請使)가 아직 일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시 이런 청을 하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호시(互市)하게 한 일은 대체로 관서(關西) 지방에 기근이 거듭 심하여 별도로 진념(軫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애당초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폐단이 없지 않을 듯하니, 사신(使臣)이 되돌아온 뒤에 다시 품처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39 책 461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농업-전제(田制) / *구휼(救恤)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註 9291]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9292]개시(開市) : 시장을 열어 물건을 매매함. ☞ 


27)숙종 31권, 23년(1697 정축/청 강희(康熙) 36년) 윤3월 16일 병신 2번째기사

●인천·김포·부평 등의 고을에서 지진이 있다
인천(仁川)·김포(金浦)·부평(富平) 등의 고을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영인본】39책 454면【분류】*과학-천기(天氣)

28)숙종 32권, 24년( 1698 무인 / 청 강희(康熙) 37년) 1월 28일 갑진 1번째기사

●서울에 기근이 심해 기한을 정하여 진휼청의 곡식을 발매하도록 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서울에 기근(飢饉)이 심한 까닭으로 2월 10일 전까지를 한도로 하여 진휼청(賑恤廳)의 곡식을 발매(發賣)하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지평 어사휘(魚史徽)가 경기 수사(京畿水使) 민섬(閔暹)이 아내의 장지(葬地)로 통진(通津)의 대촌(大村)을 점거하였다 하여 파직(罷職)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최석정이 대계(臺啓)가 사실과 틀리다고 진달하고, 판돈녕(判敦寧) 서문중(徐文重)도 역시 그렇게 말하니, 임금이 파직하지 말고 그대로 유임(留任)시키도록 명하였다.
 
【영인본】 39 책 484 면【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풍속(風俗) / *구휼(救恤)
 

29)숙종 38권, 29년(1703 계미/청 강희(康熙) 42년) 3월 6일 신해 1번째기사

●지사 이유가 문수산성의 방비에 대해 청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문수산성(文殊山城)은 아주 강도(江都)의 요충(要衝)이 되는 땅인데, 이미 성을 쌓았다가 문득 버리게 되니 실로 애석합니다. 마땅히 1천여 보(步)를 더 쌓고 통진부(通津府)를 성 안으로 옮겨서, 갑진(甲津)과 마주 대하여 험요(險要)로 삼을 것이며, 또 김포(金浦)의 군사를 여기에 소속시켜 전란(戰亂)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물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때 바야흐로 큰 흉년이므로 고을을 옮길 수 없다는 이유로 조용히 의논해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유가 일찍이 문수산성과 강도(江都)의 지세(地勢)를 가서 살펴보고 오기를 스스로 청하여 갔다 왔기 때문에 건의하여 아뢴 바가 있었으나,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영인본】40책 8면【분류】*왕실-경연(經筵)/*군사-관방(關防)

30)숙종 38권, 29년(1703 계미/청 강희(康熙) 4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종친부에 김해·강경포 등을 소속시켜 세를 거두게 하다

종친부(宗親府)에서 아뢰기를,“경진년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왕자(王子)를 이미 봉작(封爵)하였으면 모든 수거(修擧)할 만한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김해(金海)·창원(昌原)의 초장(草場)과 은진(恩津)·강경포(江景浦)·사진포(肆津浦)·김포(金浦)·보소실(伏所室)·통진(通津)·조강(造江)을, 청컨대 본부(本府)에 모두 소속시켜 세(稅)를 거두어 수용(需用)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허가하였다. 이때에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산과 바다에 두루 미쳐서 국력(國力)이 피폐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식자(識者)들이 절수의 폐해가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영인본 40책 29면【분류】*왕실-종친(宗親)/*재정-상공(上供)/*농업-전제(田制)/*수산업(水産業)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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