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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숙종실록(31-45)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31)숙종 39권, 30년(1704 갑신/청 강희(康熙) 43년) 7월 8일 병오 2번째기사

●대사간 한성우가 절검과 김만근의 일에 대하여 소를 올리다

대사간(大司諫) 한성우(韓聖佑)가 상소하기를,“지난 초여름에 혜청(惠廳)의 쌀을 이끌어 쓴 일로 대신(臺臣)이 여러 차례 구정(救正)하는 말을 했는데,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사대(賜對)하던 날에 하교하시기, ‘시전(市廛)에서 대용(貸用)하여 즉시 상환(償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이끌어 쓴 것인데, 대신(貸臣)이 곡절을 몰라 이처럼 분운(紛紜)한 것이다.’ 하시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의 이 말씀은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비록 향당(鄕黨)의 자호(自好)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채대(債貸)의 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더군다나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장사꾼에게서 꾸었으니, 이미 사방(四方)에 들리게 해서는 안되는데, 한 방에서 의논하는 즈음에 어찌 이런 전교를 내리셨습니까?

애석합니다. 그 날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이 혹 ‘성교(聖敎)가 윤당(允當)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이끌어 써도 해롭지 않다.’라고 하고, 광구(匡救)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지금의 조정에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까?

사신(史臣)은 쓰기를, ‘임금이 「국용(國用)이 부족하여 시전에서 꾸어 썼다.」고 말하고, 여러 신하들이 따르면서 말하기를, 「성교가 윤당합니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이끌어 써도 해롭지 않다.」라고 하였다.’ 한다면, 후에 오늘을 보는 자들이 성조(聖朝)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평소 검용(儉用)·절재(節財)의 덕에 힘쓰셨다면 반드시 이런 전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지금 이후부터 더욱 검약에 힘쓰소서.
 
김만근(金萬謹)이 소(疏)로 시비를 논한 것은 우선 논하지 말더라도 언관(言官)을 내쳐 변방 고을에 보임하여 기한을 정해 급박하게 내쫓은 것은 성덕(聖德)에 지나친 거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성조(聖祖) 30년간에 말로써 죄를 얻어 연달아 영해(嶺海) 밖에 가서 그대로 죽어 돌아오지 못하 자가 한 둘이 아닌데, 이제 또 김만근이 엄격한 일정(日程)으로 급히 달려 가다가 심한 더위가 엄습하여 길에서 쓰러지면, 전하의 신속하게 처리하는 폐단이 어찌 후일 비난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지평 김재(金栽)는 그날 대각(臺閣)에 나아가 성비(聖批)의 엄격함과 후사(喉司)에서 복역(覆逆)하는 것과 신하를 내쫓는 말이 나오는 것을 직접 보고도 단지 전계 몇 장을 전하고는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문 채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갔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대관(臺官)이 있겠습니까?

정언(正言) 이만견(李晩堅)은 집에 있으면서 정고(呈告)하고, 그대로 예궐(詣闕)하지 않은 채 이튿날에야 겨우 환수(還收)하라는 청을 갖추었으니, 대각의 풍채가 없어지고 꺾인 것이 금일보다 심한 적이 없으므로, 가만히 세도(世道)를 위해 한 번 개탄을 드러냅니다.

김재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여론이 비난하는 것을 듣고는 소(疏) 한 장을 올려서 자신(自身)을 논핵하는 계책을 삼았으나, 그가 한 말이 한편으로 억제하고 한편으로는 끌어올리어 반복(反覆)·회호(回互)함이 끝이 없으니, 그 맥락과 귀추를 따져보면 오로지 임금의 뜻을 맞추고 중재(重宰)에게 아부하면서 그 아양을 떠는 모습을 신은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신은 반드시 이러한 사람을 물리친 연후에야 조정이 바르게 되고 당론(黨論)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신사(知申事) 강선(姜銑)은 일찍이 김포 군수(金浦郡守)를 지냈는데, 마침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하는 때를 당하여 감히 ‘도덕(道德)이 온전하지 못하고 허물을 감추기가 어려운데,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여 오랫동안 승배(升配)되고 있으니, 쾌히 출척(黜斥)하여 묘정(廟庭)을 숙청해야 한다.’는 등의 말로써 별도로 고문(告文)을 지어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고 시인(時人)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할 계책을 삼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정상이 아주 통분한데, 전조(銓曹)에서 살피지 않고 청요직(淸要職)에 주의(注擬)하여 전하의 낙점(落點)까지 받았습니다.

성명께서 양현을 존신(尊信)하심이 이미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는데, 사왕(邪枉)의 무리를 도리어 등용하였으니, 어질고 바른 사람을 모욕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기미를 엿보아 소매를 걷고 일어날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물리치라는 명을 내려 존현(尊賢)의 도리를 밝히소서.”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윗 조항에 진달한 바는 비록 하교(下敎)한 본의와 조금 어긋나지만, 대의(大意)가 좋으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김만근의 소어(疏語)에 대한 시비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구해(救解)하는 데만 급급하여 후일의 비난하는 의논을 부른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며,

대신(臺臣)을 침공(侵攻)하는 데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고 임금의 뜻을 맞추고 대신에게 아부한다는 등의 말을 억지로 가하지 않음이 없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강선이 만약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전조(銓曹)에서 반드시 은대(銀臺)에 의망하지 않았을 것이니, 사람을 논하는 즈음에는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한성우의 소는 사람들이 어려워한 바를 말하였다 할 수 있는데, 양현을 출향(黜享)할 때의 고문(告文)은 바로 양천(陽川) 사람이 지은 것이지 강선의 소위가 아니라 하였다.

한성우가 마침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후에 헌부(憲府)에서 일에 따라 논열(論列)한 대의(大意)가 진실로 좋으니 엄지(嚴旨)가 내린 것을 혐의할 필요가 없고, 편벽되게 떠돌아다니는 말을 믿어 비록 자세히 살피는 데는 부족하였으나, 풍문으로 일을 논하는 것도 역시 대례(臺例)라고 처치하여 출사(出仕) 시키도록 청하였다.
 
【영인본】40책 95면【분류】*정론-정론(政論)/*구휼(救恤)/*재정-국용(國用)/*인사-임면(任免)/*사법-탄핵(彈劾)/*사상-유학(儒學)

32)숙종 43권, 32년( 1706 병술 / 청 강희(康熙) 45년) 3월 15일 계유 1번째기사

●통진의 유학 심상희 등이 고 평사 이목에게 포창하여 관작을 줄 것을 청하다

통진(通津)의 유학(幼學) 심상희(沈尙熙) 등이 고(故) 평사(評事) 이목(李穆)을, 화를 같이 입었던 여러 신하를 포증(褒贈)13546) 한 것에 따라 할 것을 소(疏)로써 청하니, 해조(該曹)에 내렸다.
 
【영인본】 40 책 190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註 13546]포증(褒贈) : 포창하여 관작을 추증(追贈)하는 것. ☞ 


33)숙종 43권, 32년(1706 병술/청 강희(康熙) 45년) 5월 15일 임신 2번째기사

●어사 김흥경과 이명준이 복명하다

어사(御史) 김흥경(金興慶)·이명준(李明浚)이 복명(復命)하기를,“치정(治政)을 잘못한 이유로써 공주 목사(公州牧使) 구지정(具志禎), 이산 현감(尼山縣監) 박상빈(朴尙彬), 남포 현감(藍浦縣監) 전이장(全爾樟), 김포 군수(金浦郡守) 심현(沈玹)을 죄주고, 치정(治政)을 잘한 이유로써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유민(李裕民)을 가자(加資)하였습니다.”하였다.
 
【영인본】40책 194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인사-관리(管理)/*사법-탄핵(彈劾)

34)숙종 48권, 36년( 1710 경인 / 청 강희(康熙) 49년) 6월 25일 기미 2번째기사

●강화도의 축성 문제를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조태구(趙泰耉)가 일찍이 강도(江都)15045) 에 성(城)을 쌓은 후에 성첩(城堞)을 지킬 군졸(軍卒)을 또한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민순(閔純)이 진계(陳啓)한 바에 의거해 삼군문(三軍門)15046) 의 보인(保人)과 본고을에 있는 원호(元戶) 3천여 명으로써 수첩군(守堞軍)을 삼되, 원호는 이웃 고을의 보인으로 서로 바꿀 것을 청합니다.

대개 문수성(文殊城)은 성첩이 1천 1백여 개에 이르는데, 통진의 본군(本軍)이 1천 명에 차지 못하여 파수(把守)할 수가 없으니, 만약 이 군사를 보충한다면 약간을 배치하여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통진부(通津府)는 지형이 비록 매우 협착하다 하더라도 본부(本府)를 성(城) 안에 옮긴 연후에야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이 일이 어떠한가?”하자, 이여가 말하기를,
 
“본성(本城)은 지형이 협착한데다가, 또 우물이 적어서 읍거(邑居)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박권(朴權)이 새로 강도(江都)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지형과 수원(水源)이 고을을 옮길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만약 문수(文殊)로 옮겨 쌓는다면 조금 넓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신(臣)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성(城)은 급변(急變)에 임(臨)하여 잠시 주필(駐蹕)할 곳으로 삼는 데에 지나지 않고, 또 갑곶이[甲串]에 다다라 힘써 굳게 지킴에 달려 있으니, 넓게 설치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로써 박권에게 물으니, 박권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에 성을 쌓느라고 이미 물력(物力)을 많이 소비하였으니, 이제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통진부를 꼭 성 안으로 옮겨 들인 후에야 성첩(城堞)을 수선하여 수비(守備)를 조치할 수가 있으니, 지형이 비록 좁더라도 오히려 한 고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관해(官廨)와 창름(倉廩)을 뜯어 옮길 즈음에 쓰일 물력이 셀 수 없으니, 통진부 각처의 지응(支應)15047) 을 만일 6, 7년 동안 제감(除減)하여 오로지 고을을 옮기는 데에 힘쓴다면 일의 두서(頭緖)가 잡힐 것입니다.

강도(江都)를 만약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는다면 갑곶이가 물길이 좁아 건너기가 쉬운데, 이 성을 굳게 지킨다면 또한 갑곶이를 넉넉히 방어할 수 있습니다.”하고, 우의정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강도(江都)에 부임(赴任)하였을 때 형편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산성(山城)은 한 면의 산등성이를 따라 쌓아 물가에 이르러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 안이 비록 협착하더라도 오히려 통진(通津) 한 고을을 용납할 만하였습니다. 또 산성으로부터 관부(官府)까지의 거리가 겨우 10리에 이르므로, 편리함에 따라 옮겨 설치하는 것이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곧 천참(天塹)15048) 이어서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았으나, 안에 부성(府城)이 없으므로 천참을 지키지 못하면 존망(存亡)이 순식간에 결정될 것이다. 만약 내성(內城)이 있으면 서로 버티는 즈음에 근왕(勤王)의 군사가 이를 수 있어서 순식간에 망하는 형세는 없을 것이니, 결코 내성을 쌓아야 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고려(高麗)가 강도(江都)에서 몽고란(蒙古亂)을 피함이 거의 50년이었으니, 강도를 버릴 수 없음은 대개 이에서도 알 수가 있다. 통진도 또한 모름지기 성 안으로 고을을 옮긴 후에야 성 안을 굳게 지킬 수 있을 것인데, 비록 협착하더라도 오히려 한 부(府)를 받아들여 설치할 수 있다고 말하니, 마땅히 고을을 옮기되, 여러 가지 부역(賦役)도 또한 마땅히 감제(減除)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이 말하기를,
 
“이미 고을을 옮기기로 정하였으면, 혹 추성(秋成)15049) 을 기다리거나 혹은 내년으로 시기를 지정하여 분부하신 연후에야 거행할 수가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에 반드시 고을을 옮기려 함은 아니다. 비록 금년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마땅히 이설(移設)해야 할 것이다. 듣건대 문수성(文殊城)은 성가퀴가 많이 허물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후로는 훼손되는 대로 곧 보수하여 전과 같이 포기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0 책 357 면【분류】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註 15045]강도(江都) : 강화도. ☞
[註 15046]삼군문(三軍門) :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삼영문(三營門). ☞
[註 15047]지응(支應) : 벼슬아치가 공무로 어느 곳에 갔을 경우, 필요한 물품을 그 지방 관아에서 대어주던 일. ☞
[註 15048]천참(天塹) : 강하(江河) 따위로 인하여 저절로 이루어진 요충지. ☞
[註 15049]추성(秋成) : 추수(秋收). ☞ 


35)숙종 49권, 36년( 1710 경인 / 청 강희(康熙) 49년) 12월 11일 신미 2번째기사

●통진부를 통진현으로, 홍주목을 홍양현으로 삼다

통진부(通津府)를 강등(降等)하여 통진현(通津縣)을 삼고, 홍주목(洪州牧)을 강등하여 홍양현(洪陽縣)을 삼았는데, 모두 삼성 죄인(三省罪人)이 태어난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영인본】 40 책 380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군사-관방(關防)
 
 

36)숙종 50권, 37년( 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9월 2일 무자 2번째기사

●여주 유학 심일녕이 매부 이만운이 그 누이동생을 때려 죽였다고 호소한 옥사

경인년15661) 7월에 여주(驪州)의 유학(幼學) 심일녕(沈一寧)이 격고(擊鼓)15662)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그 매부(妹夫) 이만운(李萬運)이 그 누이동생 심명애(沈命愛)와 싸우다가 때려 죽이고 강에다 시체를 버린 뒤 도주(逃走)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므로 그가 변고(變故)를 듣고 상경하여 이만운의 비자(婢子) 옥매(玉梅)와 순업(順業) 등에게 힐문하여 그가 행한 흉악한 행동을 다 알아냈는데,

오직 이만운과 함께 사는 종수(從嫂)의 여종 주사리(注沙里)만은 반은 실토하고 반은 실토하지 않기 때문에 형조(刑曹)에 정소(呈訴)하였으나, 판서(判書) 유득일(兪得一)이 일부러 끌면서 미루어 묻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임금이 급히 엄교(嚴敎)를 내려 형관(刑官)을 파직하고, 이만운과 각 사람들을 엄히 국문(鞫問)하여 10일 내에 시체(屍體)를 찾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주사리와 순업은 먼저 취복(取服)하였고, 이만운의 종수 윤씨(尹氏) 역시 때려 죽인 것이 명백하다는 것으로 형조의 함문(緘問)15663) 에 대답하니, 이만운이 드디어 부득이 자복(自服)하여 결안 취초(結案取招)15664) 하였으며, 옥매는 도망하여 있다가 붙잡혔는데, 역시 말이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었다.

이만운과 윤씨는 반드시 그 실상(實狀)을 폭로하고자 하여 그의 아들 이경석(李慶錫)과 지친(至親) 이세좌(李世佐) 등을 시켜 변복(變服)하고 몰래 따라나서 강화(江華)에 이르렀다.

이는 대개 명애(命愛)가 밤을 틈타 도망나와 상선(商船)을 타고 강화에 이르러 사비(私婢) 수득(愁得)의 집에 의접(依接)하고 있었는데, 통진 리(通津吏) 김익평(金益平)이 마침 홀아비로 살면서 말[馬]을 보내어 맞아 갔다가 5, 6일이 지나서 살림을 못한다고 돌려보내므로 이어 수득의 집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세좌 등이 유수(留守)에게 고해 즉시 계문(啓聞)하여 형조에 내리니, 이만운이 이에 스스로 그 무복(誣服)한 것을 자복(自服)하였고, 명애와 수득 등도 역시 모두 자백하니, 심일녕 등이 다시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애는 결안 취초하고, 심일녕과 그의 동생 심일회(沈一會)는 다 도배(徒配)하였으며, 이만운은 집안 법도가 패란(悖亂)한 것으로써 결장(決杖)하고, 수득과 김익평은 형추(刑推)하여 방송(放送)하였다.

옥매 등도 말을 바꾸어 곧바로 공초(供招)하니, 형조 판서 윤덕준(尹德駿)이 아뢰기를, “옥매는 사죄(死罪)로써, 그의 상전(上典)을 무고하였으니 마땅히 삼성 추국(三省推鞫)15665) 해야 할 죄인이나,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명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옥매의 무복(誣服)이 이만운의 자복(自服) 뒤에 있었으니, 모살 주인(謀殺主人)의 법으로 단죄해서는 안됩니다.”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참작하여 품처(稟處)하라.”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조 판서 이언강(李彦綱)이 청하기를, “옥매는 사죄를 감하여 절도(絶島)에 유배(流配)하고, 주사리·순업 등은 참작하여 정배(定配)해야 합니다.”하였다.
 
【영인본】 40 책 411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윤리(倫理)
[註 15661]경인년 : 1710 숙종 36년. ☞
[註 15662]격고(擊鼓) : 거둥 때에 원통한 일을 임금에게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림. ☞
[註 15663]함문(緘問) : 죄과(罪科)가 있다고 생각되는 관원에게 서면(書面)으로 추문(推問)하는 일. 거기에 대해 서면으로 답하는 것을 함답(緘答)이라 함. ☞
[註 15664]결안 취초(結案取招) : 옥안(獄案)을 종결하여 공초(供招)를 받음. 곧 혐의자에게 범죄(犯罪)를 자인하는 진술을 마지막으로 받는 것. ☞
[註 15665]삼성 추국(三省推鞫) : 의정부(議政府)·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에서 합좌(合坐)하여 강상(綱常)에 관련된 죄인을 추국하는 일. ☞ 

37)숙종 51권, 38년( 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월 10일 갑오 1번째기사

●경기의 재결에 결마다 수미를 3두씩 감하도록 하다

지난해 가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진규(金鎭圭)가 명을 받들어 강도(江都)에 사신갔다가 돌아와 통진(通津) 등 고을이 흉년 들었음을 여쭙고 처음에 씨를 심지 못한 곳은 급재(給災)15911) 하기를 청하였는데, 뒤에 또 대신(大臣)의 말을 인하여, 명하여 기전(畿甸)15912) 의 여러 고을의 처음에 씨를 심지 못한 곳은 일체(一體)로 사험(査驗)15913) 하여 급재케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필명(朴弼明)이 각 고을의 재결(災結)15914) 을 조열(條列)하면서 무릇 6백여 결로써 아뢰니, 묘당(廟堂)에서 그 너무 많음을 의심하여 호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기를 청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이 지부(地部)의 낭관이 적간하는 것은 상규(常規)와 다름이 있기 때문에 그 명을 정지하고 결(結)마다 봄에 거두는 쌀 3두(斗)를 감(減)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김진규가 소(疏)를 올려 그 불가(不可)함을 말하기를,
 
“처음에 씨를 심지 못한 전지의 급재한 것이 병술년15915) 에는 1천 5백여 결이고, 무자년15916) 에는 1천 6백여 결이며, 경인년15917) 에는 2천 8백여 결이나, 이제 6백여 결을 가지고 너무 많다고 하여 거짓이 있나 의심함은 어찌된 것입니까?

청컨대 장문(狀聞)에 의하여 급재하소서.”하고, 소의 끄트머리에 또 윤덕준(尹德駿)이 청한 바 대현(大賢)의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허락하지 말라는 그릇됨을 논하며 말하기를, “근래에 사원(祠院)이 진실로 함부로 섬이 있고 또한 폐단이 많으니, 오직 마땅히 그 넘침을 막고 그 폐단을 없애야 하나, 어찌 대현을 제사하는 것도 아울러 일례(一例)로 금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갑술년15918) 에 유상(儒相)이 입조(入朝)하여 첩설(疊設)의 금령(禁令)을 펴기를 청하고 종사(從祀)하는 제현(諸賢) 및 대명현(大名賢)은 마땅히 별양(別樣)으로 우대(優待)하여야 한다고 일렀는데, 장료(長僚)15919) 가 유상의 건백(建白)한 바를 기억하지 못하여서 이 청이 있는 것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두 건의 일은 일전에 처분한 것인데, 나는 그 옳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으니 자주 변개(變改)함은 마땅치 않다.”하였다.
 
【영인본】 40 책 428 면【분류】 *농업-농작(農作) /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15911]급재(給災) : 재해를 입은 전지에 대하여 전세(田稅)를 면제하여 주던 일. 그 재상(災傷)의 정도에 따라 차등이 있었음. ☞
[註 15912]기전(畿甸) : 경기(京畿). ☞
[註 15913]사험(査驗) : 조사 답험(踏驗)함. ☞
[註 15914]재결(災結) : 재해를 입은 전지. ☞
[註 15915]병술년 : 1706 숙종 32년. ☞
[註 15916]무자년 : 1708 숙종 34년. ☞
[註 15917]경인년 : 1710 숙종 36년. ☞
[註 15918]갑술년 : 1694 숙종 20년. ☞
[註 15919]장료(長僚) : 예조 판서인 윤덕준을 가리킴. ☞ 

38)숙종 52권, 38년( 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1월 5일 갑신 2번째기사

●신하들을 인견하고 통진을 강화도에 소속시키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김석연(金錫衍)이 금오(金吾)의 직을 겸임하고 있으면서도 행공(行公)하지 않아 어제 이미 체직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탑전(榻前)으로 불러 면유(面諭)하신다면 이 뒤로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김석연이 글을 하지 못한다며 사직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옥(科獄)은 지극히 중요하니, 이런 때에는 행공해도 무방하다.”하였다.

임금이 홍숙(洪璛)의 눈병의 경중을 묻자, 이유가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이 개차(改差)하도록 명하였다. 이유가 또 대정(大政)이 천취되고 있다며 다시 이조 판서를 재촉하여 올라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추고(推考)하고 다시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이유가 또 종성 부사(鍾城府使) 조식(趙湜)은 나이가 이미 65세라고 하여 개차(改差)를 청하고, 이어 문무관(文武官)을 막론하고 나이 60을 넘은 사람을 육진(六鎭) 등지의 변장(邊將)이나 수령(守令)으로 차출하지 말 것을 품달(稟達)하여 정식(定式)으로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태로(趙泰老)가 아뢰기를, “통진(通津)은 강도(江都)와 실로 순치보거(脣齒輔車)16344) 의 형세가 있는데, 문수 산성(文殊山城)이 통진으로 가는 요해지(要害地)에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강도의 형세가 환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같이 지키면서 기세를 합친 다음에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총융사(摠戎使)에 소속되었으니 강도에 대해서는 실로 서로 의지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군정(軍情)을 들어 보건대, 모두 강도에 소속되기를 바란다고 하니, 하문(下問)하여 처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이유도 또한,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하니, 임금이 이속시키도록 명하였다.

또 통진에 있는 읍(邑)을 문수 산성으로 옮기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하문하자, 조태로가 아뢰기를, “성안이 아주 험하고 또 우물이 적으니, 고을을 옮김은 불편합니다.”하고, 이유는 고을을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임금이 고을을 옮기기로 확정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어유귀(魚有龜)가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새 죽산 부사(竹山府使) 강세보(姜世輔)는 성품이 본시 용렬하고, 새 중화 부사(中和府使) 조유춘(趙囿春)은 사람됨이 거칠고 못나니, 모두 개차(改差)하기 바랍니다.”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강계(江界)의 교생(校生) 오징(吳徵) 등이 정장(呈狀)하기를, ‘종포(從浦)의 진졸(鎭卒)로 도고(逃故)한 경우가 50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는데, 저희들은 그 족속(族屬)으로 혹독한 침징(侵徵)을 받고 있습니다.

만호(萬戶) 박홍보(朴弘輔)는 인족(隣族)을 교유(敎誘)하되 대정(代定)할 때 소용되는 것이라며 한 사람에 은(銀) 1냥(兩) 씩을 거두어 도합 50냥을 전부 자기가 차지하고, 도고는 그대로 대정하지 않은 채 그전대로 포(布)를 거두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는 토민(土民)들이 고소(告訴)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자세하게 사핵(査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박홍보를 잡아다 추문(推問)하여 핵실해 처결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40 책 469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註 16344]순치보거(脣齒輔車) : 입술과 이, 광대뼈와 잇몸. 서로 긴밀하게 서로 의지하고 있는 관계를 말함. ☞ 

39)숙종 52권, 38년( 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1월 15일 갑오 1번째기사

●연은문 괘서 사건에 관한 서종철·윤매의 국문 내용

일전에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우항(李宇恒)이 청대(請對)하여, 상변(上變)한 사람 서종철(徐宗哲)·윤매(尹梅)가 바친 봉서(封書)를 수진(袖進)하였는데, 대개 연은문(延恩門)에 괘서(掛書)한 사람을 고발한 일이었다. 임금이 즉시 대신과 의금부 당상(堂上) 및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을 명소(命召)하여 그 봉서를 내리고, 이어 정국(庭鞫)을 차리라고 명하였다.

서종철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사인(士人) 유언임(兪彦任)이 말하기를, ‘권설(權卨)이 괘서(掛書)가 나오기 며칠 전에 「3, 4일이 되지 않아서 괴이한 글이 나라에 나올 것인데 나라의 근심이 반드시 클 것이다.」라고 했었는데, 며칠 뒤에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고 했습니다.

만일 지금 권설을 추문(推問)한다면 역적의 괴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국청(鞫廳)에서 이 말을 가지고 유언임(兪彦任)을 추문하니, 유언임이 공술하기를, “권설과는 본래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고, 이른바 ‘3, 4일이 되지 않아 반드시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다.’는 말도 본시 발언(發言)한 일이 없습니다.”하였다.

서종철을 다시 추문하자, 이르기를,“포도 부장(捕盜部將) 정무혁(丁武赫)과 함께 분주하게 기포(譏捕)했지만 끝내 단서(端緖)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유언임에게서 들은 대로 부장에게 말했을 뿐입니다.”하였다.

윤매를 다시 추문하니, 이르기를,“서종철이 ‘이번의 밀고(密告)는 나와 자네가 일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과연 그의 말대로 한 것인데, 서종철 자신이 주장이 되었고, 저는 한결같이 서종철의 지휘에 따라서 했습니다.”하였다.

정무혁을 추문하자, 이르기를,“서종철이 두 장의 문서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하나는 윤매가 만든 것이고, 하나는 유언임이 만든 것이다.’고 했습니다.”하였다. 이튿날 윤매를 불러다 자세히 추문하자, 윤매가 말하기를,
 
“유언임이 말했다는 ‘3, 4일이 되지 못하여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다.’는 말은 제가 과연 듣거나 안 일이 없으며, 밀서(密書)도 저와 유언임이 모두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종철에게 협박을 받아 스스로 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하므로, 즉시 서종철을 윤매가 앉아 있는 곳으로 오라고 청하여 꾸짖으니, 서종철이 과연 그가 공갈(恐喝)한 실상을 자복하였다.

여러 군관(軍官)에게 다시 들은 바를 추문하자, 윤매가 말하기를,“밀서는 비록 제가 쓴 것이 아니지만, ‘3, 4일이 못되어 괴이한 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과연 유언임에게서 들은 것이기에, 바로 여럿이 모인 곳에서 제가 다시 스스로 써서 주었고, 이를 대장(大將)에게 바치면서 일의 정상을 갖추어 고했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서종철이 ‘이봉천(李奉天)의 일과 통진(通津) 공가(孔哥)의 일은 그 뒤에 모두들 허망한 것임을 자복했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곧 서종철을 형추(刑推)했는데, 서종철은 12도(度)에 비로소 실토했고, 윤매는 위차(威次)를 베풀자 곧 자복했다. 국청의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종철은 마땅히 율(律)대로 처단하라. 윤매는 서종철에게 유혹과 위협을 받은데다 또 2대 독자(獨子)이니, 또한 불쌍히 여길 만하다.

내 뜻으로는 생의(生議)16349) 에 붙이고자 한다.”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판의금부사 민진후(閔鎭厚)·지의금부사 김석연(金錫衍)·동지의금부사 이만성(李晩成)과 유명웅(兪命雄)이 모두 말하기를,“성교(聖敎)가 마땅합니다.”하고, 지평 김상옥(金相玉)·헌납 한영조(韓永祚)는 아뢰기를,“윤매는 이미 제 손으로 밀서를 썼으니,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고 서종철은 법대로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이 뒤에 정언 홍우녕(洪禹寧)이 발계(發啓)하여 윤매를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환수(還收)하고 율(律)대로 처단할 것을 청하고, 또 논하기를,
“이우항이 경연(經筵)에서 진달한 일은 사체가 중대하였는데, 구핵(究覈)해 보니 마침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정무혁이 공술한 것으로 보건대, 서종철의 허망한 정상이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았으니, 말의 부실함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초 어찌하여 일에 단서가 있다며 중신(重臣)에게 말했다가【이우항이 일찍이 일에 단서 있다고 조태채(趙泰采)에게 말했는데 조태채가 경연에서 그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이우항이 드디어 할 수 없이 말을 꺼냈던 것이다.】 또한 어찌하여 앞질러 청대(請對)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인본】 40 책 470 면【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註 16349]생의(生議) : 죄(罪)에 의의(疑義)가 있을 때 그 죄를 경감(輕減)시키어 목숨을 살려 주는 것. ☞ 

40)숙종 53권, 39년( 1713 계사 / 청 강희(康熙) 52년) 5월 20일 병신 1번째기사

●대신들이 송도 총융청의 군수보 사용의 폐단과 《가례원류》의 간행 등에 대해 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주언(奏言)하기를,
 
“송도(松都)에 예전에 총융청(摠戎廳)의 아병(牙兵)16700) 이 있었는데, 신이 일찍이, ‘그 아병(牙兵)을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총융청은 군수보(軍需保)에 이급(移結)할 것’을 청하여 명령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아병(牙兵) 4백여 명이 거둔 쌀이 7백여 석(石)에 이르는데, 이를 모두 장관(將官)의 급료(給料)의 자금과 긴요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수용으로 삼았다 합니다.

이제 마땅히 급료의 규정을 폐지하고 이를 취해 관용(官用)에 보태되, 강도(江都)의 예(例)와 같이 하도록 명하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경리청(經理廳)이 때로는 전포(錢布)가 없어 그 규모(規模)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변사(備邊司)나 호조(戶曹)·병조(兵曹)의 미포(米布)를 마땅히 대용(貸用)하여야 하는데, 평안도(平安道)에서 전하여온 은전(銀錢)이 있으니, 이를 또한 마땅히 먼저 빌어 써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주언(奏言)하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유계(兪棨)가 편집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자못 상밀(詳密)하니, 진실로 마땅히 간행(刊行)하여야 합니다.

그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지금 용담 현령(龍潭縣令)이 되어 간포(刊布)하려 하고 있는데, 고을의 재력(財力)이 넉넉치 못한 형편이니, 마땅히 본도(本道)에 명하여 그 재력을 보조하도록 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이 고(故) 현감(縣監) 이지함(李之菡)에게 증시(贈諡)하도록 청하기를, “이지함은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그는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

’고 칭찬하여 관작과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역명(易名)16701) 의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하고, 이유(李濡)와 이이명(李頤命)도 모두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태로(趙泰老)가 군기시(軍器寺)에 소장된 조총(鳥銃)을 통진(通津)의 속오군(束伍軍)16702) 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고, 또 본부(本府)에 있는 총융청(摠戎廳) 창고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이속(移屬)시키지 말 것을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이유(李濡)와 이이명(李頤命)이, ‘공조 참판(工曹參判) 권성(權)이 청간(淸簡)하고 계려(計慮)가 있어 크게 임용할 만하다.’고 함께 추천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런데 이날 권성의 사직하는 상소가 마침 현도(縣道)로부터 올라오니, 임금이 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게 되면 몸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니, 그로 하여금 올라와 공무를 집행하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40 책 500 면【분류】 *군사-군기(軍器)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출판-서책(書冊) / *인사-관리(管理)
 
[註 16700]아병(牙兵) : 대장(大將)의 휘하에 있는 병정. ☞
[註 16701]역명(易名) : 시호를 내림. ☞
[註 16702]속오군(束伍軍) : 조선조 14대 선조(宣祖) 27년(1594)에 훈련 도감을 설치하고, 역(役)을 지지 않은 양인(良人)과 천민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편성한 군대. 이들은 평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나라에 큰 일이나 사변이 있을 때에만 소집되었음. ☞ 

41)숙종 54권, 39년( 1713 계사 / 청 강희(康熙) 52년) 11월 6일 경술 1번째기사

●경기 수군의 일을 명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문(狀聞)으로써 명하기를,“통진(通津) 수군(水軍) 1백 2명을 부평(富平)으로 이정(移定)하고, 안산(安山)의 93명을 본도(本道)에 그대로 두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0 책 520 면【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42)숙종 61권, 44년( 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4월 1일 기묘 6번째기사

●강화도의 형편에 대해 강화 유수 권성이 올린 소장의 내용

강화 유수(江華留守) 권성(權)이 소장을 올려 본도(本島)의 형편을 논하기를, “갑진(甲津)의 수어(守禦)는 방책이 대강은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지(草芝) 이서(以西)와 장곶이[長串] 이남까지의 바닷가 뻘흙이 있은 땅은 조수가 밀물일 때에도 짐을 무겁게 실은 배들은 뜨기가 어려운데 장봉(長峰)과 주문(注文) 사이에 만약 향도(鄕導)가 있다면, 또한 어찌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을 정도뿐이겠습니까?

정포(井浦)에서 인화(寅火)·철곶이[鐵串]를 거쳐 승천보(昇天堡) 서쪽에 이르기까지 교동(喬桐)의 해로(海路)에 있는데, 그 동북쪽은 곧 경강(京江)의 하류로 설치한 것이 지극히 허술합니다.

전에 있었던 수신(守臣)들이 전의 일에 크게 징계되어 오로지 갑진(甲津)에다만 힘을 기울이느라고 서북쪽에는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효종[孝廟]에게 고하기를, ‘적인(敵人)들이 해빙(海氷)할 때를 당하여 삼강(三江)의 배를 거두어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온다면 승천보가 가장 염려스러운데, 어찌 갑곶이만이 적병의 요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상신이 먼 장래를 염려하는 식견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해 삼군문(三軍門)에서 축성(築城)한 뒤에 거류(居留)하는 신하들이 차차로 축성하도록 할 것으로 일찍이 정탈(定奪)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뒤 흉년이 들었고, 또 내성(內城)의 역사(役事)가 있었으므로 성명(成命)이 드디어 중지되었습니다.

지금 강화의 서북 지역에 축성하는 것을 한결같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동쪽 지역에서 축성한 것과 같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만, 신의 얕은 식견은 이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저 장성(長城)은 가로로 축성하면 외면은 보기가 좋지만 수졸(守卒)이 단약하게 되어 여장(女墻)을 쉽게 넘게 됨은 물론이고 축성하는 데 드는 비용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옛부터 돈대(墩臺)를 설치할 적에는 마땅히 조밀하게 할 것이요 소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두 돈대 사이에 시석(矢石)이 서로 미치게 만든 다음이라야 우리의 수비가 공고하게 되고 저들은 오더라도 꺼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물을 타고 감히 경솔하게 나아오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안에 올라오더라도 뚫고 지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적을 방어하는 승산(勝算)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대의 간격이 넓어서 적선(賊船)이 정박하는 장소에 알맞으니 장성을 축조하지 말고 흙돈대[土墩]를 증수(增修)하되 높이를 4, 5장(丈)이 되게 한다면, 일이 줄어들어 만들기가 쉽고 수비가 온전하여 방어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이는 장성의 축조에 비하여 물력과 노동의 비용을 동일하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두포(船頭浦)의 좌우와 갈곶이[葛串]·양암(陽巖) 두 돈대에 이르러서는 한 번 포(浦)를 막아 통(筒)을 쌓은 뒤로는 포구(浦口)에 진흙뻘이 가로질러 있게 되어 큰 배들이 통행하기가 어려우므로 양암과 갈곶이 이 두 돈대는 실지로 무익하게 되니, 설치해야 할는지 혁파해야 할는지의 편의(便宜)를 중신(重臣)을 보내어 자세히 살피고서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월곶이[月串] 이상에서 휴암(鵂巖) 이하까지에 축조한 성은 조수에 충격을 받아 여장(女墻)과 더불어 파괴되어 떨어져 나갔으니, 개축하거나 부서진 곳을 보완하는 일은 결단코 중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농삿일이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백성들을 동원하기가 실로 어려우니, 지금 각창(各倉)의 회계(會計) 이외의 나머지 미곡을 가지고 백성들을 모아서 역사를 일으키되, 먼저 토성(土城)을 쌓아 그것이 완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여장(女墻)을 쌓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일에 대해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이 성의 설치는 처음 임금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축성한 뒤에 다시 조치(措置)한 적이 없어 군병(軍兵)도 많지 않고 기계(器械)도 준비되지 않고 양향(粮餉)도 부족한 등 어느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한정(閑丁)을 얻기가 제일 어렵기 때문에 군병(軍兵)을 첨가하여 주는 데 있어 실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천과 김포를 아울러 부평(富平)에 예속시키는 것은 크게 긴요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지금 김포를 통진(通津)에 이속시켜 협력하여 수비하게 한다면 일푼이나마 도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양향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전에 지급한 것이 또한 1천여 석에 이르렀습니다만, 염산(斂散)이 마땅하게 되지 못하고 간리(奸吏)들이 용사(用事)한 탓으로 그 태반이 귀록(鬼錄)에 기입되어 있어 성에 속한 요미(料米)가 지금 바야흐로 부족한 형편이므로 형세가 숫자를 더하여 지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통진에 맡긴다면 구투(舊套)를 그대로 답습할까 염려됩니다.

산성 별장(山城別將)을 각별히 선택해서 임명하고 인신(印信)을 만들어 주어 조적(糶糴)과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보충할 수 있게 한다면 본부(本府)에서 미곡과 금전을 적당하게 헤아려 별장(別將)에게 내주고 그로 하여금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취하여 요량하여 개수(改修)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화포(火砲) 등의 물건은 본부(本府)에서 참작하여 이급(移給)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흙돈대[土墩]를 더 설치하고 양암과 갈곶이를 혁파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그 유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따로 중신을 파견하여 다시 간심(看審)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괴되어 떨어져나간 구성(舊城)은 더욱 급히 먼저 수리 보수해야 하는데, 이는 본부에서 수시로 살펴 선처하여 완전하고 공고하게 만들기를 도모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문수 산성에 대해 논의한 것은 진실로 의견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부평에 소속한 김포를 떼어내어 이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산성 별장(山城別將)은 병조에서 각별히 선택하여 임명하게 하소서. 인신을 만들어 주어 조적(糶糴)과 군향(軍餉)·기계(器械) 등 제반 일을 관리하게 하는 것은 모두 본부(本府)에서 선처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41책 13면【분류】*군사-관방(關防)

43)숙종 63권, 45년( 1719 기해 / 청 강희(康熙) 58년) 5월 17일 기축 3번째기사

●군자감 정 김민주와 사과 이상성을 파직할 것을 사간원에서 청하니, 따르지 않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과(司果) 이상성(李相成)은 작년에 상서(上書)하여 자기를 탄핵(彈劾)하였던 대관(臺官)을 도리어 구함(構陷)하였으니, 풍습(風習)이 가증스럽습니다. 진실로 이는 천신(薦紳)19392) 의 수치(羞恥)인데도 도리어 뽐내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박태도(朴泰道)는 문자(文字)를 해득(解得)하지 못하여 소장(訴狀)의 제사(題辭)를 오로지 하리(下吏)에게 위임(委任)하였고, 칙사(勅使)의 수용(需用)이라고 핑계대고서 가호(家戶)를 헤아려 돈을 받아들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마소서.”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김만주(金萬胄)와 이상성(李相成)의 일은 논핵한 바가 자못 정도에 지나친 데 관계된다.”하였다.

후일에 발론(發論)한 대관(臺官) 김여(金礪)가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김만주가 염치(廉恥)와 의리(義理) 없음을 무릅쓰고 탄핵(彈劾)을 감내(堪耐)하면서 시험을 관장한 것은 진실로 진신(搢紳)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상성의 경우는 지난해 한 통의 상서(上書)가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았고, 조사한 일이 허투(虛套)로 돌아갔는데, 죄벌(罪罰)을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처(自處)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직 물러가 엎드려 허물을 반성해야 할 것인데, 전후의 시임(試任)에 득의양양(得意揚揚)하여 무릅쓰고 나아갔습니다.

지금 신이 논핵한 바도 참작(參酌)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하고, 인하여 물러가 기다렸는데, 사간(司諫) 조언신(趙彦臣)이, ‘뒤따라 논핵(論劾)을 가하는 것이 이미 공심(公心)이 못되는데, 억지로 허투로 돌아갔다고 한 것은 더욱 매우 그릇된 것이다.’라고 처치(處置)하여 김여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41 책 67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註 19392]천신(薦紳) : 관직(官職)에 있는 사대부(士大夫)의 총칭. ☞ 


44)숙종 63권, 45년( 1719 기해 / 청 강희(康熙) 58년) 5월 22일 갑오 1번째기사

●통진 부사 박태도를 파직시키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다만 박태도(朴泰道)의 일만 따랐다.
 
【영인본】 41 책 68 면【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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