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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영조실록(1-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1. 영조실록 51건  
 
1)영조 3권, 1년(1725 을사/청 옹정(雍正) 3년) 1월 23일 임술 1번째기사

●민진원의 정사로 심택현 외 14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정호(鄭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김동필(金東弼)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권업(權)을 우윤(右尹)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임(申銋)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정호를 장원서 제조(掌苑署提調)로, 이의현(李宜顯)을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이의록(李宜祿)을 김포 군수(金浦郡守)로, 신사적(申思迪)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황유후(黃有垕)를 교하 현감(交河縣監)으로, 김상훈(金相勛)을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홍우제(洪禹濟)를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민진원의 정사였다.
 
【영인본】41책 466면【분류】*인사-임면(任免)

2)영조 9권, 2년( 1726 병오 / 청 옹정(雍正) 4년) 2월 22일 을유 8번째기사

●성유열 등 5인에게 급제를 내리다
성유열(成有烈) 등 5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숙종(肅宗)의 어용(御容)을 강도(江都)에 봉안(奉安)하고, 임금이 그 지방민(地方民)을 위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중신(重臣) 이병태(李秉泰)를 보내 교통(喬桐)에서 과시(科試)를 보이니, 통진(通津) 사람도 아울러 과장(科場)에 나아갔다.
 
【영인본】 41 책 583 면【분류】 *인사(人事) / *왕실(王室)

3)영조 16권, 4년( 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3월 27일 정축 9번째기사

●이배의 공초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배(李培)를 문초하니, 이배가 공초하기를, “신이 전년 10월에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갔으나 병사는 보지 못하고 단지 군관(軍官) 안추(安樞)만 만나보고 자산(慈山)에 이르러 겨울을 나고 3월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11일에 갈원(葛院) 사는 김정현(金廷賢)이 와서 보고는 양천의 가천(加川) 최경우(崔擎宇)의 집에 함께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김정현과 최경우가 백기(白旗)에다 ‘의(義)’자를 써가지고 가서 변산(邊山)의 적을 격파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변산의 적은 국가에서 마땅히 토벌할 것이고 우리들이 토벌할 것이 아니다.’ 하고는 그대로 도망해 오고 말았는데, 장사(壯士) 두 사람이 갈원 뒷고개에 모여 있다가 신을 붙잡아 권서룡(權瑞龍)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에는 바야흐로 군사 3초(哨)가 모여 있었고, 적당(賊黨)은 권서봉 3형제와 박영동(朴寧東)·김정현(金廷賢)·최경우(崔擎宇)였습니다. 전라도 나주에 방을 건 자인 나가(羅哥)가 3천 명을 거느리고 변산으로 들어갔는데, 태인의 수령 박필현(朴弼顯)이 그 당이어서 모든 적이 박필현에게 가서 의논하고 왔습니다.

10일 청주에서 모인 자는 양반(兩班)이 거의 2백 명이나 되어 하나하나 그 성명을 기억할 수가 없고, 여섯 장사(壯士)는 고몽량(高夢良)·김성달(金成達)·김두백(金斗白)·정치룡(鄭致龍)·소성(蘇晟)·최경우(崔擎宇)·목주경(睦州敬)이었으며, 내응(內應)은 남태징(南泰徵), 통진 부사(通津府使) 남태적(南泰績),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었고, 신은 정세윤(鄭世胤)의 중군(中軍)이 되었습니다. 병사(兵使)를 죽인 자는 바로 군인 최갑(崔甲)인데 최용서(崔龍瑞)·최경우(崔擎宇) 역시 함께 하였습니다. 이인좌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영장을 잡아오라 하기에 신이 남문(南門)에 앉아서 군사를 보내 붙잡아 오게 해서 신이 붙잡아 가지고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이인좌가 말하기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신으로 하여금 끌어내어 죽이게 하였습니다.”하였는데, 2차 형신했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여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임금이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올린 적중의 도목(都目)을 내리고 명하기를,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과 홍문 정자(弘文正字) 이종성(李宗城)으로 하여금 구별하여 초출(抄出)하게 해서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보내어 처치하게 하라. 도목 가운데 양반 및 사나워서 두목(頭目)이 된 자, 일찍이 여러 적의 초사(招辭)에 나온 자는 효시(梟示)하는 질열(秩列)에 두고, 소민(小民)으로 협종(脅從)한 자는 결곤(決棍)하는 질열에 두라.”하였다.
 
【영인본】 42 책 32 면【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4)영조 16권, 4년( 1728 무신 / 청 옹정(雍正) 6년) 3월 28일 무인 8번째기사

●목함경의 공초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睦涵敬)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전(前) 참봉(參奉) 이동형(李東馨)의 조카 이호(李昈)·김중만(金重萬)과 함께 모의하였으나, 신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윤몽징(尹夢徵)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호가 양성(陽城) 사람과 모의하고 있다.’ 하기에 초아흐렛날에 신이 가서 이호를 만나 보았더니, 김중만과 함께 자고 있었습니다.

김중만이 간 후에 신이 물었더니, 이호가 말하기를, ‘네가 만약 권서린(權瑞麟)의 집으로 가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권서린의 집으로 갔더니 바야흐로 소를 잡고 수백 명이 모여 있었는데 도검(刀劍)이 무서웠습니다.

대개 도둑떼를 모은 것으로서 최경우(崔擎宇)가 상인(喪人)으로 변복(變服)하고 수백 명을 모아온 것인데, 장수는 이인좌(李麟佐)였습니다. 김중만이 80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인다고 했는데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었고, 이배(李培)가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 호군(犒軍)하고 사습(私習)하였습니다.

좌장군(左將軍)은 이호(李昈), 우장군(右將軍)은 최경우(崔擎宇)이고, 신은 진용 도위(進勇都尉)가 되었으며,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평택을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집으로 돌아와 김중만을 찾아 갔으나 간 곳을 몰랐고, 3월 13일에 정세윤(鄭世胤)의 아들 정일화(鄭一華)가 신을 데리고 이호의 종의 집으로 가서 협박하므로 신이 부득이 따라갔습니다.

15일에 비를 맞으며 청주(淸州)로 들어가 길을 나누어 안성(安城)으로 향하였는데, 신이 적도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안성의 군사가 모두 도망하였다고 한다. 만약 금위군(禁衛軍)을 나에게 주면 내가 마땅히 가서 안성을 깨뜨리겠다.’ 하니, 허락하였기 때문에 거짓으로 군사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흩어져 도망하다가 진천(鎭川)에 이르러 관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듣건대, 해미(海美)의 영장(營將)이 17일에 군사를 이끌고 적과 화응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하니 그 보장(報狀)이 적실(的實)하며, 영남의 군사가 15일에 올라온다고 하였으나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정세윤(鄭世胤)이 일을 주관했으나 패하여 죽었고, 민창도(閔昌道)의 아들 민원해(閔元楷)가 충주(忠州)에서 수창(首唱)하였으니, 만약 민원해를 붙잡아 묻는다면 충주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세윤과 안엽(安熀)이 평안도에 가서 모의하고자 하였는데, 안엽은 신의 친척으로 용인(龍仁) 직곡(直谷)에 삽니다. 정세윤이 또 정월에 호남에 갔고 이호도 뒤좇아 갔는데, 태인의 원이 암암리에 군사를 점열(點閱)하였고, 나주(羅州)의 부자 나만적(羅晩績)이 전포(錢布)를 많이 내어 이호에게 주었습니다.

적군이 청주로 들어갈 때 모두 소복(素服)을 하였고, 장흠(張欽)·장용(張鎔)은 간 곳을 모르며, 권서린(權瑞麟)은 패해 죽었다고 들은 듯하고, 권서룡(權瑞龍)은 죽산의 진(陣)으로 향했습니다. 위목천 현감(僞木川縣監) 곽장(郭長)은 도순무영(道巡撫營)에 사로잡혔으며, 정일화(鄭一華)의 처남(妻娚) 윤취징(尹就徵)은 양지(陽智)에 사는데 군사 3백명을 모았습니다.

적의 괴수가 말하기를, ‘영남의 군수 수만 명이 15일 안동을 격파하고 문경(聞慶)에 둔을 치고 있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남태적(南泰績)이 본부(本府)에 있으면서 3백 명이 군사로 장차 서로 호응하려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좌장군 이호의 휘하에 진용 오도위(振勇五都尉)가 있는데, 그 둘은 신과 이의형(李義衡)이며, 나머지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적도들이 또 말하기를, ‘태인의 군사가 15일에 공주(公州)로 향했다.’고 하였습니다. 양반(兩班)이 처음에는 1백 20명이었으나 청주와 진천에 이르러서는 거의 2백 명이 되었는데, 적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죽산(竹山)에 가면 이천 부사(利川府使)가 의당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호응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권서린과 이인좌가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이천 부사와는 서로 아는 사이로서 역시 우리와 같은 무리이니, 반드시 서로 호응할 것이고, 통진(通津)과 이천 두 부사는 모두 우리들이 일찍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민망해 하였다.’ 하였습니다. 유검(柳儉)·윤태징(尹台徵)은 양지(陽智)에 사는데 이호(李昈)와 모두 한 동네이며, 이는 이호의 동서(同婿)이며 신의 6촌(寸)입니다.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광적(李光績) 역시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유검이 말하기를, ‘남인(南人)이 태반이나 들었으니, 만약 각기 5, 6인씩만 내어 차차 성안으로 흘러 들어가 각기 각자의 집에 숨어 있다가 변을 일으키면 좋을 것이다.’ 하였으니, 만약 청녕교(淸寧橋)에 살고 있는 유검의 형 유염(柳淰)에게 물으면 그 계획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배(李培)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大門)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還刀)와 군복(軍服)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참형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임금이 목함경은 병사(兵使)를 죽였다 하여 정법(正法)한 후 지체(肢體)를 원수의 집에 주라 하였다.
 
【영인본】 42 책 33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 / *가족-친족(親族)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5)영조 30권, 7년( 1731 신해 / 청 옹정(雍正) 9년) 8월 28일 무오 2번째기사

●박도창의 조카 박성건을 국문하다. 옥사를 끌다가 10월 을미일 이후 처리하다
좌포도청(左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작년 국옥(鞫獄) 때에 역적(逆賊) 박도창(朴道昌)의 조카 박성건(朴成建)을 기포(譏捕)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즉시 박성건의 동서로서 정배(定配)된 사람인 표태만(表泰萬)의 고발로 인해 죄인 박성건을 곤양군(昆陽郡)에서 잡아 보내어 이름이 국안(鞫案)에 기재되었으니, 마땅히 의금부로 이송(移送)하여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로부터 연달아 본부(本府)에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죄인 박성건을 신문하였다. 이보다 앞서 포도청에서 박성건을 신문하기를,
 
“노몽서(盧夢瑞)의 공초(供招)에 따르면 네가 박도창의 형의 아들로서 박도창의 집 문 밖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또 금부 나장(禁府羅將) 순금(順金)의 공초에 말하기를, ‘박도창의 서찰을 박도창의 첩(妾)에게 전하니, 박가 성을 가진 사람이 약봉지를 내어 주었습니다.’ 하였고, 외직 나장(外直羅將) 박창휘(朴昌輝)의 공초에는 ‘박도창의 아들이 나에게 「아버지가 승관(承款)하면 족속(族屬)을 다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네가 만약 주선(周旋)해 준다면 마땅히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중삼(重三)의 공초에는 ‘어떤 사람이 박창휘의 일가 박초관(朴哨官)이라 하면서 박창휘를 만나 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는데, 그 오른쪽 손을 보니 종이로 포장한 물건을 쥐고 있었습니다. 무슨 물건인가 묻자 기운을 돕는 약이라 했는데, 이내 박창휘에게 주었습니다.

박창휘가 박초관에게 「박도창이 본부(本府)에 있을 때는 형벌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약을 사용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니, 우선 상궐(上闕)하여 친국(親鞫)하기를 기다려 그때 순창(順昌)에게 전해주어 그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해야 된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박도창의 첩(妾)의 동생되는 점상(點尙)의 공초에는 ‘박도창이 음독(飮毒)하여 죽은 뒤에 족인(族人)인 박가(朴哥)가 그 형의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하였으니, 박도창에게는 이미 자식이 없고 또 다른 조카가 없는데,

너는 바로 박도창의 형의 아들이니 박도창의 집안 일을 관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네 이름이 이미 노몽서의 공초에서 나왔고, 그 나머지 각 공초에서 혹은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족속이라 하기도 한 것은 모두 너를 가리킨 것이니, 그렇다면 박도창의 역모(逆謀)를 네가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박도창을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것도 또한 네가 만든 짓이다.”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박도창의 5촌 조카로서 순천(順天)에 살다가 경술년6027) 1월에 올라와 박도창의 집에 의지하였고, 노몽서 등이 박도창의 처남 정태형(鄭泰亨)의 집으로부터 많은 돈꿰미를 서울로 운반해 왔지만, 저는 실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박도창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자 박도창의 처가 도피하라고 했기 때문에 두렵고 겁이 나서 도피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포도청에서 다시 신문하기를,“네 공초에 이미 이르기를, ‘정태형의 집으로부터 돈꿰미를 운반해 들이는 상황을 직접 보았다.’ 하였고, 박도창의 처도 또한 너를 도피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박도창의 집에 모여서 모역(謀逆)한 자들이 누구 누구이며 너로 하여금 약을 전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박도창을 죽게 한 것은 또한 누가 시킨 것이냐?”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약을 먹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일은, 저와 세규(世奎)·점상(點尙)이 점매(點梅)의 집에 이르니, 점상이 나졸(羅卒)을 불러 와서 저에게 약을 전해 주도록 하였는데, 그 뒤에 박도창이 과연 곧바로 죽었습니다. 박도창이 모역한 일은 무신년 9월부터 박도창이 노몽서·정태형 이성(異姓) 친척인 박대강(朴大江)과 정태형의 동성족(同姓族)으로 성(姓)이 정(鄭)인 자와 순천(順天)에 사는 김갑(金甲) 등과 함께 밤낮으로 모여서 모의하였습니다.

그때 순천 영장(順天營將)으로 신문(新門) 밖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과 정사효(鄭思孝)의 서제(庶弟), 용산(龍山)의 이생원(李生員), 양천(陽川)의 이생원(李生員)이라는 자가 또한 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각 사람이 비밀스럽게 말하는 것은 모두 ‘그 약을 그에게 이미 전해 주었느냐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문 밖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옥관자(玉貫子)를 단 자도 또한 와서 말하기를, ‘네가 모주(謀主)가 되었으니, 그 약에 대한 일을 반드시 잘 처리하라.’ 하였습니다. 또 박태망(朴泰望)이라는 자가 있어 와서 ‘이미 큰 일을 도모하였으니, 그 약을 속히 과녀(寡女)에게 전해 주라.’ 하였고, 장의동(壯義洞)의 이가(李哥)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도 또한 와서 ‘그 약을 과녀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상궁(尙宮)에게 전해 주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도동(桃洞)의 이병사(李兵使)의 아우가 또 와서 말하기를, ‘그 약을 상궁에게 전달해 동궁(東宮)에게 사용한다.’ 하였습니다. 약은 박도창이 그의 종 사회(四會)·귀익(貴益)을 시켜 과녀에게 전해 주게 하였습니다. 과녀는 박도창의 족속이라 했는데, 박도창이 계집종을 사서 들여보내 상궁의 방자(房子)6028) 로 삼은 것입니다.……”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박도창이 모역한 정절(情節)은 이미 포도청에 납초(納招)하였고, 함께 참여한 여러 사람들은 혹 성(姓)만 일컫고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호(號)를 일컫고 사는 곳을 말하지 않아서 한결같이 포도청의 공초와 같았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5, 6년 전에 민참의(閔參議)라는 자가 박도창에게 ‘매양 우리 당(黨)의 패배 때문에 벼슬이 여기에 그쳤으니, 분하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마땅히 너와 함께 모역하리라.’ 하였습니다.

박도창을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자들은 바로 박도창의 처남으로 이름을 정희산(鄭喜山)으로 바꾼 정흥교(鄭興僑)와 박대강 두 사람입니다.”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이 고발한 여러 사람들을 포도청으로 하여금 발포(發捕)하게 하여, 이침(李梫) 등을 박성건과 면질(面質)시키니, 이침이 박성건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신년6029) 9,10월 무렵에 내가 박도창의 집에 갔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병오년6030) 에 북우후(北虞候)에 제수되어, 무신년 12월에 서울로 돌아왔으니, 네 말은 저절로 허망한 데로 돌아간다.”하고, 이우명(李遇命)은 말하기를,
 
“나는 임인년6031) 에 출신(出身)하여 비랑 감찰(備郞監察)이 되었으니, 생원(生員)이라는 칭호는 잘못된 것이다.”하고, 최환익(崔桓翼)은 말하기를,
“네가 비록 죽을 곳에서 살기를 구한다지만, 어찌 차마 터무니없이 사람을 모함하느냐?”하고, 이여명(李汝明)은 말하기를,
“노몽서는 내가 본래 모르는 사람이다.”하고, 이성익(李聖翼)은 말하기를,

“너는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서 다시 진위(眞僞)를 알리라.”하여,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이 다시 공초하기를,
“이른바 민참의(閔參議)는 전번 공초에서 잘못 고발한 것으로, 분명히 윤참의(尹參議)입니다.”하였다. 박성건이 또 공초하기를,
 
“박도창의 모역을 표태만(表泰萬)·정운보(鄭雲普)·정세귀(鄭世龜)·정희태(丁喜泰)가 참여하여 듣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박도창의 종 금이(金伊)를 시켜 정태형(鄭泰亨)의 집에 돈을 실어가게 하고 약을 박도창에게 전달한 것이 사실입니다.”하였다. 박성건이 또 정태진(鄭泰震)과 면질(面質)하여 말하기를,

“네가 김영태(金寧泰)와 함께 어찌 박도창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는가?”하니, 정태진이 말하기를,
“나는 박도창과 본래 혐의가 있었고, 표태만과 차강(車江)은 지난해에 다 정배(定配)되었으며, 정운보는 내가 본래 모르는 사람이다. 표태만이 내게 박도창의 시신을 함께 거두기를 요구하였지만, 나는 피하고 가지 않았다.”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에게 1차 형신(刑訊)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용산(龍山)의 이생원(李生員)은 바로 정태진(鄭泰震)의 고모부이고 박태망(朴泰望)은 바로 순천 파총(順天把摠) 박창무(朴昌茂)이며, 순창(順昌)은 바로 민참의(閔參議)의 수청노(守廳奴)입니다. 박도창의 종 이태(二太)를 신문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이태를 신문하였으나, 이태가 승복하지 않아 박성건의 말과 서로 어긋났다. 박성건을 김갑(金甲)과 면질(面質)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네가 전대(纏帒)에서 약을 꺼낼 때 박도창의 계집종 준엽(俊葉)·부전(富全)이 어찌 참견(參見)하지 않았는가?”하였으나, 김갑이 승복하지 않았다. 박대강을 박성건과 면질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너는 박도창의 4촌으로 박도창의 집에 와서 어찌 ‘내가 이미 이역(吏役)에 들었으니, 너와 일을 함께 해야 되겠다.’라고 하지 않았는가?”하니, 박대강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관리(官吏)가 되었는데 어찌 박도창 같은 자와 함께 모의(謀議)했겠는가? 무신년에 박도창이 감영(監營)에서 형벌을 받을 적에 내가 구함(構陷)한 것 때문에 심지어 죽이려고 하였다고 했는데, 너는 어찌 알지 못하는가?”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정흥교를 박성건과 면질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박도창이 ‘이병사(李兵使)의 아우로 신문(新門) 밖에 사는 이영장(李營將)과 근동(芹洞)에 사는 이영장(李營將)이 나와 동모(同謀)했으니, 너도 함께 들어와야 된다.’고 말하니, 네가 어찌 ‘우리 집안에 정배(定配)된 사람으로 나라를 원망하는 이가 있고, 또 본관(本官) 및 본관 친족(親族) 중에 함께 일을 할 만한 이들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하였다. 정흥교가 공초하기를,
 
“이른바 정배된 사람이란 바로 사간(司諫) 송필항(宋必恒)인데 지금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고, 본관은 바로 박태삼(朴泰三)인데 국옥(鞫獄)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기유년6032) 겨울이었으니, 어찌 박도창과 함께 공모할 수 있었겠습니까?”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창무를 신문하니, 박창무가 공초하기를,
 
“저는 순천에 살면서 박도창과 서로 알고 지내긴 했지만, 갑진년6033) 이후로는 서로 대면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부전(富全)을 신문하니, 부전이 공초하기를,
 
“16세 이후에는 다시 박도창에게 사역(使役)되지 않았고, 통진(通津)에 와서 거주한 지가 이미 7년이나 되며, 김갑은 본래 모르는 사람입니다.”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다시 박성건을 신문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신문 밖에 사는 이영장(李營將)은 처음 공초에서 잘못 고발한 것이므로 지금 비로소 깨달았으니, 바로 일찍이 순천 영장(順天營將)을 지냈던 유일기(兪一基)입니다.”하여, 옥사(獄事)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못하였다. 10월 을미일에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기를,
 
“죄인 이침(李梫)·이우명(李遇命)은 공초한 내용이 명확하고, 이성익(李聖翼)도 또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모두 석방하소서. 박창무(朴昌茂)와 부전(富全)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며, 정태진(鄭泰震)은 이미 3차의 형벌을 가했고, 이태(二太)도 또한 5차의 형벌을 가했는데, 별달리 어긋나는 단서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뒤에 의금부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최환익(崔桓翼)·이여명(李汝明)·박대강(朴大江)·김갑(金甲)·박창무(朴昌茂)·부전(富全)은 특별히 석방하고, 이태(二太)·정흥교(鄭興僑)는 모두 변방의 먼곳에 정배(定配)하였다. 정태진(鄭泰震)과 박성건(朴成建)은 모두 물고(物故)하였다.
 
【영인본】 42 책 275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 / *가족-친족(親族)
[註 6027]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6028]방자(房子) : 궁중의 여자 하인. ☞
[註 6029]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6030]병오년 : 1726 영조 2년. ☞
[註 6031]임인년 : 1722 경종 2년. ☞
[註 6032]기유년 : 1729 영조 5년. ☞
[註 6033]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6)영조 30권, 7년( 1731 신해 / 청 옹정(雍正) 9년) 12월 25일 갑인 3번째기사

●권이진·호서 부임을 꺼린 수령 이수신·통진 부사 이완을 논한 허옥의 상소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권이진(權以鎭)은 경재(卿宰)가 된 몸으로 시골에서 넉넉하게 살면서 다만 곡물(穀物)에 대해 인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언사(言辭)가 해괴하고 패망하였으니, 마땅히 그 관직을 삭탈하고 그 곡식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호서(湖西)의 쇠잔한 고을을 싫어해 회피한 사람은 마땅히 무겁게 책벌(責罰)을 가해야 하며, 이기헌(李箕獻)이 논핵한 이수신(李守身)의 일은 한 번 조사를 거쳐서 그 허실(虛實)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이수신을 잡아다 문초하여 핵실하여 처치하소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완(李莞)은 일찍이 군읍(郡邑)을 다스렸는데 이미 해괴한 행위가 많았고, 또 그 이력(履歷)이 이 고을에 합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 직(職)을 체직시켜 바꾸어야 합니다.”하니, 비답하기를,
 
“권이진의 일은 거조(擧措)가 진실로 지나치니 파직시키도록 하되, 애당초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하필 그 곡식을 되돌려 줄 것까지야 있겠는가? 호남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서는 이미 문비(問備)를 행하였으니, 하필 추가로 문책할 것까지 있겠는가? 이수신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이완의 일은 사조(辭朝)한 지가 얼마 안되니, 마땅히 시험해 보는 것이 옳으며, 자주 체직시키는 것은 아마 민폐(民弊)를 끼칠 것이다.”하였다.

대개 권이진이 공주(公州)에 사는데, 어사(御史) 황정(黃晸)이 장곡(庄穀)을 억지로 분배하여 사고(私庫)를 봉(封)하는 데까지 이르자, 권이진이 ‘이미 재열(宰列)에 있었으니 부민(富民)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사고를 봉하는 조처를 하고 억지로 분배하는 명령을 하는 것은 조정의 체모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편지를 보내 황정을 책망하였는데, 그 말이 화평을 잃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영인본】 42 책 292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재정(財政)

7)영조 37권, 10년( 1734 갑인 / 청 옹정(雍正) 12년) 1월 22일 기해 4번째기사

●대신들과 양역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팔도(八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과 육조(六曹)의 장관(長官)을 희정당(熙政黨)에서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의익(李義翼)이 중추부(中樞府)의 녹사(錄事)와 강화(江華) 수첩군(守堞軍)의 장교(將校) 가운데 경내(境內)에 사는 사람을 모두 괄출(括出)하여 궐액(闕額)7276) 에 충당시켰다고 합니다. 마땅히 여러 고을에서도 이를 본받아 행하게 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이 진실로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뒤로 중추부와 강화에서 혹시 불편함을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다. 지금부터 무릇 군정(軍政)에 관계된 모든 것은 전부 비국(備局)을 경유한 뒤에 아뢰게 하라.”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양포(良布)7277) 는 으레 2필(疋)을 거두게 되어 있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잡색(雜色)은 다만 1필만을 거두어 사용(私用)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원망은 국가로 돌아오고 이익은 사가(私家)로 돌아가게 되므로 매우 마땅한 것이 아니니, 마땅히 모두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병조 판서 윤유(尹游)는 말하기를,
 
“박문수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폐지하는 것은 또한 불가한 일입니다.”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윤유가 관서(關西)를 안찰하고 있을 적에 또한 일찍이 사용(私用)을 그 동생(同生)인 사촌(四寸)에게 주었었기 때문에 지금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국가에 이익이 있는 것이겠습니까?”하니, 윤유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박문수가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적에 유독 그 동생인 사촌에게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하였다. 박문수가 눈을 부릅뜨고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일찍이 이에 대해 논계(論啓)하여 폐지할 것을 청했었습니다만, 결국 조문명(趙文命)에게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윤유처럼 사용(私用)을 달갑게 여겨 폐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윤유는 더욱 노하여 점점 더 꾸짖고 박대하면서 심지어는,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할 수 있는가?’라고까지 하여 전상(殿上)이 시끄러웠다. 승지 홍상빈(洪尙賓)이 모두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은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된다고 하교하고 단지 박문수만 추고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천위(天威)7278) 의 지척에서 재상(宰相)이 욕설을 하며 꾸짖게 되매 사기(辭氣)가 비루하고 패려스러웠으니, 연석(筵席)의 체통이 엄중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뒤 박문수가 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윤유의 탐오스럽고 추잡한 정상을 대면(對面)하여 책망하면서 패려스러운 말로 서로 욕을 하기에 이르렀었다.

윤유가 감히 태연히 공직(供職)할 수 없어 사양하는 뜻을 조금 보이기는 했으나 곧이어 무릅쓰고 출사(出仕)했으므로 예대(隷儓)들도 모두 타매(唾罵)하였다.”
 
【영인본】 42 책 415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사학(史學)

[註 7276]궐액(闕額) : 모자란 인원. ☞
[註 7277]양포(良布) : 양역(良役)의 가포(價布). ☞
[註 7278]천위(天威) : 임금의 위엄. ☞ 

8)영조 37권, 10년(1734 갑인/청 옹정(雍正) 12년) 2월 20일 병인 3번째기사

●김동필이 문수 산성의 방어를 위한 대책을 건의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동필(金東弼)이 문수산성(文殊山城)이 강도(江都)를 굽어보고 있는데, 수비(守備)가 단약(單弱)하여 적에게 검거당하기 쉽다는 것을 이유로 통진(通津)의 부치(府治)를 문수(文殊)로 옮겨 단독의 진(鎭)으로 만든 다음 덕포진(德浦鎭)을 거기에 예속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양천(陽川)·김포(金浦)를 합쳐 양천의 현치(縣治)에다 하나의 웅부(雄府)를 설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영인본】42책 421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군사-군정(軍政)

9)영조 39권, 10년(1734 갑인/청 옹정(雍正) 12년) 9월 15일 정해 1번째기사

●대신 및 여러 신하들과 차사원, 수령들을 불러 대동미를 특별히 감할 것을 분부하다
임금이 장릉(章陵)에 거둥하여 김포군(金浦郡) 관사(館舍)에서 유숙하였다. 밤에 대신(大臣) 및 여러 신하들과 차사원(差使員), 수령(守令)들을 인견하고 분부하기를,
 
“신미년에 선조(先朝)께서 시행한 전례에 의하여 지방관(地方官) 및 병참읍(並站邑)에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물어 올 가을에 새로이 받을 대동미(大同米)에서 매결(每結) 2두(斗)씩을 특별히 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방관은 또 숙소(宿所)의 역(役)을 담당했으니, 더욱 고휼(顧恤)함이 마땅하다. 올 봄에 정퇴(停退)한 대동미를 또한 견감(蠲減)하고 그 밖에 연조(年條)가 오래 되어 탕감할 만한 것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2책 453면【분류】*왕실-행행(行幸)/*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재정-공물(貢物)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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