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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영조실록(40-51)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1. 영조실록(40-51)

40)영조 105권, 41년( 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1월 27일 계유 5번째기사

●교동 독운 어사 이석재가 통진·김포에 환곡이 부족함을 진달하니 묘당에 명하여 구획하게 하다
교동 독운 어사(喬桐督運御史) 이석재(李碩載)가 복명하여 통진(通津)과 김포(金浦) 양읍(兩邑)에 환곡(還穀)이 부족한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구획(區劃)하여 주도록 하였다.
 
【영인본】 44 책 191 면【분류】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구휼(救恤)

41)영조 105권, 41년(1765 을유/청 건륭(乾隆) 30년) 1월 27일 계유 5번째기사

●교동 독운 어사 이석재가 통진·김포에 환곡이 부족함을 진달하니 묘당에 명하여 구획하게 하다
교동 독운 어사(喬桐督運御史) 이석재(李碩載)가 복명하여 통진(通津)과 김포(金浦) 양읍(兩邑)에 환곡(還穀)이 부족한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구획(區劃)하여 주도록 하였다.
 
【영인본】44책 191면【분류】*재정-국용(國用)/*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구휼(救恤)

42)영조 105권, 41년( 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4월 3일 무신 2번째기사

●양남에서 올라온 세선이 취재되는 경우가 많아 사실을 조사하게 하다
이보다 앞서 양남(兩南)에서 올라온 세선(稅船)이 취재(臭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신칙하였으나 일부러 치패(致敗)시킨 자가 꼬리를 이었다. 서천(舒川)의 곡식 수천 곡(斛)이 또 통진(通津) 지방에서 치패(致敗)되었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선격(船格)16265) 을 일률(一律)로 다스려서 대중들을 깨우치게 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짐을 마구 실었다는 것으로써 먼저 해당 군수를 귀양보내고, 어사 박사해(朴師海)를 보내어 가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영인본】 44 책 196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교통-수운(水運)
[註 16265]선격(船格) : 배를 부리는 곁꾼. ☞ 


43)영조 105권, 41년(1765 을유/청 건륭(乾隆) 30년) 6월 7일 신해 1번째기사

●진전의 재실에서 재거하다. 윤승렬을 김포로 귀양보내다
임금이 진전(眞殿)의 재실(齋室)에서 재거(齋居)하였다. 몸소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서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대축(大祝) 윤승렬(尹承烈)이 공복(公服)을 벗고 전사청(典祀廳)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하여 윤승렬을 김포군(金浦郡)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영인본】44책 201면【분류】*왕실-의식(儀式)/*사법-행형(行刑)

44)영조 106권, 41년( 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10월 18일 경신 4번째기사

●영의정 홍봉한이 통진읍의 산성을 옮기는 것 등의 사항을 아뢰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훈련 대장 구선복(具善復)이 강도(江都)의 목장과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와 아룀에 미쳐서 말이 근간(懃懇)함이 많았는데, 통진읍(通津邑)을 산성(山城)으로 옮기는 것과, 강화부(江華府)에서 수륙 대장(水陸大將)을 겸하는 것과 길상 목장(吉祥牧場)에 제언(堤堰)을 쌓아 물을 저장하는 것과,

목장 안의 호환(虎患)에 대하여 군사를 내어 사냥하는 등의 네 가지 조건을 청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경장(更張)에 관계되어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목장의 호환으로 말의 종자[馬種]가 장차 없어지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사냥해 잡도록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또한 우리 백성이니, 어찌 바다를 건너 사냥을 하게 하겠는가? 또한 그냥 둠이 가하다.”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사간 이하술(李河述)이다.】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하기를,
 
“단아(端雅)하고 정직한 선비를 극진히 선택하여 동궁을 보도(輔導)하는 방책을 다하게 하고 감포(減逋)·분재(分災)한 고을을 엄중히 신칙하여 간리(奸吏)가 농간하는 습속을 방지하소서.”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 녹비(鹿皮)를 하사하였다.
 
【영인본】 44 책 209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국용(國用) / *교통-마정(馬政) / *농업-수리(水利) / *과학-생물(生物) / *구휼(救恤)


45)영조 107권, 42년(1766 병술/청 건륭(乾隆) 31년) 10월 9일 을사 1번째기사

●수령들에게 조세에 대해 엄히 신칙하도록 하교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하교하기를,
 
“제도 경차관(諸道敬差官)이 요즈음 단지 그 이름만 있고, ‘경(敬)’이라는 한 글자의 중함을 알지 못하면서 그 명예만 요구하려고 하여 경비(經費)만 탕갈(蕩竭)시키며, 그 이름만 취하려고 하여 몸소 답험(踏驗)하지 아니하고 단지 강제로 실(實)을 만든다. 아! 내가 비록 덕이 박할지라도 아래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정사를 조금 아는데 맹랑(孟浪)하게 은혜를 베푸니, 어찌 참은혜라고 이르겠는가?

근래에 비총(比摠)이 오로지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제도 감사(諸道監司)를 모두 적임자(適任者)를 얻었으면 내가 마땅히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서도 근심이 없겠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도신(道臣)이 어찌 신칙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수령(守令)은 팔도(八道)라고 하더라도 바로 3백 60고을이다. 옛사람의 말에,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면 일마다 어찌 다 잘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미 비총을 하였으면 일도(一道)가 스스로 고르게 분배(分排)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고르게 분배하였다고 이르지 말 것이다.

비총은 비록 고르다 하더라도 여러 고을은 오직 수령에게 달려 있다. 가까운 경기(京畿)로써 말하더라도 양천(陽川)은 그 결총(結總)은 혹시 많으나 빠진 것이 있고, 김포(金浦)는 그 결총이 과연 적으나 지나치게 비총(比摠)한 것이 있으므로, 3백 60고을로써 통틀어 말한다면 원수(元數)에 모자람이 없으니, 도신(道臣)에게 폐단이 없고 경비(經費)에도 흠축(欠縮)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아! 나의 늙은 나이에 어찌 사소(些小)하고 과분(過分)함을 계교하겠는가? 만약 혹시 재결(災結)에 해당함에도 재결에 들지 않은 것이 있어 비총 가운데 섞여서 들어갔다면, 경비는 비록 줄어짐이 없을지라도 외로운 백성들이 어찌 능히 구중(九重)에 호소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이 마음이 어찌 놓이겠는가? 아! 3백 60주(州) 백성은 모두 옛 해에 사랑하고 가여워하던 백성인데, 혹시 수령의 잘못으로 인하여 만약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으면, 어찌 늙은 나이에 백성을 위하는 뜻이겠는가? 분등(分等)이 지난 뒤에 마땅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근만(勤慢)을 염문(廉問)할 것이니, 이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팔도에 분부하여 수령에게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4책 232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46)영조 108권, 43년(1767 정해/청 건륭(乾隆) 32년) 5월 16일 기묘 1번째기사

●모화관에 행행하여 금군·훈국 등에게 편곤을 시예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금군(禁軍)·훈국(訓局)·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기사(騎士)에게 편곤(鞭棍)을 시예(試藝)하였는데,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편곤에서 여섯 번을 맞힌 홍기창(洪起昌)·최중태(崔重泰)에게 가자하기를 명하였다. 이동백(李東白)에게 적량 첨사(赤梁僉使)를 제수하였다. 기백(畿伯)과 총융사(摠戎使)를 잡아들이라 명하여, 수원 마군의 일로써 엄히 신칙하고 나출(拿出)하였다.

환궁할 때에 김포(金浦) 백성 가운데 범필(犯蹕)한 자가 있어, 응교 서명선(徐命善) 등이 청대하여 고훤 도사(考喧都事)의 정배(定配)를 청하고, 협련장(挾輦將)은 군율(軍律)에 의해 시행하기를 청하며, 범필한 사람은 형을 가하여 멀리 정배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영인본】44책 251면【분류】*왕실-행행(行幸)/*인사-관리(管理)/*사법-행형(行刑)/*군사-병법(兵法)

47)영조 111권, 44년( 1768 무자 / 청 건륭(乾隆) 33년) 12월 9일 계해 2번째기사

●인제·회양·풍덕 등의 고을에 대해 징수를 연기할 것을 명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저번에 선전관(宣傳官)이 왕래한 뒤에 하교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어찌 상례(常例)에 따르겠는가? 받을 만한 것은 받고 받기 어려운 것은 활협(闊狹)17271) 할 것이다. 관동(關東)의 인제(麟蹄)·회양(淮陽) 등의 고을과 경기의 교동(喬桐)·풍덕(豊德)·통진(通津) 등 고을과 북도(北道)의 남북(南北)의 우심한 고을 등은 이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곧 분부하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44 책 312 면【분류】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註 17271]활협(闊狹) : 형편에 따라 징수를 연기함. ☞ 

48)영조 111권, 44년( 1768 무자 / 청 건륭(乾隆) 33년) 12월 15일 기사 2번째기사

●도승지 김응순이 함경 감사·강원 감사 등의 추고를 청하다
도승지 김응순(金應淳)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심수(沈鏽)와 강원 감사 이언형(李彦衡)의 계본(啓本) 가운데 수령(守令)·찰방(察訪)이 한 사람도 하고(下考)17283) 에 든 자가 없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정여증(鄭汝曾), 김제 군수(金堤郡守) 서일수(徐日修), 곡성 부사(谷城府使) 유언술(兪彦述),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이장(金履長), 재령 군수(載寧郡守) 이용중(李龍中), 안동 부사(安東府使) 한필수(韓必壽),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덕호(趙德浩), 진보 현감(眞寶縣監) 박상규(朴相珪), 이성 현감(利城縣監) 남익초(南益初)는 부지런하였는데 하(下)에 점(點)하였으니, 전최(殿最)를 엄명(嚴明)하게 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의 도신을 추고(推考)하소서.”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좌부승지 이한풍(李漢豊)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상순(鄭尙淳), 통제사(統制使) 이한응(李漢膺), 남병사(南兵使) 김범로(金範魯), 황해 수사(黃海水使) 신대현(申大顯), 전라 좌수사 윤희동(尹僖東),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전득우(田得雨)의 계본(啓本) 가운데 변장(邊將)이 한 사람도 하고에 든 자가 없으니, 청컨대 추고하소서.”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영인본】 44 책 312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註 17283]하고(下考) : 벼슬아치의 근무 성적 고사에 있어서 하의 등제(等第)에 드는 것. 등제에는 상·중·하가 있음. ☞ 

49)영조 120권, 49년( 1773 계사 / 청 건륭(乾隆) 38년) 1월 25일 을묘 2번째기사

●건명문에 나아가 강백능을 잡아들이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강백능(姜百能)을 잡아들였다. 이때에 기전(畿甸)에 기근(饑饉)이 들어 임금이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제읍(諸邑)의 진휼하는 정사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는데, 어사 임득호(林得浩)가 통진(通津)에 이르러 봉고(封庫)하고 이어 부사 강백능을 파출(罷黜)하였다. 이날 임금이 친국(親鞫)하여 형추(刑推)한 뒤에 차꼬를 씌워 남간(南間)에 가두고, 어사의 복명(復命)을 기다리게 하였다.
 
【영인본】 44 책 445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구휼(救恤)
 

50)영조 120권, 49년( 1773 계사 / 청 건륭(乾隆) 38년) 2월 3일 임술 2번째기사

●경기 어사 임득호가 들어와서, 진휼의 일로 수령들을 포폄하다
경기 어사 임득호(林得浩)가 들어와서 진정(賑政)을 삼가지 않은 일로 통진 부사(通津府使) 강백능(姜百能)과 장단 부사(長湍府使) 구세온(具世溫)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그리고 포창(褒彰)하도록 아뢴 사람으로는 부평 부사(富平府使) 윤심위(尹心緯)가 첫째이고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방일(李邦一)이 그 다음이었다.
 
【영인본】 44 책 446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구휼(救恤)

51)영조 121권, 49년( 1773 계사 / 청 건륭(乾隆) 38년) 11월 18일 계유 5번째기사

●대신 등을 인견하여, 하교의 정지 여부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신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리고, 비국 당상으로서 강교(江郊)에 있는 자는 곧 나와서 참여하게 하고, 공경(公卿)으로부터 하대부(下大夫)에 이르기까지 강교(江郊)에 있는 자는 모두 몰아 들여서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봉쇄(封鎖)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조엄(趙曮)이 강교에 있으면서 빈대(賓對)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통진(通津)에 충군(充軍)하였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의 아버지가 옛날에 다른 의견을 세웠는데, 경도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하니, 김양택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옛 계사년18785) 에 처음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이 되어 행공(行公)하였는데, 연달아 재이(災異)를 만나자, 상소로, ‘물려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때 선조(先朝)18786) 께서 어제(御製)를 써서 내려, 겸양하여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선신(先臣)이 순종하는 의리로써 간략하게 상소로 논한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 나라의 경사는 삼대(三代) 후 처음 있는 경사로서 팔역(八域)18787) 의 민생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는데, 돌아보건대, 신의 구구(區區)한 송축(頌祝)의 정성이 어찌 남에게 뒤지겠습니까? 성대한 행사가 빨리 이루어진다면 글로 찬양[揄揚]하는 것을 신은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하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온 세상이 아첨한다.” 하였다. 대사헌 송순명(宋淳明)과 사간(司諫) 홍구서(洪九瑞) 등이 어제 풍악을 정지하도록 한 하교를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홍구서를 파면하고 송순명을 체직(遞職)하였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고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아첨하는 것이다.”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실상이 없이 말하는 것을 아첨이라 하는데, 지금은 임어(臨御)하신 지 50년이고 성수(聖壽)가 망구(望九)이심은 실상이 아닙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81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무릇 새해[新年]는 원일(元日)18788) 을 가절(佳節)로 삼고, 한달로 말하면 초하루를 으뜸으로 삼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때문입니다.”하매, 임금이 웃었다.
 
【영인본】 44 책 466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예술-음악(音樂) / *인사-임면(任免)

[註 18785]계사년 : 1713 숙종 39년. ☞
[註 18786]선조(先朝) : 숙종. ☞
[註 18787]팔역(八域) : 팔도. ☞
[註 18788]원일(元日) : 설날. ☞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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