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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조실록(1-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2. 정조실록 39건

 1)정조 7권, 3년( 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3월 8일 임진 1번째기사

통어영을 강화부에 합치는 것에 관한 심염조의 건의와 대신들의 논의, 구선복의 별단 

통어영(統禦營)을 강화부(江華府)에 합쳤다. 이보다 앞서 무술년1604) 에 번고 어사(反庫御史) 심염조(沈念祖)가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신이 12진(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관방(關防)의 요해지(要害地)를 살펴보았는데 전후 설치하여 경영(經營)한 것이 너무도 주밀(周密)하였습니다. 차라리 진보(鎭堡)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이 될지언정 방액(防阨)이 혹시 빠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설치한 규모가 들어가서 지키는 산성(山城)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수국(水國)에 물자를 공급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또한 너무 허술했습니다.

대개 그곳의 형편이 바다가 둘러싸고 있고 또 강(江)을 두르고 있어 사면(四面)이 물로 막혀 있는데다 서남(西南)은 수도(水道)의 요충에 위치하고 있고 지척의 거리에 있는 서울의 병한(屛翰)이 되고 있습니다. 그 운용(運用)하여 변화를 도출해내는 방법은 오로지 물에 달려 있는데 지경(地境)의 둘레가 2백 리(里)이고 그 연안(沿岸)에 13진(鎭)이 있지만 거기에는 당초 한 척의 전선(戰船)과 한 명의 수군(水軍)도 없습니다.

이미 건너편 연안에 있는 적병을 건너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고 또 요진(要津)에서 적병을 막아 가까이 오지 못하게도 할 수 없다면 비록 시설이 주밀하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정축년1605) 때처럼 적병이 피선(皮船)을 타고 건너와서 강을 뒤덮고 올라 온다면 금성 탕지(金城湯池)1606) 같은 공고함과 예리한 무기(武器)가 있다한들 장차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축년의 변고에 문신(文臣)은 절개를 지켜 죽었고 무신(武臣)은 패배하여 죽은 탓으로 12신(臣)의 충렬사(忠烈祠)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만, 한 대의 화살이라도 쏘아 적병을 물리칠 계책은 도모하지 못하고 단지 한 번 죽는 것으로 결판을 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물에 대한 방비가 없었던 탓입니다. 오직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본부(本府)에 공(公)과 사(私)의 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만 행상선(行商船)·어채선(漁採船)은 얼음이 풀리면 나갔다가 얼음이 얼 무렵에 들어오기 때문에 단지 배가 다닐 수 없는 계절에만 비로소 성(城) 아래에 매어두게 됩니다. 따라서 만일 뜻밖의 변고가 발생했을 적에 준비를 하고 강에 대기시키게 할 수 있는 배는 어선(御船) 1척(隻)과 진선(津船) 두서너 척에 불과하니 비록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려 해도 어떻게 잘 건널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도 물에 대한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까닭에 고금의 수신(守臣)들 가운데 형편에 대해 논진(論陳)하는 사람들이 이를 우선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신(臣) 김진규(金鎭圭), 고 판서 신 이인엽(李寅燁)의 상소 내용이 가장 상세하고도 절실하였습니다.

김진규의 상소에 이르기를, ‘교동(喬桐)·영종도(永宗島)는 위치하고 있는 곳이 서울과 멀리 떨어져 막혀 있기 때문에 서로 조응(照應)이 되지 않아서 변란에 임하여서는 또한 반드시 기회를 잃는 걱정이 있게 됩니다. 돌아보건대 이 본부(本府)는 가까이는 기전(畿甸)을 방위할 수 있고 멀리는 오로(五路)와 통할 수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교동과 호응할 수 있고 왼쪽으로는 영종도와 연결할 수 있는가 하면 장봉(長峰)·주문(注文) 등의 섬들이 빙 둘러싸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충분히 서로 응접(應接)할 수 있습니다.

대저 기보(畿輔)라고 해서 수군(水軍)의 장수를 두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둔다면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 통어사(統禦使)를 옮겨 본부에 예속시키고 아울러 진무사(鎭撫使)도 겸하게 함으로써 교동, 영종도와 관할하고 있는 통진(通津) 등 여러 고을이 모두 절제를 받아 수륙(水陸)이 서로 호응하여 함께 방수(防守)에 힘을 다할 수 있게 된다면 소루한 잘못을 없게 할 수 있습니다.’ 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상세히 헤아린 점이 있었습니다. 이인엽의 상소에도 또한 본부에 전선(戰船)과 수군(水軍)이 없는 것 때문에 논진(論陳)한 것이 있었는데 대의(大意)는 이 상소와 대략 같았습니다.

신이 인화진(寅火鎭)에 이르렀을 적에 교동을 바라보니 탄환(彈丸)만한 작은 섬이 깊은 바다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실로 삼도(三道)를 통어(統禦)할 수 있는 형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선(戰船)을 숨겨 둘 만한 항만(港灣)이 없어서 본부의 개펄이 있는 굽이마다 배를 숨길 수 있는 것만 못하니, 여기에서 더욱 전인(前人)들의 논설이 확실한 소견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강도(江都) 한 부(府)가 비로소 쓸모 있는 곳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일이 크게 변통(變通)시키는 데 관계되기 때문에 진실로 감히 경솔하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만, 삼가 전인(前人)들이 논한 것을 채록(採錄)하여 예재(睿裁)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면서 일이 크게 변통시키는 데 관계된다는 것으로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판하(判下)하기를,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그 형편을 상세히 살펴보고 그곳의 저축을 번열(反閱)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그 뜻이 보장(保障)을 진작하고 쇄신시키는 정사를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사(御史)가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특별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거조가 있는 후에야 실효(實效)를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두루 조사하게 한 뜻이라고 하겠습니까? 그 가운데 통어사(統禦使)를 옮겨서 설치하자는 일은 이것이 어사의 말이 근거가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 옛사람의 의논에 본디 상세히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강화도 한 구역(區域)을 둘러보면 하늘이 만들어낸 참호(塹壕)로 자못 사람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내(畿內)의 성지(城池) 가운데 위급한 시기에 힘이 될 수 있는 곳에 이곳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습니까? 대저 이 부(府)는 적군이 경유하는 길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충지인데도 부(府) 아래의 13개 진(鎭)의 주사(舟師)와 전함(戰艦)을 통행(通行)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본부의 주위가 수백 리나 되는데 그 가운데 있는 축로(舳艫) 몇 척과 대갑(帶甲) 몇 초(哨)도 일찍이 영섭(領攝)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마치 별세계의 물건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이 부(府)에다 보장(保障)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설치해 놓고 나서 어찌 이처럼 제치(制置)를 허술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말하기를, ‘만일 본부를 통어영(統禦營)으로 만든다면 교동(喬桐)이 하나의 열진(列鎭)이 되어 버리니, 설사 항해(航海)하는 일이 있더라도 기각(掎角)1607) 의 형세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이 곤란한 단서가 된다.’고 합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은 항해할 때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만 변고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국세(國勢)의 위급함이 송(宋)나라 때 애산(崖山)1608) 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록 교동과 같은 곤영(閫營)이 백 개가 있어도 사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혹 두루 생각하는 데 미진한 점이 있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보장(保障)이라고 명칭하고 있으면서도 일찍이 보장에 대한 도구가 하나도 없으니, 이는 도구가 없는데도 그 이름에 맞는 실효(實效)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장님에게 보기를 요구하고 귀머거리에게 듣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도적(盜賊)의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 비록 본부(本府)로 피난하려 하여도 어가(御駕)가 장차 무슨 배를 타고 건널 수 있겠으며 관민(官民)과 군병(軍兵)이 또 장차 무슨 배를 타고 건널 수 있겠습니까? 변란을 당하여 나루를 건널 경우 적병이 뒤따라 오는 것은 필연의 형세인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나루 앞에는 배가 없고 나루 뒤에는 적병이 있는 상황에서 항해(航海)를 할 수 없다면 위망(危亡)을 서서 기다리게 됩니다.

다행히 한두 척의 배가 있어 어가(御駕)가 잘 건널 수 있고 설혹 약간인(若干人)이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피난할 허다한 사민(士民)을 무슨 배로 죄다 나루를 건너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혹은 적병에게 죽기도 하는 것은 다만 병가(兵家)에서 적군을 헤아려 보는 방책에서만 그럴 뿐이 아니라 또한 병자년1609) ·정축년1610) 에 이미 당한 일이어서 또한 넉넉히 감계(鑑戒)가 될 만하니 이것이 어찌 생각하여 보면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도적이 호남(湖南)의 바닷가를 따라 물살을 타고 내려와서 바람을 따라 돛을 올리고 바다를 뒤덮어 거침없이 들어온다면 오직 저 교동은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기 때문에 사세가 탐지하여 살필 수가 없습니다. 본부(本部)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를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있습니다만 이미 정비하여 대기시켜 놓은 전선(戰船)이 없고 또 단속(團束)해 놓은 군졸이 없는데 어떻게 적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본부는 비록 평상시에도 경내(境內)를 지나가는 선척에 대해 오르내리는 것을 그대로 맡겨둔 채 애당초 검찰(檢察)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존해 있는 얼마 안 되는 사선(私船)은 모두가 이 도민(都民)들이 생활하기 위한 상선(商船)들로서 봄에 나갔다가 겨울에 돌아오기 때문에 애당초 준비하여 대기시켜 놓은 배가 없습니다.

지세(地勢)에 의거하여 논하고 군무(軍務)에 의거하여 참작하여 보건대 물은 있는데도 배가 없고, 배는 있는데도 군졸이 없고, 군졸은 있는데도 무기가 없다고 할 적에 이 가운데 하나가 있다 하더라도 패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이런 허다한 폐단을 다 겸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근일 통어사(統禦使)의 장계(狀啓)에 의거해 살펴보건대, 본영(本營)에 저축되어 있는 전곡(錢穀)이 없어서 심지어 강화(江華)에 있는 곡물(穀物)을 옮겨 획급(劃給)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또 눈앞에서 이루지 못할 사리(事理)의 한 단서입니다.

전후의 사세를 통하여 상세히 헤아려 보건대 통어영(統禦營)을 본부(本府)에 설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잘못된 계책인 것입니다. 처음 설치할 때부터 혹 화량(花粱)에다 하기도 하고 혹은 교동(喬桐)에다 하기도 하여 이미 정해진 법제가 없었으니,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법규를 확정하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옮겨 설치하는 즈음에 만약 소모되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면 돌아보건대, 지금의 경저(經儲)로는 실로 시국은 곤궁한데도 경비는 지나치게 든다는 탄식이 있겠습니다만, 비유하건대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것이어서 드는 비용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가(朝家)에는 해가 되는 것이 없으면서 위급한 시기에는 힘이 될 수 있으며, 보장(保障)에도 크게 이익됨이 있으면서 수륙(水陸)이 서로 상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해(利害)와 편부(便否)가 이렇게 분명한데도 그전대로 따라 행하여 포기하고 있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니 충분히 상의하여 가장 온편한 방도를 얻도록 힘쓰는 것이 처음 모의를 완벽하게 한다는 체통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묘당(廟堂)의 신하들에게 각각 가부에 대한 의논을 진달하게 하소서.”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의논하기를,“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좌우에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면서 서로 보장(保障)이 되고 있으니 비록 우리 나라의 금성 탕지(金城湯池) 같은 중요한 곳입니다만, 만약 전수(戰守)하는 형세로 말한다면 진양(晉陽)1611) 처럼 지킬 수 있는 곳은 될 수 있으나 유수(濡須)1612) 처럼 반드시 싸울 수 있는 곳과는 다릅니다.

지금 이 수륙(水陸)을 겸하여 총괄하게 하자는 의논은 다만 이제 수의(繡衣)1613) 가 말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종전의 수신(守臣)들의 의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1백여 년 동안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전대로 그냥 지내오고 있는 이유는 진실로 이해를 따짐에 있어 열에 하나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이 완전 무결하게 하는 데 관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다만 한때 경장(更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나라의 대계(大計)를 모의함에 있어 주저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강도(江都)는 산과 바다가 빙둘러 싸고 있어 위치한 곳이 깊숙하지만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해로(海路)의 문호(門戶)가 되며, 교동(喬桐)은 조금도 가려진 것이 없어 위치한 곳이 환히 드러나 있지만 양서(兩西)로 통하는 해로의 요충지입니다. 비록 위급한 변고가 발생했을 때를 당하여 만일 동북쪽의 육지에 있는 적군을 만났을 경우에는 강도로 돌아갈 수 있지만, 서남쪽의 바다의 적군을 만났을 경우에는 강도로 돌아갈 수 없으니, 비록 수군(水軍)을 겸한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교동과 영종도에는 모두 수군(水軍)을 배치하였는데 유독 강도에만 수군을 배치하지 않은 것은 당초 제치(制置)할 적에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가령 강도에서 교동의 수군을 총괄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저 갑진(甲津)·월곶(月串)의 바닷물은 큰 전선(戰船)이 용납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사세상 그대로 서남쪽의 제도(諸島)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제도(諸島)라고 하는 것이 혹은 강도보다 먼 곳도 있고 혹은 교동보다 가까운 곳도 있으니, 그 만약 바다 물결이 뒤집히면서 갑자기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다급한 변란에 대응함에 있어 손아래에 있는 교동에 책임지우지 않고 이에 도리어 등뒤에 있는 강화에 책임지우겠습니까? 이제 바다에 임하여 있는 통어영(統禦營)을 폐지하는 것은 또한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더구나 옹진(瓮津)·교동은 서쪽 바다에서 광대뼈와 잇몸[輔車]처럼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교동의 영(營)의 상황이 비록 잔약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기는 합니다만 거기에는 성곽(城郭)도 있고 수군(水軍)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수사(水使)를 피인(彼人)들은 번번이 장군(將軍)이라고 일컫기 때문에 서해(西海)의 당선(唐船)1614) 이 바닷가에 출몰(出沒)하지 않는 날이 없지만 유독 옹진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그 영아문(營衙門)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동의 수영(水營)을 해서(海西)에 있는 수영과 똑같이 일컫다가 이제 갑자기 혁파한다면 한쪽 팔을 제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관제(官制)에 의거하여 말하더라도 제도(諸道)의 수군(水軍)은 원래 문재(文宰)가 관령(管領)하는 법규는 없습니다. 이제 만약 유수(留守)를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로 삼는다면 바다에서 출몰(出沒)해야 하는 봄과 가을의 조련(操鍊)은 경직(耕織)하는 것과는 사의(事宜)가 달라서 허술한 점이 반드시 많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신(武臣)에게 거류(居留)1615) 의 직임을 맡긴다면 이는 또 사세(事勢)의 구애되는 점이 있게 되는 하나의 단서인 것입니다. 

이제 신이 진달하는 것은 단지 이속(移屬)시키는 것의 당부(當否)를 논했을 뿐입니다. 만약 그 이속시킨 뒤에 조치하는 방도에 피차 서로 방해되는 단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절목(節目)을 만드는 사이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상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관방(關防)을 변통시키는 일은 살펴서 신중히 하는 것이 귀한 것인데 신의 좁은 소견으로 어떻게 감히 잘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금성방략(金城方略)》에도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만약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신하로 하여금 두 곳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게 하여 과연 처치(處置)를 사의에 맞게 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면 그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기다려 처분(處分)을 내리는 것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하고, 영중추부사 이은(李溵)은 의논하기를, 

“신이 일찍이 강도(江都)에 대죄(待罪)1616) 하고 있으면서 대략 그 형편을 살펴본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는 보장(保障)이 되는 중요한 곳으로 진실로 교동(喬桐)을 관할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교동이 또 강도의 울타리가 되고 있으니 또한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관방(關防)은 비록 피차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조처함에 있어서는 의당 이해(利害)의 구분을 상세히 살펴야 합니다. 만일 통어영(統禦營)의 호칭을 강도로 이속(移屬)시킨다면 강도는 통령(統領)하는 권한이 있게 되는데,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그대로 교동에 둔다면 해방(海防)이 허술하게 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영돈녕부사 정존겸(鄭存謙)은 의논하기를,

 “교동영(喬桐營)의 통어사를 마땅히 강도로 이속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말하기를, ‘교동은 위치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양서(兩西)와의 선로(船路)는 비록 가깝지만 삼남(三南)과의 선로는 아득하여 서로 관계되는 것이 없으며, 강도는 위치가 중추가 되는 요지에 있으므로 양서와 삼남의 선로가 이를 버리고 다른 데로는 갈 길이 없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교동은 전선(戰船)이 육지(陸地)에 걸치게 되어 있어 곧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말지만 강도는 개펄 구비구비가 움푹 패여 있어 전선을 숨겨둘 만한 장소가 많이 있으니, 여기에서 이해와 편부가 흑백(黑白)이 나뉘듯 분명하여진다.’ 하는데, 그 말들이 참으로 옳습니다. 

병자년과 정축년에 이미 겪은 일로 말하여 보건대, 그 창졸간 적병을 피할 처음을 당하여 진선(津船)들이 죄다 흩어져 수 척의 배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다투어 건널 즈음 손으로 뱃전을 움켜쥐고 매달리다가 물에 빠져 죽는 참혹한 정상은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무릇 성(城)으로 들어간 뒤에, 갑진(甲津)은 하늘이 만들어 준 요해처인데도, 적군의 배가 강(江)을 뒤덮어 올라올 때를 당하여 당초 그 사이에서 차단하려고 나서는 전선과 수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적군이 건너와서 정박(渟泊)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므로 물을 등지고 언덕을 올라와 육박전(肉薄戰)으로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온 뒤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비로소 방어할 계책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면(四面)이 물에 막혀 있고 명색이 보장(保障)인 곳에 대해 이렇게 조치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전후 수신(守臣)들이 형편을 눈으로 직접 보고 마음속으로 지난일을 슬퍼하면서 관방의 허술함을 걱정하고 시설에 결함이 있는 데 대해 개연(慨然)스러움을 느껴 기필코 급급히 서둘러 해진 옷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하려는 것이 어찌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힘쓰는 그런 뜻이겠습니까? 이는 예전의 일을 징계하여 뒷일을 조심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 상신(相臣) 유척기(兪拓基)는 항상 구규(舊規)를 준행하였습니다만 이 일에 대해서는 극력 이개(釐改)할 것을 주장하면서 통어사를 강화로 이속(移屬)시키자는 뜻으로 선조(先朝)께 진달하여 성심(聖心)도 허락하였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도 또한 동의(同議)되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해직(解職)된 탓으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삼가 판부(判付)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그 굉원(宏遠)한 방략과 치밀한 모유(謀猷)는 경위(經緯)를 총람(總攬)하여 남김없이 다 포괄(包括)하고 있으니, 비록 이름난 석학(碩學)이 평소 익히 강론한 계책과 경신년1617) 에 이미 정한 의논도 모두 성려(聖慮)의 범주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처럼 우매(愚昧)한 자질로서는 이루어 놓은 것을 우러러 찬송(贊頌)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릇 어찌 좁은 소견에 〈천 번 생각하면〉 한 번 얻는 것으로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좌의정 서명선(徐命善)은 의논하기를,

 “수규(首揆)1618) 가 이미 의견을 달리하는 의논을 제시했는데 신이 그 말에 따라 반복(反復)해서 말해도 되겠습니까? 대저 강도는 지킬 수는 있지만 싸울 수는 없는 곳이라는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런데 지키는 방도는 반드시 제군(諸軍)을 통령(統領)하고 열진(列鎭)을 관할한 연후에야 비로소 정장(亭障)1619) 의 형세를 이룰 수 있고 적군을 막는 도구를 준비할 수 있어 적군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수비가 공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킬 수 있는 곳이어서 전구(戰具)가 쓸데없다고 한다면 설사 성(城)을 공격하여 오는 걱정이 있어도 손을 묶고 앉아서 적군에게 당하겠습니까? 계람(繫纜)1620) 하는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과 호칭을 혁파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성교(聖敎)의 내용이 또한 교동의 선함(船艦)을 다 빼앗고 교동의 진보(鎭堡)를 영구히 폐지하여 그 섬을 텅 비우게 하고야 말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포(排布)하고 제치(制置)하는 것을 오직 마땅히 구관(舊貫)을 따르게 하고 단지 통어사의 명칭만 강도로 이속시켜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총람(摠攬)하게 한 다음 교동은 영종도와 함께 수군(水軍)이 방어하는 곳으로 만들어 강도의 좌·우익(左右翼)이 되게 하며, 무릇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적에 강도의 통어사에게 절제(節制)를 받게 한다면 군제(軍制)가 통섭(統攝)되는 효험이 있고 보장(保障)이 허술하다는 탄식이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불편(不便)한 점을 볼 수 없습니다. 무릇 문재(文宰)가 수군을 통령할 수 없고 무신(武臣)이 거류(居留)1621) 가 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예로부터 사람을 인용함에 있어서는 다만 그의 재기(才器)가 어떠한지만 살피면 되는 것이요 반드시 문신·무신이라는 것에 구애된 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교동의 수사(水使)는 유독 문재가 아닙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일이 변통시키는 데 관계된 것이므로 신이 감히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우의정 정홍순(鄭弘淳)은 의논하기를,

 “경륜(經綸)과 조치(措置)에 관해서는 매양 뒷사람이 전인(前人)만 못한 것을 걱정하여 왔는데, 세급(世級)이 낮아짐에 따라 사리가 으레 그런 것입니다. 지금 계책을 세운다면 오직 마땅히 이루어진 법규를 삼가 지키고 변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혹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긴 탓으로 시의(時宜)에 따라 손익(損益)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다만 마땅히 드러나는 대로 보완하여 진실로 완전하게 하기를 힘써서 옛사람이 시설(施設)하여 놓은 본의(本意)를 어기지 않는 것이 절로 원대한 앞날을 위하여 경영하는 모유(謀猷)에 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부득이한 점이 있다면 단지 통어사의 호칭을 강도에 이속시켜 사변이 발생할 때에 관할할 수 있게 하되 절도사(節度使)의 영(營)은 전대로 두고 고치지 말아서 해서(海西)의 영진(營鎭)과 함께 표리(表裏)의 형세를 이루게 한다면 보장(保障)에는 통령(統領)하는 권한이 있게 되고 해방(海防)에는 허술해지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하고, 지중추부사 구선복(具善復)은 의논하기를,

 “신이 무진년1622) 에 영종도(永宗島)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교동에 나아가 조련(操練)했었는데 그때 강도의 동남쪽을 두루 살펴보니, 삼남(三南)의 선로(船路)가 모두 강도의 월곶진(月串鎭) 연미정(燕尾亭) 앞바다에 이르러 경강(京江)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곧이어 해서 수사(海西水使)의 직임을 받았으므로 수로(水路)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느라고 강도의 뒷바다에까지 이르렀었는데, 양서(兩西)의 왕래하는 선박들이 모두 이 길을 따라 교동을 지나 연미정에 이르러 경강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남쪽과 서쪽의 수로가 옷깃처럼 합쳐진 곳입니다. 그렇다면 강화(江華)가 해로(海路)의 인후(咽喉)가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또 을유년1623) 훈국(訓局)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왕명을 받들고 가서 길상(吉祥)의 목장(牧場)을 살펴본 다음 다시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參星壇)에 올라가서 두루 사면을 바라보니, 바둑알처럼 널려 있는 섬들이 오로지 강화 한 부(府)를 위하여 설치된 것 같았습니다.

이는 실로 해로의 관문이고 서울의 한폐(捍蔽)인 것입니다. 만일 해방(海防)에 경보(警報)가 있을 경우 강도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 삼남(三南)의 조운선(漕運船)과 양서(兩西)의 운량선(運粮船)이 경강(京江)으로 들어오는 길이 끊기게 될 것이니, 그것이 경강의 걱정이 되는 것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통어영(統禦營)을 옮겨서 설치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교동(喬桐)과 영종도(永宗島)에 이르러서는 강도의 좌·우익(左右翼)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교동은 곧 하나의 탄환(彈丸)만한 섬으로 성첩(城堞)도 높지 않고 민호(民戶)도 많지 않으며 또 배가 정박하는 데도 불편하여 허다한 전선(戰船)을 육지에 걸쳐놓게 되어 있기 때문에 현일(弦日)에 조수(潮水)가 많이 들어오는 때가 아니고서는 배를 띄워 바다로 내보낼 수 있는 형세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형편으로 어떻게 삼도(三道)를 통어(統禦)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다가 선로(船路)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다만 바람이 부는대로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교동·영종도의 설치(設置)는 또한 적군에게 대응하는 요지가 되기에 충분하고 강도의 보거(輔車)가 되니, 그것을 등한히 여겨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방영(防營)을 좌우에 나누어 설치하고 먼저 경보를 알리고 뒤이어 후원하게 함으로써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게 하는 것이 실로 만전의 계책인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천견(淺見)에는 온편하다고 여겨집니다.”하고, 우참찬 김종수(金鍾秀)는 의논하기를, 

“통어영을 강도로 옮기자고 하는 의논에 대해 신이 그곳 유수(留守)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대략 거론한 것이 전석(前席)에서 아뢴 것과 같은 내용이었으니, 이제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강도에다 한 척의 전선과 한 명의 수졸(水卒)도 배치하지 않고서 다만 오로지 들어가서 보전할 계책만 했을 뿐 애당초 적군을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그 모책이 매우 졸렬하여 만전을 기하는 데 흠결됨이 있습니다. 막는 것과 지키는 것은 서로 돕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막는 것에 의해 더욱 공고하게 된다는 것은 병가(兵家)의 통상적인 계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에는 지키는 것은 있지만 막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막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적군이 이미 언덕에 올라온 뒤에 막으려 하는 것이요 적군이 언덕에 올라오기 전에 막으려 하는 것이 아니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또 강도는 앞은 한강(漢江)의 입구를 대하고 있고 왼쪽은 교동을 끼고 오른쪽에는 영종도를 두르고 있으므로 위치는 서남(西南)을 통괄(統括)하고 있고 형세는 피차 호응하기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적선(賊船)이 남쪽에서 올 경우 영종도를 지나 한강 입구의 교동으로 닿을 줄을 모르고, 서쪽에서 오는 경우 교동을 지나 한강 입구의 영종도로 닿을 줄을 모르는 것이, 모두 우리의 안중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유독 절제(節制)가 제진(諸鎭)에 통해지지 않고 전선과 수졸이 수하(手下)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는 이외에 어디에 물을 길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잘된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렇기 때문에 강화부 유수로 하여금 삼도 통어사(三道通禦使)를 겸하게 하고 전선과 수졸을 두는 것이 편하다고 여깁니다. 대저 이런 등등의 일에 대해서는 매양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걱정이 있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보는 방법 이외에는 그림으로 그린 지도로 그 지형을 대략 파악하여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문에 신이 강도에 있을 적에 지도를 모사해 만들어 한 번 올려 을람(乙覽)할 수 있게 하려 했었으나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방(海防)에 관계된 큰 계책에 대해서는 신 같은 변변치 못한 지혜로는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고, 강화 유수 이복원(李福源)은 의논하기를,

 “해도(海島) 가운데 이것은 중하고 저것은 가볍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같이 눈으로 본 것이고 병세(兵勢)는 합치는 것을 귀히 여기고 나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전인(前人)이 이미 진달한 것입니다. 강도(江都)의 수군(水軍)에 이르러서는 예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궐전(闕典)입니다. 지금의 이 판부(判付)는 이미 이해(利害)를 통촉하신 것이어서 신은 감히 외람되이 한 마디 말도 덧붙일 수 없습니다.”하고, 부사직(副司直) 이보행(李普行)은 의논하기를,

 “강도는 바로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해로(海路)가 따라서 출입하는 관애(關隘)요 인후(咽喉)이므로 나라의 문호(門戶)가 되는 것입니다. 그 형편(形便)을 말하여 본다면 교동과 영종도는 각기 한 모퉁에 위치하고 있어 전혀 관섭(管攝)이 없는 것에 견주어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따라서 방어하고 수비하는 방도에 대해 참으로 조금도 소홀히 함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통어영(統禦營)을 옮겨서 설치하는 것에 대한 편부(便否)와 이해는 흑백(黑白)이 나뉘는 것처럼 분명하여 예로부터의 의논이 진실로 이와 같았습니다. 다만 한때 경장(更張)하는 것을 꺼려하여 지금까지도 전대로 답습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 다행히 성감(聖鑑)이 남김없이 통촉하시어 이미 구중 궁궐에서 상세히 재탁(裁度)하시고 이에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을 내려 지획(指畵)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해방(海防)에 대한 굉원한 모유(謀猷)이고 변새(邊塞)를 공고히 하는 원대한 계책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천견(淺見)으로도 흠탄(欽歎)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굽어 하문하신 데 대해서는 다시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하고, 대사성 유당(柳戇)은 의논하기를,

 “심도(沁都)1624) 에 자리한 진영(鎭營)은 삼변(三邊)이 수로(水路)의 요충이고, 명색이 거류(居留)이면서도 수하(手下)에는 한 척의 전함과 한 명의 수졸도 없어서 적선(賊船)이 바다로 침범하여 올 경우에도 감히 차단하고 저지할 수 있는 계책을 세우지 못한 채 다만 험준한 것을 이용하여 적군을 피하는 것만 장책(長策)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임금은 나라의 사경(四境)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팔로(八路)의 인민(人民)들을 버리고 깊숙하고 먼 데로 도망하는 것을 한결같이 고려(高麗) 말기의 복철(覆轍)을 따라야겠습니까? 잘되면 〈조(趙)나라 양자(襄子)1625) 가〉 진양(晉陽)으로 도망했던 것처럼 되고, 못되면 공손술(公孫述)1626) 이 성벽(城壁)을 축조(築造)한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써늘하여 마음이 떨립니다.

 교동은 명색은 비록 통어영이지만 하나의 탄환(彈丸)만한 작은 섬에 불과하고 기계(器械)도 예리하지 못하고 재력(財力)도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해마다 곡식을 심도(沁都)로 옮기는 것은 이미 계속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닌데 더구나 배를 물이 얕은 곳에 숨기기 때문에 매양 조수가 빠질 때를 당하면 배가 흙위에 있게 되니, 해구(海寇)가 쳐들어 오는 것이 반드시 조수가 가득 찼을 때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삼도(三道) 생민(生民)들의 고혈(膏血)을 모두 긁어내어 이 절반은 위험하고 절반은 안전한 외진 데 떨어져 있는 곳을 지키면서 만분의 일인 요행을 바라서야 되겠습니까? 가령 교동의 형편이 사의(事宜)에 맞는 것이 심도(沁都)와 비등(比等)하다고 하더라도 그 양쪽에 설치하여 세력이 나뉘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곳에다 힘을 모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더구나 전혀 심도만 못한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만일 심도로 하여금 통어사의 직책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고 따로 작은 진(鎭)을 교동에 설치하여 병선(兵船)·방선(防船) 등 작은 배를 거느리고 서쪽에서 오는 해구를 멀리서 바라보고 막으면서 심영(沁營)을 돕게 한다면 배가 작아서 물이 얕아 뜨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되고 형세가 합쳐져 전제(專制)의 중요함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심도의 통어영을 은연중 해로(海路)의 거방(巨防)으로 만든다면 비록 적선 수만 척이 바다를 뒤덮어 온다고 하더라도 이곳을 비켜 멋대로 지나갈 계획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런 계책에 대해 전후 말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습니만, 단지 눈앞에 별 걱정거리가 없고 또 경장(更張)한다는 명칭을 꺼려하여 예전의 일을 답습한 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聖上)께서 편의를 깊이 살펴 만세(萬世)토록 이롭게 할 관방(關防)을 만들려 하십니다.

신은 우매하여 별다른 의견이 없으므로 삼가 전배(前輩)들이 의논한 것에 의거하여 성상의 아름다운 명을 대하여 선양(宣揚)하겠습니다.”하고,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 이조 판서 이중호(李重祜),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 호조 판서 구윤옥(具允鈺), 형조 판서 정광한(鄭光漢), 부사직 이연상(李衍祥), 도승지 홍국영(洪國榮), 부사직 정민시(鄭民始)는 모두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 없다고 의논드리니, 비답하기를, 

“이에 대한 의논을 살펴보건대 옳다고 헌의(獻議)하고 옳지 않다고 헌의한 것이 각각 의견이 있는 것이었으니, 종당에는 충분히 상의하여 완전하고 편의하게 하는 데로 귀결시키도록 힘써야 한다. 그 가운데 영상(領相)의 헌의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근거가 있는 의견을 진달한 것이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한두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헌의한 내용에 ‘강도와 남한 산성은 좌우에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면서 서로 보장(保障)이 되고 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정확한 의논이다.

하단(下端)에 강화는 수군(水軍)을 겸할 수 없다고 논한 부분에서는 곧 ‘진실로 동북쪽의 육지의 적군을 만났을 경우에는 강도로 돌아갈 수 있지만 만약 서남쪽의 바다의 수적(水賊)을 만났을 경우에는 강도로 돌아갈 수 없으니, 비록 수군을 겸하고 있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는데, 만일 육지의 적군이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를 뒤쫓아 오는 적군이 반드시 나루에까지 오게 될 것인데 그런 뒤에 적군이 ‘우리는 육군(陸軍)인데 저들이 이미 바다로 들어갔으니 물을 건너가서 성(城)을 공격하는 일을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고 군사를 돌려 떠나가겠는가?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적군은 반드시 기계를 갖추고 전선을 정비하여 언덕에 닿아 올라온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멀뚱히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곧 도리어 등뒤에 있는 교동에다 적군을 막아 물리치라고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또 바다의 적군을 만나서 돌아갈 수 없다면 서남(西南) 수로(水路)의 인후(咽喉)가 과연 교동이라고 하더라도 적군이 쟁취하려는 것과 우리가 지키려는 것이 단지 교동에 있을 뿐이라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여기에만 있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물살을 따라 내려가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혹은 송도(松都)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경성(京城)으로 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교동의 방수(防守)를 진실로 소홀히 할 수가 없는데, 세 갈래의 수로가 합쳐 흐르는 지점은 곧 월곶(月串)의 연미정이니, 더더욱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지키려 한다면 수하(手下)에 있는 강화를 버리고서야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돌아갈 수 있고 지킬 수 있다는 것은 곧 백관(百官)들과 만성(萬姓)들이 대가(大駕)를 호위하여 간 후에야 돌아갔다고 하고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적군을 막을 계책을 생각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경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 모두가 돌아갔다고 하고 지켰다고 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교동은 유독 지킬 수 있는데 강호만 지킬 수 없게 되겠는가? 지리(地利)는 서로 이해(利害)가 있는 것이고 병기(兵機)에 대해서도 장단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도 한 구역은 동북쪽이나 서남쪽의 적군을 막론하고 돌아갈 수 있고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이 점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헌의의 내용에 또 ‘강도는 지킬 수 있는 곳이고 교동은 싸울 수 있는 곳이다.’고 한 말은 정확한 의논이긴 한데 지금의 형편은 이와 반대 되는 점이 있다. 강도는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있는 군졸이 없고, 교동은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있는 형세가 없다.

성(城)을 뒤덮어 오는 적군을 군졸이 없는 빈 성첩(城堞)으로 지킬 수 있겠으며 바다를 뒤덮어 쳐들어오는 해구(海寇)를 물이 얕아서 땅에 걸려 있는 배로 싸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또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또 헌의에 ‘우리 나라의 수사(水使)를 저들이 번번이 장군(將軍)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은 혹시 어채(漁採)하는 무리들이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닌가?’

진실로 이빨을 검게 물들이고 머리를 깎은[왜적을 이름] 무리들이 창칼을 휘두르면서 곧바로 달려들어 마구 유린할 경우 알 수 없지마는 이런 때 과연 수사(水使)를 어떻게 보겠는가?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가지를 부러뜨리듯 하여 아마도 그 토붕 와해(土崩瓦解)라는 비유로는 부족할 듯하다. 또 제도(諸道)의 수군은 원래 문재(文宰)가 관령(管領)하는 법규가 없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옛날에도 본부(本府)의 유수(留守)를 임명할 적에 오히려 무신(武臣)으로 차임하여 보낸 전례가 많이 있는데 더구나 지금 제치(制置)를 경장(更張)하는 시기이겠는가? 간혹 무장(武將)을 차임하여 융정(戎政)을 수거(修擧)하게 하되 경직(耕織)의 마땅한 시기를 잃어 허술하다는 탄식을 초래시키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또한 이미 헤아렸던 것인데 바야흐로 수의(收議)하여 의논이 귀일(歸一)된 것에 비길 만한 것이 있은 뒤에 다시 순문(詢問)하려고 한 일이다. 때문에 일전의 판부(判付)한 가운데는 미처 제기하여 언급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신(大臣)의 말이 과연 내가 말하기에 앞서 발론한 것이다. 대체로 이런 것들은 모두가 부질없는 이야기이다. 

지금 강화의 제일의 폐단은 곧 전함이 없고 수졸이 없는 그것이다. 만일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내용과 같이 비록 강화를 지키지 못하여 항해(航海)하려는 때를 당하였다 하더라도 성(城) 밖의 사면(四面)에 한 척의 배도 없다면 가령 교동이 금성 탕지(金城湯池)처럼 공고하고 전수(戰守)에 대한 도구가 완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로부터 그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

이제 또 보장(保障)의 형편으로 영상(領相)의 의견에 대해 반복해서 말해도 되겠는가? 강도와 남한 산성은 모두가 보장(保障)인 것이니, 강도에는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통괄할 수 있는 통어사(統禦使)를 두고 남한 산성에는 이보(二輔)의 육군을 영솔하는 수어부(守禦府)를 개설하는 것이 어찌 사리에 있어 떳떳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 이런 의논이 도착했기 때문에 다시 또 거듭 언급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 충분히 논의하여 의견을 귀일시키기에 달려 있다. 헌의(獻議) 가운데 변방의 일에 대해 잘 아는 신하로 하여금 두 곳을 두루 살펴보게 한 다음 그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기다린 뒤에 처분(處分)을 내리라고 한 것은 매우 좋은 의견이다. 즉시 무장(武將)을 차견하여 제치(制置)에 관한 형지(形止)와 설시(設始)에 소요되는 재력(財力)을 그로 하여금 일일이 살펴가지고 오게 하려 한다.”하였다.

 다음해에 구선복(具善復)을 순심사(巡審使)로 삼아 형편을 상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구선복이 복명(復命)하고 나서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신이 먼저 통진(通津)의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도착하여 강화 유수 신(臣) 이진형(李鎭衡)과 함께 내외의 형편을 같이 살피기 위해 갑곶(甲串)을 거쳐 조수(潮水)를 타고 올라가면서 두루 각포(各浦)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 월곶진(月串鎭)의 연미정(燕尾亭)에 올라가 수로(水路)와 형승(形勝)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남쪽과 서쪽의 해로(海路)가 연미정 앞바다에서 합쳐져 동쪽의 한수(漢水)로 통하게 되어 있으니 요충지가 되기로는 이보다 나은 곳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신이 혼자서 인화보(寅火堡)로 가서 조수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교동(喬桐)의 해방(海防)을 상세히 살펴보니, 앞으로는 삼남(三南)을 제어하고 뒤로는 양서(兩西)와 통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 서쪽은 끝없는 망망 대해로 외양(外洋)의 방알(防遏)은 단지 한 곳의 교동뿐이어서 실로 강도(江都)의 울타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통관(統管)하고 있는 수로(水路)가 영종도(永宗島)에 견주어 더욱 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가부(可否)를 토론한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이었는데 그대로 수사(水使)의 호칭을 두어 강도를 호위하게 하는 것이 매우 온편 타당하게 여겨졌습니다. 

다시 유수 신 이진형(李鎭衡)과 함께 북쪽의 철곶(鐵串)에서부터 남쪽의 초지(草芝)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연변(沿邊)의 개펄에 움푹 패여진 곳에 당도하여 보니 이는 곧 하늘이 해문(海門)에다 만들어 준 장성(長城)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제언(堤堰)을 쌓아 논을 만드는 것으로 인하여 개펄이 점점 굳어짐에 따라 간간이 선척(船隻)의 정박이 많아지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웠습니다. 대체(大體)로 논한다면 바다 가운데 여러 섬들이 사면에서 빙 둘러싼 중앙에 강도가 위치하고 있으니, 참으로 수신(帥臣)이 거처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통어영(統禦營)을 옮겨 설치하고 수륙(水陸)을 겸하여 관령(管領)하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한 것입니다. 경영(經營)의 긴헐(緊歇)에 대해서는 감히 천견(淺見)을 가지고 뒤에 조목별로 나열하였고 또 지도(地圖)를 올려 을람(乙覽)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널리 묘당(廟堂)에 순문(詢問)하여 재처(裁處)하소서. 

1. 강도 연변(沿邊)의 12진보(鎭堡) 가운데 인화보(寅火堡)가 본부(本府)의 서쪽 30리(里)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교동과는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고 있습니다. 험준한 작은 섬들이 앞에 있고 무성한 풀이 뒤에 있어 본디 험준 험난한 바다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또 서쪽에서 오는 적군은 먼저 교동을 경유한 연후에야 다음으로 인화보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동에 방비가 있으면 인화보는 걱정이 없게 됩니다. 

1. 철곶보(鐵串堡)는 인화보 북쪽 10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세(水勢)가 매우 빠르고 급하며 작은 섬들과 우거진 풀이 중첩되어 있어서 보통 왕래하는 선척들도 매양 그 험난한 것을 꺼려 반드시 조수가 차고 바람이 순할 때를 기다린 뒤에야 지나가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적군을 방어하는 것은 다른 곳에 견주어 조금 나은 점이 있습니다. 

1. 승천보(昇天堡)는 철곶보의 동쪽과 교동의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으니, 곧 강도의 아주 긴요한 요해지입니다. 대개 그 위치한 형세가 서쪽으로는 황해(黃海)의 외양(外洋)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삼남(三南)의 조운로(漕運路)와 통해 있으며 동쪽은 경강(京江)의 하류이고 조금 북쪽은 송도(松都)로 가는 대로(大路)이므로 동서 남북이 모두 해문(海門)의 인후(咽喉)입니다.

그 이해(利害)에 대해 논한다면 전후 좌우가 모두 적군이 침입하는 길에 해당되는 요충지여서 만일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교동과 함께 각각 수군(水軍)을 통솔하여 안팎에서 서로 호응함으로써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면 강도를 지키는 데 만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해보(該堡)의 별장(別將)을 승격시켜 첨사(僉使)로 만들어 겸하여 중군(中軍)을 통솔하고 전함(戰艦)을 비치하여 변란에 대응할 방도로 삼는다면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이 모두 공고하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해보(該堡)의 별장은 곧 강도에서 자벽(自辟)1627) 하는 자리입니다. 이를 첨사로 승격시켜 중군을 겸하여 통솔하게 하려면 병조(兵曹)에서 이력(履歷)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차임해야 하는데, 그 대임(代任)으로는 덕진 만호(德津萬戶)를 서로 바꾸어 별장으로 삼으면 일이 매우 온당하게 될 것 같습니다. 

1. 승천보의 동쪽에 송정포(松亭浦)가 있는데 본래부터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에 가서 형지(形止)를 살펴보니, 뒤는 산이고 앞은 바다로 지세(地勢)가 감돌아 안고 있는 형국이며 거처하고 있는 백성이 4백 호(戶)쯤 되고 선창(船艙)에 매여 있는 민선(民船)이 또한 수십 척이 넘었습니다.

배를 정박하는 장소는 다만 강도에서 제일이 될 뿐만이 아니라 타도(他道)에서 찾아보아도 또한 찾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만일 중영(中營)을 승천보(昇天堡)에 설치하고 전함을 이곳에다 감추어 둔다면 비록 경보(警報)가 있을 때를 당했더라도 다수의 사선(私船)들이 모두 방어에 대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1. 월곶진(月串鎭)은 승천보 동쪽 20리쯤에 있는데 곧 신경(神京)1628) 의 해문(海門)이요 삼남과 양서의 수로(水路)가 합쳐지는 곳이니, 그 긴요(緊要)함이 여기보다 더한 데가 없습니다. 또 그 윗쪽에는 연미정이 있어 삼로(三路)의 수로(水路)를 굽어 보고 있고 앞에는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마주 대하고 있어 곧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서로 응원할 수 있으니, 이는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塹壕)인 것으로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이 더욱 자별합니다. 

1. 제물진(濟物鎭)은 월곶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진(鎭)은 다만 서울로 통하는 직로(直路)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 전일의 징계(懲戒)가 있으니, 모든 설치에 대해 더욱 유의(留意)해야 합니다. 현재 있는 어가선(御駕船) 1척, 진선(津船) 6척 이외에 진선 수척에다 더 많은 수효를 비치하여 문수 산성과 통섭(通涉)하기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은 물론 방수(防守)에 관한 계책을 극진히 하도록 힘써 입술과 이가 서로 보존되는 형세를 만들어야 합니다. 

1. 용진진(龍津鎭)은 제물진 남쪽 10리쯤에 있는데 제물진과는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입니다. 갑진(甲津)에 방비가 갖추어져 있으면 위급할 때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1. 광성보(廣城堡)는 용진(龍津) 남쪽 15리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오두돈(鰲頭墩) 아래에 우거진 풀이 수리(數里)를 가로질러 있고 광성돈(廣城墩) 앞에는 험한 작은 섬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으며 강심(江心)의 수세(水勢)가 가장 위험합니다. 따라서 배를 정박시키기가 불편하니 곧 일당백(一當百)의 요해지입니다.

 1. 덕진진(德津鎭)은 광성보의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섬들이 험하고 물이 휘돌아 가장 위험하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이 이른바 손돌목[孫石項]인데 강면(江面)이 매우 좁아서 수세(水勢)가 방아 찧듯이 부딪치기 때문에 왕래하는 선척들이 모두 두려워 꺼리고 있으니, 형승(形勝)이 믿을 만하고 외구(外寇)가 침범하기 어렵습니다.

 1. 초지진(草芝鎭)은 곧 남쪽으로 가는 초입경(初入境)인데 이 진(鎭)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연변에 축조한 제방이 이미 끊어졌고 돈대(墩臺)의 설치도 허술합니다. 한 번 개펄을 바라보면 텅 비어 있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니, 그 큰 걱정이 다른 진(鎭)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갑신년1629) 무렵에 유수 신(臣) 정실(鄭實)의 장청(狀請)에 의거하여 해진(該鎭)을 첨사(僉使)로 승격시켜 목관(牧官)을 겸하게 한 것은 대개 진(鎭)이 모양새를 이루고 방수(防守)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듣건대 한 번 목관을 겸임하게 한 이후 해진(該鎭)의 첨사가 바다의 장기(瘴氣)를 싫어하여 피하면서 목장(牧場)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항상 깊숙한 벽처(僻處)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진에 있는 날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목아(牧衙)를 철훼(撤毁)하여 진사(鎭舍)를 더 건립하고서 첨사로 하여금 항상 본진(本鎭)에 거처하면서 겸하여 목관(牧官)의 일도 살피게 한다면 애당초 원근(遠近)의 구별이 없이 양쪽 다 폐기되지 않고 제대로 행하여질 것입니다.

 1. 선두보(船頭堡)는 제방을 축조한 안쪽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태산(泰山)이 가로질러 눌러 있고 해구(海口)와의 거리가 멀리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밖의 성식(聲息)이 까마득하여 서로 알릴 수 없으니, 만일 창졸간에 해구(海寇)의 변고를 당함이 있게 되면 언덕에 정박하여 육지에 내려온 뒤에야 바야흐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기계와 군졸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제때에 배포(排布)하여 나가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이 보(堡)는 당초 화도 별장(花島別將)으로서 저 지난 병술년1630) 에 제언(堤堰)을 축조할 때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여 제언의 역사(役事)를 구관(句管)하고 개간(開墾)하는 것을 감동(監董)하게 하던 곳입니다.

이제는 곡식을 생산할 만한 땅은 이미 다 개간하였고 제언도 또 견고하여 변장(邊將)이 별로 간칙(看飭)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본보(本堡)와 5리쯤 되는 거리에 후애돈(後崖墩)이 있는데 뒤는 산이고 앞은 바다이어서 진(鎭)을 설치하기에 적합하니, 이제 본보를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여 해방(海防)을 진수(鎭守)하고 제언에 관한 일을 겸하여 살피게 한다면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편리함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장곶보(長串堡)는 마니산(摩尼山) 서쪽 기슭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뒤에는 태산(泰山)이 절벽처럼 우뚝 서서 가로 10여 리를 뻗어나가 있고 앞에는 풀과 작은 섬들이 물속에 숨겨져 있어 선로(船路)를 방해하고 있는 데다 겸하여 사람의 허리에까지 푹푹 빠지는 질퍽한 개펄이 있기 때문에 비록 토박이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왕래하는 데도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애당초 해구(海寇)가 와서 정박할 걱정은 없습니다.

 1. 정포보(井浦堡)는 장곶(長串)의 북쪽 매음도(煤音島)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치한 곳이 이미 깊숙한데다 수세(水勢)가 급한 것과 도서(島嶼)들이 험한 것은 덕진(德津)·광성(廣城) 등처와 다를 것이 없으니, 험고(險固)한 곳에 의지하여 방수(防守)하면 그 지리(地理)가 믿을 만합니다.

 1. 이미 통어영(統禦營)을 옮기고 전선(戰船)을 설치한다면 수군들을 교련(敎鍊)시킬 장소를 가려서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갑진(甲津)과 용진(龍津) 사이는 강면(江面)이 조금 넓고 수세(水勢)도 평온하고 완만한 편이어서 전선들을 벌여놓고 진퇴(進退)하고 주선(周旋)하는 데 여유가 있으니, 조련시키는 장소는 이곳으로 완정(完定)하소서.

장대(將臺)는 양진(兩鎭) 사이의 가리돈(加里墩)이 교련장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굽어 내려다 보면서 지휘할 수 있으니, 장대는 이곳으로 정하소서. 그리고 이곳의 포항(浦港)은 빙둘러 감싸고 바람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전선 몇 척을 둘 수가 있습니다.

 1. 통진(通津)·문수 산성(文殊山城) 밖의 남쪽 산기슭 한 줄기가 활을 잡아당긴 것 같은 모양으로 뻗어 내려가 강(江)에 닿아서 끝났으며, 나머지 산기슭들도 이리 저리 빙빙 감돌아 곁에 저애(阻隘)를 이룬 곳이 많습니다. 길이 그 위로 나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수유현(水踰峴)입니다.

통진부(通津府)와의 거리는 겨우 3리쯤 되고 갑진(甲津)과의 거리도 또한 수리(數里)가 못되니, 실로 강도(江都)로 들어가는 인후(咽喉)가 되는 곳입니다. 한 번 그 길로 올라서면 강도의 허실을 역력히 지적할 수 있으니 견고하게 지켜야 할 곳이요 등한하게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지세(地勢)를 논하면 산성(山城)은 마땅히 이 산기슭에 축조해야 되고 통진은 이 산기슭 안으로 옮겨야 하는데 둘레가 조금 넓어서 옮기는 데 폐단이 있을 것 같으므로 이제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의견은 수유현 한 산기슭에 그 길을 막아서 단절시키고 나무를 심어 금양(禁養)케 함으로써 목책(木柵)이 이루어져 은연중 방수(防守)의 형세가 되게 해야 하며,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은 통진읍(通津邑) 뒷산 산골짝 사이에 있는 낮고 평평한 옛길을 고쳐 전대로 개통(開通)시킨 다음 문수(文殊)의 진두(津頭)에 도착한 연후에야 비로소 외성(外城)을 바라볼 수 있게 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도리(道里)로써 논하여 보더라도 또한 우회(迂回)하는 일이 없고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변방을 공고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도 전보다는 더욱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1. 문수 산성이 강도를 내려 굽어보고 있으니 그 요해가 되는 것이 또한 조(趙)나라의 북산(北山)이나 남한(南漢)의 한봉(汗峯)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산성만 설치하였을 뿐 수군(水軍)이 없습니다. 이는 비록 군정(軍丁)을 얻기 어려운 데 연유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매우 허술한 조처인 것입니다.

신의 의견에는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이미 강도(江都)의 좌영장(左營將)을 겸하고 있는데, 거느리고 있는 원군(元軍)이 또한 팔초(八哨)입니다. 매양 습조(習操)할 때를 당하면 그전에 해온 대로 강도로 와서 거처하면서 늘 정칙(整飭)시키는 곳으로 삼고, 사변이 있을 경우에는 강도로 오지 말고 산성을 신지(信地)로 삼아서 들어가 수유현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목책(木柵)이 이미 완성된 뒤에는 통진 부사로 하여금 군병을 거느리고 먼저 수유현을 지키게 하여 적병이 달려와 돌격하는 형세를 막게 하되 적병의 형세를 살펴가면서 물러가 산성을 지키게 한다면 적병의 예봉(銳鋒)을 늦출 수가 있고 산성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군민(軍民)들이 바다를 건널 즈음에 창황하여 바다에 빠지는 탄식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1. 대저 심도(沁都)는 서울의 수구(水口)에 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진흙이 구덩이를 이루어 저절로 장성(長城)을 이루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만들어 준 험준한 곳입니다. 또 삼남(三南)과 양서(兩西)를 통행하는 선박(船舶)이 서울의 문호(門戶)를 방위하여 주고 있으니, 보장(保障)으로 논한다면 당연히 제일이 됩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이른바 ‘만일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군병과 백성들을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하고 수군(水軍)을 진도(津渡)에 배치시켜 놓는다면 기치(旗幟)가 서로 바라보이고 화고(火鼓)가 서로 호응되어 적군이 감히 나아오지 못할 것이니, 이는 싸우지 않고도 적병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했는데, 참으로 바꿀 수 없는 의논입니다.

만일 불행하게 외구(外寇)가 갑자기 들이닥쳤는데도 해방(海防)의 도구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이 언덕으로 올라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니 언덕으로 올라온 다음에는 언덕에서 내성(內城)과의 거리가 가까운 데는 5리 내지 10리이고 먼 데는 20리 내지 30리나 되기 때문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이에서 제때 주선(周旋)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남(三南)의 세선(稅船)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지나가므로 전쟁이 발생했을 즈음에는 이 해로(海路)가 또한 막힐 우려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특별히 수군(水軍)을 설치하여 접응(接應)하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편의할 것 같습니다.

 1. 교동(喬桐)은 비록 탄환만한 작은 섬이지만 서해(西海)의 요충(要衝)에 위치하고 있으니 양서(兩西) 해로의 관건(管鍵)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남(三南)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남(三南)의 배들도 바람에 밀리게 되면 또한 이 섬을 지나가게 되는데 화량(花梁)의 수영(水營)을 이리로 옮겨 설치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곳 앞바다의 수세(水勢)는 공전(攻戰)에는 유리하지만 방수(防守)에는 불리하여 곧 강도의 광대뼈와 잇몸[輔車]이 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둘 다 보존해야지 한쪽만 폐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강도가 중앙에 위치하여 좌우로 교동·영종도의 열진(列鎭)을 호령하고 삼도(三道)를 관할하면서 서로 접응하는 것이 편리한 것만 못합니다.

따라서 통어(統禦)이 호칭을 강도로 이속(移屬)시키는 데 대해서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만, 교동의 수군(水軍)에 이르러서는 통어영을 옮겨 설치하는 것 때문에 결단코 그 수효를 지나치게 감하여서는 안 되고 또한 격을 낮추어 방영(防營)1631) 으로 만드는 것도 곤란합니다. 해서(海西) 수영(水營)의 예(例)에 의거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에게 교동 현감(喬桐縣監)을 겸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고 합당할 것 같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선창(船艙)이 불편한 것인데 사세가 장차 물력(物力)을 좀 들여서 해마다 점차적으로 강바닥의 모래를 파내면 될 것입니다. 가까운 송가(松家)에서 돌을 운반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좌우에 제언(堤堰)을 축조하고 동쪽으로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개도(開導)한다면 아침 저녁 밀물과 썰물이 항상 선창을 씻어내는 효과가 있게 되어 굴착한 선창이 결단코 메워지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1. 교동의 전선(戰船)을 이제 마땅히 강도로 옮겨 설치해야 하는데, 강도에는 이미 관안(官案)에 올라 있는 공선(公船)이 많은데다가 또 어가선(御駕船) 2척이 있습니다만 교동에는 전선(戰船)·병선(兵船)·사후선(伺候船)이 모두 19척이고 그밖에는 달리 공선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문(海門)의 초입로(初入路)에 위치해 있으니, 수군(水軍)을 지나치게 감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제 전선 1척, 병선 2척, 사후선 1척 모두 합쳐 4척을 강도로 이송(移送)하게 하였습니다만, 강도는 이미 내양(內洋)에 위치해 있고 간혹 물이 얕아 작은 섬들이 물위로 노출되어 있기도 하므로 배치하는 배의 제도를 지나치게 크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뒤로 새로 만들거나 혹은 개조(改造)하는 배는 그 제도를 조금 작게 한다면 운용(運用)하기에 편리하고 재력(財力)의 사용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능로군(能櫓軍)은 각진(各鎭)의 토졸(土卒)들 가운데 물길을 잘 알고 신체가 건장한 자들을 가려서 통어사(統禦使)가 구관(句管)하고 있는 모곡(耗穀)과 응당 받아들여야 하는 방포(防布)1632) 로 급대(給代)하고 사역(使役)시킨다면 싫어하고 기피하여 충당하기 어려운 걱정은 없게 될 것입니다.

사수(射手)·포수(砲手)는 연례(年例)로 행하는 수조(水操) 때에는 해선(該船)에 원래 정해진 수군을 불러서 참여하게 하면 되고, 만일 위급한 일을 당했을 경우에는 강도에 장려(壯旅) 18초(哨), 의려(義旅) 18초, 무학(武學) 12초, 속오(束伍) 12초 등의 정군(正軍)이 있으니, 임시하여 분배(分排)하면 됩니다. 물에 있을 경우에는 수군으로 만들고 육지에 올랐을 경우에는 육군으로 만들어 추이(推移)하여 양쪽으로 쓰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 이제 이 통어영을 옮겨서 설치하는 것은 강도를 크게 변통시키는 것에 관계가 되는데 그에 따른 수군(水軍)·중군(中軍)의 영사(營舍)를 새로 건립하고 변란에 대비한 정(亭)과 장대(將臺), 군물(軍物)과 기계(器械)를 보관해 두는 고사(庫舍)의 역사(役事) 및 선창을 새로 파는 일 등에 드는 재력(財力)을 확실히 헤아려 보지는 않았습니만 요컨대 1만 금(金)의 돈과 4, 5백 석(石)의 곡식이 들 것 같습니다.

이런 재력을 특별히 구획(區劃)한 연후에야 설치를 시작하여 뒷폐단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따로 군수고(軍需庫)를 설치하여 각선(各船)의 기계(器械)와 기치(旗幟), 장교와 나졸들의 요포(料布)도 또한 대략 마련하여 영구히 준행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소서.”하였다. 임금이 구선복(具善復)을 소견하였다. 구선복이 아뢰기를,

 “강도는 곧 하늘이 만들어 준 곳이고 교동은 서울의 울타리가 되어 있으니, 통어영을 강도에 설치하고 겸하여 수륙(水陸)을 영유(領有)하게 하면 이는 실로 해문(海門)에 장성(長城)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교동에는 그대로 수사(水使)를 두어 강도를 호위하게 한다면 또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룰 수 있겠습니다.”

 하자,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말하기를,“강도에 통어영을 설치하는 것은 대개 수륙의 군대를 겸하여 통솔하려고 하는 것인데 교동에다 또 수영을 설치하는 것은 변통시키는 본뜻이 아닙니다. 비록 방어사(防禦使)를 둔다고 하더라도 수사를 두는 것만 못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강화 유수에게 경기 수사와 삼도 통어사를 겸임시켜 수군·육군을 통령하게 하고 교동 현감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방어사를 겸하게 한 다음 안흥진(安興鎭)을 수사의 행영(行營)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 이진형(李鎭衡)을 개성 유수로 이배(移拜)하고 홍낙순(洪樂純)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홍낙순이 부임하고 나서 상소하기를,

 “교동(喬桐)과 심도(沁都)를 하나로 합치자는 의논은 바로 해방(海防)을 더욱 중하게 하여 신경(神京)1633) 을 호위하자는 것이니, 참으로 국가를 위한 만세(萬世)의 이익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명사(名士)·석유(碩儒)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만 일이 중대하고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 백년토록 이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 성스러운 주모(籌謨)로 득실을 통찰하였으므로 동요되거나 의심하는 일이 없이 결단을 내려 시행하셨으니, 이로부터 수군(水軍)의 통할이 귀착될 데가 있게 되었고 수로(水路)의 비어(備禦)에 제치(制置)가 있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적임자를 얻어서 맡긴다면 해역(海域)에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어 경도(京都)에서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누워 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우활하여 진부한 선비로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아 안으로는 중한 임무와 밖으로는 대번(大藩)을 간혹 일찍이 돌려가면서 두루 역임하였습니다만 몽매하고 어리석은 탓으로 아는 것이 없어 보탬이 되게 한 것이 없으니, 후한 녹봉(祿俸)을 훔쳐 자신의 집만 살찌운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죄를 피할 수가 없어 몸이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삼가 유도(留都)에 차임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옮겨 설치하는 처음을 당하였으므로 경획(經劃)하는 사무와 조처하는 절제(節制)에 있어 반드시 기의(機宜)에 합치되게 하고 사정(事情)에 흡족하게 된 연후에야 뒷폐단이 없이 영구히 전해 가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신처럼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잠자코 명을 받든 지가 이제 10여 일에 이르렀습니다만 두렵고 황송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형편을 두루 살펴보고 장사(將士)들에게 순방(詢訪)하는 한편 주야로 생각하고 헤아려 정성과 힘을 다할 것을 기약합니다. 삼가 아둔한 견해를 아래에 나열하여 진달합니다.

 1. 교동에 소속된 전선(戰船)이 2척, 귀선(龜船)이 1척, 병선(兵船)이 4척, 방선(防船)이 1척 인데 각선(各船)에 모두 사후선(伺候船)이 있으므로 도합 16척입니다. 통어영을 이제 심도(沁都)로 귀속시키면 전선과 병선도 사리상 3분의 1은 심도로 옮겨 배치해야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교동은 심도의 문호(門戶)가 되고 심도는 교동의 당오(堂奧)가 되는데 경외(境外)에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면 당오에서 문호를 지휘하고 문호가 당오를 가리워 막는 것은 이것이 이해(利害)에 관계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사리에 있어서도 당연한 것입니다. 가령 해구(海寇)가 장차 교동을 침범하려 할 경우 교동의 전구(戰具)가 단약(單弱)하여 내양(內洋)으로 들어가게 방치한다면 이에 심도가 위태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오에서 방비하는 것이 문호에서 막는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선(各船)의 능로군(能櫓軍)과 제색 수군(諸色水軍)이 모두 교동(喬桐) 한 섬에 있으니 지금 갑자기 심도로 이정(移定)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단지 전선 1척, 병선 1척과 사후선 각각 1척 씩만을 이전시키고 그 나머지는 전대로 교동에 유치시켜 놓음으로써 급한 일이 생겨 방어해야 할 즈음에 거의 오로지 그 일에만 힘을 써서 공적을 거둘 수 있는 방도로 삼아야 합니다.

 1. 심도가 이미 통어영이 되었는데도 단지 두 척의 전선과 병선이 있을 뿐이라면 수군(水軍)이 수효가 적고 힘이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통어영에 소속되어 있는 5진(鎭)의 주함(舟艦)이 거의 40척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덕포(德浦)·장봉(長峯)·주문(注文) 세 진(鎭)이 다만 돛대 하나의 사이에 격해 있는 편이어서 만일 사변이 발생하면,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구름같은 돛대가 저녁에 진(鎭)의 해루(海樓) 앞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도의 수군은 그 수효가 적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전함을 이미 옮겼으면 전함을 정박시킬 곳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데 포서(浦嶼)가 널려 있는 상하 수 30리 사이에 오직 송정(松亭)만이 가장 편리합니다. 좌우에 사록(砂麓)이 가로막아 호위하고 있어 바람을 피할 수 있으므로,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걱정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포(浦) 위에 3, 4백 호(戶)가 거처하고 있으므로, 교대로 서로 간호(看護)할 수 있는 것이 둘째 조건입니다. 뒤로는 높은 언덕을 의지하고 있고 앞으로는 큰 강(江)을 굽어보고 있는데 조수가 언덕에까지 넘치게 되면 비록 천 곡(斛)을 실은 누선(樓船)이라도 하나의 갈댓잎처럼 뜨게 되니, 전함이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뜰 수 있어 경보(警報)를 들으면 즉시 출발하는 이점이 있는 것이 세번째 조건입니다.

월곶(月串)과 승천(昇天)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여러 돈대(墩臺)와 마주 바라보고 있고 포성이 서로 들리기 때문에 대변정(待變亭)을 건립하지 않아도 충분히 경보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네번째 조건입니다. 선장(船將) 이하 능로군·격군(格軍)·사수(射手)·포수(砲手)·제색 졸오(諸色卒伍) 수백 인이 모두 포민(浦民)으로 충정(充定)되어 있으므로, 조련(操鍊)할 때를 당하여는 징발하여 왕래하는 폐단이 없는 것이 다섯번째 조건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이점이 있으니 선창(船艙)은 이곳을 버리고서는 적합한 곳이 없으며, 대변정을 설치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상(船上)의 집물(什物)과 군기(軍器)를 저장하는 고사(庫舍)는 수십 칸을 밑돌지 말아야 합니다만 이는 본부(本府)의 고사(庫舍) 가운데 오래도록 비어 무너져 있는 것이 많으니, 이를 헐어서 옮겨다가 다시 지으면 됩니다. 이는 쓸데없는 것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일과 힘을 더는 것은 물론 부비(浮費)를 절약하게 할 수 있습니다.

 

1. 월곶(月串)의 앞바다는 수면(水面)이 넓어서 조련장(操鍊場)으로 쓸 수 있습니다만 두 개의 물줄기가 횡분(橫分)되는 곳이어서 물결의 형세가 치솟아 오를 것이니 용진(龍津)의 물이 평온한 것만 못합니다. 용진은 갑진(甲津) 아래에 있는데 약간 감싸 안은 형세이지만 배들이 왕래하면서 분돌(奔突)하는 데 있어 그 형세가 편리하고 쉬우니, 조련장은 이곳으로 정하소서,

 1. 선상(船上)의 장졸(將卒)들은 마땅히 통어영의 구례(舊例)를 따라야 합니다만 약간의 증산(增刪)을 가하여야 합니다. 전선의 선장(船將) 1인, 병선의 감관(監官) 1인, 상장 초관(上粧哨官) 1인, 하장 초관(下粧哨官) 1인, 병선 초관(兵船哨官) 1인, 포도관(捕盜官) 3인, 타공(舵工) 5명, 능로군(能櫓軍) 28명, 격군(格軍) 96명, 사수(射手) 48명, 포수(砲手) 41명, 육물 고자(六物庫子) 1명, 각색 장인(各色匠人) 9명, 각초(各哨)의 서기(書記)·인기수(認旗手)·사후(伺候) 등 군(軍) 13명, 도합 2백 49명은 송정포(松亭浦) 마을에서 충정(充定)하며, 교련관(敎鍊官) 2인,

기패관(旗牌官) 12인, 군수 감관(軍需監官) 1인, 영리(營吏) 2인, 군기색(軍器色) 2인과 고자(庫子) 2명, 군량색(軍粮色) 3인과 고자(庫子) 3명, 군뢰(軍牢) 4명과 순령수(巡令手) 6명, 등롱수(燈籠手) 8명, 사령(使令) 2명, 나장(羅將) 4명, 중영 군뢰(中營軍牢) 2명과 순령수(巡令手) 4명, 도훈도(都訓導) 2인, 교사(敎師) 1인, 별파진(別破陣) 1인, 쟁수(錚手)·고수(鼓手)·열발수(鋝鈸手)·호총수(號銃手) 등 4명, 도합 65명은 부내(府內)에 소속된 사람들로 충정시키는데, 능로군·격군·사수·포수 이외에는 모두 월료(月料)와 삭전(朔錢)을 신축성 있게 많게도 주고 적게도 주어야 합니다.

능로군·격군은 그 신역(身役)을 감하여 주고 사수·포수는 시상(施賞)하는 과(窠)를 설치하여 매달 초하룻날 기예(技藝)를 비교하여 3등으로 나누어 부료(付料)함으로써 권장하고 면려하여 흥기시키는 기본을 삼아야 합니다.

 1. 군정(軍政)에 있어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능로군·격군과 사수·포수인데 전선(戰船)을 옮겨서 정박시킨다는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포민(浦民)들이 선동되어 불안스럽게 여기고 있으므로 신이 그곳의 노소(老少)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들의 질고(疾苦)를 묻고 이해(利害)에 대해 효유(曉諭)하였습니다.

대개 이름이 포인(浦人)에 매인 사람은 해마다 돈 두 냥씩을 바치게 되어 있고 또 관리(官吏)들에게 침탈당하는 고통이 있었는데 이제 그 돈을 감면하고 그 고통을 면제시키고, 다만 능로군·격군의 군안(軍案)에 매이고 매년 가을 조련할 때 참여하게 하면 이틀의 노고를 허비하는 데 불과하게 됩니다.

그 나머지 날들은 조수를 타고 왕래하면서 어채(漁採)에 종사하게 되면 스스로 이익은 있고 손해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나오게 됩니다. 포민(浦民) 가운데 산업(産業)이 조금 넉넉한 사람은 배를 몰고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혹은 농사를 짓기도 하고 혹은 궁시(弓矢)를 만들기도 하고 혹은 육군(陸軍)에 예속되기도 한 사람이 간간이 많이 있습니다.

달마다 기예(技藝)를 비교하여 시상(施賞)하게 되면 이것도 또한 이익은 있고 손해는 없기 때문에 모두 응모(應募)하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원래 정해진 삭료(朔料)가 있는 과(窠)는 포인(浦人)·읍인(邑人)을 막론하고 행여 뒤질세라 응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군제(軍制)를 대략이나마 확립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수군(水軍)을 설치하는 것은 장차 갑작스러운 일에 대비하고 경급(警急)한 변고를 막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송정(松亭)의 능로군(能櫓軍)·격군(格軍)은 봄과 여름은 해상(海上)에 떠서 바다를 집으로 삼고 있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별안간 소식을 알 수 없는데, 만일 이런 때에 불행히 사변이 있게 되면 장차 그 누구를 시켜 키를 잡고 배를 운행하여 적군을 막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데,이 말도 참으로 옳습니다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송정은 비록 어촌(漁村)으로 이름이 나 있지만 장정(壯丁)인 남자는 4, 5백 인입니다.

늙은이, 어린이, 농사짓는 사람,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 직업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을 계산하면 삼분의 일이 넘기 때문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겨우 그 절반이 넘을 뿐입니다. 만일 적군이 침범하여 오는 경보(警報)를 당했을 경우에는 온 마을의 유정(遊丁)이 모두 능로군·격군이 될 수 있으니, 사람이 부족한 것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1. 고수(鼓手)와 기수(旗手) 40여 명은 따로 명색(名色)을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무영(鎭撫營)과 통어영(統禦營)을 합쳐서 한 영(營)으로 만들어 습조(習操)할 때를 당하여 스스로가 피차 돌려가면서 쓰면 허비되는 비용도 줄일 수 있고 또한 사의(事宜)에도 합치됩니다.

 1. 통어영의 1년 동안 구관(句管)하는 전곡(錢穀)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기 수군(京畿水軍)이 2백 16명인데 매인당 방번전(防番錢)이 2냥(兩)씩이니 모두 합쳐 4백 32냥이며, 해서 수군(海西水軍)이 6백 69명인데 매인당 방번전이 2냥씩이니 모두 합쳐 1천 3백 38냥이며, 교동 수군(喬桐水軍)이 7백 76명인데 매인당 방번전이 2냥씩이니 모두 합쳐 1천 5백 52냥이며, 삼도 수군(三道水軍)이 1천 6백 61명인데 급량전(給粮錢)을 균역청(均役廳)에서 획송(劃送)해 오는 것이 매인당 1냥씩이니 모두 합쳐 1천 6백 61냥입니다. 돈을 계산하면 도합 4천 9백 81냥이고 곡식을 계산하면 삼도(三道)의 모조(耗租) 4백 석(石)뿐입니다.

교동이 이미 방영(防營)이 되었으니 교동 수군의 번전(番錢)과 양전(粮錢)이 모두 합쳐 2천 3백 28냥인데 이것은 그대로 교동에 유치시켜야 합니다. 그 나머지 2천 6백 52냥과 모조(耗租) 4백 석(石)은 통어영으로 이속(移屬)시켜야 합니다. 위에서 열거한 군졸(軍卒)·이례(吏隸)의 월료(月料)·삭전(朔錢)과 포인(浦人)의 신역(身役)에 대치시킬 것과, 사수·포수에게 상을 주어 권면할 비용을 모두 구별하여 지용(支用)하여도 또한 남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선상(船上)의 집물(什物)·군기(軍器)·기치(旗幟)와 염장(鹽醬)·촉자(燭子), 호궤(犒饋)하는 데 드는 제반 물건에 이르러서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낭비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1년이 끝나면 본영(本營)에서 문부(文簿)를 정리하여 묘당(廟堂)으로 올리면 묘당에서도 또한 유의하여 조찰(照察)함으로써 거의 부당하게 낭비되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가 두 건(件)의 절목(節目)을 만들어 하나는 본부에 유치시켜 두고 하나는 비국(備局)으로 보내어 전곡의 용도를 밝히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진무사(鎭撫使)가 이미 통어사(統禦使)를 겸하였으니 진무 중군(鎭撫中軍)도 또한 마땅히 통어 중군(統禦中軍)을 겸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변이 있을 때는 왕래하면서 응접(應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임시(臨時)하여 따로 한 명의 가장(假將)을 내는 것도 또한 가하겠습니다.

 1. 영종도(永宗島)가 처음에는 통어영에 소속되어 절제(節制)를 받았었는데 수십 년 전에 무슨 까닭인 줄 모르겠습니다만 따로 독진(獨鎭)이 되어 스스로 호령(號令)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통어영을 옮겨 설치하는 때를 당하여 교동과 영종도가 모두 보거(輔車)가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똑같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약 영종도를 통어영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심도가 오른 팔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은 물론 사리에 의거하여 따져 보아도 전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독진(獨鎭)의 권한을 폐지시키고 다시 통어영으로 예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 통어영에 대한 일은 이제 이미 대강 정하여졌습니다만 본부(本府)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미처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있는데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은 하나는 군정(軍政)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걱정이고 하나는 군향(軍餉)이 부족한 걱정입니다.

이 두 가지 걱정을 제거하지 않으면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라 할지라도 유익함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이 본부에 도착한 이틀째 되는 날에 배를 타고 갑진(甲津)에서부터 북쪽으로 월곶(月串)에 이르렀고 또 서쪽으로 승천보(昇天堡)에 이르렀다가 철곶(鐵串)·인화보(寅火堡)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인화보는 곧 교동의 앞바다입니다.

한강물이 조강(祖江)의 입구에 이르러 서남(西南)의 조수를 받아 더욱 크고 넓어지는데 월곶(月串)에 이르러서는 양애(兩涯) 사이가 넓어서 소와 말을 분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줄기는 가로로 흘러 남쪽으로 가서 갑곶(甲串)으로 들어가고 한 줄기는 곧바로 서쪽으로 흘러가 승천보로 달려갑니다. 승천보 밖은 더욱 아득하게 넓은데 그런 가운데 이른바 청주여(靑州礖)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가 이곳에서 오르내리다가 한 번 형세를 잃게 되면 곧바로 전복되어 빠져 버리는데 대개 바다 가운데서 가장 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 갑진(甲津)에서 제물진(濟物鎭)으로 내려와서 남쪽으로 초지(草芝)에 이르러 손석기(孫石磯)를 보았으며, 남쪽으로 영종도의 해구(海口)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마니산(摩尼山)의 밖을 살펴보았습니다. 대개 갑곶(甲串)에서 남쪽으로 흘러 덕진(德津)에 이르기까지는 좌우의 산자락이 서로 교차되는 탓으로 물속의 돌이 더욱 거칠고 물살도 매우 사나워 허옇게 파도치며 급하게 흐르는데 그 아래에는 왕왕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연못이 있어 물살이 수레바퀴 돌듯이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손석기(孫石磯)입니다. 신이 언덕 위에 서 있을 때 만조(滿潮)가 되어 있고 바람이 잔잔하였는데 해선(海船)들이 고기비늘처럼 죽 늘어서 오고 있었습니다.

배들이 이곳에 도착하여서는 기세를 가다듬어 키를 잡고 가운데를 따라 나아가다가 곧이어 또 키를 옆으로 꺾어 꾸불꾸불 돌면서 급류와 바위를 피하고나서는 또 키를 똑바로 잡고 가운데를 따라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 해야 하니,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역풍(逆風)을 만나면 감히 지나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순풍(順風)을 탔다가도 바람이 갑자기 변하면 반드시 바위에 부딪쳐 부서져서 물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물에 익숙한 주자(舟子)들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객선(客船)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마니산 밖에 대해서는 토인(土人)의 말을 듣건대, 바닷가의 개펄이 질퍽하여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데 넓이가 혹 수리(數里)가 되는 곳도 있고 혹은 4, 5리가 되는 곳도 있어 혹시 배를 정박한다고 해도 언덕으로 오를 수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육해(陸海)인 것입니다.

장자평(丈者坪)에서 황청포(黃靑浦)에 이르기까지의 3, 40리 사이는 모두 이러하였으니, 옛사람이 토성(土城)을 쌓을 적에 월곶(月串)에서 시작하여 올라가 초지(草芝)에서 중지한 것은 고견(高見)이라고 일컬을 만합니다. 이곳의 험고(險固)함이 이와 같습니다.

 섬에 사는 인민(人民)은 남녀 모두 3만 3천여 구(口)이고 이들이 해마다 내는 곡식이 10여 만 석(石)이나 되니 또한 백성이 많고 재물이 넉넉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내려가 배를 타고 싸우기도 하고 언덕에 올라가 지키기도 하며 농사지어 식량을 충당하니, 충분히 스스로 공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고려(高麗)의 임금이 이곳에 들어와 40년 동안 거처하면서 능히 종사(宗社)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세(地勢)가 험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강도부(江都府)는 참으로 국가의 중요한 땅인데 어떻게 외진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똑같이 일컬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제야 더욱 성려(聖慮)가 보통에서 아주 뛰어난 것에 탄복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군병이 있은 연후에야 적군을 막을 수 있고 식량이 있은 연후에야 군병을 양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부(本府)의 군향(軍餉)은 16만 5천여 석(石)인데 기호(畿湖) 각 고을에서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이 1만 5백여 석입니다. 본부에서 각년(各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과 현재 창고에 유치되어 있는 것이 3만 7천 6백여 석인데 적곡(糴穀)으로 나누어 준 것은 1만 석뿐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하늘이 덕있는 이를 도와주어 나라의 역수(曆數)가 장구하여질 것이므로 만세(萬世)토록 태평을 누릴 것을 앉아서 기대할 수가 있으니 어찌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마는 편안해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대비하는 것은 국가를 보유(保有)하는 상도(常道)인 것입니다. 만에 하나 왕사(王師)가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삼군(三軍)·백관(百官)·만민(萬民)의 식량을 며칠이나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강한 구적(寇賊)이 밖에서 공격하고 군사의 식량이 안에서 고갈되면 결국은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제 비록 곡식을 생산하려고 해도 장차 어디서 만들어 내겠습니까? 태창(太倉)에서 가져오자니 태창이 고갈되었고 외고(外庫)에서 옮겨 오자니 외고도 바닥이 났습니다. 비록 유안(劉晏)1634) 과 같은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또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곡식을 모으는 것이 이토록 어렵기 때문에 비록 동서로 분주히 뛰어다니며 주선하면서 어렵게 거두어 모으더라도 10년 사이에 겨우 1, 2만 석(石)을 더 보탤 수 있습니다. 조곡(糶穀)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곡식을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본도(本島)의 민호(民戶)가 9천 7백여 호이니, 이제 1만 곡(斛)의 쌀로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흉년의 경우에는 3, 4천 석(石)을 더 지급하는 데 불과하지만 풍년인 경우에는 받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아 1만 석은 항상 남아돌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옛날 향곡(餉穀)이 묵어 쌓여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받아가려 하지 않을 경우 관청에서 협박하여 주었으므로 도민(島民)들의 큰 고통거리가 되어왔습니다. 지금 1만 석의 수량은 알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를 초과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군향(軍餉)은 끝내 넉넉하게 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군량을 더 첨가하지 않고 둔전(屯田)도 하지 않고서도 군량을 넉넉하게 할 방도가 있습니다.

 대개 본도(本島)에는 한전(旱田)·수전(水田)이 3천 4백여 결(結)이 있는데 거기서 생산되는 곡식이 대략 8, 9만 석(石)이 됩니다. 그 가운데 2, 3만 석은 추적(秋糴)으로 들여놓고 4, 5만 석은 민식(民食)으로 돌리며, 또 2, 3만 석은 혹 부민(富民)들에게 전판(轉販)하기도 하고 혹 육지 사람을 위해 실어내어 가게 하기도 하면 됩니다. 앞서는 도중(島中)에 흉년이 들면 곡식을 내어가지 못하도록 금했었는데 근래에는 이 법이 해이해졌습니다.

이 뒤로는 엄중한 법을 설치하여 경인(京人)이나 읍인(邑人)을 막론하고 도중(島中)의 곡식을 10석(石) 이상 내어가는 자는 도형(徒刑)에, 50석 이상은 유형(流刑)에 처하며, 제물·월곶·승천 등 각진(各鎭)의 진장(鎭將)이 사정(私情)에 따라 이를 방과(放過)하는 경우에는 그 죄가 곡식을 내어가는 자와 똑같게 하고 유수(留守)가 잘 살피지 못한 경우에는 또한 이 법에 의거 좌죄(坐罪)시키게 하소서.

 1. 도중(島中)에서 돌고 있는 곡식으로 항상 유치되어 있는 것이 수만 곡(斛)인데 1, 2년만 더 쌓이게 되면 형세가 장차 곡식이 천하게 될 형편에 있습니다. 3년째 여름과 가을을 넘기고 나서 연곡(年穀)의 풍흉(豊凶)을 살펴보아 가면서 비로소 방출(放出)을 허락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둔전(屯田)을 하지 않고 군량을 더 첨가시키지 않아도 병졸과 백성들의 식량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전주(佃主)로 말하더라도 국가에서 도중(島中)의 곡식을 빌려다가 돌려가면서 운반해 가게 되고 벼[租]는 쌀과는 달라서 비록 1, 2년을 묵힌다고 해도 또한 부패될 걱정이 없는데, 이것이 무슨 인정에 거슬려 행하기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혹자는 논하기를, ‘사곡(私穀)을 차류(借留)하는 것은 국가의 체모에 있어 구간(苟艱)스럽고 구량(口粮)1635) 을 금지하여 막는 것은 인정상 하기 어려우니, 이 법은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도중(島中)에다 곡식을 저축하는 것은 바로 국가의 대계(大計)인 것입니다. 대계를 모의하는 사람은 작은 일은 돌보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흉년이 든 해에 배로 운반해 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대개 도민(島民)을 처지를 위한 것입니다.

만일 혹자의 말과 같이 한다면 국가에서 무엇 때문에 법을 설립하여 금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에 이미 금했는데 지금 금하지 않을 필요가 뭐 있으며 흉년에 이미 금했는데 풍년에 금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보장(保障)도 폐기할 수 없고 병식(兵食)도 부족하게 할 수는 없는데 곡식을 생산해 낼 방도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 다만 결단을 내려 시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1곡(斛)의 벼가 반곡(半斛)의 쌀을 당할 수 없으니, 설사 2, 3만 곡을 유치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적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삼남(三南)의 대동미(大同米)는 유독 호남(湖南)이 조금 넉넉하니, 만일 나누어서 1만 석을 갑진창(甲津倉)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다음해 3, 4월에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외방(外方)에서 받게 하고 또 햅쌀 1만 석을 나누어 유치시켰다가 전처럼 외방에서 받아가게 하되 해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1만 곡(斛)의 쌀은 장구히 도중(島中)에 유치되어 있게 됩니다.

공인들도 비록 경창(京倉)에서 받는 것만은 못하더라도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가서 받는 것보다는 또한 매우 편리하고 쉽습니다. 그리고 심도(沁道)가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판매(販賣)할 만한 물산(物産)이 없기 때문에 남쪽의 선박(船舶)들이 곧바로 경강(京江)으로 달려가므로 연포(沿浦) 민호(民戶)들의 생리(生理)가 삭막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서 받게 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배들이 꼬리를 물게 되어 시사(市肆)가 줄지어 서게 될 것이니, 포민(浦民)들이 힘입어 살아갈 수 있는 생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곡식이 저축되는 이로움이 있고 또 백성을 모집하는 이로움도 곁들이고 있으니, 신은 이 법을 반드시 시행해야 된다고 여깁니다.

 1. 초지(草芝)는 삼남(三南) 해로의 애구(阨口)인데 옛사람이 이곳에 진(鎭)을 설치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목장을 겸하여 관리하게 됨으로부터 이른바 첨사(僉使)란 자가 겸하고 있는 목아(牧衙)로 들어가 거처하고 있으므로 진사(鎭舍)는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단지 두서너 명의 토병(土兵)들만이 황량한 보(堡)에 흩어져 거처하고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진장(鎭將)을 설치한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속히 목아를 파기시키고 진사를 더 지어 첨사로 하여금 신지(信地)에 와서 거처하면서 진졸(鎭卒)들을 수습하고 전구(戰具)에 마음을 전일하게 하되, 만일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곧 죄를 논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1. 군제(軍制)는 전부(前部)인 무학군(武學軍)이 1천 3백 32명이고 후부(後部)인 속오군(束伍軍)이 1천 3백 32명인데, 이는 원군(原軍)입니다. 장려(壯旅)의 좌열 군관(左列軍官)이 9백 99명이고 우열 군관(右列軍官)이 9백 99명이며, 의려(義旅)의 좌열 군관이 9백 99인이고 우열 군관이 9백 99인인데, 이는 고(故) 유수(留守) 신(臣) 이선(李選)이 신유년1636) 에 설치한 것입니다. 또 대년군(待年軍) 2백 22명, 아병(牙兵) 1백 11명, 이노 작대(吏奴作隊)인 난후 친병(攔後親兵)의 좌·우 초군(左右哨軍) 2백 22명, 잡색군(雜色軍) 4천 6백 55명이 있는데, 모두 1만 1천 8백 70명이니, 또한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년군·아병·이노 작대·잡색군은 진실로 승패(勝敗)를 가름하는 수효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속오군·무학군이 바로 몽둥이를 들고 앞으로 공격하여 나갈 수 있는 군대입니다. 그런데 근래 인심이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여서 편호(編戶)의 천민(賤民)들도 모두 입자(笠子)를 쓰고 도포(道袍)를 길게 끌고 다니는 것으로 스스로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속오와 무학에 편입된 자들이 거개 양려(兩旅)의 무리들 속으로 몸을 숨기는 탓으로 원군(原軍)이 날로 줄어들어 궐오(闕伍)된 것이 거의 절반이나 되는데도 수십 년 이래 대신 충당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지쳐 병들거나 늙어서 쓸데없는 사람뿐입니다만, 이제 수괄(搜括)한다면 도피하느라고 분분하여 저지시킬 수 없게 됩니다.

이른바 원군(原軍)은 참으로 유명 무실 그대로이니, 오직 마땅히 천천히 무마하고 천천히 불러 모아 세월을 두고 연마하여 가면서 잔약한 자들을 건장(健壯)한 자들로 바꾸고 궐루(闕漏)된 것을 충실하게 충당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책성(責成)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려(兩旅)의 군관(軍官)들도 또한 편호(編戶)의 어리석음으로 속오군들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데 단지 입자(笠子)를 쓰고 도포를 길게 끌면서 당(堂)에 올라가서 절할 뿐입니다. 그 가운데는 무력(武力)을 지닌 용건(勇健)한 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비록 군관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군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도 또한 그 형세를 이용하여 이롭게 인도해야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 양려(兩旅) 가운데 신수(身手)가 좋고 여력(餘力)이 있는 자를 각각 3백 명씩 뽑아서 매달 초하루마다 전립(戰笠)에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활쏘기도 시험해보고 포쏘기도 시험해보는 등 법으로 단속하고 상(賞)으로 격려하여 기예(技藝)를 힘써 연마하게 해야 합니다.

무학군에 이르러서는 또한 농사지어 먹고 사는 양민(良民)이니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것도 또한 특별히 3백 인을 뽑아서 시험에 응시하게 하여 상을 준다면 몇 년 뒤에는 모두 정병(精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지에 있을 경우에는 육군으로 만들고 바다에 있을 경우에는 수군으로 만든다면 9백 명의 날랜 군사가 충분히 일면(一面)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초하루에 상을 주는 비용은 또한 따로 구획(區劃)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부(本府)의 별회록(別會錄)에 들어 있는 쌀은 대개 수신(守臣)이 늠료(廩料)를 주고 남은 것을 추이(推移)하여 놓은 것으로 외읍(外邑)에서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그 수량의 다과(多寡)는 거관(居官)의 구속(久速)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임기가 차서 돌아가는 사람의 경우는 적어도 2백여 석(石)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신이 매달 초하루에 10여 곡(斛)의 쌀을 덜어내어 무예를 권면하는 상(賞)의 비용으로 쓰게 되면 조가(朝家)에서는 허비되는 경비가 없으면서 융무(戎務)는 마땅히 일신(一新)될 것입니다.

 1. 강도(江都)에는 또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과 발거(拔去)할 수 없는 걱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성(城)을 보수(補修)하는 역사(役事)입니다. 신이 그 폐해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만 돌아보고 꺼리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점이 있어서인 것입니다.

대저 강도에 토성(土城)이 생긴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유래는 오래되었습니다. 그 뒤 고(故) 판서(判書) 신(臣) 신정(申晸)이 여첩(女堞)1637) 을 그 위에다 축조했는데 신이 그 유지(遺址)를 살펴본 바 너비와 두께가 8, 9보(步)가 되었으니, 높이는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 고 판서 신(臣) 김시혁(金始㷜)이 토성(土城)의 반을 잘라내고 벽돌로 쌓았는데, 그 의도는 중국의 장성(長城)의 제도를 모방하여 요컨대 변어(邊圉)를 공고히 하는 기반을 만들려고 한 것이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 연새(燕塞)의 수림(樹林) 사이에 있는 흙은 그 성질이 견조(堅燥)하여 벽돌과 비슷한데 더구나 또 유회(油灰)로 밑바닥을 축조하였으므로 단단하기가 금석(金石)과 같아서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형세가 진실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상(島上)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여 해조(海潮)가 밖에서 침식하고 산의 물이 안에서 감돌아 차면서 나가기 때문에 여름에 장마가 들 적에는 물이 범람하여 거세게 씻어내려 가는데, 성이 산 위에 있고 물이 성의 틈새로 흘러나오니, 그것이 잘 무너지는 것은 또한 형세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바다의 진흙과 모래·자갈을 섞어서 쌓는 것이 가장 알맞은 방법입니다. 대저 바다의 진흙은 아교처럼 잘 들어붙는데다가 물을 만나면 빨아들이고 햇볕을 보면 건조하여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튼튼하게 축조하고 그 위에다 사초(莎草)를 입힌다면 비록 조수가 침식하고 물이 불어난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사리에 있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해택(海澤)의 제언(堤堰)에 모두 진흙을 쓰는 이유는 이 때문인 것입니다. 무릇 이른바 벽돌로 쌓은 성은 축조한 지 얼마 안 되어 곧바로 무너지게 되니 갑진(甲津)이 상하 수리(數里) 밖에는 모두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득이하여 벽돌을 돌로 바꾸었습니다만 1년에 축조하는 것이 3백 보(步)로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금년에 이만큼 축조하고 내년에 이만큼 축조하고 10년을 이렇게 하고 20년을 또 이렇게 하여 갑자년1638) 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36년 동안 해마다 이렇게 축조하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만 50리(里) 사이에 겨우 그 절반을 축조했을 뿐이므로 앞으로 축조해야 할 것이 또한 수십여 리(里)가 됩니다. 이를 다 축조할 기간을 계산하여 보면 또한 30년이 허비되는데 옥포(玉浦)의 석성(石城)은 이제 또 무너졌습니다.

성을 보수하는 데 드는 전곡(錢穀)을 헛되이 물속에다 던져넣는 격이 되니, 이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입니다. 거기다가 어호(漁戶)는 돌을 운반하도록 독촉하기 때문에 배를 임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장차 10냥(兩)에 이르게 되고, 남정(男丁)들은 역역(力役)을 하도록 독촉하기 때문에 돌을 나르느라 외치는 호야(呼耶)의 고통이 번번이 여러 날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니산(摩尼山)의 나무는 매탄(埋炭)으로 다 없어지게 되었고 해서(海西)의 강철(强鐵)은 연장을 만드느라 다 녹여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대저 천하의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맺음이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가 있으면 편안할 때가 있는 법인데, 지금의 이 성역(城役)은 빙빙도는 고리와 같아서 이유도 없이 민력(民力)이 항상 수고롭기만 할 뿐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때문에 심도(沁都) 백성들의 속담에 ‘아! 이놈의 성을 쌓는 것이 장강(長江)과 같아서 끝이 없구나! 저 장강물이 끊어져야만 이 역사(役事)가 끝나리.’ 하는 말이 있으니, 그들의 원망하고 애통해 하는 정상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내년부터 속히 성을 수축하는 역사를 폐지하고 광성(廣城)에서 초지(草芝)에 이르기까지 20여 리(里)를 진흙으로 축조하되 힘써 완고(完固)하게 만들고 그 위에 여장(女墻)을 설치하며 강가의 상하에 나열되어 있는 돈대(墩臺) 사이에 각각 1백 보(步)씩을 한계로 하여 따로 초루(譙樓)를 축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사변이 발생할 경우에는 각진(各鎭)의 토병(土兵)들로 하여금 좌우에서 서로 바라보면서 양쪽에서 시석(矢石)을 날려 적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민력(民力)을 쉬게 할 수 있고 재용(財用)을 축적할 수 있고 또한 적군도 막을 수 있는데, 또 어찌 석성(石城)을 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어리석고 미혹하기는 합니다만 또한 충분히 헤아려 보았으니, 삼가 예재(睿裁)를 바랍니다.”하였는데,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수신(守臣)이 15조항으로 상소하여 논열한 것은 매우 상세하고도 주밀하며 조가(朝家)의 처지에서도 이미 따르기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참으로 변통시키는 사의(事宜)에 맞게 되어 있어 단락에 따라 복주(覆奏)할 필요가 없으니, 일체 청한 그대로 모두 시행할 것을 허락하소서.

그 가운데 호남(湖南)의 대동미(大同米) 1만 석(石)을 매년 강도(江都)에 윤치(輪置)시키고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외방(外方)에서 받아가게 하자는 의논은 구애되어 곤란한 점이 생길 우려가 없지 않으니, 이는 다시 상세히 살펴서 합당하게 하도록 힘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45 책 95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註 1604]무술년 : 1778 정조 2년. ☞

[註 1605]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1606]금성 탕지(金城湯池) : 방비가 아주 견 고한 성. ☞

[註 1607]기각(掎角) : 앞뒤에서 공격함. ☞

[註 1608]애산(崖山) :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산임. 송(宋)나라 말기에 장세걸(張世傑)이 18대 임금 상흥제(祥興帝)를 받들고 이 산에서 지탱하다가 원(元)나라의 장수 장홍범(張弘範)에게 패전하게 되자 육수부(陸秀夫)가 임금을 업고 바다에 빠져 죽음으로써 송나라가 멸망하였음. ☞

[註 1609]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610]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1611]진양(晉陽)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縣)인데, 옛날 전국 시대 때 조양자(趙襄子)가 이곳으로 피난가서 끝까지 지켰고 결국은 지백(智伯)의 군대를 격파하였음. ☞

[註 1612]유수(濡須)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함산현(含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작은 성(城). 삼국 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축조하여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군대를 막던 곳으로 동관(東關)과 서관(西關)으로 나누어져 있음. ☞

[註 1613]수의(繡衣) : 어사(御史). ☞

[註 1614]당선(唐船) : 중국배. ☞

[註 1615]거류(居留) : 유수(留守). ☞

[註 1616]대죄(待罪) : 봉직(奉職)의 겸칭. ☞

[註 1617]경신년 : 1740 영조 16년. ☞

[註 1618]수규(首揆) : 영상(領相). ☞

[註 1619]정장(亭障) : 변방의 요새(要塞) 한 곳에 설치하여 사람의 출입을 검사하는 관문(關門)임. ☞

[註 1620]계람(繫纜) : 닻줄을 맴. ☞

[註 1621]거류(居留) : 유수(留守). ☞

[註 1622]무진년 : 1748 영조 24년. ☞

[註 1623]을유년 : 1765 영조 41년. ☞

[註 1624]심도(沁都) : 강화(江華). ☞

[註 1625]양자(襄子) : 춘추·전국 시대 사람. ☞

[註 1626]공손술(公孫述) : 후한(後漢) 초기의 참주(僭主). 성도(成都)에서 기병(起兵)하여 세력을 떨쳐 황제라 일컫고 있었으나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파견한 장수에게 패전하여 죽고 그 일족(一族)이 멸망되었음. ☞

[註 1627]자벽(自辟) : 장관(長官)이 자의(自意)로 관원을 추천 임명함. ☞

[註 1628]신경(神京) : 서울. ☞

[註 1629]갑신년 : 1764 영조 40년. ☞

[註 1630]병술년 : 1706 숙종 32년. ☞

[註 1631]방영(防營) : 방어사(防禦使)를 둔 병영(兵營)의 약칭(略稱). ☞

[註 1632]방포(防布) : 방수군(防戍軍)의 보인(保人)이 내는 베. ☞

[註 1633]신경(神京) : 서울. ☞

[註 1634]유안(劉晏) : 당(唐)나라 대종(代宗) 때의 재상(宰相). 국가의 재정(財政)을 잘 처리하였음. ☞

[註 1635]구량(口粮) : 사람의 수효대로 주는 식량. ☞

[註 1636]신유년 : 1741 영조 17년. ☞

[註 1637]여첩(女堞) : 성 위에 쌓은 낮은 담. ☞

[註 1638]갑자년 : 1744 영조 20년. ☞

 2)정조 10권, 4년( 1780 경자 / 청 건륭(乾隆) 45년) 7월 20일 병신 2번째기사

 ●세곡의 폐선이 빈번하자 호송한 지방의 수령과 변장을 문책하다

이 해에 영남의 후조창(後漕倉)의 배 한 척이 영암(靈巖)에서 파손되고, 호남 능주(綾州)의 조세를 실은 배는 부안(扶安)에서 파손되고, 또 무안(務安)의 조세를 실은 배 한 척은 만경(萬頃)에서 파손되고, 호서의 홍주(洪州)·은진(恩津)의 조세를 실은 배는 고양(高陽)에서 파손되고, 공주(公州)의 조세를 실은 배는 통진(通津)에서 파손되었다. 하교하기를,

 “선왕조 갑오년2331) 에 칙교(飭敎)를 내린 이후로 세곡(稅穀)을 실은 배가 침몰하는 일이 없었으며, 제때에 실어 보내어 호송도 근실히 하였다. 그런데 몇 년 이래로 이 법이 점차로 해이해져서 지난해는 그 전해보다 더 심하고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심한데, 올해는 파손된 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미 신칙하고자 하였으나 우선 관대히 봐 주었다. 옛날 우리 선왕조에서 자상하게 신칙하셨던 것은 미곡(米斛)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한 톨의 쌀이 백성들의 피나는 고생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내가 감히 그 법을 닦아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기 도백의 장계를 살펴 보건대, 고의로 배를 침몰시킨 실정이 불을 보듯 명백하다. 침몰된 1천 포대는 한결같이 건져내기만을 바라고 있으나 곡식이 어디로 간 지 모르고, 배도 어디로 간 지 모르는데, 향리의 교활한 이졸은 편안히 다른 배를 타고서 범연히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만일 법대로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간교한 폐단을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침몰된 배의 감관·색리·사공·곁군 등을 도백으로 하여금 여느 일을 제쳐놓고 친히 신문하여, 간계를 꾸민 우두머리를 곧바로 적발해서 규식에 따라 형률을 정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징계하고 후일을 단속하는 본보기로 삼도록 하라.

만일 일찍이 애써 실어서 보냈더라면 어찌 간교한 꾀를 쓸 수 있겠으며, 또 신중히 호송을 하였더라면 어찌 간교한 심보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배에 실어 보내고 호송한 그 지방의 수령과 변장(邊將)을 모조리 관직을 삭제하고 의금부로 하여금 붙잡아다가 문초하여 죄를 정하게 하라. 대체로 지방 고을은 경사(京司)를 본받는 것이니 법령을 금석(金石)과 같이 지켰다면 몇 년 안되어서 법이 어찌 이처럼 해이해 졌겠는가?

올해에 들어 조세의 배가 침몰된 여러 도의 감사는 모조리 종중 추고하도록 하라. 이것은 바로 세 번 명령하고 다섯 번 거듭 주의시키는 의미이니, 다시 이러한 폐단을 아뢸 경우에는 결코 그 즉시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영인본】 45 책 174 면【분류】 *교통-수운(水運)

[註 2331]갑오년 : 1774 영조 50년. ☞

 3)정조 12권, 5년( 1781 신축 / 청 건륭(乾隆) 46년) 12월 9일 정축 3번째기사

 ●경기 관찰사 이형규가 국경 수비에 대해 아뢴 상소문

경기 관찰사 이형규(李亨逵)가 상소하기를, “도내(道內)에 한두 개의 변통시켜야 할 관방(關防)3032) 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교동(喬桐)에 전처럼 그대로 수사(水使)를 두는 데 관한 일입니다. 신이 가을 순찰(巡察)할 때 통진(通津)에 이르러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올라서 바라보니, 심도(沁都)의 외곽(外郭)이 바닷물 가운데 있고 진보(鎭堡)가 서로 연결되어 벌려 있는 것이 별과 바둑돌 같았습니다.

교동은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삼남(三南)의 길목을 견제하고 있고 뒤로는 양서(兩西)의 해로(海路)를 끼고 있어, 실로 심도(沁都)의 문호(門戶)이고 경사(京師)의 보장(保障)이었습니다. 따라서 수군 절도사를 설치하여 삼도 통어(三道統禦)를 겸하게 한 것은 이렇게 시조(施措)한 규모(規模)가 진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옮겨 심도에 예속시킨 뒤로는 가호(假號)의 방영(防營)에 불과하여 스스로 호령을 주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만일 긴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심도의 절제(節制)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분주하게 왕래할 즈음에 이미 기미에 따라 변에 대응하는 방책을 잃게 될 뿐만이 아니라, 호위하고 차단시키는 방도에 있어서도 또한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3033) 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本府)의 군오(軍伍)를 모두 심도(沁都)에 예속시켰기 때문에 매양 수조(水操)가 있을 때면 1천여 명의 교졸(校卒)들이 심도로 달려가는데, 1인당 식량에 드는 비용이 작아도 4, 5냥의 돈을 밑돌지 않습니다. 탄환(彈丸)처럼 작은 섬이어서 생리(生理)가 말할 수 없이 어려우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에 시달리면서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근래 듣건대, 도민(島民)들이 모두들 ‘통어영(統禦營)은 비록 복구(復舊)시키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유독 진장(鎭將)의 설치를 허락한다면 수조(水操)에 달려가는 폐단이 제거(除去)되어 편안히 살 수 있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고 합니다.

민정(民情)을 논한다면 그 곡절을 알기 쉬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만일 교동(喬桐)에다 하나의 수사(水使)를 설치하여 스스로 호령(號令)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심도와 서로 기각(掎角)3034) 의 형세를 이루게 하면 해방(海防)이 더욱 굳건하게 되고 민정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곧 파주(坡州)의 방어(防禦)를 전처럼 도로 장단(長湍)에다 설치하는 일입니다. 서북(西北) 여러 곳의 방영(防營)은 오로지 서북을 방비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장단은 곧 기서(畿西)의 제일의 요충지로 동으로는 신경(神京)을 호위하고 있고 서로는 송도(松都)를 견제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심도(沁都)의 문호(門戶)가 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우보(右輔)에서 가장 긴요한 곳입니다.

그곳의 지세(地勢)를 말하면 서북(西北)의 대로(大路) 이외에 또 사잇길 두 가닥이 있습니다. 강변(江邊)에서부터 은밀히 양덕(陽德)·맹산(孟山)을 넘어서 곡산(谷山)·수안(遂安)을 지나 이른바 본부(本府)의 고랑포(高浪浦)에 닿는데는 4백여 리(里)에 불과합니다. 또 북쪽의 육진(六鎭)에서부터 곧바로 삼방곡(三防谷)·추가령(楸柯嶺)으로 달려 평강(平康)·이천(伊川) 사이로 나와서 고랑포에 도달하는 것도 또 3백여 리에 불과합니다.

 병민(兵民)에 대해서 말하여 본다면 지방(地方)이 매우 넓고 또 사람의 총수(摠數)가 상당히 많아서 무기(武技)를 정예롭게 단련하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고 군졸은 액수(額數)를 충당시키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치(措置)해 놓은 연륜이 오래되고 제도(制度)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아침에 징발하여 저녁에 출동시킬 수 있습니다. 무신년3035) 의 변란 때에도 신속하게 사기(師期) 안에 달려가 죽산(竹山)에서 엄히 진을 치고 있었으니, 이것이 그 증험입니다.

아! 저 파주(坡州)에서 의지하여 믿고 있는 것은 곧 한가닥 허리띠 같은 강물과 하나의 탄환만한 작은 성(城)뿐입니다. 강(江)가의 얕은 여울은 옷을 걷거나 벗고서 건널 수 있는 곳이 많으니, 파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달려간다면 방진(方鎭)에서 수비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본목(本牧)은 지역이 좁고 사람이 적어서 영(營)을 설치한 이후 각읍(各邑)의 군보(軍保)를 거개 모두 이속(移屬)시켰어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하여 구차스럽게 첨액(簽額)하고 있습니다. 한번 파주에서 영을 옮기고서부터 상진곡(常賑穀) 5백 석(石)을 해마다 획급(劃給)하여 교졸(校卒)에게 급대(給代)하는 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이제까지 18년 동안 없어져버린 진곡(賑穀)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위에서 진달한 바 관방(關防)의 지세(地勢)와 병민(兵民)의 편부(便否)는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변별(卞別)할 수 있으며, 현재 부족한 경비에 대해서도 또 생각하여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장단(長湍)에다 전처럼 도로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여 지리(地理)를 잃지 않고 군제(軍制)가 믿을 수 있고 공곡(公穀)이 모축(耗縮)되지 않게 한다면, 그 득실(得失)이 또한 분명히 드러나는 정도뿐만이 아닐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제일 먼저 유지(有旨)에 응하여 소장을 올렸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두 건의 일은 그대로 따라서 시행하는 것에 대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재처(裁處)하게 하겠다.”하였다.

 【영인본】 45 책 285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註 3032]관방(關防) : 국경 수비. ☞

[註 3033]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 :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가 떠날 수 없는 것처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도와서 의지함을 이르는 말임. ☞

[註 3034]기각(掎角) : 앞뒤에서 협공(挾攻)함을 이름. ☞

[註 3035]무신년 : 1728 영조 4년. ☞

  4)정조 15권, 7년(1783 계묘/청 건륭(乾隆) 48년) 5월 23일 계축 2번째기사

 ●진휼에 대한 논공 행상을 행하다

경기·호서·영남에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1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끝마쳤다.【경기의 관청이 진휼한 곳은, 광주(廣州), 여주(驪州), 파주(坡州), 수원(水原), 부평(富平), 인천(仁川), 남양(南陽), 풍덕(豊德), 통진(通津), 고양(高陽), 안산(安山), 김포(金浦), 교하(交河), 양천(陽川), 금천(衿川), 과천(果川), 음죽(陰竹), 양주(楊州), 장단(長湍), 죽산(竹山), 안성(安城), 진위(振威), 용인(龍仁), 이천(利川), 양성(陽城), 양지(陽智), 포천(抱川) 등의 고을과, 화량(花梁), 덕포(德浦), 덕적(德積), 주문(注文), 장봉(長峰) 등의 진(鎭)이었다. 총 굶주린 백성은 55만 52명이었고, 진휼로 들어간 곡물은 2만 5천 2백 석 영(零)이었다.

 ○호서의 관청에서 진휼한 곳은 수군 절도영(水軍節度營), 평택(平澤), 아산(牙山), 천안(天安), 직산(稷山), 해미(海美), 신창(新昌), 온양(溫陽), 태안(泰安), 서산(瑞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덕산(德山), 한산(韓山), 임천(林川), 서천(舒川), 석성(石城), 부여(扶餘), 연기(燕岐), 비인(庇仁), 정산(定山), 문의(文義), 결성(結城), 청주(淸州), 홍산(鴻山), 대흥(大興), 홍주(洪州), 예산(禮山), 충주(忠州), 제천(堤川), 공주(公州), 보령(保寧) 등의 고을과 소천(所千), 평신(平薪), 마량(馬梁), 서천포(舒川浦) 등의 진과 성환(成歡), 율봉(栗峰), 연원(連源), 이인(利仁) 등의 역참이었다.

총 굶주린 백성이 40만 6천 8백 89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2만 3천 9백 석 영이었다. 개인이 진휼한 곳은 남포(藍浦), 이성(尼城), 청양(靑陽) 등의 고을이었는데, 굶주린 백성이 총 1만 1천 3백 14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7백 53석 영이었다.

○영남의 관청에서 진휼한 곳은 양산(梁山), 김해(金海), 함안(咸安), 칠원(漆原), 칠곡(漆谷), 영산(靈山), 밀양(密陽), 군위(軍威), 의령(宜寧), 비안(比安), 인동(仁同), 초계(草溪), 대구(大丘), 성주(星州) 등의 고을과 귀산(龜山), 독용(禿用) 등의 진과 황산역(黃山驛)이었다.

구급(救急)한 곳은 창원(昌原), 현풍(玄風), 창녕(昌寧), 고령(高靈), 영일(迎日), 경산(慶山), 청하(淸河), 청도(淸道), 의성(義城), 의흥(義興), 하양(河陽), 자인(慈仁), 신녕(新寧), 흥해(興海), 진보(眞寶), 장기(長鬐), 금산(金山), 지례(知禮), 영천(永川) 등의 고을과 포항(浦項), 금도(金島) 등의 진과 자여(自如), 송라(松羅), 성현(省峴), 장수(長水) 등의 역이었다.

굶주린 백성은 총 62만 9천 8백 73명이었고, 진휼에 들어간 곡물은 5만 2천6백 70석 영이었다.】 임금이 하삼도(下三道)에서 진휼을 끝마쳤다고 올린 장계에 대해 진휼청·이조·병조의 당상이 등대(登對)하여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서호수가 아뢰기를,

 “진휼의 곡물을 자체에서 준비한 장단 부사 이한오(李漢五), 죽산 부사 이언충(李彦忠), 비인 현감 박형(朴泂)에게는 옷감을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해미 현감 조윤근(曹潤根), 홍주 목사 이겸환(李謙煥), 면천 군수 유언제(兪彦銻)에게는 숙마를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용인 현령 김이중(金履中), 부여 현감 윤창(尹昶)에게는 아마를 하사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부유한 백성 중 곡물을 자원해서 바친 이계갑(李繼甲)·나후륜(羅後倫)·이경윤(李景尹)에게는 그에 걸맞는 관작으로 임용해야 하겠으며, 이홍수(李弘遂)·김광재(金光載)에게는 품계를 올려주는 은전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지난해 기호(畿湖)에 든 흉년은 거의 최근에 없었던 것이었다. 불쌍한 저 몹시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구렁에 쓰러져 죽게 되었다가 지금 다행히도 진휼을 다 끝마쳐 상처가 겨우 아물었는데, 이는 모두 도백과 고을 원들이 정성을 다하여 구제한 효과이다. 그러나 시행한 실지의 정사와 입은 실지의 혜택이 고을마다 차이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너무나 심하게 형편없게 하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앞서 조절(操切)한 것은 이미 일정한 격식에 벗어났었는데, 지금에 와서 논공 행상하면서 지나치게 인색하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해조에서 심리하여 아뢴 것이 비록 매우 정세하고 요약되었으나, 더러 석수(石數)를 보고하지 않았거나 원래 진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으로 인해 대부분 논공 행상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너무나 형편없으니,

여주 목사 원후진(元厚鎭)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라. 비인 현감 박형은 진휼의 정사를 가장 잘하였으니, 그의 치적에다 비교하면 그래도 부차적인 것에 속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별도로 포상을 해야만 다른 사람을 권면할 수 있다. 문벌의 성적(聲績)이 있는 수령도 품계를 올려 주도록 하라. 안산 군수 이성호(李成祜), 고양 군수 임중원(林重遠)은 실지로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는데, 어찌 누락되어서야 되겠는가? 준직(準職)을 제수하라.

청양 현감 이진(李璡), 이성 현감 심희(沈禧)는 비록 원래 진휼한 고을은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한 곡물의 수량이 많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근거할 만한 예를 참고해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남포 현감 홍상덕(洪相德)은 진휼을 한 정사가 치적보다 월등하여 공과 잘못이 상반(相半)된다고 할 만하니, 논하지 말라.

장단 부사 이한오는 재해지를 조사하고 진휼청을 설치하였으니, 그의 성실함은 실로 듣기 드문 일이다. 해미 현감 조윤근의 노고와 공적은 안산과 고양의 두 군수에 뒤지지 않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의망하라.

용인 현령 김이중은 자체에서 2백 석을 준비하였으니, 승진시켜 서용하라. 부여 현감 윤창은 김이중에 비하면 뒤떨어지니, 반아마(反兒馬)를 하사하라. 엊그제 도성에서 곡물을 발매할 적에나 굶주린 호구를 뽑을 때에 일을 주관한 당상들에게 범의 가죽을 하사하였으니, 지금 달리 할 수는 없다.

경기 감사 이형규(李亨逵), 홍충 감사 김문순(金文淳)에게 각각 중등의 범의 가죽을 하사하라. 지난해에 근실히 하고 태만히 한 것을 평가하겠다는 뜻으로 누차 분부하였으니,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상을 시행하는 때에 벌을 논하는 정사가 있어야 하겠는데, 조정에서 억지로 구별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포폄(褒貶)의 달이 바싹 다가왔으니, 그 가운데서 임무를 감당해내지 못한 사람은 혹시라도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그냥 넘기지 말고 한결같이 듣고 본 바의 우열에 따라 상벌의 고하를 삼도록 하되, 의정부에서 이 뜻을 낱낱이 들어 각별히 엄중하게 주의시키도록 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부유한 백성이 재물을 떼내어 진휼을 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렸으니, 그 뜻이 가상하므로 노고도 보답해야 한다. 연전에 호남에서 1천 포의 곡식을 가지고 사적으로 진휼한 세 사람을 올려보내게 하여 실직(實職)을 제수하였던 것은 권장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었다. 이번 영남과 호서에 진휼을 시행할 때에 한산 이계갑(李繼甲), 밀양 이경윤(李景尹) 등이 사적으로 진휼에 보태준 곡물은 모두 천여 석이 넘었다. 조연(朝筵)에서 실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지만 그냥 놔두고 말았으니, 너무나 실상이 없다.

그리고 경기에 있어서는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부유한 호구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통진 이홍수(李弘遂)가 8백 포를 사적으로 진휼한 것은 한산·밀양의 1천 포와 맞먹을 수 있는데, 품계를 올려 주는 직첩만 지급한다면 또한 권장하는 데에 부족하다. 영남·호서에서 사적으로 진휼한 두 사람과 같이 각기 도백이 올려보내게 한 뒤에 여쭙도록 하라.

서천 진사 나후륜(羅後倫)은 1천여 석의 정제된 곡물로 한 고을의 진휼할 밑천을 전담하였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일에 손색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고을 수령과도 똑같이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성추(羅星樞)의 지난 사례가 있으니, 선왕조 계사년의 전교에 따라 실직의 첨지(僉知)에 임명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청양 현감 이진(李璡), 이성 현감 심희(沈禧), 기장 현감 서유룡(徐有龍)은 자체에서 진휼의 곡물을 준비하였으니 매우 가상하기는 하나, 사적으로 진휼한 고을에 상을 주자고 청한 것은 사례가 없으니, 그냥 놔두소서.”하니, 임금이 특별히 이진과 심희는 승진시켜 서용하고 서유룡은 준직으로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45책 367면【분류】*구휼(救恤)/*인사(人事)

 5)정조 17권, 8년(1784 갑진/청 건륭(乾隆) 49년) 4월 20일 갑진 2번째기사

 ●경기의 진휼을 마치다

경기에 진휼(賑恤)을 베풀었는데, 정월에서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서 진휼을 마쳤다.【공진(公賑)으로, 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豊德)·통진(通津)·남양(南陽)·죽산(竹山)·인천(仁川)·부평(富平)·고양(高陽)·김포(金浦)·교하(交河)·양천(陽川)·광주(廣州)·양주(楊州)·수원(水原)·용인(龍仁)·양지(陽智)·과천(果川) 등의 고을과, 덕포(德浦)·화량(花梁)·주문(注文)·덕적(德積)·장봉(長峯) 등의 진(鎭)에, 총 기민(飢民) 34만 3천 8백 38구(口)이며, 진곡(賑穀) 3만 6백 32석 영이었다. 강화(江華)는 계묘년 12월부터 진휼을 설행하여 이해 5월에 진휼을 마쳤는데, 총 기민은 2만 9천 2백 35구(口)에, 진곡은 7백 95석 영이었다.】

 【영인본】45책 441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구휼(救恤)

 6)정조 20권, 9년( 1785 을사 / 청 건륭(乾隆) 50년) 9월 17일 계해 1번째기사

 ●승지 이병모를 통진 부사로 보직하다

승지 이병모(李秉模)를 특별히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보직(補職)하였으니, 이병모는 대관(臺官)의 탄핵(彈劾)으로 인책(引責)하여 소명(召命)을 어긴 때문이었으며, 곧 그 곳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으니, 각신(閣臣)의 사은 숙배(謝恩肅拜)는 합문(閤門)에서 하는 것이 준례인데 이병모는 지방의 보직(補職)에 사은(謝恩)하면서 정하여진 준례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었다.

 【영인본】 45 책 539 면【분류】 *인사(人事)

  7)정조 21권, 10년( 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2월 29일 계묘 1번째기사

 ●비변사의 인사·과거·군량 등에 대한 논의

빈대(賓對)하였다.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말하기를, “묘당에서 추천하는 법에, 비변사의 당상들이 각각 3인을 추천하여 여러 당상들에게 돌려 보여 회공(回公)이라고 한 다음에 비로소 의망에 넣도록 하는데, 이는 법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여러 당상들이 대뜸 불천(不薦)이라는 두 글자를 쓰고 있으니, 이는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엄히 신칙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수찬 이상도(李尙度)의 상소에 과장(科場)에서 시험지의 글씨를 바꾸어 쓰는 폐단에 관해 말하였는데, 지금의 병폐에 적중하였습니다. 시간을 늘리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별시 시관에게 물었다. 행 사직 이명식(李命植)이 말하기를,

 “지금 과거를 보일 때 초장(初場)에는 2천 4백 권(卷)이고 종장(終場)에는 1천 2백 권인데, 50명의 서리(書吏)를 가지고 어떻게 모두 베껴 쓸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글씨를 바꾸어 쓴다고 해도 별로 불법의 방지가 되지 않습니다.”하자, 우참찬 정창성(鄭昌聖)이 말하기를,

 “글씨를 바꾸어 쓰는 것은 불법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더러 주초(朱草)로【글씨를 바꾸어 쓴 뒤에 주필(朱筆)로 사동(査同)·교동(校同)을 쓰기 때문에 주초라고 한다.】 잘못 써서 본초(本草)를 가져다 보아야 하므로 실로 도움은 없고 경비만 납니다.”하니, 정존겸이 말하기를,

“이는 옛법이므로 조금 시간만 늘려야지 가볍게 개혁을 의논할 수 없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 박우원(朴祐源)이 아뢰기를,

 “강화부의 진무영(鎭撫營)에 속한 읍 부평(富平)·연안(延安)·풍덕(豊德)·통진(通津)의 네 영장(營將)과 통어영(統禦營)에 속한 진(鎭) 교동(喬桐)·영종(永宗)은 비록 강화부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애당초 부(府)에 비치된 좌부(左符)가 없습니다. 다른 진영의 사례에 따라 만들어 두소서.”하니, 병조에 하달하라고 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강화도의 군량은 본래 17만여 석인데, 경사(京司)에서 대여해 준 것과 각 도에서 떼어준 것이 13만여 석입니다. 경사에서 대여해 준 것을 상환하는 것은 비록 가볍게 의논할 수 없더라도 삼남(三南)에서 떼어 보낸 것은 지금 상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비국에 하달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에서 말하기를,

 “대여해 준 곡물을 추심해 들여서 군량을 비축하는 것은 정말 옳은 일입니다만, 1년 내에 모두 수납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호서(湖西)는 2년 내에, 영남은 5년 내에 모두 상환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수를 헤아려서 분담시켜 서로 걸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햇수를 한정하여 갚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5 책 557 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군사-병참(兵站)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국용(國用)

   8)정조 23권, 11년(1787 정미/청 건륭(乾隆) 52년) 5월 23일 기축 1번째기사

 ●경기·영남·호남·호서·관동·관북 여섯 도의 진휼을 마치다

경기(京畿)·영남(嶺南)·호남(湖南)·호서(湖西)·관동(關東)·관북(關北) 여섯 도(道)의 설진(說賑)을 정월(正月)부터 베풀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휼을 마쳤다.【경기. 광주(廣州)·수원(水原)·통진(通津)·풍덕(豊德)·인천(仁川)·부평(富平)·김포(金浦)·고양(高陽)·교하(交河)·과천(果川) 등의 고을과 덕포(德浦)·덕적(德積) 등의 진(鎭)의 총 기민(饑民)은 17만 8천 9백 39구(口)이고, 진곡(賑穀)은 1만 3천 4백 44석(石) 영(零)이며, 강화부(江華府)의 사진(私賑)은 총 기민이 4천 2백 32구이고, 진곡은 1백 86석 영이며,전(錢)이 6백 24냥 영이다.

영남. 남해(南海)·웅천(熊川)·거제(巨濟)·진해(鎭海)·양산(梁山)·청하(淸河)·칠원(漆原)·장기(長鬐)·울산(蔚山)·함안(咸安)·김해(金海)·동래(東萊)·연일(延日)·기장(機張)·하동(河東)·곤양(昆陽)·고성(固城)·사천(泗川)·초계(草溪)·밀양(密陽)·진주(晉州)·거창(居昌)·지례(知禮)·단성(丹城)·함창(咸昌)·함양(咸陽)·언양(彦陽)·산청(山淸)·경주(慶州)·흥해(興海)·영해(寧海)·영덕(盈德)·의령(宜寧)·합천(陜川)·청도(淸道)·하양(河陽)·경산(慶山)·삼가(三嘉)·현풍(玄風)·대구(大丘)·인동(仁同)·영산(靈山)·영천(榮川)·예천(醴泉)·성주(星州)·상주(尙州)·창녕(昌寧)·봉화(奉化)·선산(善山)·안동(安東)·고령(高靈)·금산(金山)·안의(安義) 등의 고을과 좌병영(左兵營)·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의 우후(虞候)·귀산(龜山)·사량(蛇梁)·당포(唐浦)·삼천포(三千浦)·남촌(南村)·구소(舊所)·비적량(非赤梁)·미조항(彌助項)·평산(平山)·가덕(加德)·제포(薺浦)·안골(安骨)·천성(天城)·신문(新門)·청천(晴川)·부산(釜山)·다대(多大)·개운(開雲)·두모(豆毛)·서평(西平)·포이(包伊)·서생(西生)·지세(知世)·옥포(玉浦)·영등(永登)·조라(助羅)·가배(加背)·율포(栗浦)·장목(長木)·금도(金島)·독용(禿用) 등의 진(鎭)과 자여(自如)·소촌(召村)·송라(松羅)·황산(黃山)·사근(沙斤)·성현(省峴) 등의 역(驛), 진주(晉州)·울산(蔚山) 등의 목장(牧場)의 총 기민이 1백 8만 8천 2백 87구이고, 진곡은 8만 3천 5백 31석 영이다.

호남. 나주(羅州)·남원(南原)·순천(順天)·장흥(長興)·보성(寶城)·영광(靈光)·영암(靈巖)·진도(珍島)·낙안(樂安)·만경(萬頃)·광양(光陽)·강진(康津)·부안(扶安)·무장(茂長)·무안(務安)·흥덕(興德)·고창(高敞)·동복(同福)·진안(鎭安)·장수(長水)·운봉(雲峰)·흥양(興陽)·구례(求禮)·해남(海南)·함평(咸平) 등의 고을과 병영(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격포(格浦)·방답(防踏)·사도(蛇渡)·법성(法聖)·임자도(荏子島)·가리포(加里浦)·고금도(古今島)·고군산(古群山)·위도(蝟島)·임치(臨淄)·여도(呂島)·발포(鉢浦)·녹도(鹿島)·금갑도(金甲島)·남도(南桃)·지도(智島)·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마도(馬島)·신지도(薪智島)·어란이진(於蘭梨津)·검모포(黔毛浦)·회령포(會寧浦)·고돌산(古突山)·흑산도(黑山島)·섬진(蟾津) 등의 진(鎭)과 나주·진도·흥양·순천 등의 목장, 벽사역(碧沙驛)의 총 기민 1백 55만 6천 4백 39구이고, 진곡은 8만 6천 1백 71석 영이며, 사진(私賑)은 전주(全州)·광주(光州)·순창(淳昌)·금산(錦山)·창평(昌平)·옥과(玉果)·곡성(谷城)·화순(和順)·임실(任實)·용담(龍潭)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27만 5천 4백 38구이고, 진곡은 1만 6천 9백석 영이다.

호서. 태안(泰安)·온양(溫陽)·평택(平澤)·아산(牙山)·직산(稷山)·석성(石城)·홍산(鴻山)·정산(定山)·부여(扶餘)·음성(陰城)·신창(新昌)·비인(庇人)·청양(靑陽)·공주(公州)·서천(舒川)·보령(保寧)·홍주(洪州)·결성(結城)·천안(天安)·전의(全義)·예산(禮山)·한산(韓山)·남포(藍浦) 등의 고을과 수영(水營)· 행영(行營)·마량(馬梁)·서천포(舒川浦)·소근(所斤) 등의 진(鎭), 성환(成歡)·이인(利仁) 등의 역(驛)의 총기민이 27만 9천 8백 77구이고, 진곡이 1만 7천 75석 영이며, 사진(私賑)은 임천(林川)·은진(恩津)·연산(連山)·진잠(鎭岑) 등의 고을과 금정역(金井驛)의 총 기민이 3만 2천 6백 57구이고, 진곡은 2천 3백 38석 영이다.

관동. 간성(杆城)·고성(高城)·울진(蔚珍)·평해(平海)·흡곡(歙谷)·통천(通川)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1천 6백 3구이고, 진곡은 9백 94석 영이다. 관북. 안변(安邊)·북청(北靑)·갑산(甲山)·삼수(三水)·이원(利原)·단천(端川)·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부령(富寧)·무산(茂山)·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 등의 고을의 총 기민이 9만 5백 31구이고, 진곡은 2천 4백 14석 영이다.】

 여러 도(道)의 도신(道臣)이 진휼을 마쳤다고 아뢰니, 차등을 두어 시상하고, 경기의 통진 부사(通津府使) 황인영(黃仁煐)과 파주 목사(坡州牧師) 홍인묵(洪仁默)은 계제직(階梯職)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고, 김포 군수(金浦郡守) 유한위(兪漢緯)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통진 전 군수(通津前郡守) 이홍수(李弘遂)는 가자(加資)한 후 실직(實職)에 조용하고,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문원(李文源)에게는 녹비[鹿皮] 한 령(令)을 사급(賜給)하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소(李素)와 부평 부사(富平府使) 윤기동(尹耆東)에게는 아마(兒馬)를 사급하며, 이천 부사(利川府使) 심규(沈鍷)와 음죽 현감(陰竹縣監) 최재수(崔在修)에게는 상현궁(上弦弓)을 사급하고, 원납인(願納人) 이병후(李秉垕) 등에게는 제직(除職)하거나 혹은 상가(賞加)·체가[帖加]하였다.

영남의 장기 현감(長鬐縣監) 유환보(柳煥輔)는 준직을 제수하고, 함양 부사(咸陽府使) 이득준(李得駿)은 계제직(階梯職)으로 승천(陞遷)하고, 의령 현감(宜寧縣監) 홍선양(洪善養)은 준직에 조용(調用)하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김이용(金履容)에게는 표리(表裏)를 사급하고,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이계(金履銈)에게는 아마(兒馬)를 사급하고, 울산 부사(蔚山府使) 심공예(沈公藝)와 거제 부사(巨濟府使) 김혁(金爀)은 승서(陞敍)하고, 원납인 황득린(黃得麟) 등은 제직하거나 혹은 체가하였다.

호남 병사(湖南兵使) 이한오(李漢五)·전수사(前水使) 허임(許任)·우수사(右水使) 신우문(申遇文)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리고, 해남 현감(海南縣監) 윤수묵(尹守默)은 가자하고, 낙안 군수(樂安郡守) 심묵지(沈默之)·광양 현감(光陽縣監) 허명(許溟)·장흥 부사(長興府使) 송재서(宋載瑞)·함평 현감(咸平縣監) 송관휴(宋觀休) 가운데 이미 준직(準職)한 자는 영장(營將)·중군(中軍) 가운데서 승천하고 준직하지 않은 자는 도내(道內)의 부사나 군수에 차의(差擬)한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민정환(閔廷桓)·흥덕 현감(興德縣監) 장집소(張集紹)·고창 현감(高敞縣監) 박문경(朴文絅)·임실 현감(任實縣監) 서유풍(徐有豊)은 준직에 조용하고, 순창 군수(淳昌郡守) 홍수영(洪守榮)·곡성 현감(谷城縣監) 임하철(林夏喆)·화순 현감(和順縣監) 임성운(林性運)은 승직하여 조용하고, 원납인 장익복(張益福) 등은 제직하거나 혹은 상가한다.

호서(湖西)의 임천 전 군수(林川前郡守) 김재구(金載久)·태안 현감(泰安縣監) 박형(朴泂)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사석(金思䄷)·진잠 현감(鎭岑縣監) 윤귀석(尹龜錫)은 승품(陞品)하여 조용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조명준(曹命峻)에게는 숙마(熟馬)를 사급하고, 원납인은 체가하였다.

관동(關東)의 울진 현령(蔚珍縣令) 홍치범(洪致範)은 계제직(階梯職)에 조용하고, 평해 전 군수(平海前郡守) 정은성(鄭殷誠)·통천 군수(通川郡守) 김동진(金東鎭)은 승서(陞敍)하고, 고성 군수(高城郡守) 이최원(李最源)은 아마(兒馬)를 사급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김이빈(金履彬)·흡곡 현령(歙谷縣令) 장한철(張漢喆)은 꾸미지 않은 활을 사급하고, 원납인 등에게는 체가하였다. 또 명하기를,

 “이해 오부(五部)에서 발매(發賣)할 때의 한성부의 당상관과 낭관·부관(部官)과 선혜청의 당상관·낭관에게 시상하라. 판윤(判尹) 정창순(鄭昌順)에게는 녹비[鹿皮]를 내리고,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김이소(金履素)에게는 상현궁(上弦弓)을 내리고, 진휼청 낭청 이창회(李昌會)·민백준(閔百準)은 승품하여 조용하고, 남부 도사(南部都事) 박영원(朴英源)·북부 봉사(北部奉事) 임호상(任好常)은 수령에 조용하고, 원납인은 변장(邊將)을 제수하라.”하였다.【오부(五部)의 발매는 총 2만 6천 9백 66호(戶)에 쌀 4천 8백 91석(石) 영(零)이었다.】

 【영인본】45책 653면【분류】*구휼(救恤)/*왕실-사급(賜給)/*인사-임면(任免)

 9)정조 30권, 14년(1790 경술/청 건륭(乾隆) 55년) 7월 10일 무자 3번째기사

 ●경기 관찰사 김사목이 교동·부평·인천 등의 해일 피해에 대해 보고하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장계하기를, “교동(喬桐)·부평(富平)·김포(金浦)·인천(仁川)·안산(安山)·통진(通津)·풍덕(豊德)·영종(永宗) 등 8개 고을과 진(鎭)은 이달 17일 조수가 불어났을 때 동풍이 갑자기 불며 파도가 높이 밀려오는 통에 바닷가의 제방이 충격을 받아 파손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짠물이 넘쳐서 모든 곡식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교동에서는 무너지고 깔린 민가가 71호이고 부평 석관면(石串面)과 모월관면(毛月串面)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무너지고 터진 제방이 모두 51개소나 됩니다.

피해를 입은 밭은 40여 섬지기나 되며, 파괴된 소금가마는 20개 정도됩니다. 김포의 검단면(黔丹面)은 여러 곳에 제방을 쌓았지만 피해를 입은 전토는 모두 58섬지기이며, 민가 3호도 무너지고 깔렸습니다. 그리고 소금가마가 9개 정도 파괴되었습니다. 인천·안산·통진·풍덕·영종 등 5개 고을과 진의 바다를 낀 여러 면에서 제방이 무너지고 터져 토지가 피해를 입은 곳이 형언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해일은 근래에 없었던 일로서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무너지고 깔린 민가의 구제는 곡물과 달풀[草薍]로 구별하여 주어서 안정을 되찾게 하고, 무너진 제방과 침몰된 소금가마는 물이 빠지는 대로 고쳐 쌓도록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교동 수사의 장계로 인하여 금방 글을 만들어 하교하였는데, 부근 고을의 무너진 소금가마와 교동의 기본조세는 감사와 의논하여 즉시 탕감하여 턱없이 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돌보아 구제하는 것도 또한 교동의 전례대로 하라.”하였다.

 【영인본】46책 154면【분류】*과학(科學)/*구휼(救恤)/*재정(財政)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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