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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조실록(202-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0)정조 39권, 18년(1794 갑인/청 건륭(乾隆) 59년) 4월 12일 무진 5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명식이 경재·시종·백관과 함께 합문 밖에 나아와 면대를 청하다
병조 판서 이명식이 경재·시종·백관과 함께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합문 밖에 나아와 면대를 요청하였다. 명식은 귀양보내고 따라온 경재들은 모두 김포군(金浦郡)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영인본】46책 463면【분류】*사법(司法)
 
21)정조 41권, 18년(1794 갑인/청 건륭(乾隆) 59년) 11월 16일 경자 1번째기사

●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 사관에게 별도로 내린 유시. 여러 어사와 사관의 결과 보고
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 사관(摘奸史官)에게 별도로 유시하기를,【광주(廣州)·죽산(竹山)·양성(陽城)의 어사는 박윤수(朴崙壽)이고, 고양(高陽)·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豊德)의 어사는 홍낙유(洪樂游)이고, 이천(利川)·여주(驪州)·음죽(陰竹)의 어사는 정내백(鄭來百)이고, 적성(積城)·마전(麻田)·연천(漣川)·삭녕(朔寧)의 어사는 정약용(丁若鏞)이고, 양천(陽川)·김포(金浦)·부평(富平)·통진(通津)·교하(交河)의 어사는 채홍원(蔡弘遠)이고,

영평(永平)·포천(抱川)의 어사는 정이수(鄭履綬)이고, 금천(衿川)·안산(安山)·남양(南陽)·인천(仁川)의 어사는 유사모(柳師模)이고, 과천(果川)·용인(龍仁)·진위(振威)의 어사는 이조원(李肇源)이고, 양지(陽智)·안성(安城)의 어사는 정동관(鄭東觀)이고, 양근(楊根)·가평(加平)의 어사는 정만석(鄭晩錫)이고, 교동(喬洞)·강화(江華)의 적간 사관(摘奸史官)은 조석중(曺錫中)이고, 양주(楊州)·광주(廣州)의 적간 사관은 서준보(徐俊輔)와 구득로(具得魯)이고, 금천(衿川)·수원(水原)·광주(廣州)의 적간 사관은 정문시(鄭文始)이고, 지평(砥平)의 적간 사관은 이면승(李勉昇)이다.】
 
“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이 어사의 직임이다. 비단옷을 입는 것은 그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요, 도끼를 지니는 것은 그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근래 혹 각도에 보낸 사람들이 그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어찌 전적으로 그 사람들만을 책할 수 있겠는가. 조정이 사람을 제대로 뽑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하여 파견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중궁궐에서 어떻게 세세히 살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천리나 되는 경기 지방에 흉년이 들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혜택이 아래로 미치지 않고 폐단이 위로 보고되지 않는지라, 고을이 황폐해져서 마을 개가 꼬리치지 않으며 못에 기러기가 모여든다 하니,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직 어사뿐이며, 관리들이 눈짓하며 두려워하는 것도 오직 어사일 뿐이다.

조정이 빙문(憑問)하여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도 오직 어사의 말을 믿고 징험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너희들에게 나누어 명하는 거조가 있는 것이니, 보고 듣기에 전심하고 그 종적을 비밀스럽게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몇 고을을 넘지 않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그

리하여 찌를 뽑아 아래 사정을 구별하면 자연 살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맡은바 직분을 삼가하여 관부와 시장, 촌락을 드나들면서 세세히 조사해 모아서 조정에 돌아올 때에 일일이 조목별로 나열해 아뢰도록 하라. 인(印)과 장부를 현장에서 잡은 경우가 아니면 혹시라도 경솔하게 먼저 창고를 봉하지 말라. 무릇 황정(荒政)에 도움이 되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들도 탐문하여 아뢰고, 특별히 뽑은 뜻을 저버리지 말고 그 직분에 걸맞게 하도록 하라.
 
1. 흉년에 조세를 감해주는 것은 실제 감해준 수대로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기가 어렵다. 수령이 사사로이 쓰거나 아전들이 훔치거나 하는지 특별히 살펴보도록 하라.
 
1. 산전과 화전에 대해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는 폐단은 곳곳마다 다 그러하다. 지난번 완백의 장계에 따라 여러 도에 엄하게 신칙하였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의 여부를 각별히 염탐하고 법을 범한 자는 나타나는 대로 논계하라.
 
1. 지난번 진휼청의 초기에 따라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일을 경외에 엄히 신칙한 명이 있었다. 수령된 자가 과연 마음을 다해 실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가에서 보내준 곡식이 또한 중간에서 소모되고 있지나 않은지에 대해서도 각별히 염문하도록 하라.
 
1. 이번에 정지하고 대납케 한 것은 한결같이 호를 뽑은 대로 하고 있다. 만약 혹시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지 못했거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 들어가서 빈부가 서로 뒤섞이고 허실이 서로 섞인 경우가 있다면, 이것이 어찌 호를 뽑아 정지하고 대납케 한 본 뜻이겠는가.

방방곡곡 몰래 다니면서 어느 호가 우심과 지차 중 어떤 등급에 들어갔는지를 물어보고 그 정지하고 대납하는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견휼 조건과 비교해 보아서 고찰하여 논계할 바탕을 삼으라.”하였는데, 여러 어사와 사관이 복명하였다. 광주·죽산·양성 3읍의 어사 박윤수가 서계하기를,
 
“양성 현감 권순(權栒)은 정령을 엄하고 급하게 단속할 만한 위엄도 없고 간사한 것을 살필 만한 명찰함도 없습니다. 마을에서 돈을 거두는 것은 불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세를 견감해주기 위해 호를 뽑는 것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견책하여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고양·파주·장단·풍덕 4개 읍의 어사 홍낙유가 서계하기를,
 
“파주 목사 조택진(趙宅鎭)은 호를 뽑는데 누락한 것이 많아서 고을 백성들이 억울하다고 하며, 수미(需米)를 퇴짜를 놓아 거리에서 소리치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견책하여 파직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장단 부사 이진익(李鎭翼)은 호를 뽑는 것을 전적으로 아전과 향임에게 맡겨서 조세를 견감해 주면서 빼앗는 것이 많았으니, 재해를 입은 흉년의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요구하기가 어렵겠습니다.”하고, 적성·마전·연천·삭녕 4개 읍의 어사 정약용이 서계하기를,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은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주고 재결을 도둑질해 먹었으니 그 죄를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삭녕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은 화전(火田)에 지나치게 세를 물리고 향임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체차되어 옮긴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양천·김포·부평·통진·교하 5개 읍의 어사 채홍원이 서계하기를,
 
“양천 현령 심공엽(沈公燁)은 조세를 견감해줄 전결을 뽑을 때 혹 원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개 양천은 재해를 구제해주는 정사를 함에 있어 실로 몹시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묵어서 황폐해진 것이 29결인데 호의 이름이 양안(量案)에 들어가 백징(白徵)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땅히 변통을 시행해야 될 듯합니다.
 
부평 부사 강명길(康命吉)은 재결은 훔쳐먹고 군보에게는 첨징하여 허다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통진 부사 김이용(金履容)은 물에서 건진 쌀과 돈을 가지고 요판(料販)하였고, 환자미의 조세로 이익을 남겼으며, 칙사의 접대 비용을 제멋대로 썼고, 뱃사람들에게 가징(加徵)하였으니, 그 죄상을 논하여 중한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양지·안성 2개 읍의 어사 정동관이 서계하기를,
 
“양지 현감 홍욱호(洪旭浩)는 조세를 견감해주는 일을 균등하게 하지 않았고 호를 뽑는 데도 뒤섞인 것이 많았으니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하고, 교동·강화의 적간 어사 조석중이 서계하기를,
 
“전전번 교동 부사 허근(許)은 배 만들 재목을 발매하여 사사로이 써버렸으며, 빌려쓰는 것이라 칭하고는 비장과 향임의 첩(帖)을 팔았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는 마땅히 엄하게 감죄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하고, 금천·광주·수원의 적간 사관 정문시가 서계하기를,
 
“금천 현감 홍경후(洪景厚)는 아전과 향임이 재결(災結)을 훔쳐먹는 것을 전혀 살피지 못했으니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시·원임 대신, 각신, 이조·병조 판서, 비국의 유사 당상, 경기 감사 및 어사 등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양천 등 4개 읍의 어사인 채홍원의 서계 중에서 말한, 양천 현감이 30결을 백징(白徵)한 일에 대해서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한 뒤 고르게 조세를 견감해 주게 하소서. 부평 부사 강명길에 대해 어사의 서계 중에서 말한 허다한 죄상은 모두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니 먼저 파직한 후에 잡아들이게 하고, 훔쳐먹은 수량은 일일이 징수해서 민간에 지급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해부로 하여금 엄하게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서 법에 따라 중하게 다스리도록 하라.”하였다. 이소가 또 아뢰기를,
 
“어사의 서계 중에서 논한 전 통진 부사(通津府使) 김이용(金履容)의 탐욕스럽고 불법을 저지른 죄에 대해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조사하게 하고, 사사로이 쓴 것은 부평 부사(富平府使)의 예에 따라 민간에 돌려주게 하소서.
 
전 연천 현감(漣川縣監) 김양직(金養直)은 범한 바가 장오죄에 관계되니 한결같이 나문하여 죄를 처단하시고, 그가 팔아 먹은 것은 수를 따져서 징수해내도록 하되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것은 수량을 나누어 기한을 물려주도록 하소서.
 
전 삭녕 군수 강명길(康命吉)은 바야흐로 현재 맡고 있는 부평의 일로 잡혀온 것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엄하게 조사해 보고하게 하되 문목을 첨가하여 공초를 받도록 하소서.
 
전 교동 부사(喬洞府使) 허근(許)의 허다한 범죄는 참으로 증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해부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게 하여 그가 스스로 착복한 수를 일일이 징봉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허근의 일은, 그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을텐데 어찌 차마 작년 교동에서 탐오하고 불법스런 죄를 저질렀겠는가. 먼저 해부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여 엄히 가두어놓고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이조 판서 이치중(李致中)이 아뢰기를,
 
“금천 현감 홍경후(洪境厚)는 어사의 계사에서 재해의 구제 정사를 살피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먼저 파직하고 후에 나문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
 
“정사를 한 것이 분명치 못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소한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때에 이 고을을 생무지의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우선 논하지 말고 앞으로 정사의 근만을 살펴보아서 처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다시 혹 소홀히 하는 잘못이 있다면 또 무엇을 돌아보고 핑계대겠는가. 마땅히 곱절의 형률을 시행할 것이니 이러한 내용으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소가 아뢰기를,
 
“재결을 판정해주는 법의 뜻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아전과 향임이 훔쳐 먹는 것이 이처럼 낭자하니, 해읍의 향색(鄕色)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당 현감을 처음에는 논하지 않고자 하였는데, 사관의 서계 중에서 전결의 조세를 감면해주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논열한 뒤이니, 정말로 그가 살피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막론하고 국법상 묻지 않을 수 없다. 해부로 하여금 나문하여 사실을 조사함으로써 처결할 바탕을 삼게 하라.” 하였다. 치중이 또 아뢰기를,
 
“파주 목사 조택진과 장단 부사 이진익은 어사의 서계 중에서 이미 논열하였으니, 아울러 파출하고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다시 물을 만한 일이 없으니 잡아다 처리하는 것은 논하지 말고 조택진에게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치중이 아뢰기를,
 
“양성 현감 권순을 파직하시고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처리하게 하소서. 고양 군수(高陽郡守) 왕도상(王道常)은 세 어사의 서계 중에서 모두 선량하다고 칭찬하였으니 승진시켜 서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인본】46책 521면【분류】*왕실(王室)/*행정(行政)/*재정(財政)/*구휼(救恤)/*호구(戶口)/*사법(司法)/*인사(人事)

22)정조 41권, 18년( 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11월 19일 계묘 3번째기사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회방을 맞은 이육에게 상을 주라 명하다

통진부(通津府)에 명하여 을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회방(回榜)을 맞은 사람 이육(李堉)에게 해도로 하여금 입을 거리와 먹을 거리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고 총관(摠管)에 자리가 있거든 의망해 들이라고 하였다.
 
【영인본】 46 책 523 면【분류】 *인사(人事)

23)정조 41권, 18년( 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12월 30일 계미 2번째기사

●영남 위유사 이익운이 별단을 올리다
영남 위유사 이익운(李益運)이 별단을 올려 아뢰기를,“1. 통진부(通津府)에서 패몰된 밀양(密陽)의 조운선에 실었던 미두(米豆)의 수량은 모두 4천 3백 14석 7두 남짓이었습니다. 짐을 실은 배가 전복했을 경우 곡물을 나누어 징수하는 법[臭載穀物分徵法]에는 증미(拯米) 1석 중에서 9두 1승 2합은 배가 패몰된 지방의 고을에서 새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열미(劣米) 5두 8승 8합은 본래 곡물을 냈던 고을에서 납부하여야 하며, 건지지 못한 수량은 감색·사공·격군에게서 징수하는 것이 본래부터 《통편(通編)》에 실려 있는 바꿀 수 없는 일반적인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번 통진에서 전복된 배의 곡물을 나누어 징발한 법은 이와 달라서 이미 건져냈는지 못 건져냈는지를 불문하고 말린 쌀과 열미의 전 수량을 배에 탔던 감색 및 사공·격군 등에게서 나누어 받아들였습니다. 신이 밀양 경내에 도착하자 길을 막고서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백성들의 태반은 바로 사공과 격군들의 이웃이나 친족이었습니다.

삼랑창(三浪倉)에 다다르고 보니 이 창고는 조운하여 옮기는 곳인데 부락이 쇠잔하고 인가도 드물었습니다. 그 까닭을 그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친족에게 징수하는 데에 시달려서 도망간 자가 이미 많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침탈을 견디지 못하여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부에 들어간 뒤에 곡절을 상세하게 탐문해 보니, 4차례의 조운선이 통진에서 패몰된 뒤로 해도에서 즉시 규례대로 장계로 보고하지 않고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새 쌀로 바꾸어 내겠다고 핑계대었습니다. 이미 건져낸 쌀 9백 89석 남짓을 매 석당 2냥 2전으로 발매하여 돈을 거두고 그 나머지는 전 수량을 새 쌀로 바꾸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조에서는 쌀 한 석당 값이 4냥이고 대두는 한 석당 값이 2냥이며, 선혜청은 쌀 한 석당 가격이 6냥입니다.

통진에서 발매한 2냥 2전 외에 부족한 수는 모두 사공과 격군에게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웅천(熊川)에서 바쳐야 할 것이 4천 7백 16냥이고, 김해(金海)에서 바쳐야 할 것이 3천 3백 93냥이고, 영산(靈山)에서 바쳐야 할 것이 1천 2백 50냥이고, 밀양에서 바쳐야 할 것이 1만 1천 7냥으로 합쳐서 1만 9천 3백 67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사공과 격군이란 자들은 모두 포구에 사는 지극히 가난한 무리들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을 겪으면서도 입에 풀칠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한 되의 쌀이나 한 푼의 돈이라도 실로 독촉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임자년 이후로 죽는 이가 계속 잇달았으니 이웃과 친족에게 징수하는 것이 형세상 부득이 한 것이었지만 3년 동안 독촉하여 거둔 것이 3천 2백 냥에 불과하였습니다.
 
대개 이 조운법은 본래 엄중하여 범한 자에게 법을 시행한다는 것이 《통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해당 도신이 조법(漕法)대로 시행하지 않고 새 쌀로 바꾸어 바친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내어 감색과 사공·격군에게 두루 거두고 있는데, 이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년의 혜택은 전에 없던 것이어서 온 도가 모두 기뻐하여 고무되었는데, 증열미두(拯劣米豆)도 정지하거나 감면해 주는 쪽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통진의 쌀은 거론되지 않아 4읍의 사공과 격군만 유독 감면해 주는 은혜를 받지 못했으니,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곡식의 명칭이 열미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지극히 쇠약해진 백성들에게서 저 적지 않은 돈과 쌀을 징수한다면 비록 피부를 긁어내고 골수를 빼낸다 할지라도 실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혹 다른 고을로 옮겨가 살려고 하면 이웃에게 징수하는 피해를 당할까 염려한 나머지 떼로 일어나 공격해 내쫓아서 살 수 없게 만든다고 하니, 듣기에 참혹하고 보기에 불쌍합니다. 똑같은 백성이고 똑같은 은전인데 누구는 은혜를 받고 누구는 빠지는 것은 균등하게 보살펴 주는 정사에 흠이 될 것입니다.

법전에 따라 증열미(拯劣米)로 옮겨 기록하여 일체 감면토록 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조금씩 나누어 받아들인다면 백성들도 힘을 펼 수 있는 방법이 되고 경비도 크게 손실을 가져올 염려가 없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양전(量田)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세금을 징수당하는 것과 경상 부세가 줄어드는 것이 모두 경계가 바르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10년마다 한 번씩 다시 양전하는 법은 바로 옛사람의 원대한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도를 막론하고 경자년 이후로 지금까지 옛 것을 인순해 오기만 하여 전제(田制)의 문란함과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든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한데 영남 지방은 더욱 심합니다.
 
이번에 신의 행차에 달려와 호소하는 백성들은, 모두 임자년 수재로 땅이 뒤집어지고 모래가 덮인 곳이 많았는데 작년에 도로 기경(起耕)한 것으로 쳐서 백징(白徵)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일컬으며, 여러 읍의 백성들이 한결같은 소리로 억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임자년 이전에도 수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천이 뒤집어지고 모래에 덮인 땅으로 쳐서 영원히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경우에 포함시킨 토지가 이처럼 많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 이번에 기경된 토지를 원장부와 비교해 보건대 3분의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영원히 면제해 주는 토지는 해마다 증가하고 새로 기경한 토지는 전혀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현재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개간되지 않은 토지가 없으니 수천여 리를 두루 돌아다녀 봐도 한 평의 버려진 황무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토지를 개량(改量)한 지가 지금 이미 70여 년이나 되었으니, 연수가 오래된 포구 땅에는 반드시 진흙이 생겨난 곳이 많을 것이고, 연해 지방의 제언(堤堰)에도 반드시 새로 개간된 곳이 많을 것이며, 내가 뒤집어져 모래에 덮였던 곳도 반드시 도로 기경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 새로 기경된 곳과 그 묵어 버려진 토지를 비교해 봐서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면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묵은 곳은 있으나 개간한 곳은 없고 줄어든 곳은 있으나 더 늘어난 곳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았건 줄었건 간을 막론하고 영남의 백성들이 이처럼 원통하다고 하고 있으니, 한 번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먼저 제대로 된 수령을 얻은 후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법이니, 온 도를 한꺼번에 개량하는 것은 비록 의논할 수 없다 하더라도 먼저 정도가 심한 곳부터 시작하여 1년에 십여 고을씩 차차로 개량해 나간다면 3, 4년을 지나지 않아서 일을 완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년 가을을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거행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소서.
 
1. 도내에 통영(統營)의 창고가 있는 곳이 다섯 군데인데, 바로 진해의 창포(倉浦), 남해의 곡포(曲浦), 밀양의 삼랑(三浪), 하동(河東)의 목도(鶩島), 고성(固城)의 고성창(固城倉)이 이것입니다. 이 다섯 마을은 본래부터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환곡의 폐단이 고질적인 것이 되었는데 별도로 통영 창고를 설치하자 곡식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도내의 고을에 쌓여 있는 통영 곡식의 수량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일체 본읍에 맡기고 단지 모곡만을 취해가기 때문에 환곡을 받아가고 들일 즈음에 별로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군데의 통영 창고는 본읍에서 전혀 간섭하지 않고 감색과 고자(庫子)도 모두 영문에서 임명해 부리는 사람들로서 이들에게 창고 장부를 일임하여 그들이 하는 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에 곡식 색에 대해서는 일부러 퇴짜를 놓고, 섬을 말질할 때는 반드시 높이 넘치게 하며, 환곡을 받을 때 감모분으로 받는 것을 절제 없이 하고, 환곡을 흩어줄 때는 사납게 구는 등 멋대로 농간을 부리며 한갓 매질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환곡 한 석을 바치는 데 거의 20두가 넘으니 이것이 진실로 환곡을 바치는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순영의 용당창(龍塘倉)과 좌병영의 경주창(慶州倉)도 모두 병영의 교리가 주관하기 때문에 모두 이런 폐단이 있습니다.
 
대개 이 창고의 곡식을 당초 설치했을 때에는 무슨 의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곡식도 수백 포에 불과하였고 창고도 너댓 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창고 밑에 사는 약간의 민호들에게만 환곡을 나누어 주고 받아들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설치한 지가 오래되자 곡식 장부도 점점 복잡해지고 모곡 위에 또 모곡이 생겨나 해마다 증가하면서 옛날에는 약간의 민호에게만 나누어 주던 것을 지금은 거의 절반의 고을 민호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7개 창고 부근에 있는 몇 군데의 면리는 이미 본읍의 환곡을 먹고 또 해당 창고의 환곡을 받는 바람에 두 군데서 독촉을 받는 것이 이미 쌓인 폐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통영 창고 보기를 마치 범이나 이리 보듯이 하여 봄에 환곡을 받으면 가을에 갚을 것을 미리 근심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통영 창고가 저기 있으니 쇠그물이 풀리지 않는구나. 불쌍하다, 우리 백성들이여. 언제나 편히 살꼬.’ 합니다. 이것은 신이 목격한 바로 바로잡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흉년을 당하여 연해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서는 곡식 장부가 크게 줄어들어 받아들이는 것이 많지 않으니, 백성들을 진휼하고 민호에 환곡을 나누어주는데 두루 배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쪽 것을 옮겨다 저쪽을 보충하여 차차 옮겨 보내면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곳을 보태주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통영 창고 근처에 사는 백성들의 뼈에 사무친 폐단도 조금 덜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순영의 용당창과 좌병영의 둔창도 일제히 혁파하고, 이전한 곡식은 그대로 각 해당 고을에 맡긴 뒤에 순영의 곡식이든 통영의 곡식이든 병영의 곡식이든 상관말고 ‘순영 별도회계 규례[巡營別會例]’에 의거하여 내년부터는 본읍에서 받아들여 머물려놓고 단지 모곡분만을 각 해당 영문으로 수송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라고 분부하소서.
 
1. 기장현(機張縣)은 대마도(對馬島)와 가장 가까워 표류한 왜인들이 와서 정박하는 일이 거의 없는 달이 없습니다. 변방의 보고 규례는, 처음에는 드러난 형상을 멀리서 관찰하여 알리며, 다음은 어느 곳에 정박했는지를 보고하며, 세 번째는 무슨 일로 왔는지 실정을 물어 보고하고, 네 번째로는 어느 날 배가 출항할 것인지 보고하고, 다섯 번째는 어느 지경에서 교체하였는가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풍세가 좋지 못하여 즉시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있으면 거의 제한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보고를 전해야 하며 감히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아문이 아홉 군데나 되므로 공사(公事)를 맡은 자가 다시 고을의 사방에 사는 백성들을 돌아가며 차역시키는데, 일을 맡은 자의 노자는 경내에 사는 백성들에게 똑같이 거둬들여서 거리를 계산하여 지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선이 한 번 정박하면 온 경내가 소란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돈을 거두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고용하는데 매번 드는 비용이 많을 경우에는 80, 90금까지 가고 적을 때도 70, 80냥을 내려가지 않으니, 1년 동안 드는 비용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거의 1천금이나 됩니다. 저 불쌍하고 쇠잔한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지탱하며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때때로 물에 막히거나 해서 시각이 지체되면 각영에서 추고해 다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인정(人情)에 들어가는 비용을 전적으로 일을 맡은 자가 부담하니 한 번 일을 맡은 사람은 집안 망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옛날 전성하던 민호가 날로 점점 쇠잔해져가고 온 고을이 근심에 쌓여 모두 짐 싸들고 떠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 기장현 백성들의 절실하고 고질적인 폐단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기장현이 이와 같으니 다른 연안의 고을들은 미루어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좌우도를 막론하고 왜선이 정박한 뒤에 첩보하는 규정을 단지 수계 아문(修啓衙門)에 때맞춰 치보(馳報)하는 것만 규례대로 하고, 그 외의 각처에는 단지 처음 발견했을 때와 어느 곳에 정박을 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에 대해서 세 차례만 보고하도록 규식을 정하여 시행한다면, 변방의 보고가 소홀해질 염려도 없을 것이고 연안 백성들의 짐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변방의 정세에 관계되는 것이라 사안이 중대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채해(菜海)는 바로 어선이 모이는 곳인데 얼마간의 폐단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신이 본 지역에 도착하여 여러 방면으로 염찰해 보았더니, 좌수영에서 진상하는 청어(靑魚)와 서울과 지방의 잡비가 진실로 모든 바닷가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었습니다.
 
매번 겨울철이 되면 해영에서 각 포구로 교리(校吏)를 내보내는데 한 달이 넘도록 머물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음식을 대접하게 하고 각 배가 잡아들인 것은 비록 한두 마리라도 잡는 대로 영중에 바치게 하는데 그 값을 내주는 일은 없습니다.

또 서울에서 쓸 비용이라 칭하고 경내의 해선(海船)과 강선(江船)에 대해 배가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1척당 3냥씩을 거두어들이는데, 비록 한줌의 담배를 실은 배라 할지라도 징수하지 않는 선박이 없습니다. 연해안 각 고을의 배도 또한 같은 예로 수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세한 곡절을 알고자 하여 기장 현감 이현원(李賢遠)으로 하여금 조사관을 정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영에서 청어를 진상하는 총수는 모두 1백 69마리이고 동서강의 각 포구에 있는 배는 모두 1백 54척이다. 매척마다 3냥의 돈을 대신 받아들여 모두 4백 95냥인데, 그중에서 1백 69냥은 청어 1백 69마리를 잡는 대로 값을 주고 70냥은 사옹원의 뇌물이고 2백 2냥은 병영의 경비로 보내고 그 나머지는 색리들의 사사로운 용도가 되었는데, 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다 보니 바로 잘못된 규례가 되어버렸다.

청어를 봉진하는 데는 본래 정해진 기한이 있어 각 포에서 잡은 것을 얻는 대로 모두 바치게 하는 것은 기한에 맞추어 봉진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른바 값을 준다는 것이 모두 아전의 손에 빼앗기게 되니 바닷가 백성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배마다 3냥을 거두는 것도 이미 법 밖의 일인데 하물며 2백여 냥이나 영의 용도에 소속시키며 원래 봉진하는 물품의 값은 중간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색리들이 이를 인연하여 해독을 끼치고 있으니 모두 매우 놀랍기만 하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본영에 도착하여 일체 혁파하고 절대 다시는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히 해당 수사에게 신칙하고 연해안의 각읍에도 한결같이 관문으로 신칙하였습니다.
 
또 해역전(海役錢)이란 명색이 있는데 이는 더욱 바닷가 민호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에 수영에서 6백 80냥을 떼어내어 본전을 소관하는 각포에 나누어주고 매 1냥마다 2푼씩 이식을 취하여 지금까지 거두어들여 영문에서 필요한 경비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해마다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른바 원전(元錢)을 최초로 받아간 사람의 이름 아래에 기록해 놓아 그대로 누인 부채가 되어 버렸습니다. 시행한 지 오래되자 받아간 사람들은 거의 모두 죽고 자손에게 대대로 전습되어 오고 있는데 유망하거나 호가 끊길 경우에는 이웃과 친족에게 두루 미치어 해독이 포구에 흐르고 원성이 바다에 가득 찼습니다.

50년 동안 달마다 이자를 계산해 보면 거의 1만 냥에 가까우니 영의 비용이 아무리 어렵고 구차하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사정이 진실로 불쌍합니다. 엄히 본영에 신칙하여 부채를 탕척하게 하여 바닷가 백성들의 폐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합니다.
 
1. 본도에서 전세와 대동세를 돈과 목면으로 상납하는 규례에는, 산군(山郡)과 영(嶺) 밑 고을을 등급을 나누어 구별하여 영 밑의 여러 고을들의 경우 전세는 모두 돈으로만 상납하고, 대동세는 돈과 목면을 반씩 섞어서 납부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목면이 흉년이 든 해를 당하더라도 상납하는데 기한을 어길 근심이 없으니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방도입니다.

영양(英陽)은 죽령(竹嶺)의 옆에 있고 안동(安東)·예안(禮安)과 땅이 서로 접해 있으므로 토산물도 별로 다른 점이 없으니 제반 토지에 따른 공물도 두 고을의 규례에 따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본현이 중간에 신설된 고을이라 당초 분정(分定)할 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세의 상납은 일체 산군의 예를 따르고 있으니, 실로 영양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본현은 과연 영 밑 고을과 접해 있고 목화도 토질에 적합한 곳이 아니니, 영 밑 고을의 예에 따라 시행하여 홀로 은혜에서 소외되어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도록 분부하소서.
 
1. 본도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한 것은 관동·관북 지역에 흉년이 들 경우 곡식을 옮겨줄 자본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초에는 연일(延日)·흥해(興海)·장기(長鬐)·경주(慶州)·청하(淸河) 5개 읍이 각각 한 개의 창고를 차지하고 봄가을로 조적(糶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주와 장기 두 고을은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본읍의 경계에 옮겨 설치하고 단지 연일·흥해·청하 3개 읍의 창고만 있습니다.

연일·흥해 두 읍은 접해 있는 지경이 서로 가까워 폐단이 되는 줄을 모르나 청하만은 다른 고을의 경내를 넘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하며 서로 간의 거리가 40여 리나 되므로 조적하느라 왕래하는 데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읍민의 무리들은 이것을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건대, 본현은 동북으로 곡식을 실어 옮기는 배가 지나가는 길목입니다. 포항창에서 짐을 꾸려 출발한 뒤에 매번 본현의 포구에 도착해서 배가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리곤 합니다. 만약 이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창고 안에 저축해 두고 배가 포구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편의에 따라 더 실으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멀리 40리나 떨어진 곳에 두었다가 싣고 와 다시 이곳에 정박하기보다는 여기에서 곡식을 내다 싣는 것이 훨씬 편리할 것입니다. 더구나 경주·장기 두 고을의 전례도 있으니, 청하도 본현의 포구에 창고를 설치하게 하여 봄가을로 조적을 하게 함으로써 불시의 필요에 대비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1. 조령과 죽령은 얼마나 중대한 관방(關防)입니까. 조령 성안에서는 소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따위의 절목을 별장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법을 범하고 베지 못하여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합니다. 그런데 성밖에 이르러서는 원근의 거민들이 집 지을 재목이라 칭하고 날마다 도끼로 찍어대는데 금지하지 않으니, 어떻게 벌거숭이 산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죽령은 이보다 더욱 심합니다. 소나무·회나무·잡목 등을 찍어내지 않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불을 질러 밭을 개간하기까지 합니다. 신이 봄 사이에 사명을 받들고 가는 길에 그 상황을 목견하였습니다.

그 관방(關防)을 중히 하고 송금(松禁)을 엄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이와 같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여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워서 일체 금단하게 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따라 중하게 다스리게 하며, 이를 신칙하지 않은 수령은 장계로 보고하여 논죄하게 하소서.
 
1. 동래(東萊)는 변방의 독진 아문(獨鎭衙門)이니, 군제와 관계되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본부의 유황군(硫黃軍) 3백 명이 27개 고을에 산재해 있는데 매년 바치는 신포(身布) 각 1필 대신 돈 2냥을 거두어 들여서 장교와 군사들의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혹은 한두 명씩 또는 서너 명씩 얼마 안 되는 숫자가 각 고을에 산재해 있는데 먼 곳은 5, 6백리가 되고 가까운 곳도 3백 리 이하인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년 본부에서 장교를 정해 보내서 고을마다 다니며 거두어 오고 있는데 여러 읍들이 제때에 거두어 주지 않아서 더러는 3, 4차례 왕복하기까지 하고 혹은 한 달도 넘게 머물기도 하니, 이와 같은 즈음에 이 읍이나 저 읍이나 간에 모두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영의 방군(防軍)은 여러 고을에 두루 퍼져 있으나 신포를 각자 그 고을에서 거두어 받아 직접 영문에 납부합니다. 이 유황군 3백 명을 본부에 나눠준 방군으로 바꾸어 본부의 역에 응하게 한다면 수영에 있어서도 별 손해가 없을 것이고 본부에 있어서도 실로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해당 수신과 해당 부사에게 분부하여 바꾸어 정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비변사가 복주하기를,“통진부에서 패몰된 밀양의 조운선 쌀에 대한 일입니다. 증열미(拯劣米)를 나누어 징수하는 것은 본래 그 규례가 있는데, 밀양에서 미두(米豆)를 새 쌀로 바꾼다는 명색하에 수량대로 변상하도록 독촉함으로써 그 폐해가 온 사방의 이웃과 친족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당초의 곡절은 잘 모르겠으나 금년에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고 견감해 주는 은혜를 모든 도가 똑같이 받았는데 유독 한결같이 베풀어주는 은택을 입지 못하여 이렇게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4읍의 증열미두(拯劣米豆)는 다른 예에 의거하여 기한을 물려주고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게 하되 그 연조(年條)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3냥이나 2냥 5전을 받는 것이 본래부터의 정식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연조를 상고하여 증열미로 옮겨 기록해서 다른 예에 따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전지를 개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양전(量田)에 대해서는 조정의 명령이 이미 오래 전에 있었고 다른 도의 여러 고을에서도 이미 시험해 본 적이 있으나 혹 농사가 흉년이 들었거나 혹은 고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관계로 아직까지 차례대로 거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정의 명령을 이미 반포하였고 백성들의 소원도 간절하니 영읍에 신칙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들 편리한 방도를 상의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독촉하여 거행하게 할 것이 아니니, 다시 조령(朝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놔두소서.
 
통영 창고에 대한 일입니다. 통영의 창고가 폐단이 된 것은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읍이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연로 고을의 민정(民情)이 정말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7개의 창고를 한꺼번에 혁파하는 것은 어렵고 삼가해야 할 일입니다.

통영의 창고이든 순영이나 병영의 창고이든 막론하고 영의 비장이나 군교를 보내지 말고 단지 해당 고을로 하여금 감색을 차출하게 한 뒤, 해당 고을에서 다른 아문의 예에 의거하여 환곡을 출입시키고, 그중 곡부가 가장 많은 곳은 곡식이 적은 고을로 적당한 양을 헤아려 옮겨서 무역을 하거나 전운(轉運)하게 한다면, 비록 혁파한다는 이름은 없으나 저절로 폐단이 제거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통영·병영과 왕복하며 별도로 자세히 의논하여 좋은 쪽으로 선처해서 연읍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장현의 표류해 오는 왜인의 상황을 보고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왜선이 표류하다 정박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기한이 없으니 쇠잔한 고을이 거행하자면 형세상 궁박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아홉 군데에 다섯 차례씩 보고하는 것이 읍의 폐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변방의 보고가 오고가는 것은 본래부터 엄중한 일이고 첩보를 올리는 아문은 모두 관할하는 바가 있으니 그 중요도를 나누어 선뜻 의논해서 줄일 수 없습니다.

노비(路費)를 거두는 것은 크게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공사(公事)를 맡은 자에게 줄 고가(雇價)가 만일 부족하면 보태서 주는 방도에 대해서 영읍과 상의해서 좋은 쪽으로 잘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비용을 거두는 문제는 엄히 금단을 가한다는 뜻으로 해도의 수영과 병영에 분부하소서.
 
좌수영에서 청어를 진상하는 것과 경향(京鄕)의 잡비를 혁파하고 해역전(海役錢)의 부채를 탕척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선세(船稅)를 함부로 징수하여 영의 용도로 써버리다니 진실로 놀랍습니다. 참으로 엄하게 금지하고 통렬히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위유사가 이미 관문을 보내서 영과 읍에 신칙하였으니, 스스로 영원히 견감하고 제거할 것으로 다시 번거롭게 조정에서 명령할 필요는 없습니다. 해역전에 대해서는 50년 동안 누인 부채로 해마다 그 자손들에게 징수해 왔으니 명색이 바르지 못하고 폐단도 고질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다시 침징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여 해도의 수신에게 분부하소서.
 
영양현(英陽縣)의 전세와 대동세를 한결같이 영 밑에 사는 고을의 예에 따르게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똑같은 영하읍인데 순전히 돈으로만 내고 혹은 목면으로 바친다니 일이 혼란스러워 억울하다고 일컫는 것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체모가 중하여 갑자기 변통할 수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민정과 일의 형편을 살펴보고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한 뒤 품처하게 하소서.
 
청하의 포항창(浦項倉)에 대한 일입니다. 40리나 지경을 넘어서 환곡을 내오고 들이는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폐단이 됩니다. 관동과 관북으로 가는 뱃길의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 또 같은 현 포구에 있으니 창고를 옮겨 곡식을 쌓아 두는 것이 진실로 편리할 듯합니다.

그러나 포구를 넘어 창고를 설치한 데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니, 포항(浦項)의 곡물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 역시 도신으로 하여금 관문으로 본현에 물어서 사세를 참작하여 의견을 갖추어 장문으로 보고한 뒤 품처하게 하소서.
 
죽령의 일은, 비록 심상한 산일지라도 나무의 채벌을 금지하고 기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조령과 죽령은 얼마나 중요한 곳입니까. 전후로 관문을 보내 엄하게 신칙했을 뿐만이 아닌데 마음대로 채벌을 하고 심지어 화전까지 일구니, 그 관방(關防)을 중히 하고 뒤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 통렬히 금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과조를 엄하게 세워서 거듭 금령을 밝히고 만일 전처럼 법을 어기고 나무를 베는 폐단이 생기면 양도의 지방관을 드러나는 대로 논죄하겠다는 뜻으로 엄히 신칙하고 양도의 도신에게 분부하소서.
 
동래의 유황군(硫黃軍) 3백 명을 본부에서 나누어 놓은 방군(防軍)과 서로 바꾸어 역에 응하게 하는 데 관한 일입니다. 수영의 방군과 본부의 유황군이 모두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데 방군은 열읍에서 신포를 거두어 바치기 때문에 애초 폐단이 없었고 유황군은 본부에서 교리를 보내어 포를 거두기 때문에 폐단이 매우 많은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방군을 열읍에 있는 유황군과 바꾸어 정한다는 것은 둘다 편리한 방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군액을 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수신과 해당부에 분부하여 익숙히 그 편부를 상의해서 이치를 따져 보고하게 한 후에 품처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46 책 538 면【분류】 *사법(司法) / *행정(行政) / *교통(交通) / *상업(商業) / *농업(農業)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외교(外交) / *호구(戶口) / *구휼(救恤)

 24)정조 43권, 19년( 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10월 21일 무술 6번째기사

●부교리 정래백이 형정의 부당함과 기강·언로·재용 등의 폐에 대해 상소하다
부교리 정래백(鄭來百)이 상소하기를, “지금 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말하면 진정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제방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허적(許積)과 김성탁(金聖鐸)이 범한 죄와 관련하여 단안(斷案)이 일단 확정되었고 국시(國是)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죄명(罪名)을 특별히 씻어주시는 바람에 형정(刑政)이 타당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택수(澤遂)와 홍섭(弘燮)의 지속(支屬)과 같은 자들까지도 양이(量移)6036) 하거나 석방해 주도록 하셨으니, 이것은 또 어찌 된 거조이십니까. 만약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흉역(凶逆)의 잔당들이 필시 앞으로 꼬리를 물고 헛된 생각을 품으면서 머리를 맞대고 억울함을 따지려 들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지기만 합니다.
 
기강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무엄하기만 한 습속과 분의(分義)를 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함창(咸昌)의 아전이 관청 뜰에서 칼을 빼들었으니 그 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여태 법을 적용하지 않고 있고, 통진(通津)의 백성이 임금의 행차 앞에서 외람되게 하소연을 한 그 일이야말로 예전에 없었던 것인데도 통렬하게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등위(等位)와 관계가 있는 일인데 작은 일이 점점 커지다 보면 무슨 변인들 생기지 않겠습니까.
 
언로(言路)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징토(徵討)하는 일이야말로 조정의 대론(大論)이라 할 것인데, 공(公)을 사(私)가 가리기도 하고 은혜가 거꾸로 의리를 엄폐시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금령(禁令)으로 비호해 주기도 하고 엄한 분부로 입을 막아버리기도 하시기 때문에, 마음들이 이로 말미암아 서로 막히고 분위기가 이로 인해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습니까.
 
재용(財用)의 측면에서 말하건대, 태창(太倉)에서 녹봉을 반급(頒給)해 주는 것도 늘 부족한 걱정이 있고 외방 고을 창고에 남겨 둔 것도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객사(客使)가 장차 이를텐데 그 지공(支供)하는 비용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호남의 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진휼(賑恤)할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傳)에서 이른바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과 불행히도 근사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백성의 근심거리로 말하건대, 신(新)·구(舊)의 환곡(還穀)을 바야흐로 급히 독촉하여 거두면서 인족(隣族)을 침해하는 등 갖가지로 고달픔을 당하고 있는데, 관아에서는 백성의 주름살을 펴줄 정사를 생각하지 않고 있고 마을에서는 대부분 공포의 분위기만 감돌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조목 모두가 현재 당면한 급무(急務)이니, 오직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시고 통분스러운 심정으로 분발하시어, 제방의 측면에서는 엄밀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시고, 기강의 측면에서는 엄숙하게 진작시킬 방도를 강구하시고, 언로의 측면에서는 그 길을 넓혀 줄 방도를 강구하시고,

재용의 측면에서는 넉넉하게 할 방도를 강구하시고, 백성의 근심거리에 대해서는 생활을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조항에 대해서도 유사(有司)로 하여금 차례차례 거행하게 하소서.
 
한편 신이 달포 전에 명을 받들고 동래부(東萊府)에 다녀왔는데 나름대로 진달드릴 의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즉 본부(本府)의 군교(軍校)들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정사(政事)에 있어 실로 소루한 점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서쪽 변방 및 북쪽 변방의 고을과 경기도 안의 독진(獨鎭)을 두고 말하더라도 혹은 급료를 주는 군관(軍官)을 두기도 하고 혹은 오래 근무하는 변장(邊將)이 있기도 한데 동래부만은 유독 이런 규정이 없습니다.
 
중년(中年)에 조정에서 별기위(別騎衛)를 설치하고 매년 좌병영(左兵營)에서 기예를 시험한 뒤 우수한 자를 뽑아 장계로 보고해서 직부(直赴)토록 했습니다만, 일단 벼슬길을 찾아 발신(拔身)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출신(出身)한 경우도 흐지부지되도록 방치해 두고 있는 형편입니다.

심지어 한산 군교(閑散軍校)의 경우는 애당초 특별히 격려하는 방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습할 의욕이 없어진 가운데 활쏘는 기예 역시 점점 서툴어지고 있으니, 변방에서 무예를 숭상해야 하는 법도로 볼 때 소홀하기가 그지없다 하겠습 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후로 매달 기예를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뽑은 뒤 그들 모두에게 급료를 받는 군교와 오래 근무하는 장교의 자격을 부여하되 서쪽과 북쪽 변방의 예대로 해서 차차 거두어 쓰게 하고 변장(邊將) 한 자리와 말천(末薦) 한 자리를 허락해 주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실로 그들을 격려시키고 위로하는 요결이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비답하기를,
“품처할 만한 것은 품처하게 하겠다.”하였다.
 
【영인본】 46 책 607 면【분류】 *정론(政論) / *과학(科學) / *재정(財政) / *인사(人事)
[註 6036]양이(量移) : 좋은 곳으로 적당히 이배(移配)해 주는 것. ☞ 

25)정조 43권, 19년(1795 을묘/청 건륭(乾隆) 60년) 7월 5일 갑인 2번째기사

●경기에서의 진휼을 끝마치다
경기에서 진휼을 1월부터 실시하여 이때에 와서 끝마쳤다.【교동(喬桐)·남양(南陽)·부평(富平)·인천(仁川)·통진(通津)·풍덕(豊德)·안산(安山)·김포(金浦)·교하(交河)·양성(陽城) 등 고을과 영종(永宗)·화양(花梁)·덕포(德浦)·주문(注文)·덕적(德積)·장봉(長峯) 등 진(鎭)을 대상으로 총 기민 14만 8천 4백 90구에게 곡물 1만 2천 3백 30석을 나누어 주었다.】
영인본】46책 586면【분류】*구휼(救恤)

26)정조 43권, 19년( 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8월 21일 기해 1번째기사

●강도 유생들의 시권을 심사하여 뽑힌 자들을 직부 전시토록 하다
강도(江都) 유생들의 시권(試券)을 심사하여 강화(江華)의 진사 이장후(李章垕), 통진(通津)의 유학 민창려(閔昌呂), 교동(喬桐)의 유학 남궁성(南宮惺), 강화의 유학 정진명(鄭進明) 등을 뽑고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였다.
 【영인본】 46 책 595 면【분류】 *인사(人事)

27)정조 43권, 19년( 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8월 5일 계미 3번째기사

●제도의 고을 수령들을 자주 체차시키는 폐단과 관련하여 품처토록 명하다
상이 제도(諸道)의 고을 수령들을 자주 체차시키는 데 따른 폐단과 관련하여 전조(銓曹)에게 품처(稟處)토록 명하니, 이조가 묘당에 나아가 의논한 뒤 광주 부윤(廣州府尹) 서미수(徐美修), 파주 목사(坡州牧使) 서영보(徐英輔), 양주 목사(楊州牧使) 한광근(韓光近), 장단 부사(長湍府使) 신광로(申光輅), 통진 부사(通津府使) 황인영(黃仁煐), 직산 현감(稷山縣監) 조중진(趙重鎭), 전주 판관(全州判官) 윤광수(尹光垂), 함평 현감(咸平縣監) 김기헌(金箕憲), 고창 현감(高敞縣監) 남이범(南履範),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집두(李集斗),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배수(徐配修), 신천 군수(信川郡守) 조후진(趙厚鎭)은 그 지역 수령으로 잉임(仍任)시키고 오래 근무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아뢰었다.
 영인본】 46 책 592 면【분류】 *인사(人事)
 

28)정조 44권, 20년(1796 병진/청 순치(順治) 1년) 2월 17일 계사 1번째기사

●강화유수 김이익이 고한 궁궐의 가마의 왕래 일로 관원을 체직·파직하다
남소영(南小營)에 행차하여 내금위의 춘등(春等)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전날 저녁에 강화유수 김이익(金履翼)이 와서 주대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명이 있으면 의당 와서 기다려야지 어찌 감히 주대를 청하는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익이 아뢴 내용을 보니,

 “신이 양천(陽川)에 도착하여 중군(中軍)의 보고를 받았는데, 내사(內司)의 별제(別提) 두 사람이 가마 셋을 인솔하고서 죄인을 지키는 곳에서【바로 인(裀)을 찬배한 곳이다.】 나왔고, 또 가마 두 채는 다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마 한 채의 간 곳을 아직 탐지하지 못해서 천만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미 하교를 받들어 부득이 내려갑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김포 군수의 첩보에 의하면, 어제 해시(亥時)에 가마 한 채가 또 지나갔다고 하였습니”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은 이른바 가마 셋이 온 곳과 간 곳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니, 강화 유수를 다시 올라오게 하라.”하였다. 이에 각신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의 아룀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분명히 하교하소서.”하고, 여러 승지들이 또 번갈아 아뢰기를,
 “전년처럼 뜻밖의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신들이 어찌 일제히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고(嚴鼓)가 이미 울렸다.”하고는, 마침내 환궁하여 여러 승지를 다 체직하고 각신 및 별운검(別雲劍)을 아울러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낙성이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주대하기를 요청하니, 물러가라 명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찌 확실치 않은 일을 가지고 연석에서 발설한단 말인가. 또 더구나 궁궐의 가마가 왕래한 것은 예전에도 흔히 있었던 일이니, 특별히 집증할 만한 말이 없고 형적도 없는데 이로써 죄를 가한다면 도리어 일이 전도되게 된다. 오늘 파체한 제신은 아울러 분간하라.” 하였다.
 영인본】46책 630면【분류】*왕실(王室)/*군사(軍事)
 
29)정조 44권, 20년(1796 병진/청 순치(順治) 1년) 4월 29일 갑진 2번째기사

●배를 북쪽 해안에 정박시킨 강화 유수 김이익을 나포하려다가 용서하다
경기 관찰사 김문순(金文淳)과 강화 유수 김이익(金履翼)을 나포하라는 명을 내렸다가 곧바로 중지시켰다. 이전에 상이 내수사에 명하여 교자(轎子)와 장정들과 말을 강화도로 보내 비밀리에 인(裀)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이문순이 이런 기미가 있는 정보를 듣고서, 시급히 품신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입대(入對)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어찌 인견해 봐야 알겠는가. 경이 필시 잘못 듣고서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이다. 경이 먼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포하여 심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여러 승지들이 입대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미 내려갔다. 내가 왜 속이겠는가. 즉시 물러가라.”하였다. 이어서 선전관 네 명을 나누어 보내 여러 규장각의 신하들이 대궐로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도록 하고, 금호문(金虎門)에 입직한 군사들로 숙장문(肅章門)에 벌려 세워 조정의 관리 한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전교하기를,
 
“강화 유수의 처사가 대단히 경악스럽다. 아무 일이 없는 때에 무엇 때문에 배에 손을 대어 북쪽 해안으로 모아 정박시켰는가. 이는 사안이 범법에 해당되기 때문에 부절(符節)을 빼앗고 잡아다가 엄중하게 처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관가나 민간에 일이 없는 것으로 근자의 수응(酬應)하는 원칙으로 삼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일의 증표가 되는 것이었다. 강화 유수 김이익(金履翼)을 용서하고 밀부(密符)를 되돌려 주라.”하였다.
 
이전에 김이익이 장계하기를, “이달 28일 진시(辰時)에 선전관 두 명이 표신(標信)을 받들고 내수사 소속의 관원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이 때 내수사 소속의 관원들은 곧장 방수소(防守所)로 가고 선전관 장현택(張鉉宅)과 이유엽(李儒曄)은 곧장 신이 있는 영문(營門)으로 들어와서, 장현택은 부(府)에서 대기하고 이유엽이 표신을 가지고 유시(諭示)를 전하고 상경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니, 일이 의리에 관계되어 감히 경솔히 군명(君命)을 소홀하게 대하는 죄를 범할 수 없을 상황이 되어 끝내 거부하기 어렵고 또 방비를 손상시키는 일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도 없었습니다. 결국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표신을 공경스럽게 받게 되었고 선전관이 신을 통솔하여 문수진(文殊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신은 부(府)의 경계 밖까지 나왔으니 군명(君命)에 대하여는 수레가 당도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어느 정도 이행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장차 목전에 임박할 판이고 직함은 아직 갖고 있으면서 이쯤에서 가거나 말거나 내맡겨 두고 의기양양하게 나아간다는 것은 의리상 차마 말로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선전관이 신의 부절(符節)을 빼앗아 본 부로 되돌아가 부에 대기하고 있던 선전관에게 전해 주고는 곧바로 돌아와서 신을 압송하여 김포(金浦) 지경에 이르러 점막(店幕)에 구류하였습니다.
 
당일 유시(酉時) 쯤에 부에 대기하던 선전관 장현택이 뒤쫓아 와서 표신을 전하고 병부(兵符)를 되돌려 주었으며 이어서 속히 내려가라는 하교를 전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하교를 받고 사태의 전말을 치계합니다.” 하고, 또 장계하기를,
 
“신이 점막(店幕)에 구류되어 있을 무렵에, 전날 밤 이경(二更)쯤에 관복(冠服)을 갖춘 별제(別提) 한 명과 내수사의 관속들이 화려한 교자 한 채를 거느리고 곧장 올라가더니 삼경 쯤에 또 다시 관복을 갖춘 별제 한 명과 내수사의 관속들이 화려한 교자 한 채를 거느리고 내려왔습니다.

이번에 교자가 내려온 일은 신이 압송되는 도중이라 병부를 받지 못한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영문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방수(防守)에 대한 모든 조치를 더욱 엄격하게 신칙할 요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전·현임 대신들이 조방(朝房)에 나와 모여 있었다. 상이 지엄한 분부를 내리니, 대신 채제공·윤시동·이병모가 함께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전교하기를,
 
“이미 강화 유수의 장계를 보았는데 무슨 의심이 더 있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가?”
 
하고, 이어서 대궐밖에 와 있는 여러 신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도록 명하였다. 규장각 제학 심환지(沈煥之)와 직제학 이만수(李晩秀)가 금표(禁標) 안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의금부 관원들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또 전교하기를,
 
“수신(守臣)도 이미 용서하였는데 도신(道臣)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김문순을 나문하라고 한 명을 정지시키라.” 하였다.

【영인본】46책 648면【분류】*사법(司法)/*정론(政論)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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