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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50-5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50-59)

50)고종 12권, 12년( 1875 을해 / 청 광서(光緖) 1년) 7월 29일 계해 1번째기사

●세자의 사, 부, 빈객들이 올리는 글에 세자라는 글을 쓰지 말고 시강원을 쓰게 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세자의 사(師), 부(傅), 빈객(賓客)은 소장(疏章)이나 관청에 왕래하는 문건 외에는 ‘세자(世子)’라는 두 글자를 쓰지 말고 ‘시강원(侍講院)’이라는 세 자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이런 내용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라.”하니,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를 받들건대, 매우 지당합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과장(科場)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 듣건대, 먼저 접수하는 즈음에 소란을 피우는 일이 더욱 심하다고 하기에 지난번에는 액정서(掖庭署)의 서리들을 내보내서 금지시켰다. 애당초 잘 신칙하지 않고 죄를 저지른 후에 다스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다. 모름지기 사관소(四館所)에 신칙해서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하니,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최근에 사추(士趨)가 과연 단정치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칙한 뒤에 어찌 고의로 범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였다. 하교하기를,
“강원도에 또 수재가 있었는데, 흉년이 든 데다가 해마다 재해를 입는 것이 이렇듯 혹심하니,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더욱 걱정스럽다. 경강(京江)은 물이 불어서 15척(尺)이나 높아지고 양주(楊州) 등지(等地)가 더욱 심하다고 하니, 이전에도 이와 같이 비가 내린 적이 있었는가? 일전에 풍세(風勢)도 몹시 나빴다.”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일전의 풍세는 몹시 강하였는데 이런 때에는 세선(稅船)이 전진할 수 없으니 두류(逗留)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스럽습니다.”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치상(閔致庠)이 아뢰기를,
“오조창(五漕倉)에서는 그간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후조창(後漕倉) 배들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는데 벌써 1척(隻)의 배가 치패(致敗)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김제(金堤)의 대동선(大同船)은 통진(通津)에 와서 치패되었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이 지연되는가?”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후조창의 배가 매번 지체되기 때문에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의 당상(堂上官)들이 해마다 신칙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도 종전과 같이 되풀이하니 통완(痛惋)함이 끝이 없습니다.”하니, 민치상이 아뢰기를,

“수조(收租)하여 반강(頒降)하는 일들이 때로는 조금씩 늦어져 경사(京司)의 집주(執籌)와 외읍(外邑)에서 짐을 싣는 것이 뒤따라 지체되어 결국 배가 얼어붙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거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인심(人心)의 향배(向背)가 여기에 달려 있고 세도(世道)의 오륭(汚隆)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추가 단정치 못하니 사실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과연 공도(公道)를 넓히고 깨끗하게 대양(對揚)한다면 어찌 원칙을 손상시키고 죄를 저지르는 행동을 하는 데까지 이르겠습니까?

보건대 이제 식년과(式年科)가 멀지 않았으니 이로써 거조(擧條)하여 각 도의 도신(道臣)과 북평사(北評事)에게 행회(行會)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시관(京試官)을 직접 만나서 신칙하여 보내며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시관(試官)은 해조(該曹)에서 각별히 골라 차임하고 특별히 신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즘에 와서 아전과 하례, 상민과 천인이 모칭(冒稱)하고서 과거에 응시하는데 이것은 나라의 기강과 크게 관련되는 것이니, 일체 금단(禁斷)하며 방목(榜目)을 발표한 뒤에는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불법적으로 응시한 자는 우선 빼버리고 중률(重律)로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수령이 체역(遞易)된 뒤에 해유(解由)로 마감(磨勘)하는 것은 대개 공화(公貨)를 중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 규정이 문란하여 해를 넘기면서 질질 미루고 있다고 포기하고 맙니다. 시임(時任)이나 전임(前任)을 막론하고 호조에서 각별히 조찰(照察)하여 3달 안으로 마감하도록 하며 만약 정한 기간이 넘으면 계품(啓稟)하여 엄하게 감처(勘處)하도록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세곡(稅穀)을 방납(防納)하는 일을 제기하여 아뢴 적이 있으나, 외읍에서 일어나는 간사한 폐단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비록 상납(上納)한 면포(綿布)로 말하더라도 담당 색리(色吏)들이 온갖 구실을 대고 백성들에게서 지나치게 징수하여 걷어 들이고는 한 끝머리의 천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상경(上京)하여, 바치게 된 아문(衙門)의 하속(下屬)들과 체결(締結)하여 몰래 뇌물을 보내어 교묘하게 속이고는 싼값으로 바꾸어서 무사히 준납(準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인(貢人)에게 나누어 주고 군졸(軍卒)에게 방하(放下)하면 마침내 원성(怨聲)이 이르게 되는데, 그 죄상을 따져보면 색리나 고속(庫屬)들은 다 같은 무리들입니다. 장차 신이 아뢴 것을 우선 납포(納布)하는 아문과 각도(各道)와 각읍(各邑)에 엄하게 신칙하며 간사한 짓을 하는 무리들은 나타나는 대로 형률을 적용하며 신칙을 하지 않은 해당 당상과 낭청(郎廳), 장신(將臣)과 도신(道臣), 수령(守令)들은 모두 엄하게 논죄(論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하교하기를,
“특별히 금단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영인본】 1책 502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법제(法制)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과학-천기(天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창름(倉廩) / *인사-선발(選拔) / *재정-공물(貢物)

51)고종 12권, 12년( 1875 을해 / 청 광서(光緖) 1년) 8월 23일 정해 2번째기사

●이양선이 연해에 들어왔으므로 역관을 파견하여 사유를 따지게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낯선 배가 내양(內洋)에 들어왔는데 그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무슨 일로 와서 정박하고 있는지 상세히 문정(問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리에 밝은 역관(譯官) 몇 사람을 사역원(司譯院)에서 특별히 선정하게 하여 하직 인사는 그만두고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민태호(閔台鎬)가 보고한 바를 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덕포(德浦)의 손돌목〔孫石項〕에서 파수(把守)하고 있는데 군량을 획급(劃給)하는 것이 과연 시급하니 모(某) 아문(衙門)의 쌀 300석(石)만 특별히 획하(劃下)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낯선 배가 내양에 침입한 만큼 방수를 소홀히 할 수가 없는데 읍(邑)에는 창고에 남아 있는 양식이 없고 군대에는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외창(外倉)에 있는 쌀 중에 300석을 즉시 획송(劃送)하라고 호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낯선 배가 경기 연안에 와서 정박하고 있은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외양(外洋)의 여러 고을에서 그 배가 지나간 형적에 대해 수계(修啓)한 곳이 한 곳도 없으니, 어찌 이러한 변정(邊政)이 있겠습니까? 망을 보는 일이 이처럼 소홀하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며 너무나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내용으로 우선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문(關文)으로 그 신칙하여 그 경위를 자세히 조사하여서 치문(馳聞)하게 하여 엄하게 감처(勘處)하도록 하고, 이후의 거행은 더욱 엄하게 단속하고 신칙하여 감히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체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504면【분류】 *교통-수운(水運) / *군사-관방(關防) / *어문학-어학(語學)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신분-중인(中人)

52)고종 13권, 13년( 1876 병자 / 청 광서(光緖) 2년) 1월 13일 을사 3번째기사

●접견 대관이 일본 군함에 가서 정박 사유를 물은 것에 대해 보고하다
접견 대관(接見大官)이, ‘이달 10일 오시(午時)에 통진부(通津府)에 도착하여 곧 해당 부사(府使) 이규원(李奎遠)의 보고를 받아보니, 「그들의 큰 배 5척(隻)이 일제히 올라와서 항산도(項山島) 앞바다에 정박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배가 벌써 거슬러 올라오고 있으므로 신들이 출발할 수 없기 때문에 잠시 본부(本府)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의 배에 대한 소식을 계속 탐지하였습니다.
 
이달 11일 인시(寅時)에 접견하여 사유를 물으러 간 관리 오경석(吳慶錫)과 현석운(玄昔運)으로부터 받은 보고에 의하면, 「본원(本員)들이 이달 8일 해시(亥時)에 초지진(草芝鎭)에서 배로 떠나 9일 묘시(卯時)에 팔미도(八尾島) 앞바다에 이르니, 그들의 배 5척이 연기를 뿜으며 올라왔으므로 즉시 그들의 배로 가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배가 몹시 빨라서 서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정박한 항산도로 쫓아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만나 우리 조선에서 접견 대관(接見大官)과 부관(副官)을 파견하여 장차 귀국의 사신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서 접견하려 한다는 것과 접견 날짜를 결정해야 한다는 뜻을 통지하였습니다.
 
모리야마 시게루가 말하기를, 『귀국에서 이미 파견한 대관이 강화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인천부(仁川府) 지방관에게서 들었으며, 접견하는 절차와 날짜는 우리가 내일 강화성(江華城)으로 들어가 유수(留守)와 만나서 면담한 다음 의정하겠으니, 이것을 강화 유수(江華留守)에게 가서 알리고 군사와 백성들을 타일러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접견 절차와 날짜는 우리 대관이 바로 의정할 것이니 강화부(江華府)에 가서 의논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또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문제는 우리 조정의 명령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논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말도 건네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저들의 배에서 내려가라고 독촉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우리 배로 돌아왔습니다. 신들은 강화부로 급히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514면【분류】 *교통-수운(水運) / *군사-관방(關防) / *외교-일본(日本) / *군사-군기(軍器)
 
53)고종 14권, 14년(1877 정축/청 광서(光緖) 3년) 10월 12일 계사 1번째기사

●홍우창을 일본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타다의 반접사에 임명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호남(湖南) 개항지대의 수심(水深)을 측량한 뒤에 이어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개항지역을 지적하는 것은 비록 약조(約條)에 들어 있긴 하지만 통상하는 일로 수도에 주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래부(東萊府)에서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들은 기어코 올라오려고 하는데 우호(友好)를 지속시키려면 또한 강하게 거절하기도 어렵습니다.
 
접대하는 절차는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작년의 전례로 참작해서 시행하도록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홍우창(洪祐昌)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차하(差下)하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규원(李奎遠), 김포 군수(金浦郡守) 이중윤(李重允), 양천 현령(陽川縣令) 이민선(李敏善)을 모두 연접관(延接官)으로 차하(差下)해서 역참(驛站)마다 교대로 호위하게 할 것이며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이어 호송관(護送官)을 그대로 겸하게 하도록 모두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1책 561면【분류】*외교-일본(日本)/*인사-임면(任免)/*교통-육운(陸運)

54)고종 14권, 14년( 1877 정축 / 청 광서(光緖) 3년) 11월 17일 무진 1번째기사

●통상관계 문서를 만들어 동래의 왜관에 보내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사신 일행과 통상하는 배가 통진(通津)을 경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개항의 사안에서 중요한 곳에 대해서는 의논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일본 사신은 마음대로 결단하기 어려우니 본국(本國)에 돌아가서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시 질정(質定)해서 서계(書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조사(措辭)하여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563면【분류】 *외교-일본(日本) / *교통-수운(水運)
 
55)고종 15권, 15년(1878 무인/청 광서(光緖) 4년) 3월 9일 기미 1번째기사

●경기 암행어사의 서계와 관련하여 파주 전 목사 등을 표창하다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이헌영(李永)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때문이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파주 전 목사(坡州前牧使) 이낙희(李樂熙), 가평 전 군수(加平前郡守) 서홍순(徐弘淳),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직현(李稷鉉), 영평 군수(永平郡守) 전동혁(全東赫), 김포군수(金浦郡守) 이중윤(李重允), 풍덕 전 부사(豐德前府使) 이문영(李文永), 시흥 전 현령(始興前縣令) 이기석(李起錫), 양성 전 현령(陽城前縣令) 조병업(趙秉業), 연서 찰방(延曙察訪) 방효린(方孝隣), 덕적 전 첨사(德積前僉使) 한봉득(韓鳳得), 임진 별장(臨津別將) 김한갑(金漢甲) 등에게는 죄를 주고 진위 전 현령(振威前縣令) 이승우(李勝宇)는 표창하고 승서(陞敍)하였다.
 
【영인본】1책 569면【분류】*인사-관리(官吏)/*왕실-국왕(國王)

56)고종 15권, 15년( 1878 무인 / 청 광서(光緖) 4년) 8월 27일 갑진 1번째기사

●영의정 이최응이 풍덕과 인천 등의 대동미를 돈으로 대납할 것을 청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윤자덕(尹滋悳)이 보고한 바를 보니, 풍덕(豐德)의 부세(賦稅)와 인천(仁川)·부평(富坪)·통진(通津)의 대동미(大同米)를 다시 기한을 연장하고 돈으로 대신 바칠 것을 청하였습니다. 다만 풍덕은 읍(邑)으로 회복된 나머지 끌어다 보충하기가 아직도 곤란하고, 인천은 영(營)으로 승격된 후에 배정하여 획급하는 것이 많이 모자라며, 부평과 통진은 포군(砲軍)을 설치할 자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번에 만약 일반 규정대로 본색(本色)으로 받아낸다면 경기 연안 요충지의 각종 급료는 장차 마련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풍덕 한 부(府)의 부세와 인천 등 세 고을의 대동미는 3년 정도 기한을 연기하여 상정(詳定)해서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돈상(李敦相)이 보고한 바를 보니, 영광 군수(靈光郡守) 박제교(朴齊敎)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열거하여 말하기를, ‘병자년(1876)의 대흉은 읍을 설치한 뒤 처음 당한 일로 도내(道內)에서 가장 심하였으며 게다가 전염병까지 겹쳐서 대부분 유망(流亡)하였습니다. 그런데 각종 상납을 규정대로 독촉한다면 남아있는 백성들마저 모두 흩어져 고을이 장차 텅 비게 될 것이니, 해당 군(郡)의 병자년 세미(稅米)에서 유망한 사람들의 몫인 900여 석을 특별히 탕감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1,000여 석은 상정하여 대봉(代捧)하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 군의 황급한 정상은 부안과 서로 같은데, 개간하지 않은 땅에서 어떻게 강제로 거두어들인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돌봐주는 뜻에 있어서는 일반 규정만을 고집할 수 없으니, 부안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병자년 조의 미납된 조세미(租稅米)는 모두 상정하여 대납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세균(金世均)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 갑산(甲山) 땅의 혜산(惠山)·운총(雲寵) 두 진(鎭)은 저쪽 땅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그것이 요충지로서 다른 곳에 비하여 더욱 구별됩니다. 그러나 몇 개의 진속(鎭屬)들이 피폐하고 약해서 이미 의지할 자산이 없습니다.

혜산진은 본사(本社) 중에서 본부(本府)의 환민(還民) 21호 및 토지 188결을 본 진에 떼어 주어 환곡(還穀)의 모조(耗條)와 결세를 모두 거두어서 포군(砲軍)을 설치하여 급료를 주고, 운총진은 본 사 중에서 본 부의 환민(還民) 102호를 본 진에 떼어 주어 진속으로 창감(倉監)·색고(色庫)를 차출하여 규례대로 조적(糶糴)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환곡은 비록 본 부에서 관할하지만 전적으로 본 진에 속하게 하여서 포군을 설치하여 급료를 주게 한다면 영락된 진이 조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주진(主鎭)인 고을은 하루아침에 두 가지를 잃게 되니, 생각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부는 근년 이래로 공한지로서 개간된 땅과 호적 외에 더 늘어난 호구가 모두 ‘세금이 면제되고 있으니, 어느 곳이나 샅샅이 조사하여 참작해서 세를 받아 양사(兩社)에서 부족 되는 것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보고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보현(金輔鉉)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부 공도회(公都會)의 해액(解額)이 일 년에 세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수원(水原)과 개성(開城)은 해마다 뽑는 인원이 여덟 사람이니, 문치(文治)를 장려하는 정사에 있어서 마땅히 피차간의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과 개성의 규례대로 똑같이 돌보아주는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이 부(府)는 중요한 곳으로서 모든 제도를 두는 데에 있어서 진실로 화성(華城)이나 개성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다만 공도회의 액수가 두 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경내의 많은 선비들이 울분을 품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유수(留守)가 진술한 바를 허락하여 이제부터 두 도(都)의 규례대로 시취(試取)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주도(濟州道)는 먼 바다 밖에 치우쳐 있어 조정의 관심이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관(文官)은 괴원(槐院)까지 허락하고 있으나 무관(武官)은 선전관(宣傳官)으로 추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비단 먼 곳의 사람들이 원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균등하게 대해 주는 정사가 아닙니다.

이후에는 그곳의 지위와 문벌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순서를 뛰어넘어 선전관으로 추천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전조(銓曹) 및 선전관청(宣傳官廳)에 분부하게 해주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인천(仁川)과 부평(富平) 등지에 돈대(墩臺)를 설치할 만한 곳이 있으면 본 소에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니, 강화(江華)에 비교하면 더욱 요충지가 될 것이다. 진(鎭)을 창설하고 돈대를 설치하여 방어하고 지키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이 늘 인천(仁川)을 경유하여 오는데, 이 고을은 서울과 가깝습니다. 지금은 비록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었지만 기타 관액(關阨)의 어귀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여 사전 대비책을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영조(英祖) 때 일찍이 장산도(長山島)에 진(鎭)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영조 때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설치한다면 어찌 그것을 계승하는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하교하기를,
“인천과 부평 땅에 본 소에서 돈대를 창설하는 일은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응당 들었을 것이다.”하니, 어영 대장 신정희(申正熙)가 아뢰기를,

“신이 별장(別將)으로 있을 때 이미 들었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본 소에서 이 일을 관할하기로 하였는데 어영 대장이 이미 별장을 지냈고 본래 시임과 원임의 구별이 없으니, 비록 대장의 임무를 맡기는 하였지만 편할 대로 오갈 것이며 며칠 안으로 내려가서 형편을 헤아려보라.”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것은 관방(關防)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이미 어영 대장에게 맡겼으니, 모든 제도의 설치를 그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게 하고 훗날 상벌(賞罰)의 근거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그렇다. 강화 돈대에 대한 일은 어영 대장의 부친이 진무사(鎭撫使)로 있을 때 잘 만들어 설치하였으니, 어영 대장도 이 일을 잘 해낼 것이다.”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한 해 동안의 급료와 군사 제도도 장차 강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때에 가서 변통해도 될 것이다.”하였다.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이 사퇴를 윤허하여 줄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세 정승의 자리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의지하는 바가 더욱 무겁다. 경은 겸손하게 사양하지 말고 오직 백성과 나라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영인본】 1책 579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호구-호구(戶口) / *재정-전세(田稅) / *농업-개간(開墾) / *인사-선발(選拔)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

57)고종 16권, 16년(1879 기묘/청 광서(光緖) 5년) 윤3월 13일 병술 1번째기사

●인천부의 급료를 주는 비용은 부근 고을에서 포량미와 잡비까지 합쳐서 이획하여 충당할 것을 윤허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인천 부사(仁川府使) 임백현(林百鉉)의 보고를 보니, ‘본 부는 방영(防營)으로 승격된 뒤 주교사(舟橋司)의 쌀 500석(石)을 매년 이획(移劃)하여 지방(支放)하는 비용으로 삼았습니다만 이는 한때만 실어오는 것이 아니어서 단지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매번 지방이 정지되곤 합니다.

강화영(江華營)의 포량미(砲糧米) 500석(石)을 취해서 인천(仁川), 부평(富平), 시흥(始興), 안산(安山), 과천(果川), 김포(金浦), 양천(陽川) 등 읍에서 바치는 것을 모두 잡비로 구획(區劃)하여 본 부로 직접 획급하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부(該府)는 해문(海門)의 요충지이고 또 방어사(防禦使), 절제사(節制使)를 창설한 곳이니 조정에서 진념(軫念)하는 것이 그전보다 갑절 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사미(舟司米)를 실어가기 곤란한 것이 과연 보고한 내용과 같다면 특별히 청한 바에 따라 위에서 말한 부근 고을에 있는 포량미(砲糧米)로써 이 수량만큼 모두 잡비로 획급하라는 내용으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와 본 도의 감사(監司)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동래부(東萊府)의 장계(狀啓) 등보(謄報)를 보니, ‘일본 공사(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지금 장차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기(京畿) 바다의 만(灣)에 가서 수심을 측량한 후에 강화(江華)를 경유해서 곧바로 서울로 가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접대와 관련한 절차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성의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몇 년 전 그들이 머물 때로 말하면 우리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어지럽게 모여든 것은 이미 극도로 수치스러웠는데, 하물며 모래와 돌을 던져 일부러 소란을 일으킬 단서를 만들기까지 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저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어찌 먼저 잘못하면 스스로 수모를 받게 된다는 의리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저 사람들이 닻을 내리고 통과하는 길에서 다시 혹시라도 이와 같은 버릇이 벌어지게 되면 그 자리에서 효시(梟示)할 것이며, 신칙(申飭)하지 못한 지방관은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나문(拿問)한다는 내용을 연해(沿海)의 제읍(諸邑)에 일일이 선포할 것을 해당 감사(監司)와 수령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1책 595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재정-국용(國用)/*재정-전세(田稅)/*군사-군정(軍政)/*외교-왜(倭)

58)고종 16권, 16년(1879 기묘/청 광서(光緖) 5년) 윤3월 21일 갑오 2번째기사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접대와 관련된 일에 대해 윤허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공사(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장차 머지않아 수도에 올라올 것입니다. 접대와 관련된 모든 일은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이전 규례를 참작하여 시행하게 하며, 행호군(行護軍) 홍우창(洪祐昌)을 강수 겸 반접관(講修兼伴接官)으로 차하(差下)하고, 통진(通津), 김포(金浦), 양천(陽川) 세 고을의 수령은 모두 연접관(延接官)으로 임명하여 역참(驛站)에서 교대하여 호위하게 하며 돌아갈 때에도 그대로 이내 호송관(護送官)으로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1책 595면【분류】*교통-육운(陸運)/*외교-왜(倭)/*인사-임면(任免)

59)고종 18권, 18년(1881 신사/청 광서(光緖) 7년) 6월 24일 갑인 5번째기사

●김홍집을 김포군에 찬배하다
김홍집(金弘集)을 김포군(金浦郡)에 찬배(竄配)하였다. 누차 신칙(申飭)을 내렸으나 끝내 나와 숙배(肅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영인본】2책 13면【분류】*사법-행형(行刑)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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