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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남침 공격신호 ‘폭풍’ 타전Ⅰ.김포지역 6.25전쟁사

   
▲ 1951년 4월 3일 강대국이 그어놓은 원한의 38선. 이 38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는가!
이 글은 6.25전쟁 과정 중 김포지역에서 전개된 북한군과 국군 및 유엔군간의 전투상황을 중심으로 요약서술한 것이다.

1950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의 북한군의 김포지역 점령과 국군의 방어 및 후퇴상황을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두 번째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연합군 및 해병대의 김포진격이 이루어진 1950년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또한 1951년 1월 4일 일명 1.4후퇴 이후 서울재수복 이루어진 1951년 3월 16일까지 해병대의 김포재확보 과정을 기술하였다.1)

들어가는 말, 남침 공격신호 ‘폭풍’ 타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38선 일대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38선 일대에 배치돼 있던 북한군 각 부대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폭풍’이라는 암호가 하달되었고 무전망으로는 ‘224’가 타전됐다.

암호 ‘폭풍’과 무전망의 신호 ‘224’는 이미 남쪽을 향해 포격을 시작하라는 남침명령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북한군의 포구(砲口)는 일제히 남쪽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하였고 피비린내 나는 남북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8선으로부터 불과 40키로 떨어진 서울 시민들이 일요일을 맞아 느긋한 아침 단잠에 빠져 있는 사이, 북한군은 질풍노도처럼 남으로 진격해 왔다.

북한군은 불과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장악했고, 국군의 주력은 한강 이북에서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 이후 전쟁은 무려 3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한민족이 5,000년 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한반도는 아비규환의 수라장 속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김포지역도 이 참혹한 현실을 맞아해야 했으며 그야말로 북한군의 공격암호가 말해주듯이 김포반도에 폭풍이 들이닥쳤다.
김포지역에서 전개된 북한군과 아군의 전투사를 통해 그 폭퐁의 현장을 소개한다.

1. 북한군의 김포반도 작전계획2)

1) 김포반도 진격 작전계획

1950년 6월 25일 남한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의 작전계획 기본방향은 “1950년 6월 말 전면공격으로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시킨다. 그 후 인민군이 신속히 남해안까지 진격하여 미 증원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아 1개월 내에 전쟁을 종결함으로써 8월 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서울에 통일 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3)

북한군은 위와 같은 전략적 방침과 작전개념하에 남침의 기본계획을 세웠다. 특히 개성방면의 제6보병사단(-1개 보병연대, 1개 포병대대 및 1개 자주포포대)은 한강을 끼고 있는 김포반도 진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 날 오후 늦게 병력 일부로 하여금 개성반도의 방비를 강화하게 하면서 하조강리(개성 남방 20㎞) 지역에서 한강을 도하하고, 둘째 날 아침에 통진(강화 동남방 6㎞, 현재 김포시 월곶면 군하리 기점), 백석현(통진 서방 2㎞, 현 통진읍 도사리) 고개, 마곡리(통진 서방8㎞, 현 하성면 마곡리), 선을 따라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의 적 병력이 서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영등포(서울 서남방 5㎞)로 공격을 확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다.

위 전략계획에 의하면 김포반도로의 진격은 서울에서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 차단을 목표로 김포를 진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포반도의 진격은 치명적인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한강도하의 문제였다.

  <북한군 작전 김포지도>4)

   
▲ 북한군 김포작전지도


2)북한군의 작전경과 과정

북한군은 김포반도 진격을 위한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한강은 진격에 있어 치명적인 장애물(6㎞까지의 폭과 0(8)M까지의 수심)이었기 때문에 이 강을 도하하는 데는 충분한 양의 도하장비와 군관 및 병사들에 대한 교육훈련이 필요하였다.

적절한 조직력이 부재하고 도하장비도 부족했기 때문에 6월 26일 아침 6시 30분 무렵까지도 제15보병연대 예하 1개 대대, 제13보병연대 예하 1개 대대, 교육대대 및 76㎜야포 2문만이 한강남쪽 방면으로 도하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한강도하는 한강하구의 자연적인 환경조건과 도하장비의 부족 때문에 시간을 많이 지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군은 6월 27일 한강도하에 성공하여 김포지역 월곶면 조강포 지점에서 3키로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제6보병사단 예하 부대들은 포격과 공습에도 불구하고 도하를 계속하여 6월 27일 오전에 제15보병연대, 제13보병연대 주력, 제15보병연대 연대 포병 및 대대포병, 제6사단 포병연대 예하 2개 포대와 제17군단 포병연대 예하 제2포대 등이 한강을 도하하였다. 그 외의 포병, 전차 및 자주포 등은 도하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6월 27일 여명을 기해 짧은 시간동안 포병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제15 및 제13보병연대는 적을 공격하여 교두보를 5㎞ 내지 6㎞까지 확장하였다. 그러나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는 적은 강력한 저항을 펼쳤으며 수차례에 걸쳐 역습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오후 5시 무렵에 사단 예하부대들이 적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통진, 백석현 고개, 선을 점령하였다. 전과확대를 위하여 교육대대가 통진(현, 월곶), 율생리(통진 남동방 8㎞, 현 대곶면) 방면 전투에 투입되었다. 시단은 6월 27일 오후 늦게 율생리, 수참리(통진 동남방 8㎞, 현 양촌면) 선까지 전출하였다”

“이후 제6사단 예하 부대들의 진격은 서울로부터 투입된 적 제22보병연대 2개 대대, 2개 보병학교생도 대대 및 여타 부대들의 조직적 저항에 의해 약산리(통진 남방 10㎞, 대곶면), 도이곶(도사리, 통진 동남방 7㎞, 통진읍) 선에서 저지되었다”

“6월 27일 주간에 시도된 포병의 도하는 적의 수차례에 걸친 항공공격으로 인하여 계속 지연되었다. 6월 27일 밤부터 28일까지 사단내 보병 제13보병연대 연대포병 및 대대포병, 제6포병연대 예하 2개 포대, 76㎜ 자주포 포대, 제17군단 포병연대 예하 제2포대 및 전차중대 등이 강을 완전히 도하하였다”

“6월 28일 여명을 기해 짧은 시간 동안 포병공격 준비사격을 실시한 후에 보병이 전차중대와 협동으로 적을 공격하여 적을 대곡리(김포 서방 4㎞, 현 인천시 서구 대곡동), 김포 지역으로 퇴각시켰다.

하지만 진격을 계속하여 김포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이후에 펼쳐진 10여 시간에 걸친 전투 후에야 적의 저항을 와해시키고 오후 5시 20분에 사단 예하부대들이 김포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 사단의 진격은 서울에서 철수하는 적 부대들로 인하여 정지되었다.

6월 29일 하루 동안 예하부대들은 김포 동남방 10㎞ 지점에 위치한 공항을 점령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이는 한편 적의 역습을 격퇴시켰다.

3) 김포 점령한 북한군 제6보병사단

북한군의 김포반도 진격은 중공군 제166사단을 전환하여 편성한 제6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1942년 만주의 관동군에서 탈주한 한국인들을 모아 편성된 중국 공산당 8로군 예하 동북의용군 사단으로,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의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는 관록 있는 사단이었다.

이들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합의에 의해 국공내전이 마무리될 즈음인 1949년 7월, 북한군으로 전환하기 위해 신의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단명칭을 제6사단으로, 예하연대를 제13ㆍ14ㆍ15연대로 개편한 후 국적전환에 따른 적응훈련을 실시하였다.5)

개성 및 김포반도를 공격하였던 제6사단의 주요장비는 <표1>과 같이 T-34전차 4대를 비롯한 SU-76자주포 16문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표1> 북한군 제6사단의 주요장비 현황6)

   
▲ 북한군 제6사단의 주요장비 현황

북한군 제6사단장에 임명된 방호산(方虎山:본명 李天富) 소장은 1913년 함경도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 흑룡강성 밀산지역에서 공산당 항일유격대에 참가하고, 1936년경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추천으로 소련에 유학하여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40년 소련에서 교육을 수료한 후 연안에 도착하여, 동북간부 훈련반과 중공 중앙 해외사업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일제 패망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이홍광 지대,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 제166사의 정치위원으로 만주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49년 7월, 제166사단을 인솔하여 신의주로 입북한 뒤 북한군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7)

각주)
1)<
김포6.25전쟁비사> 조사와 관련하여 주민증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김포지역에서 전개된 전쟁사(전투사)를 중심으로 요약 발췌하였다. 참고도서는 본문 후반부에 첨부하였다.
2)북한군의 김포반도 진격 및 점령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1>에 기술된 북한군의 김포반도 진격 작전계획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3)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상), 1995, p.75.
4) 6.25전쟁 당시 북한군 작전 지도/이 문서는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107연대가 축척 1:50,000 지도에 강화도, 고양군, 서울, 부천 등 한반도 중서부 지역 등이 포함된 김포지역에 대한 방어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1949년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에서 작성한 것이다./제지/ 가로 : 178cm  세로 : 118cm
5)『한국전쟁(제1권):38선 초기전투와 지연작전)』,육군본부, 1986, p.19.
6)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라주부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2001, pp.284-287.
7)김중생,『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명지출판사, 2000, pp.174-176.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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