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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은 너무 느끼지 못해요유연종(76세)/ 걸포동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걸포동>

지금 사람들은 너무 느끼지 못해요

당시 걸포리 297번지에서 6.25를 만남
치안대 활동 제2국민병 활동

   
▲ 유연종(76세)/ 걸포동
“6.25전쟁이 나고 6월부터 9월까지는 의용군 안 나가려 도망 다녔어요. 그러다가 붙잡혀서 나갔다가 다시 도망 왔어요. 한강을 건너 김포로 왔는데 그때 도망오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이완일이 동생 이인수와 조막손이도 못 왔어요. 방호철이도 못 왔어요. 우리 또래는 다 갔었어요. 30명쯤 갔었는데 그 사람들은 못 왔어요. 그때는 천주교 예배당이 걸포리에 있었는데 천주교회에 모여라 해서 집단적으로 끌고 갔어요”

“9.28수복 때는 인천상륙 작전을 하면서 인민군이 유엔군에 의해 밀려오면서 사람을 죽였어요.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개신교인들을 싫어했어요. 아마 맥아더가 인천상륙이 1주일만 늦었어도 1/3은 더 죽어나갔을 거라고 믿어요. 그 당시에 듣기로 좌경인민위원장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우선 학살하자고 결의를 봤었다는 거예요. 1주일만 늦었어도 큰일날뻔 했었요”

“그 당시에 9.28 치안유지 대원들은 모두 걸포리 출신들이었어요. 치안대는 오로지 걸포리에만 있었어요. 걸포리는 행정리로 부락단위로 4개리가 모인 규모라서 김포군에서 제일 컸어요. 우리는 자체적으로 치안대를 만들었습니다. 걸포동, 감정동, 북변동, 운양동일대의 치안을 담당했어요. 풍무동은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집안끼리도 사상이 다르면 까고 죽였어요. 그렇게 무서웠어요”

“당시 뱀골은 모스크바였어요. 사변 시에도 봉화불로 사변을 연락했잖아. 운양동이 강을 오가는 나루터였어요. 감바위, 감암포라고 했지. 지금은 일산대교가 놓였잖아요. ‘행동한 자는 다 죽인다’ 그때의 감정은 그랬어요. 재판이 있어 뭐가 있어 내 형제 멀쩡한 사람이 죽어 가면 눈에 보이는 게 뭐있나. 어느 누구도 순한 사람이 없어요. 겪은 사람은 그대로 했어요”

“수수밭에서 낫으로 ‘비켜 비켜 내가 할세’ 하면서 머리고 뭐고 닥치는 대로 찍어 죽였어요. 경찰서 앞에서는 빨갱이들을 잡아가지고 오다가 패면서 옆에 불난 집으로 몰아넣어 빨갱이들에게 뛰어 들어가 죽어라고 해서 그 집에 들어가 타 죽기도 했어요. 사람은 당하고 나면 순한 사람이 없어요. 지금 사람들은 느끼지 못해요. 우리는 분통이 터집니다”

“우리가 군인을 나갔을 때에 이승만대통령은 너희는 죽으면 역적이다. 살아야 애국자라고 인력이 모자라니까 그렇게 말했어요. 지금은 흔히 민주화운동이란 말들을 하는데 공산당과 싸운 참전용사들이 민주화 운동 한것 아닌가 말이야. 17살 18살에 그런 일들을 했다고요. 피난 가서 고생한 것 그런 생각을 하면 열불이 난다구요”

“구 경찰서 유치장이 있었는데 반달형이었어요. 인민군이 삼각창으로 죽였어요. 치안대들은 당시에 30명이 활동했고 서에서도 김포 걸포리는 사상적으로 완전한 곳으로 인정했었어요.

지금도 생존한 치안대원들이 있어요. 강석민, 유용산, 유재복, 방대수, 조도연, 유만종, 박해준, 박세준, 방정현, 김상남, 유련종, 한명만, 유동종, 유재인, 유선종, 유연종, 유순호등은 모두다 6.25참전 용사입니다”

“나는 대한청년단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변나니까 지역빨갱이 앞세우고 잡으러 다니더라고요. 큰집에 숨었다가 외가 거물대리로 갔다가 그 지역이 사상이 불순해서 다시 와서 건넌방에다 땅굴을 파고 숨었어요. 구들장을 뚫고 숨었는데 만약 아궁이에 불 지르면 굴뚝으로 해서 빠져 나가려고 했어요. 가을엔 새막을 짓고 숨어있었는데 유재덕씨와 같이 숨어 있었어요.

유재덕씨는 제2국민병 나가서 8사단 21연대 6중대에서 육박전을 했는데 새벽에 거기서 죽었어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눈을 상처받아 잘 안보였었기 때문에 8사단 21연대 5중대에서 눈 때문에 병참학교 장군때 있었어. 근무하다가 4년 만에 제대했어요. 보급만 지원했습니다”

“인천에서 함포사격을 해서 터진 것도 있고 불발탄이 걸포리에 떨어져 한강주변에서 터졌어요. 지금 어디엔가 몇 발은 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한강위주로 부락들이 피난을 갔고 풍무동 원당고개에 해병대가 있었고, 서로 인민군과 밀고 당기면서 살상행위들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때 제일 많이 죽었다고요. 길거리와 경찰서에 불순분자들이 잡혀서 있었어요.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서에서 해방되었는데 130명 정도가 갇혀 있었어요”

“당시에 걸포리에는 산 밑에 새까맣게 인민군들이 붙어있었어요. 치안대 하다가 도망을 가다가 붙잡힌 7명이 삼각창에 찔려 죽었어요. 따꽁총(따발총)에 묶인 삼각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외에도 북변리 사람도 죽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들을 안치시킨 곳이 무명탑이고 충현탑이라구요. 우리 아는 사람들만 일곱 명이지 또 있어요. 박상연 장복남(노루아버지)도 죽고, 유지종씨는 창으로 찔러 죽였어요. 유시윤, 유윤종, 유재선도 죽고, 채기화는 나이든 노인인데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무명탑이라는 것이 이름 없다는 거잖아요. 고양에 가서 죽인사람도 있었는데 방공호에 놓고 죽인 것들인데 한데 화장해서 항아리에 담아서 묻었어요. 누가 누구의 시체인지 아느냐고 말이야.

누구시체인지 몰라요. 그저 한데 묻은 거야. 9.28수복 전투시에 그때 당시에 인민군 시절에 너무 많이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행동한 자는 다 죽였어요. 우리는 가족들을 해치지는 않았어요. 행동한 자는 다 죽였어요”

“걸포리는 사상적으로 깨끗했어요. 아군 패잔병 군인이 와서 숨겨주고 전쟁 끝나고 경상도 사람인데 17연대 소속인 사람은 살려서 고향을 찾아가게 했어요. 곁광에다 감춰두고 상처를 쑥으로 비벼서 살려냈어요. 박사준 어머니가 가까이 돌보며 살려줬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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