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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군에 강간당한 사람도 있어요이기실(73세)/ 양촌면 석모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양촌면>

터키군에 강간당한 사람도 있어요

초등 5학년 때 토끼풀 뜯다가 6.25터져
피난길 평택에서 폭격으로 어머니 잃고 망연자실
경농(서울대농대)다니던 형 현역 나가 전사 57년 만에 확인

   
▲ 이기실(73세)/ 양촌면 석모리
이기실(73세)씨는 만 15살에 6.25를 만났다. 9대째 양촌면 석모리에서 살아오고 있다. 당시에 양곡초등학교 6학년 재학 중에 있었다.

“문수산의 아군은 학도병들이었습니다. 일주일간 훈련받고 있다가 인민군 박격포 쏘니까 다 밀려 나온 겁니다. 나는 토끼풀을 뜯다가 부천까지 피난을 갔어요. 집에 들어오니까 고단이 주공단지 앞에 박격포가 떨어져 모두 난리가 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가물었었어요. 비가 오려고 뇌성벽력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6월 27일 28일 이틀 만에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피해는 아군이 무기가 있나? 고3들이고 머리는 빡빡 깎고 등걸잠뱅이로 갈아입고 민간인들과 같이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인민군이 먼저 앞서서 그 학도병들이 고향을 제대로 찾아갔나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대한민국 국군은 무기가 없었어요. 나는 부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틀 만에 집으로 왔어요. 석모리 349번지 우리 집은 400년 이상 조상 대대로 9대째 살아오던 곳이었습니다.

9.28때는 하루는 터키군이 김포에 있는데 인민군은 밤에 통진 쪽에 있었어요. 인민군이 올 때는 배타고 왔어요. 6.25때는 팔로군이라고 옷이 불그죽죽한 옷이었고 따발총을 썼고요”

“1.4후퇴 때는 중공군이 왔었어요. 인민군 3개월 정치시의 바닥 빨갱이들을 전부 잡아다 죽였어요. 장릉산이나 양곡 천주교회 뒤에서 죽였어요. 석모리에서도 3.4명이 가서 죽었어요.

이북의 내무서원을 했다고 여기 치안대가 죽인 거예요. 어떤 이는 25세에 결혼하고 딸 하나씩 낳고 가족이 있었는데 죽고 난 후에 아내는 재혼해서 시집가고 뿔뿔이 흩어졌어요. 시부모 모시다가 재혼했지요.

옛날에는 결혼하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었어요. 요즘하고는 세대차이가 많지요. 바닥 빨갱이들이 설친 것은 많았어요. 막말로 갯골창에 은폐하고 숨어 있다가 붙잡혀서 장릉산에서 죽었어요.”

6.25가 나니까 젊은이들 20살 넘은 사람들은 양곡초로 모여서 의용군을 지원하라고 했는데 끌려가면 함흥차사가 된 거예요. 석모리에도 45가구 정도가 있었고 9.28이후에는 미군 벙커를 수도 없이 지으면서 휴전을 하고나니 수백 개가 되었어요”

“우리 형님은 바로 위 형님인데 이기승으로 1.4후퇴시 현역으로 나가 전사를 했어요. 51년 10월 20날 전사한 것을 최근에사 찾았어요. 57년 만에 국립묘지 현충원에 있는 것을 확인했어요. 위패를 모신 것을 찾아냈고 당시에 21살이었는데 DNA검사를 해서 유골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동작구 현충원에는 위패만 모셔있는데 서울농대(당시에 경농)를 졸업하고 8사단에 참전 중 사망확인된 것으로 57년 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형의 일을 해결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형도 군인 나갔다가 휴전이 되면서 포로석방이 되어서 교환되어서 온 이가 있습니다. 큰 형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피난은 어머니와 15살이었던 나와 9살 동생과 갔어요. 공항에서 아군들이 후퇴하느라 드럼통이 불타서 펑펑 하늘로 불꽃이 치솟아 올랐어요. 다음날 부천에 가니까 벌써 중공군이 와있어서 평택을 가니까 다리가 끊겼더라고요.

동생은 엿을 고아서 걸머지고 가고, 나는 소에 쌀 두 가마 싣고 어머니하고 평택까지 갔는데 다리가 끊겨져 있어서 갈 수가 없었어요. 거기서 미군 탱크부대가 포를 쐈어요”

“우리는 피난민이 아니라 불구덩이 속에 있었어요. 화성군 반월면 번호리라는 동네서 4시 30분에 쌕쌕이가 폭격을 하기 시작했는데 51년 12월 7일에 어머니가 폭격에 맞아서 돌아가셨어요.

처음에는 팔에 맞으셔서 “어머니 팔에서 피가 나요”했는데 다음순간 등을 맞으시고 돌아가셨어요. 난 솜바지를 입었었는데 앞이 다 없어졌더라고요. 동생은 넓적다리 있는데 맞아서 솜바지가 떨어져 나가면서 살았어요.

눈구덩이 속에 쳐 박히고 숨어 들어갔는데, 나는 없어진 동생을 부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동생은 엄청나게 많이 왔던 눈 속에 쳐 박혀 있었고 나는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거예요“

“아버지는 왜정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피난길에서 잃고 시신을 모시지 못하고 집에 올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때의 심적 고통이 너무 심했습니다. 달밤이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폭격 시에 피난민들이 벌판으로 내뛰는데 중공군 반 피난민 반 그랬어요. 그 당시에 소마산, 대마산에서 같은 쪽으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53명이 돌아가셨어요”

“우리 어머니의 시신은 소에 싣고 간 이불로 싸서 모시고 겨울이니까 이엉으로 덮어 놓았다가 52년 봄에 어머니를 찾으러 갔습니다. 석 달 후에 아군이 밀어서 압록강까지 가니까 경찰청에 다니던 형이 27-8살 되었었는데 돌아와서 사람이 리어카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흘 걸려서 모시고 와 선산에 모셨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릅니다. 어머니 시신 돌봐 준 사람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집에 왔을 때 보호자가 없어서 2달 동안 밥얻어 먹었습니다. 이웃사촌들이 밥들을 줬어요. 쌀을 가져다 주면 밥을 해 줬어요. 피난 시절에 밥해 준 이들 2명은 생존해 있어요.

수정엄마와 이진종이 누이가 너무나 고마워서 쌀 한 가마 부쳐 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15살이던 나와 9살 내동생은 날마다 울기만 했어요. 소도 남을 줬어요”

“6.25전에는 할아버지가 천석꾼 작은 아버지도 그랬어요. 동대문 구청장 등을 하고 왜정때 일꾼을 수십 명 두고 살았어요. 형은 22살에 대곶 지서장을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수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양곡은 천주교 지은 곳에서 내무서원 했던 사람들 많이 죽고, 지금 3.1만세운동 기념비 있는 산에서도 많이 죽었어요. 토익기군(터키)에 의해 강간을 당한 석모리 사람도 있었어요. 양곡중학교를 창설한 반병섭 목사는 군목이었는데 강간했다는 사람을 유선 줄로 묶어서 의자를 걸머지게 했어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여자를 귀찮게 해서 벌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터키 사람은 키는 작고, 노란 수염을 달고 있었어요”    

“9.28땐 석모리 논에 인민군이 숨어 있는 것을 부락 치안대가 잡았었는데 장기리 헌병대가 데려갔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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