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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송장을 먹고 온동네 냄새를 풍겼어홍선표(78세)/ 양촌면 양곡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양촌면>

개가 송장을 먹고 온동네 냄새를 풍겼어

양릉에서 유엔군 인민군 전투 목격
도리깨질하던 농부 치안대에 보복 희생
18년간 군인생활 대위로 70년 예편

   
▲ 홍선표(78세)/ 양촌면 양곡리
홍선표씨는 당시에 김포농고 2학년이었다.
새벽밥을 해먹고 2시간 넘겨 걸려서 김포농고로 통학을 했다.

“당시에 부잣집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었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짚신신고 다녔어요. 중학교를 16살에 입학했어요. 등록금이 3,900원이었는데 가난해서 이웃에서 도와줘서 학교를 다닌 거예요. 6월 25일 아침 공부는 오전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 20살이었어요.

지원해서 의용군에 많이 갔는데 현 학생은 보류가 가능했었습니다. 27일 인민군이 왔고요. 겁나고 무서워서 얼굴을 대고 보지 못했습니다. 마차 우마차로 포와 쌀을 싣고 가는 것을 먼발치로 양릉에서 봤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잡혀간 사람은 없고 보도연맹 사람들이 자진 입대해서 의용군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마을의 피해는 하나도 없었고 7-8명이 의용군가서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양릉은 8.15해방 되기 전 김포에서 가장 빈한한 동네였고 나중에 수리시설이 되었던 곳입니다”

“피난은 하루 만에 되돌아와서 피난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인민군이 우리가 간 것보다 더 먼저 앞질러 갔기 때문이다. 국군은 간부후보생들이 쫒겨내려 오면서 27일, 28일, 29일 우리 집 부엌에 숨겨 주었고, 하룻밤 한복을 입혀서 내보냈습니다.

우리 동네는 가혹행위는 그 때까지 없었습니다. 보도연맹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나가고 나서 우리 동네는 민족청년단 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민군 부역경험은 있습니다. 서해바다 쪽 검단 안동포에 방공호를 구축하러 갔었어요. 인천상륙작전 대비하려고 한 이틀 공사를 했는데 인민군은 아니고 시키는 책임자가 간곳이 없어서 호파던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왔습니다”

“8월 추석 전 9월 초순에 인민군들이 이북으로 쫓겨 가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9.28수복이 되면서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민군이 쫓겨 가면서 일부가 남아서 우리 마을 옆으로 닭을 잡으러 왔었습니다.

그 당시 유엔군이 김포 누산 리를 거쳐서 양곡으로 들어오다가 닭을 잡아 식량을 보충하러 온 인민군 1개 분대와 마주쳐 전투가 벌어진 겁니다.

유엔군 지프차와 트럭행렬과 1개 중대가 들어오고 있는데 인민군들이 자기들 군대가 지원온줄 알고 환영을 하다가 유엔군인줄 알게 되자 사격을 해서 유엔군이 2-3명이 사망했습니다”

“인민군이 쫓겨 가면서 쓰러졌는데 그때는 벼가 익어 가는데 논바닥에 쓰러져 죽고 뿔뿔이 흩어져서 산에서도 죽었습니다. 미군들이 사격을 받아 후퇴를 하고 그 다음날 유엔군이 포 사격을 했습니다. 그 당시 유엔군이 들어올 때 우리 마을의 한 농부에게 물었어요. ‘인민군이 있느냐’고요.

도리깨질을 하던 농부는 인민군을 보지를 못했으니 없다고 말을 했고, 유엔군은 안심하고 통과하다가 변을 당한 겁니다”

“그 당시에 포 사격으로 마을이 피해를 크게 입었습니다. 집이 다섯 채가 불타고 죽은 사람이 네 사람이나 되었습니다. 포사격을 맞고 우리 작은 집에 소한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그 소도 죽었습니다.

동네가 쑥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유엔군 있는 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당시에 48가구였는데 다 빈집이었고요. 죽은 사람은 유엔군 사격으로 피해를 본 것입니다”

“남쪽으로 피난 갔다가 하루 있다가 오니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들이 유엔군 시신은 가져가고, 인민군들의 시신은 논바닥에서 어찌 되었나 모르고. 산에서 죽은 인민군들은 그 자리에 묻었습니다. 그때는 개들이 먹을 것이 없으니 송장을 파먹고 다니면서 냄새를 풍겼습니다.

동네 피해는 어린아이가 파편에 맞았고 할머니한 명은 집이 불이 나서 타죽고 어린아이 한 명중에는 시집갈 나이었는데 죽고 말았습니다”
“수복이 되고 나서는 자치대인 치안대에서 당시에 도리깨질을 하던 농부 박탱이(24살 혹은 25살)를 면 지소 뒤에서 죽였습니다. 박탱이는 당시에 인민군이 없는 줄 알았던 사람이에요.

인민군들이 숨어있으니 농부가 알 수는 없었지요. 유엔군이 물으니 보지 못했으니 없다고 대답한 거예요. 완전히는 아니라 보도연맹에 조금 물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천주교 자리의 낮은 산에서 죽였어요”

“죽일 적에는 보도연맹 찌꺼기들은 다 죽였습니다. 몇 십 명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선동하고 부역을 심하게 한 사람이나 보도연맹 사람들을 끌어다 호속에 집어넣었습니다. 2-3일 있다 끌어다 죽였어요. 양곡중학교 뒤쪽 산, 한강뻘에서도 죽였었는데 당시에는 철조망이 없었어요”

“1.4후퇴 전에 제2국민병 소집이 있어서 20세 이상의 젊은 장정들은 남쪽으로 내려갔어요. 방위 장교들인 무궁화 잎 하나인 사람들이 인솔해서 제2국민병은 몇 백 명을 데리고 매일 걸어서 대구까지 갔어요. 우리 부락은 10명이 갔는데 난 장남이고 방위사관 학교에 들어가 6주간 교육마치고 방위 소위가 되었어요. 2기생으로 김윤모, 이윤택 등이 동기예요”

“근데 김윤군 대령이 제2국민병 부식비를 다 떼먹어서 사형당하고 국가에서 방위군을 해산했어요. 대구에서 창령 105사단 사령부까지 걸어 내려가서 밀양 112연대에 소속되어 1년 있다가 방위군 해체되니 제각기 집으로 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복학해서 3학년 졸업을 맞고 52년 징집되어 다시 논산훈련소 8주 교육받고, 마산 육군군의학교 6주 교육, 위생병, 구호병, 보충대 거쳐서 춘천보충대로 가고, 9사단 백마부대 의무중대에 소속되었어요”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면서 휴전되기 전에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어요. 나는 최전방에 있지 않아서 살았어요. 축구를 잘해서 사단에 떨어져서 살았어요. 휴전이 되기 전 김일성이가 3.8이남으로 총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군 전선에서 3,40리 후퇴해서 땅을 빼앗겼어요.

사단까지 포가 떨어졌었어요. 징집을 나갈 때는 어깨띠를 메고 갔는데 그러고 나가는 것이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아서 싫어서 울고나갔었어요. 6.25 때문에 군인으로 18년간을 살고 대위로 제대를 했어요. 70년 5월 30일 날 대위로 예편했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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