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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극 또 생기면 가무러쳐 죽어최기윤(90세)/ 하성면 시암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하성면>

그런 비극 또 생기면 가무러쳐 죽어

전쟁이 무서웠지 인민군들은 안 무서웠다
사상 다르다고 아내 죽여, 시부모가 손자 2명 기른 집도 있어요

   
▲ 최기윤(90세)/ 하성면 시암리
“18살에 시집왔어요. 남편은 17살이었어요. 33살에 전쟁이 나고요. 6.25새벽에 자고 있는데 꽝당꽝당 비도 안 오고 천둥소리가 난다고 했더니 난리가 나서 쳐들어온다고 난리가 났어요. 꽝꽝 난리야. 강이 있는데 개미가 줄 닿듯이 강 건너 이북사람들이 이리로 쫒겨 나왔어요.

당시에 아이를 가졌는데 놀라서 유산이 되었어요. 그래서 4살, 7살, 9살, 13살, 딸 2명 아들 2명 데리고 양곡의 친정오라버니네로 갔어요. 소달구지에 벼 몇 가마에 옷담아서 친정가서 겨울을 났어요. 작은 아이는 아홉 되이고 아들은 13되 지게에 지고 나갔어요”

“너무나 무서운 사변이었어요. 35가구 정도였는데 모두 빈집이었어요. 다 피난 갔어요. 나는 양곡인데 30리 밖이라 폭탄이 안 떨어졌어요. 남편은 죽지 않았으면 들어오겠지 하고 기다렸지요. 남편은 김용운인데 제 2국민병을 나갔어요. 봄이 되어도 무소식이었는데 편지 한 장이 없다가 음력 정월에 들어왔어요. 1.4후퇴 겨울에 들어왔어요. 목수였는데 한국목수였어요.

그 부대 사람들이 다 죽었지만 집을 짓는 일 하다가 살았어요. 목수노릇을 하기 때문에 살았어요. 김포에서 300명이 나가 제2국민병을 갔는데 연대장의 집을 짓고 살아왔어요. 그 당시에 시동생이 김행원인데 당시에 20대 후반이었고 면 공무원이어서 인민군 오면 다 죽이니까 헛간에 감추고 몰래 밥해주었는데 너무 불안하고 놀래서 공포 때문에 그랬나 빨리 죽었어요. 64살에요”

“그땐, 오피산에 탱크가 6대가 있어 묻어놓고 퉁퉁 이북으로 쏘아 보내도 대항을 안했고 나중에 대항해서 인민군이 쏜 폭탄이 밭이나 골목에도, 동산에도 마구 떨어져서 시암리는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뿅하면 시시시식쾅당’하고 요란했어요. 그 폭탄 때문에 사람이 하늘까지 올라갔다 떨어지기도 했어요. 1.4후퇴 때는 이북에서 불탄을 쏴서 여덟 집이 불탔어요.

집 안팎이 불타고 할머니 한분이 죽고, 총각도 죽었어요. 그래서 장례도 못 치르고 밭에다가 짚을 갖다놓고 시신을 모셔놓고 소나무를 꺾어서 덮어놓았다가 봄에 장사를 지냈어요. 폭탄이 떨어지면 일하다가 날아가 담벼락에 달라붙었어요. 다른데 떨어졌으면 어디가 부러지거나 죽었을 텐데 그래도 담벼락에 붙어서 살았어요”

“미군들도 쐈어요. 인민군 밥해주는 줄 알고 쐈어요. 그래서 이불을 하양색으로 찢어서 장대에 꽂아서 대문에 하얀기 달아놓고 ‘민주하양이다’라고 표시를 했어요. 도대체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쌕쌕이 비행기에서 민간인 신발까지 망원경으로 보고 쐈어요. 그때는 변소가 밖에 있어서 화장실 출입이 무서웠어요. 잘 못다녔다구요.

다시 농사를 지어도 기관총 알이 밭이고 동산이고 마구 떨어져 다시 무서워서 들어왔어요. 밥꾸려 가지고 다니면서 일했어요. 다시, 그런 비극이 다시오면 까무러쳐서 죽는다고. 정말 무서운 사변이이야. 시암리 텃골 태수네등 우리 증조 할머니네도 안 안밖집 모두 탔어요”

“제 2국민병은 살살 도망 왔어요. 옥수수더미에서 종일 드러누워서 자고 산 건너 물 건너 도망 왔어요. 최서방네와 김씨네요. 이곳도 이북으로 간 집도 몇 집 있어요”

“눈올 때 인민군은 하얗게 홑이불 입고 총대도 하얗게 감고 왔어요. 배고프니 밥해달라고 했어요. 1.4후퇴 전 이야기야 유식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손바닥에 글씨쓰고 피해 없이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인민군이 또 들어왔다가 나가고 또 나가고 했어요.

괴롭힌 적은 없지요. 그럼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모두 1.4후퇴전이에요. 이북에서 검은 말을 타고 밤에 들어와  인민을 위해 왔다고 말했어요. 전쟁이 무서웠지 인민군들은 안 무서웠어요”

“그때는 사상이 다르다고 아내를 죽여서 시부모가 손자를 2명 기른 집도 있어요. 몇십리밖 친정 갔다 오다가 죽임을 당했어요. 그때는 사상이 다른 사람을 재워주면 큰 일 났어요.

치안대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잘 했어요. 좌익 괴롭힌 일 없었어요. 우리 남편은 46살에 돌아갔어요. 전쟁에서도 살아왔는데 병으로 죽었어요. 군인제대하고 돌아와 다시 4명을 더 낳아서 8남매를 다 키웠어요”

“6.25가 나고 나서 휴전하고서도 임진강변에서 수영을 했다고요. 철조망이 없었거든요. 간첩이 오면 신고하면 군부대가 있어서 총을 쐈어요. 50년대 후반까지 총 쏘면 뒷산에 수류탄 실탄 등의 탄창이 있어서 엿장수한테 주고 엿을 바꾸어 먹었다고요. 어떤 아이는 그걸 땅에 놓고 치다가 오른쪽 손가락이 날아갔어요. 삐라도 바글바글했어요. 볼펜을 빼면 수류탄이라고 줍지마라고 했어요”

“그때는 나무그늘에서 밤이면 인민군들이 회의를 했어요. 빨갱이인 유지급의 이장이 있었는데 연구아버지라고 한청사무실 차려놓고 접수보고 그랬어요.

10리 밖에서 매부가 같은 일을 하는데 물 건너서 두 사람이 고모 집에 숨어서 밥을 꾸려가지고 망태기에 담고 나무하는 척 나무를 깎아라 했는데 누가 신고를 해서 무서워서 강에 뛰다가 저놈 잡아라. 하니까 괭이가지고 와서 찍어 죽였어요.

손자들이 살아서 지금 우리 할아버지 왜 산소가 없냐고 하지. 아들은 잘 살아요. 그래도 이곳은 이씨와 김씨 동네이고 친척이라 희생이 작은 거예요. 순자 아버지는 빨갱이라고 자수하고 구류를 살고 나와서 살았어요”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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