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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민경완(68세)/하성면 봉성리

Ⅱ부. 김포6.26전쟁비사/주민증언-<하성면>

 

이제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 민경완(68세)/하성면 봉성리

포클레인으로 파는데 신발짝과 뼈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뼈를 다 모아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6.25 당시 11살이었으며 봉성리에 살았다.
"하성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석방된다고 하면서 석방이 미루어지고 있는 아버지 민창기씨가 갇힌 창고에 밥을 날랐습니다. 학교 앞으로 지나가면서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드리라고 하면 그렇게 창피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민창기씨는 인민위원회 서기 일을 보았고 이로 인해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학살은 음력으로 9월 10일로 알고 있습니다“

“학살되었을 당시에 어머니를 찾으러 왔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대신에 면서기 다니던 권동규와 형님들이 찾으러 갔었습니다.

시신을 찾을 수가 없어서 1.4후퇴 된 다음 찾으러 갔는데 모친이 임신 중이어서 놀라면 안 될까봐 외삼촌들만 갔는데 모친이 나중에 쫓아왔었습니다. 8살, 5살 동생 두 명을 둔 채로 시신을 찾으러 갔던 어머니는 시신들이 한데 섞여 있어서 누가 누군지 몰라 옷을 보고 찾으려고 했지만 끝내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이 부패했고 옷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머니는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했습니다. 당시에 태산골짜기는 험한 산골이고 개울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갔습니다”

“이렇게 당한 가족들 중에 민경완, 민경성, 김충흠 3사람이 의논을 하면서 찾아보자고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정충헌씨가 목장을 만들면서 포클레인으로 파는데 신발짝과 뼈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뼈를 다 모아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대강 추려서 포클레인으로 당시 개울에 골짜기 모아 놓은 것을 풀을 뽑고 단을 모으자고 합의해서 당시 수소문을 하고 제삿날이 같은 이들 9명이 위령비를 세우게 되었어요. 원래는 8명이었는데 나중에 권금자씨가 합류하게 되었어요. 당장은 나무를 박고 새끼줄을 치니까 시에서 산소를 못하게 캐어내라고 했어요.

정식허가를 안 해 주어서 힘들었어요. 새벽에 비는 쏟아지는데 뻐꾸기가 그렇게 많이 울더라고요. 나중에 인정을 하게 되고 봉분이 있었는데 납작하게 만들어 평묘를 했어요. 지금 이 자리가 정충헌씨가 모아놓은 자리입니다. 서로 돈을 모아 단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6.25이전에는 구장 보던 사람은 인민군 시절로 바꾸어도 일을 봐야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버지는 인민위원장이 1명 있고, 행정을 보는 서기 일을 했더랬습니다. 당시에 아버지는 동네에 의사가 없던 시절이라 주사도 사람들에게 놔주고 초상나면 봐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시에 청년단장 민만식이라는 이가 우리 집안을 별러서 동네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보고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전류리 집안네 있다가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붙잡혔다고 해서 가보니 동네 사무실이 있는 마당에 계셨고, ‘내가 무슨 죄가 있나 시켜서 했는데, 며칠 있다가 나올 거다’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봉성리에서 하성초등학교까지는 10리입니다. 그곳에 주발에 밥을 가지고 와서 열흘간 드렸는데 마지막 본 것은 면사무실에서 내려오시는데 묶지는 않았더라고요. 보리를 심을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저에게 ‘보리 심었냐?’고 물으신 것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울음)

동네 사람들이 며칠 있다 나오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 나오시면 술 드린다고 담가 놓았어요. 당시는 청년단장이 도장을 찍어야 되는데 안 찍어 주어서 못나왔습니다.

면에 다니던 형님이 밥을 가져가지 말라고 해서 학교에 갔을 때 창고를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없었어요. 당시에 창고에는 여자들도 있었어요. 처음에 우리 아버지는 경찰서에 가서 나온다고 믿었었어요. 외삼촌도 다 나올 줄 알았는데 음력으로 9월10일 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6.25당시에 군군 패잔병들이 마을에 왔을 때 옷을 다 바꾸어 입혀서 살려서 보내 군인 박해문씨가 나중에 고마웠다고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어느 동네든지 감정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치안대장 친구가 있는 사람은 안 당했어요. 하성면사무소에는 창고가 두 개가 있었어요. 창고 두 개가 다 꽉 찼었어요. 하나가 10평이 훨씬 넘는 창고였는데 젊은 사람들이 있는 창고가 있었고, 여자들과 노인들이 있는 창고가 있었어요.

의용군 나갈 때 부역한 사람, 애 있는 여자, 젊은 여자들을 매일 잡아 죽여 100여명 정도 죽인 거예요. 창고 안에 있던 사람이 다 나갔으니까요. 태산이 마지막으로 죽인 장소에 해당합니다. 건너 석탄리엔 여성과 어린아이가 많았습니다”

“석탄리 한강 둑에서 학살을 시키는데 살아나온이도 있었어요. 직접 들었습니다. 김동길이라고 1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달밤에 창고에서 손을 묶더랍니다. 김포경찰서로 다 넘긴다고 말하면서요. 김포경찰서로 가려면 큰 길로 가야하는데 뻘로 나가더랍니다.

철사로 묶어서 강가에 죽 세워놓고 총으로 갈기니까 모두 물로 넘어지면서 그이도 같이 넘어가 갈대를 붙잡고 안 떠내려가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다른이(경선)한 사람도 살아 있어 포승을 서로 끊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동길씨는 처갓집(전류리) 헛간 짚속에 숨었다가 아침에 쇠죽을 쑤러 나온 처가 식구가 화장실 재속에 감추어주었다가 나중에 자수를 시켜서 살았는데 민경선이는 집에 와서 숨었다가 다시 잡혀서 죽었습니다”

“후손으로서 이제 11살이던 나이가 68세, 70세 이상이 되었습니다. 후손으로 생각해 보면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보복성 살상이 많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 국운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이가 안쳐내려 왔으면 이런 일 없었을 것이고, 우리 아버지는 반공에 투철했지만 어려운이 돕고 그렇게 살았어도 돌아가셨어요.

이제 후손으로서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어도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해코지 한 사람도 이미 죽었고, 죽기 전에 사과를 했습니다. ‘어쩌다가 하루하루 도장 찍기를 미루어서 너희 어머니에게 미안하다 너희들에게도 미안하다’고 했어요”

“정흥철씨라고 술집 하는 이도 있고, 오케이 할머니라고 그이도 술집을 하는데 서로 무슨 일로 싸우다가 미군이 나타나서 “코뮤니스?” 라고 물으니 “오케이”라고 하자 정흥철이라는 사람을 쏴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 하성면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서 학살당한 유가족들이 증언하고 있다

 

위령비를 세운사람들
9가족

민창기 -아들 민경완(68세)
권남규- 아들 권문옥(71세),권세옥(67세) 마조리
민남기-아들 민경성(76세) 민경훈(70세) 민경웅(65세) 마조리
김순명 -아들 김충흠(74세) 가금리
민병호- 아들 민석기(작고),후평리  민경철(손자)
민만기- 민경철(68세) 마조리
어윤- 어수일(작고) 석탄리
여이현- 여운정(80세), 여운태(71세), 여운길(67세) 마곡리
권동규 -권금자(딸)(60세) 마조리

   
▲ 하성면 석탄리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서 집단 학살당한 분들의 유가족 9분이 위령비를 세웠다.

민경철(69세)/하성면 마조리

“당시에 11살이었고요. 아버지는 구장을 보다가 인민위원장을 봤고요. 아버지가 끌려간 현장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끌려가셨다고 아침마다 밥을 가져가는 것을 알았고요.

나는 어렸지만 가족들이 몇날 며칠을 시체를 찾으러 다니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고 연좌제에 묶여서 생활고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아도 다 합격을 하더라도 신원조회만 했다하면 안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을 해도 빨갱이 아들이라고 어디가면 경찰조사를 받았어요. 전셋집을 살아도 찾아오니 이웃사람들이 수상히 여기고 하도 견딜 수가 없어서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에 찾아가 왜 뒷조사를 하느냐 직접 물어봐달라고 했습니다. 막내 삼촌이 의용군을 나가서 북에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50년 12월 겨울 덜거덕 거리면서 문을 열라고 했습니다. 눈이 쌓여있었는데 네 식구가 자고 있었어요. 갑자기 누나가 뒷문으로 뛰어나갔고요. 형수는 눈병으로 앞을 못 보았는데 치안대가 칼빈총으로 방을 쾅쾅 치면서 욕을 하고 다 죽인다고 했습니다.

   
▲ 민경철(69세)/하성면 마조리

민경희(17살) 잡으러 왔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둘러 댔지만 나는 너무 무서워서 우리 누나 금방 도망갔다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누나는 이주열씨가 숨겨주어서 살았습니다. 그날 밤에 처녀들이 4-5명이 치안대에 붙잡혀 갔습니다. 누나를 못 잡아 가니까 총으로 개를 쏴 죽였습니다.

1.4후퇴때 터키군은 ‘도로꼬’ 군이라고 했는데 여자들은 대문이 튼튼한 집에 모여서 잤습니다. 아저씨들이 방망이를 들고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터키 군들이 여자들을 강간을 했거든요”

“하성초등학교에는 당시에 200-3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도치카가 있었어요. 민방공 훈련하는 것이요. 9.28때 30-40명이 죽었어요. 시체가 쫘악 깔려 있었어요. 그때는 성황당 고개여서 골짜기였고요. 그곳에서 떡도 주워 먹었는데요. 여기서는 시체를 찾아들 갔어요. 산에 감추어 놓았다가 찾아가는 이도 있었어요”


 민경훈(70세)/하성면 마조리
“강영규라고 하성면 인민위원장을 보았던 일가족 40여명이 몰살되었습니다. 3살 7살, 손을 철사로 묶고 아이 업은 여성은 죽고, 아이는 울고 하성초등학교 뒤(지금은 길옆)에서 보다가 무서워서 다시 갔습니다. 집으로 무엇을 가지러 오다가 다시 갔습니다”

   
▲ 민경훈(70세)/하성면 마조리

민경웅(65세)/하성면 마조리
“저희는 민경성, 민경훈, 민경웅 삼형제가 남았습니다. 저는 민경웅이라고 셋째인데 당시에 아버지는 몸을 피하시느라고 그랬는지 산에 많이 계시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9살 때이니까요. 우리 집 아래 황인원씨집 아래에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죽 잡아다 놓고 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일을 못 보니까 그중 배운 사람들을 일 시켜놓고 빨갱이라고 한 겁니다. 뒤주와 장롱, 인삼 캔 것을 4가마를 다 압수하고 몰수해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네일을 본겁니다. 민봉기가 붙잡아 갔습니다”

   
▲ 민경웅(65세)/하성면 마조리

권세옥(67세)/하성면 마조리
“그 당시의 상황은 다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농사를 지으면서 구장을 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조리에서 살았고요. 2000년부터 뜻을 같이 해서 아버지의 진상을 찾아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8촌 동생 권금자가 과거사를 찾는 일에 뜻을 가지고 노력하면서 저도 같이 노력하는 중입니다. 지켜보고 기다려봐야지요. 이제라도 어쩔 수없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죽음을 당한 어른들의 한이 풀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권세옥(67세)/하성면 마조리

       

김진수발행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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