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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사(진술)자료에 의한 김포 민간인학살 실태김포6.25전쟁비사- 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실태조사 P218쪽

5. 조사(진술)자료에 의한 김포 민간인학살 실태

김포면, 고촌면, 대곶면, 하성면지역의 좌익 혹은 부역혐의자로 학살당한 희생자 유가족 및 참고인이 진술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실태를 살펴본다.

1)김포면 여우재 고개ㆍ독자골 사건

(1) 희생자 연행

김포면 북변리 정순영은 ‘옹주물(감정리) 빨갱이’ 부역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5일(음력 8월 24일) 처 조명순과 생후 4개월 된 정정자와 함께 “모이라”는 치안대의 지시에 따라 불려나가 운양리 샘재 쪽에 있는 곡식창고로 끌려갔다.

김포면 감정리 신성철은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8일 나무하러 갔다가 국군에 의해 치안대로 넘겨져 김포경찰서로 끌려갔으며, 모친 이정순 등 그의 가족들은 9월 28일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한다. 일자는 불명확하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마을 정순달은 고촌으로 피신하던 중 고촌면 관청에서 연행되었다고 한다.

김포면 운양리 심덕기는 1950년 9월 18일경(음력 8월 7일경) 국군 수복 직후 “죄가 없으니 금방 갔다 온다. 너희들은 방공호에 가 있어라”고 하면서 치안대에게 끌려갔으며 그의 사촌 심현구는 그 바로 뒤에 끌려갔다.

(2) 감금

국군의 수복 직후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던 김포면 감정리 신성철에 따르면, 당시 잡혀 온 주민들 100여 명으로 세 개의 유치장이 모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갇힌 지 이틀 째 되던 날 밤인 9월 19일 밤 12시경 후퇴하던 인민군이 다시 김포로 돌아와 유치장에서 풀려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촌 오빠 심현구가 인민군에 의해 유치장에서 풀려나와 다시 경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는 신청인 심순옥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로보아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18일경부터 김포면에서 치안대가 활동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김포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간 신성철과 심현구는 1950년 9월 20일 후퇴한 인민군의 일시적 반격 과정에서 풀려났으나 1950년 9월 21일경 다시 국군이 수복하자 신성철은 자수한 후 풀려나게 되었다. 한편, 심현구는 김포에서 다시 치안대에 잡혀 여우재 고개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으로 김포를 재점령한 인민군이 후퇴하자 김포 치안대가 다시 활동하였다. 치안대는 김포경찰서로 끌려 온 주민들의 이름을 확인한 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남자는 김포경찰서 유치장에, 여자는 경찰서 내 방공호에 감금하였다.

부역혐의에 대한 조사는 김포경찰서 경찰관들이 하였는데 유치장에 감금된 남자들을 고문을 하면서 인민위원회 활동에 대한 자백을 강요했으며 여자들에게도 말채찍 모양의 흉기로 손바닥을 때리는 고문을 했다.

정순영의 처 조명순은 “장사를 하는 가게에 좌익이 드나든 사실을 말하라면서 매를 맞았으며 일주일 후인 1950년 10월 11일 남자들이 끌려 나가고 비어 있던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다시 일주일 동안 취조를 당했다”고 진술하였다.

(3) 집단 살해와 암매장

김포경찰서는 주민들을 연행한지 일주일이 지난 1950년 10월 11일 유치장과 방공호에 감금된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여 다시 두 집단으로 나누었으며 이 때 정순영․조명순 부부도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당시 경찰은 정순영이 속한 주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으나 조명순이 속한 주민들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조명순은 유치장 담당 경찰들이 주먹밥을 받은 주민들에게 “아 저 사람들 오늘 밥 한 술씩 먹고 좋은데 가는 거야”라고 하며 조롱하는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조명순은 정순영을 포함하여 밥을 먹은 주민들 100여 명이 전깃줄에 묶이어 2대의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조명순은 나중에 그들이 여우재고개로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그 곳에 있던 큰 웅덩이에 매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양촌면 수참리에서 연행되어 김포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김동철․최인준과 양촌면 유현리 황범주도 이때 여우재 고개에서 같은 시기에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신성철은 끌려간 지 한 달 만에 부평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들이 김포면 장릉산 독자골에서 1950년 9월 29일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독자골에서 가족들과 함께 끌려갔다 살아나온 정광순과 현장을 가 보았으나 유골을 찾지는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감정리에서는 이들과 함께 황씨 일가족, 정남석 일가족, 정형모 일가족 등 60여 명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당시 총탄을 빗맞아 현장에서 살아나온 정광순은 참고인 정○○이 치료해 주어 살 수 있었으나 몇 년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조명순은 “김포경찰서에 연행되기 전에 운양리(샘재) 등 여러 동네의 사람들이 북변리 김포국민학교 있는 쪽 산(장릉산)으로 끌려간 후 총소리를 들었으며, 남편 정순영의 죽음 뒤에도 김포경찰서에서 몇 번 더 주민들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김포면 운양리 심성기, 심현구, 심덕기도 김포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총살당한 것이므로 이들 역시 1950년 10월경 여우재 고개 또는 장릉산 독자골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인 조명순은 사건 1년 뒤에 희생된 주민들의 유족 서너 명과 함께 남편 정순영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여우재 고개에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당시 여우재 고개의 웅덩이에는 시신 위에 흙을 덮고 솔가지를 덮은 채  장마로 드러난 유골을 볼 수 있었으며 시신들의 팔은 통신선으로 묶여 있었다. 시신들이 입고 있던 옷도 부패되어 알아 볼 수 없었으며 여자들이 묻혔다는 곳에는 쪽 머리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감정리 정○○에 의해서도 목격되었다. 정○○은 사건 후 3~4년 지나 여우재 고개를 가 보았는데, 당시 시신들이 네 겹으로 쌓여있었으며, 아래 개울까지 시신들이 흘러 내려간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정봉운은 모친이 정경순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우재 고개를 갔는데 당시 산비탈에서 흙에 살짝 덮여 있는 시신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감정리 윤종호는 “여우재 고개에서 사람 뼈가 많이 나왔으며, 김포국민학교 뒤 충혼탑과 공군부대에서도 많이 나왔다”고 진술하였다.

사건당시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박점문도 “여우재 고개의 웅덩이에서 200명 내지 400명에 이르는 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정○○은 “정순달과 그의 며느리 한말려, 손자가 김포 공설운동장에서 희생된 것으로 안다”고 진술하였다. 이로보아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김포 여우재 고개와 장릉산 독자굴 등에서 조사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울부짖는 아낙네. 함흥 덕산광산(1950.11.13)/자료사진 지울 수없는 이미지(2007.눈빛)

2) 양촌면(현 통진면 일부 포함) 양곡지서 사건

(1) 희생자 연행

수참리 김동철과 최인준은 1950년 9월 28일경 가족들과 함께 마을에서 김포면 쪽으로 피난하던 중 바리미 부근에서 치안대에게 연행되었는데, 김포로 가는 길목인 바리미 고개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미군차에 실려 김포경찰서로 보내졌다.

이들이 차에 실린 후부터는 미군들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김포경찰서로 끌려갈 주민들이 바리미 고개 치안대 사무실에 더 있었으나 서울에서 피난 왔던 김동옥이 치안대를 설득하여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수참리 장경선은 1950년 9월 30일경 부역혐의로 양곡지서로 끌려가 9일 동안 조사를 받았으며 다시 김포경찰서로 넘겨져 10일 후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된 지 일주일 뒤 김동옥에게 불려나가 양곡지서로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정경순은 1950년 10월 10일경 양곡지서에서 나왔다고 밝힌 치안대에게 끌려갔다. 수참리 김동준과 김동기 형제는 월북했다는 김동춘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잡혀갔는데, 신청인 김동묵은 그의 친구였던 김동기가 1․4후퇴 직전까지 양곡지서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유현리 황범주는 인민군 점령 당시 면 사무소에서 일했으니 피신하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부역혐의를 받던 마을 주민 황덕현, 심유택과 함께 김포경찰서로 자수하였다. 그 뒤 황덕현과 심유택은 풀려났으나 황범주는 풀려나지 않았으며 그 뒤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2) 감금

끌려간 주민들이 양곡지서에 갇히자 신청인 정봉운, 장경선의 처 김정숙 등 그 가족들이 옷과 음식을 날랐다.

신청인 정봉운은 밥을 나르면서 정경순을 면회할 수 있었는데, 당시 양곡지서 유치장은  3~4평 정도였고 10여 명이 잡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갇혀 있던 주민들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여자들도 있었다. 정봉운은 양곡지서를 지나오던 친구들로부터 “지서에서 매일 고문하는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참고인 김정숙에 따르면, 양곡지서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을 통해 남편 장경선이 양곡지서 내 지하 방공호에 감금되어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 사람을 통해 주먹밥을 전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정봉운의 가족들은  정경순이 잡혀간 지 일주일 후 면회를 시켜주지 않자 죽임을 당했다고 판단하고 시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양곡지서 뒷산과 여우재 고개, 한강변을 찾아다니다가 1950년 11월 8일경 하성면 전류리 한강변에서 최인덕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낭떠러지였던 양곡지서 뒷산에서 흙으로 대충 덮어놓은 20여구의 시신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양곡지서로 남편 장경선의 주먹밥을 해서 나른 김정숙은 밥을 나른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지서 창고에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 때 양곡지서 근처에 거주하던 어떤 할머니의 “밥을 해 올 필요 없다. 어제 저녁에 다 끌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죽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망일을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6일)로 알고 있다. 희생된 곳은 구래리 입구 양곡지서 뒷산으로 알고 있다.

1․4후퇴 직전 신청인 김동묵은 양곡중학교 뒷산(현재 3․1공원 뒤)에서 3~4평 크기의 구덩이에 암매장 되어 있는 10여구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당시 시신들은 군용 통신선에 손을 뒤로 묶인 채 들풀로 얇게 덮여있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양촌면의 희생지는 양곡지서 뒷산과 양곡중학교 뒷산으로 두 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을 종합할 때, 장경선․정경순․김동준․김동기 등 30여 명의 주민들은 1950년 11월 6일경 양곡지서 뒷산과 양곡중학교 뒷산에서, 김포경찰서로 끌려간 김동철․최인준과 자수한 황범주는 1950년 10월경 여우재 고개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인덕은 1950년 11월 6일경 하성면 전류리 한강변에서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

3) 하성면 태산골짜기 등 사건

그림  하성면 석탄리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서 집단학살 당한 희생자 유족들이 증언을 하기앞서 참배를 드리고 있다.

(1) 희생자 연행

국군에 의해 김포 하성면이 수복되자 각 마을의 치안대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가금리 김순명 등 마을 주민 10여 명이 1950년 9월 말경 가금1리 송득선에게 끌려가 가금리 치안대 사무실로 쓰인 조제원의 집에서 매를 맞았다.

그 다음 날 김순명을 제외한 주민들은 모두 풀려났으나 김순명은 하성지서로 끌려갔다. 가금리에 피신해 있던 여이현과 마조리 마을에 있던 권동규는 치안대 민봉기에게 잡혀갔다.

마조리에서 주민들이 끌려가는 모습은 참고인 민경성․권세옥이 목격하였다. 민봉기 등 치안대원들이 30여 명 되는 마조2리 사람들의 양손을 묶은 채 잡혀 와 아래 집 마당에다 앉혀 놓았다. 그 중 민봉기가 집에 들어와 작은 소총(칼빈총으로 추정) 개머리판으로 마루를 쾅쾅 치면서 위협을 하였다. 그 뒤 이들은 권계성(마을에서는 권남규로 부름)을 끌고 갔다.

고양 벽제면 성석리에서 치안대 활동을 하던 이각은 민병택과 친인척 사이였는데, 민병택의 연행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각은 인민군 점령 당시 하성면의 배급소에서 일하던 민병택이 국군 수복 후 피신하던 중 고양 벽제면 성석리로 오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민병택은 이각의 집에서 땔감 나무를 하는 등 의심을 받지 않고 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초순경 고양 벽제면 치안대장 홍기세가 이를 보고 혹시 누군지 모르니까 김포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오라고 하였고, 이에 대해 민병택은 "매부가 하성면 청년단 단장이니까 그 사람에게 얘기하면 증명서를 해 줄 거다”면서 이각에게 김포로 다녀오라고 했다.

이에 이각이 김포 하성면 치안대장으로 있다는 남궁씨(남궁준으로 추정됨)에게 사정을 말하고 증명서를 해달라고 하였으나 이 말을 들은 남궁씨는 바로 김포 하성면 치안대원 2명을 딸려 보내며 민병택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 후 이각을 따라 온 김포 하성면 치안대 2명이 민병택을 체포하여 김포로 떠났다. 민천기에 따르면 민병택이 하성면으로 끌려온 때는 1950년 11월 10일(음력 10월 1일)이었다. 민병택이 피신해 있는 동안인 1950년 10월 29일경 그의 모친 조원순, 딸 민진기, 민군자가 치안대에 의해 끌려갔으며, 아들 민봉기는 1․4후퇴 직전에 고모부 남궁준(대동청년단장이었다고 함)의 집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마곡리 강범수는 국군 수복 당시 개풍군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전쟁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치안대 민근식이 찾아가 “살려 줄테니까 돌아가자”고 설득하여 하성면으로 돌아왔으나 그 직후 하성지서에서 감금되어 고문을 받으며 부역자들 명단 작성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 하성면 석탄리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서 집단학살 당한 희생자 유족들이 모여 위령비를 세웠다.

(2) 감금 및 고문

끌려 온 주민들은 하성면사무소 뒤 두 개의 가마창고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창고에 연행된 지 7일에서 10일 후 대부분 살해되었는데, 당시 두 창고에는 각 30여 명씩 모두 6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청인 권금자는 모친의 등에 업힌 채 창고에 함께 갇혀 있었는데, 나중에 그의 모친으로부터 부친 권동규가 매일 끌려 나가 “잘못을 대라”고 하면서 매를 맞았으며  여자들의 경우에는 수치심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발가벗겨서 때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창고는 20여 평 크기로 남녀구분 없이 감금해 놓고 있었고 수시로 끌고 나가 때렸으며 창고 안에서도 때리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3) 집단살해와 시신 수습

김충흠의 모친은 매일 가금리 김순명의 밥을 날랐는데 10일 즈음 지난 10월 20일 창고에 가 보니 이미 갇혀 있던 주민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보초를 보던 자들이 “이제는 밥을 받아 잡술 분이 없다. 누가 데리고 갔다.”고 하였다.

마곡리 민병택이 고양 벽제면 성석리에 피신하여 있는 동안 그의 처 조원순 등 가족들은 하성면사무소 앞 치안대사무실 창고로 끌려가서 5일 정도 갇혀 있다가 1950년 11월 3일(음력 9월 24일) 지금의 태산가족공원 맞은 편 야산 숲 속에서 살해당했다. 민병택은 성석리에서 치안대에게 잡혀 1950년 11월 14일(음력 10월 5일) 총살당했다.

   
▲ 학살된 시신들(원산 1950.11.13)/자료사진 지울 수 없는 이미지(2007.눈빛)

석탄리 어수갑은 인민군 점령 초기 김포군 인민위원장이었으므로 치안대의 체포를 피해 어씨 집성촌이 있는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로 피신했으나 결국 고양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 희생된 구체적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조리 권동규․민남기 등은 1950년 10월 20일(음력 9월 10일) 저녁 10시경 치안대에게 끌려 나가 하성면사무소 뒷산인 태산에서 살해당했다. 권동규는 창고에서 끌려 나가면서 함께 창고에 갇혀 있던 그의 처에게 “나한테 매달리면 매를 맞게 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나갔다고 한다.

참고인 민경완은 석탄리 강변 현장에서 살아나온 전류리 김동길로부터 당시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창고에 갇혀 있던 김동길은 치안대가 나오라고 하자 김포경찰서로 가는 줄 알았는데, 다 묶어가지고 달밤에 하성면 석탄리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큰 길로 안 가고 돌아가나 보다 했는데 가다말고 강변에다 세워놓고 총으로 쏴 댔다고 하였다.

김동길은 아래 창고에 있었는데 당시 함께 끌려간 주민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당시 석탄리 한강변은 강 물살이 아주 강해 송장들이 다 떠내려갔다고 한다. 김동길은 물에 떠 내려가지 않으려고 풀을 붙잡고 있었는데 치안대들이 다 확인하고 그냥 돌아가서 살게 되었다. 사건 당시 전류리에서 함께 살아난 사람이 두 명이었는데 다른 한명은 나중에 다시 잡혀서 태산에서 죽었다고 한다.

참고인들 진술을 종합하면 석탄리 한강변 현장에서 살아남은 주민은 김동길이었고 다시 잡혀 희생된 주민은 김영재였다.

하성면 주민들의 희생은 국군 수복 후부터 1․4후퇴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치안대 활동을 했던 참고인 황순구는 “3~4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하성면 주민들뿐 아니라 외지인들도 죽었다”고 하였다.

참고인들에 따르면, 마곡리 강범수․강봉수 등 하성국민학교 뒤에서의 총살당한 주민들은 1․4 후퇴 직전 창고에 갇혀 있다가 함께 데리고 갈 수 없었던 주민들을 경찰 등이 총살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하성지서 경찰관이었던 이재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1․4 후퇴 때 여기 창고에 사상불순자가 남았더랬어요. 그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래가지고 김포까지 차에 데리고 가 가지고 “그걸 어떻게 다 데리고 가느냐” 그래가지고. 그 때 김포 전체면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러니깐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하필이면 하성으로 들어와 가지고. 학교 뒤에다가 갑자기 그냥. 급하니까. 거기서 그냥. 총으로다 M2같은 거로 바바방 하고 얼른 하고 내빼가지고 그냥.“

김충흠에 따르면, 희생자들이 나간 날 저녁에 태산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2001년 민경성과 함께 유골과 유품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인 민경완에 따르면, 모친이 민성남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1․4후퇴 직전 태산골짜기에 왔으나 시신들이 서로 엉켜 있어서 시신을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2001년 하성지서 뒷산에 태산가족공원이 만들어지면서 희생자들의 유품과 유골 등이 발굴되었다. 이로서 하성지서 뒷산에서 하성면 일부 주민들이 총살당한 소문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때 발굴된 유골 등은 하성면 유족들인 민경성․김충흠 등에 의해 태산가족공원 내 골짜기에 수습되어 가매장되었다.
당시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박점문은 “하성면 태산골짜기에서도 여러 사람이 희생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진술을 종합하면, 하성면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석탄리 한강변, 하성국민학교 뒤 창고, 태산 건너편, 태산 뒤 골짜기, 천주교 성당 골짜기 등 모두 다섯 곳이다.

4) 고촌면 천등고개 사건

(1) 희생자 연행

9․28수복 후 치안대원들이 신곡리 한강 정수장에서 근무하던 장문숙을 잡기 위해 집을 뒤지기도 하였는데, 피신해 있던 장문숙은 1950년 10월 1일경 연행 당했다.

천주교 고촌공소 창립자 송해붕은 부역했다는 모함을 받고 천주교 신자의 집 벽장에 며칠을 숨어 지냈으나 1950년 10월 10일 오후 3시 치안대에게 발각되어 임병석 등에게 끌려가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창고에는 수십 명이 갇혀 있었는데, 신곡리 외에 전호리, 풍곡리, 향산리에서도 많이 잡혀왔다고 한다. 신곡리 이경창 가족․윤희용․김기산, 향산리 기곽도 가족은 목격자가 없어 어떻게 연행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2) 감금

임범일 등 치안대는 연행한 주민들을 고촌지서로 끌고 갔다가 고촌면사무소 옆 양곡창고에 감금했다. 양곡창고 인근 주민들은 치안대가 연행한 주민들을 창고 안에 몰아넣고 때리는 소리와 고문당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송해붕을 면회하기 위해 창고를 방문했던 그의 제자 임병렬은 창고 앞쪽에서 송해붕을 만났으며, 이때 창고 안에 함께 갇혀 있는 20여 명의 주민들을 목격하였다. 그 후 임병렬 역시 천주교 지도자 송해붕을 따르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며 3일 동안 창고에 갇혀 거꾸로 매달리고 매를 맞기도 하였다고 한다.

임병열은 “함께 창고에 갇힌 주민들도 전깃줄에 손을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물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하였다.

(3) 집단 살해와 암매장 과정

참고인들 진술에 따르면, 창고에 갇힌 주민들 중 일부는 김포경찰서로 넘어간다면서 새벽에 끌려 나갔다. 이들은 죽으러 가는지 모르고 갔던 것이었지만, 치안대는 이미 다 죽일 사람들만 뽑아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임병석 등에 대한 판결문에 따르면, 임병석 등은 송해붕과 김기산 외 여러 명의 주민들을 살해하기로 계획하고 1950년 10월 12일 0시경 각각 카빙, M1소총, 권총 등을 가진 채, 창고에 있던 희생자들을 군용전화선으로 결박하여 김포경찰서 고촌지서 서쪽에 있는 천등고개로 연행하였다.

이들은 끌고 온 주민들을 천등고개에 미리 만들어져 있던 미군용 참호에 일렬로 세워놓고 각자 휴대한 총기로 일제히 20여 발을 발사하여 전원을 살해한 후 참호에 시체를 매몰하여 이를 유기하였다.

그런데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살해는 1950년 10월 12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임병열 등 참고인들은 “이들 외에도 천등고개로 끌려간 주민들이 더 있었으며 군용 방공호가 깊어서 여러 번 주민들을 총살할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위 판결문 외에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1952년 송해붕의 시신발굴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갇혀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지서로 밥을 나르던 가족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희생자 중 송해붕 외에 아무도 시신수습을 못 했다.

송해붕의 시신은 희생된 지 2년이 지난 1952년에서야 천주교 관련 복장과 유물을 확인하여 수습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천등고개 야산(지금은 김포시 상수도사업소가 있음)에서 다섯 구의 다른 시신과 함께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70여 구의 시신을 더 찾았으나 수습할 방법이 없어 다시 덮어야만 했다고 한다. 송해붕의 시신 수습 상황을 직접 목격한 송해숙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희가 오빠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 가족하고 여기 제자들하고 200여 명이 모였어요. 어디였냐면 미래사목연구소에서 바라보이는 천둥고개였어요. 거기에 미군들이 파 놓은 방카가 있었어요. 거기서 6명을 죽였다는 소리만 들었지 어느 장소인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삽이니 곡괭이니 가래 같은 거를 다 가지고 와서 그냥 아무데나 파 보았어요. 오빠 시신을 찾기 전에 바로 그 수도사업소 길옆이 될 것 같아요. 대략 그래요. 소문에는 70~80명을 한꺼번에 죽였다고 했어요. 빨갱이들 일을 보았다고 그 손자까지도 다 죽였다고 들렸거든. 거기를 가래로 파는데 진짜 70~80명 더 되는 것 같아. 보니까 여자의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올려서 전기줄로 창창 엮었는데 돌멩이로 머리를 짓찌어 죽였어.

그래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중략)… 거기는 오빠 시신이 있는 곳이 아니니까, 여섯 명이 총살당했다는 곳이 아니니까, 60명도 넘으니까 거기는 도로 덮어 버렸지요. 그 장소가 바로 수도사업소가 있는 곳이예요. 그 맞은 편 동산으로 옮겨 가지고 제 각기 찾는 겁니다. 어디 있나 찾는데 까만 남자 고무신 한 짝이 있는 거예요. 누가 발견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납니다.

까만 고무신이 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근처를 파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여섯 분의 시신이 나왔어요. 오빠는 신학생복을 입고 있었거든요. 그 신학생복을 입은 시신의 위 주머니에서는 묵주가 나왔고, 아래 주머니에서는 데레사 성녀의 상본이 나왔고. 허리 밴드도 나왔고. 밴드는 지금도 집에 있어요.”

사건 후 고촌지서로 발령 받은 참고인 유영국은 “지서 뒷산에서 주민들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모르나 대략 많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밤에 근무할 때 많이 무서웠다”고 한다. 한편 참고인 장상래는 천등고개의 희생자가 200여 명에 이른다고 진술하였다.

(4) 사건 후 임병석 등 구속 및 재판 경과

송해숙 등에 따르면, 임범일 등이 구속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송해붕의 가족이 1952년 경 김포경찰서에 진정을 낸 결과였다고 한다. 임범일 등의 신분장에는 살인 및 사체유기 사건혐의로 임범일, 윤흥섭, 장장선은 1951년 7월 23일, 임병석은 1952년 7월 22일 체포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송해숙은 임병석 등에 대한 재판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총살 과정에서 목격한 사실이나 총살 장소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결국 가족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직접 시신을 찾아야 했다고 한다.

임범일 등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시체를 매장하였으므로 유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재판결과 이들은 「특별조치령」 제3조제1호 등에 의하여 임병석 이한선은 각 징역 8년, 윤흥섭은 징역 5년, 임범일 장장선 김용창은 각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각 신분장에 따르면, 임범일은 1953년 7월 11일 만기, 임병석은 1954년 3월 17일 형집행정지, 윤흥섭은 1953년 9월 18일 형집행정지, 장장선은 1953년 7월 11일 만기를 이유로 출소하였다. 이로보아 이들은 수십 명의 주민들을 불법 집단총살 하였다는 명백한 중범죄를 지었음에도 결국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데 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5) 대곶면 소라리 고개 사건

(1) 희생자 연행 및 감금

쇄암리 이달재는 국군 수복 후 피신하던 중 강화로 건너는 광성나루터에서 연행당했다고 한다. 그 후 대곶면사무소 앞에 있던 창고에 7~10일간 갇혀 있었으며 그 동안 모친이 창고로 밥을 날랐다.

이달재를 포함하여 당시 쇄암리에서 끌려간 주민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이들이 대곶지서 창고로 끌려가자 그 가족들이 밥을 날랐다. 당시 창고에는 30여 명이 갇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인 이강운은 9․28수복 후 12월 초순 경 대곶지서 경찰관으로 발령받았는데 지서에 도착해 보니 창고에 고향 오니산리 주민인 보도연맹원 신상규가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창고에 이틀 전까지 오니산리 김경섭, 이원상이 함께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보아 오니산리에서는 적어도 세 명이 대곶지서로 끌려왔음을 알 수 있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김경섭과 이원상이 어떻게 대곶지서로 끌려오게 되었는지는 목격자가 없어 확인되지 않았다.

(2) 집단 살해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달재의 시신은 대곶면사무소에서 약간 떨어진 소라리 고개에서 수습하였는데, 당시 쇄암리에서 끌려간 세 명을 포함하여 대여섯 구의 시신이 함께 있었다.

이달재의 시신은 모친이 수습하였는데 이때 동생 이덕재도 따라 가서 시신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이달재는 총살을 당했는데 머리를 맞아서 그랬는지 시신에 머리가 없어 모친이 나무로 머리를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 이달재의 신원은 모친이 옷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인 이강운은 대곶지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발령 직전인 11월 말경 창고에 갇혀 있던 오니산리 김경섭, 이원상을 포함한 주민들이 대곶지서 너머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총살을 한 자들이 경찰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대한청년단원들도 총을 가지고 다녔으므로 이들이 했을 수도 있으며, 총살한 곳은 소라리산 고개 골짜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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