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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건 조사 결과김포6.25전쟁비사- Ⅲ. 증언, 김포지역 민간인 학살실태조사 P218쪽

6) 사건 조사 결과

(1) 희생자 신원과 희생자 수

희생자 신원은 진술인 2인 이상의 진술 일치, 제적등본과 희생사실 정황의 일치, 조사된 자료와 대상자의 성명 일치 여부 등을 종합하여 확인하였다. 또한 참고인이 희생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경우에는 참고인의 진술이 당시의 객관적 상황과 모순되지는 않는지를 검토하여 희생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2명 이하 참고인 진술에서 확인되나 더 이상 입증자료가 없는 경우는 ‘희생 추정’으로 정리하였다.

(2) 희생자 명단

고촌면에서는, 임병석 등 판결문을 통해 고촌성당 송해붕과 신곡리 김기산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진술을 통해 신곡리 송해붕․장문숙․이경창․윤희용, 향산리 기곽도 삼형제 가족(이앙순 외 11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이경창 일가족 12명․전호리 윤섭․외지인 이태하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적등본에 장문숙은 “1950년 8월 20일(양력 10월 1일) 사망”, 송해붕은 “1950년 10월 11일 사망”, 윤희용은 “1950년 9월 30일 사망”, 김기산은 “1950년 9월 25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포면에서는 진술을 통해, 북변리 정순영, 감정리 정순달 가족(정순달 외 5명)․신성철 가족(이정순 외 3명)․정영현51) 가족(정영현 외 2명), 운양리 심성기 가족(심성기 외 2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북변리 박일영, 감정리 황○○가족과 정남석 가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인 조명순의 목격에 따르면, “김포경찰서에 잡혀 온 주민들 상당수는 김포면 운양리 샘재 주민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아이를 업은 여자들도 많았다”고 하나 이들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제적등본에 김포면 운양리 심성기는 “1950년 10월 25일 사망”, 심현구는 “1950년 10월 28일 사망”, 심덕기는 “1950년 10월 27일 사망”으로, 감정리 정순달․민문자․정범모는 모두 “1950년 9월 10일(양력 10월 20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대곶면에서는 진술을 통해, 쇄암리 이달재, 오니산리 김경섭․이원상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제적등본에 김경섭은 “1950년 9월 30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양촌면에서는 진술을 통해, 수참리 김동철․장경선․정경순․최인덕․최인준․최일만․김동준․김동기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김포경찰서에서 입수된 자료와 당시 사찰계 형사였던 박점문, 유현리 황의화의 진술을 통해 황범주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들 외에 수참리 김동영도 함께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적등본에 수참리 김동철은 “1950년 10월 5일 사망”, 정경순은 “1950년 9월 26일(양력 11월 5일) 사망”, 장경선은 “1950년 9월 27일(양력 11월 6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성면에서는 진술을 통해, 하성면 가금리 김순명, 마곡리 강범수 가족(강영규 외 34명)․민병택 가족(민병택 외 4명)․여이현, 마조리 권계성․권동규․민남기․민성남(민만기로도 부름), 봉성리 민상기, 석탄리 어윤․어수갑․김영재, 후평리 민병호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 이재기․오옥분․민낙기․황윤진의 처․미희네 가족 3명․장석범 가족 3명, 오수일 부친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적등본에 권동규는 “1950년 10월 20일 사망”, 김순명은 “1950년 9월 10일(양력 10월 20일) 사망”, 권계성(권남규로 부름)은 “1950년 10월 5일 사망”, 민남기는 “1950년 10월 14일 사망”, 여이현은 “1950년 9월 24일(양력 11월 3일) 사망”, 민성남(민만기로도 부름)은 “1950년 11월 10일 사망”, 민상기는 “1950년 10월 5일 사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외에 「판결문 71고합12」에서 민만기(호적의 민성남), 민남기의 총살 사실이 확인된다. 이상의 조사결과 희생사실이 확인된 희생자와 희생추정자의 신원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각주)
51)참고인들은 정복현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정광순, 정순익의 부친 이름은 정영현이었다.
 

   
▲ 확인된 희생자 명단(1)
   
▲ 확인된 희생자 명단(2)
   
▲ 확인된 희생자 명단(3)
   
▲ 확인된 희생자 명단(4)
   
▲ 확인된 희생자 명단(5)
 

(3) 희생자 특성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기 면(面), 리(里) 인민위원회 간부 또는 이들에게 협조적이었던 주민과 그 가족들이었음이 확인된다. 희생 원인을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보자면 인민위원회 간부, 인민위원회 간부의 가족, 의용군의 가족, 전쟁 전 좌익혐의자의 가족, 우익인사들과 사적 원한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의 경우 등으로 구분된다.

희생자들은 전쟁 전부터 좌익운동을 하던 주민들도 있었지만 전쟁 후 대개 피난 갈 형편이 되지 못 했거나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게 된 경우로서 특히 전쟁 전부터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전쟁 전부터 일해 오던 면장․구장으로서의 행정 업무를 인민군이 점령한 후에도 인민군의 압력 아래 계속 보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희생추정자 명단

진술과 자료에 따르면, 고촌면에서 본인과 일가족이 희생당한 신곡리 이경창은 리(里) 인민위원장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일가족이 희생당한 향신리 기용도는 남로당 탈퇴자였음이 확인된다. 신곡리 장문숙은 당시 김포 고촌의 양수장 수리조합 직원이었고, 송해붕은 신학생이었다.

김포면 감정리 정순달의 가족은 정순달의 아들이 좌익 활동 혐의를 받고 있었다.
양동면 마곡리 안삼순은 남편 이기학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이유로 양동지서에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양촌면 수참리 최인덕이 수참리 인민위원장이었으며, 정경순이 안말 반장, 장경선이 수참 반장이었다. 그리고 김동국이 인민위원회 일을 주로 보았으며 그 제수가 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고 한다.

김동철은 전쟁 전 양곡면에서 대한청년단이 주관하던 군사훈련을 받기도 하였으며 인민군 점령기 연락원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유현리 황범주는 전쟁 전부터 양촌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는데 인민군 점령 당시에도 계속하여 면사무소 일을 보게 되었다.

하성면 가금리 구장이었던 김순명은 리 인민위원회 간부로, 마조리 권동규는 전쟁 전부터 근무하던 하성면 서기로, 마조리 구장 권남규는 리 인민위원장으로, 마곡리 여이현은 전쟁 전부터 보던 구장 일을 인민군 점령 당시에도 계속 보았다. 그리고 마곡리 민병택은 배급소 일을 보았다고 한다. 권남규는 마조2리 구장이었던 데다가 국군 해병대에 있던 아들 때문에 인민위원장일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희생자 수

고촌면 참고인 송해숙은 고촌면 천등고개에서 송해붕의 시신을 찾던 중 집단살해당한 시신들을 직접 목격 하였는데, 70여 구의 시신이 암매장 되어 있던 구덩이와 송해붕이 암매장 되어 있던 6명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한편, 참고인 장상래는 고촌면에서만 2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고촌면 희생자 수는 80여 명 이상으로 판단된다.

김포면 참고인 조명순은 김포경찰서에서 트럭에 실려 가는 100여 명의 주민들을 목격하였는데 모두 여우재고개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며 그 후로도 여러 번 더 그렇게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김포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참고인 박점문은 200명에서 400명 정도가 여우재고개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참고인 신성철은 김포면 감정리에서만 60여 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감정리 주민들은 대부분 독잣굴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감정리 외의 주민들도 독잣굴에서 희생되었다는 진술이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을 종합하면, 김포면 희생자 수는 260여 명 이상으로 판단된다.

대곶면 참고인 이태순은 사건 당시 대곶지서 창고에는 쇄암리 3명, 오니산리 3명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갇혀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므로 대곶면 희생자 수는 30여 명으로 판단된다.

양동면에서는 참고인 이정옥 등이 마곡리 주민 6명이 갇혀 있던 수리조합 창고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갇혀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함께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므로 양동면 희생자 수는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양촌면에서는 신청인 정봉운과 참고인 김정숙이 양곡지서 유치장에 10여 명, 이외에 지하 방공호에도 주민들이 갇혀 있었으며, 양곡지서 뒷산에서 20여 구와 양곡중학교 뒷산에서 10여 구의 시신을 목격하였다고 하므로 양촌면 희생자 수는 3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성면에서는 국군 수복 후부터 1․4후퇴 직전까지 여러 차례 집단총살이 있었다고 하는데 1950년 10월 20일경 2개의 창고에 30여 명씩 60여 명이 갇혀 있다가 희생되었다는 진술과 1․4후퇴 직전 강씨 집안 등 4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는 진술로 보아 10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 사건 희생자 수는 고촌면 80여 명 이상, 김포면 260여 명 이상, 대곶면 30여 명, 양동면 100여 명, 양촌면 30여 명, 하성면 100여 명 이상이므로 이를 종합하면 김포군에서는 모두 600여 명 이상이 부역혐의자 살해사건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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