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600리 길을 걸으며’는 사단법인 지역문화전략연구원 대표 정현채님이 지난 7월29일부터 8월7일까지 안양-의왕-수원-평택-천안-차령고개-공주-부여-강경-함열-익산-부안까지 홀로 길을 걸으며 느낀 것을 기록한 글로 8회 분량으로 연재한다.
필자는 본지 필진으로 통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난 2005년부터 4년간에 걸쳐 총 90회 분량의 ‘정현채의 문화읽기’를 통해 지역 안팎을 넘나드는 문화길라잡이로 역할을 해왔다.

혼자서 길을 가면 대화 대상도 사물뿐이다. 둘이 가고 셋이 가면 대화 내용과 행동하는 반경이 다르겠지만 혼자 가면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3대가 나라를 위해 순절한 삼세오충렬사(三世五忠烈祠)가 있는 전북 용안 마을에는 수십 년 전에나 있을 법한 막걸리 집이 있었다. 여럿이 왔으면 막걸리를 먹고 갔을 텐데 혼자라 들어가기도 뭣해서 지나치면서 물만 먹었다.

길을 가면서 숲 속 같은 길을 만나면 나무 숨이 서리고,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에서는 몸도 덩달아 바빠지게 된다. 10kg의 배낭도 자연 길과 시골 길에서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숨 가쁘게 달려가는 길을 만나면 무게는 배가 되어 어깨부터 저려온다. 환경에서 오는 마음의 변화다.

길을 걷다 보면 사물에서 감사함이 우러나온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다. 삼일간은 일상에서 시달림을 받거나 서운한 것들이 머리에 틀고 앉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떠나지를 않는다. 기쁜 것보다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곡의 마음도 삼일이 지나니 안개가 걷히듯이 맑아진다.

길을 가다보면 노래가 나온다. 논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불렀던 일상의 이야기들이 노래가 되었듯이, 아내와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 나오고 형제들에게 따뜻하게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노래가 되어 나온다. 그리고 감사함이 나온다. 물을 구입할 가계가 없어 갈증으로 애를 태울 때, 물을 넣어가라는 주인의 인심에 감사하고,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할아버지와 학생들에게 감사하다.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도 고맙고 새록새록 신선한 생각을 돋게 하는 시골길도 감사하다.

부여에서 강경 가는 옛길에서는 어린이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사람도 차량도 드문 마을길에서 아이들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냥 갈수 없어 마침 옆에 있는 가계에 들어가 과자를 사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너희들이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아저씨가 주고 싶다”고 하니 초등학교 3. 4학년으로 보이는 세 아이들은 똑 같이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대답을 한다. 이 또한 예뻐서 웃음이 나왔다. 길을 가다보면 배움이 지천이다.

동학혁명군의 마지막 전투가 치열하게 있었던 공주 우금티를 지나 도로 옆에 놓여 있는 평상에서 故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을 생각했다. 전쟁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저 밭과 저 산에서 죽어갔던 애끓음이 서리고, 시인이 핍박을 받았던 시대의 광기가 아스팔트에서 펄떡이다 스러진다. 길을 나서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발을 내딛기가 어려웠고 길을 가면서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길을 가니 땀으로 만나는 역사와 인물은 종이에서 만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물에 대한 친근감은 더 하다. 우금티를 지나서 만난 것이 있다. 복숭아다. 길가의 허름한 담벼락에 서 있는 볼품없는 한 그루 복숭아나무를 도로에서 보게 되었다. 등이 굽은 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복숭아와 눈이 마주쳤다. 한 여름의 기운을 모두 받았는지 복숭아 한 가운데에 조그마한 원을 형성하고 있는 붉은 빛이 일월(日月)처럼 보였다. 한참 동안 복숭아를 보면서 이것이 천도가 아닌가! 신선이 먹었다는 복숭아는 어린아이의 눈동자와 같은 빛을 준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우금티를 걸어가며 뿌렸을 땀과 피와 서러움과 분노와 사랑이 썩고 썩어 복숭아 빛으로 발산하는 것 같다. 평화로운 길을 가면서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간다.

길 걷기 마지막은 부안의 내소사에서 맺었다. 내소사는 학생들과 남도 답사를 하면서 몇 번 갔던 곳이다. 이번에는 혼자오니 넉넉해진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대웅보전을 지나 삼성각(三聖閣)에서 육십 사배를 하고 나오니 부슬비가 내린다. 길을 가면서 성찰하고 느낀 것이 때 묻은 마음을 씻겨준다. 모든 동식물과 사람들이 자연의 터전에서 맑은 빛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 날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올라가는 길이 편안했다. 비가 내렸다.

정현채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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