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600리 길을 걸으며’는 사단법인 지역문화전략연구원 대표 정현채님이 지난 7월29일부터 8월7일까지 안양-의왕-수원-평택-천안-차령고개-공주-부여-강경-함열-익산-부안까지 홀로 길을 걸으며 느낀 것을 기록한 글로 8회 분량으로 연재한다.
필자는 본지 필진으로 통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난 2005년부터 4년간에 걸쳐 총 90회 분량의 ‘정현채의 문화읽기’를 통해 지역 안팎을 넘나드는 문화길라잡이로 역할을 해왔다.

머리가 어지럽다. 책을 보면 5분 이상 보지 못하고 졸고 있다. 거울을 보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다. 길 공부를 끝내고 집에 도착했던 8월 7일 저녁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상이 아니다. 염천(炎天) 더위에 아스팔트를 걸어가며 몸으로 들어왔던 햇빛이 이제야 조금씩 밖으로 빠져 나가는지 몸은 불구덩이를 가고 있다.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여름에 홀로 길을 걸어갔다. 6백리인지 7백리인지 그것은 모르겠다. 잣대로 길 크기를 가늠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가는 길을 어렵게 시작한 것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린 시절부터 늘 궁금하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 생각을 발걸음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발을 옮기는데 십 수 년이 걸린 셈이다. 처음 떠나는 길 공부는 2009년 7월 29일에 시작해서 안양, 수원, 평택, 천안, 공주, 부여를 경유, 강경과 익산을 거쳐 부안에서 마무리하고 8월 7일에 김포로 돌아왔다. 安(안양)으로 시작에서 安(부안)으로 마치는 길 공부였다.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통진읍 서암리에서 김포 시민체육관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걸어 다녔다. 필요한 물품과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서암천과 봉성포천을 돌아 누산리에서 농수로를 타고 우저서원 쪽으로 가보기도 하고 거물대천과 양곡을 통해서 국도변을 따라서 걷기도 했다. 위험한 것도 있고 필요한 것도 많았다. 직접 길을 나서기 전에는 걷기에 관한 책을 구입해서 읽어 불까도 생각했지만, 하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준비하기 위해서다.

몇 달 동안 준비를 하면서 신발부터 우비와 약품까지 필요한 것을 구입했다. 길 공부를 떠나기 전 단계로는「천부경」과「삼일신고」를 암송하면서 김포 길을 걸어 다녀도 보았다. 길만 보고 간다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이번 길 공부 중간에 계룡산 어느 도량에서 법사와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있었다. “이 더위에 대단한 집념이다. 그러나 길만 가기위해서 목표를 정했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떠한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길을 가고 있는 목적(화두)을 묻는 법사의 이야기다. 그곳 도량에는 뒤편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바위와 산에 돌탑이 갖가지 모양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있었다. 대단한 공력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에 보이는 저 많은 돌탑도 오로지 돌탑만을 쌓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라는 대답이다. 법사가 쌓은 돌탑이나 길을 걸어가는 것이나 쌓기 대회와 걷기 대회에 나간 것이 아니다. 내가 가는 것이고 법사가 쌓는 것일 뿐이다.

길 공부는 길에서 만나는 사물과 사람들 자체가 공부다. 별도의 준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49년 동안 살아왔던 시간을 49재를 지내는 심정으로 떠나보내고 2009년 50이라는 나이의 수(數)가 깃발이 되어 길을 나섰다.

길 공부 중간에 휴식을 하면서 책을 보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주역에 나오는 49와 50에 관한 것이다.「주역에서 49번째에 해당하는 괘는 택화혁(澤火革)괘로 과거의 낡은 것을 부숴 버린다는 혁명을 상징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50번째는 화풍정(火風鼎)괘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의미가 있다. 혁고정신(革古鼎新) 즉 옛것을 바꾸고 새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길을 가고 있던 사일 째 이 글귀를 우연하게 접하면서 수(數)에 대한 새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내 나이에다 갖다 맞추는 것은 본뜻과는 관계가 없을 지라도 다시 한 번 속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재미는 사람도 있지만 글과 뜻에도 있었다.

정현채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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