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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인헌왕후 만들기’ 프로젝트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6)

김포에 위치한 유일한 왕능. ‘장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김포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발길이 닿고 있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다. 그런데 이 장릉은 실제 왕의 능이 아니다. 다시말하면 처음부터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죽어서 나중에 왕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이를 추존 혹은 추숭(追崇)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을 말한다. 인조의 아버지, 어머니는 본인들이 원종대왕과 인헌왕후가 된지도 모른 채 왕릉으로 김포 풍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인조가 자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대왕으로 추승하고 묘효를 흥경원에서 장릉으로, 또한 어머니인 계운궁 구씨에 대해서는 인헌왕후로 추승하고 묘효를 육경원에서 장릉으로 고친 것이다.
결국 왕인 아들에 의해서 왕의 묘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속사정이 숨어있다. 왕의 무덤이 되기까지 어떠한 곡절과 사연이 있었는지 실록을 통해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인조의 어머니인 계운궁 구씨를 인헌왕후로 만들기까지 과정이 어떠했는지부터 알아본다.

인헌왕후의 묘가 김포 풍무리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묘호를 육경원이라고 불렀다. 인조 10년(1632년) 정원군이 원종대왕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존되고 능호도 정원군의 묘인 흥경원과 함께 장릉으로 바뀐 것이다.

인헌왕후는 능성구씨로 아버지는 좌찬성 구사맹이다. 1590년(선조23)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결혼하여 ‘연주군부인’으로 책봉되었다. 1619년 정원군이 죽은 뒤, 1623년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즉위하자 ‘부부인’으로 올려 책봉되고 궁의 칭호를 ‘계운궁’으로 불렀다. 1632년(인조10년) 이조판서 이귀의 청으로 정원군이 원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인헌왕후는 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능은 육경원이라 했다가 원종을 이장한 후 합하여 흥경원이라 했고 추승한 이후에 장릉이라 했다. 

반정을 통해 왕위 오른 인조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신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이 때문에 인조는 늘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신료들과 끝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왕으로서 정통성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의 생부모를 왕실의 종통(종가(宗家) 맏아들의 혈통) 속에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를 두고 시시비비를 만들어갔다. 즉 인조의 약점인 정통성 확보와 관련된 첫 현안이 자신의 어머니 계운궁 구씨를 왕후로 만들어가려 했던 일이다.

인조는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에 올랐기 때문에 왕실의 법통상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조부인 선조를 계승한 것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선조 왕과의 관계설정은 만들었으나 할아버지 다음의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제였던 것이다. 즉 할아버지가 왕이면 아버지도 왕이어야 하고 그리고 자신이 왕으로 계승된 절차상의 문제가 없어야 했는데 인조는 그렇지 못한 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만들어진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왕과 왕후로 만드는 즉 임금만들기 신 장릉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된다. 

인조 ‘부모, 왕 만들기’ 프로젝트
따라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1580-1619)과 생모인 계운궁 구씨를 인조의 왕통속으로 끌어들이는 왕과 왕비 만들기 장릉 프로젝트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논란과 주요 쟁점이 되기 시작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생부와 생모가 왕이 되어야만 했다. 자식은 왕인데 왕의 아버지는 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생각이 달랐다. 정원군과 구씨를 사친의 예에 따라 대접해야 한다고 맞섰던 것이다.

인조의 임금만들기 신프로젝트 논란의 시작은 조선왕조실록 인조 4년(1626) 1월 14일자 내용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다.

1월 14일, 인조 어머니인 계운궁이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어머니가 사망하자 왕비수준의 상례인 삼년상으로 거행할 것을 지시한다. 이 지시는 인조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왕후로 만들어가려는 첫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의도는 초반부터 신하들의 반대의견에 부딪쳤다.

예조(조선시대에, 육조 가운데 예악, 제사, 연향, 조빙, 학교, 과거 따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원년(1392)에 두었고 고종 31년(1894)에 폐하였다)에서 선조(宣祖) 왕통을 계승한 이상 육친의 부모 상(喪)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반대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인조는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3년상을 치르겠다고 마음먹고 지시 한 것을 반대의견이 나오자 묵살시켜 버린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윤방, 우의정 신흠 등이 왜 인조의 삼년상 주장이 상제에 어긋나는지를 지적하고 나섰다.

반대이유는 조종(祖宗)의 종통(宗統)과 육친의 관계는 다른 것이며 사적인 관계는 삼년상을 행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인조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자 인조는 ‘삼년상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고 내가 이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대로 부모라고 불렀는데 삼년상을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무시해 버린다.

신하들의 계속된 반대와 상소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대신들과 예조는 인조가 상주가 되는 것에도 반대하고 나섰다. 이미 인조는 왕통으로 볼 때 선조에게 출계했기 때문에 생모를 위해 상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조 4년(1626) 1월 15일자 기사에는 예조가 계운궁의 상사에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 이보(李?)가 상주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세우나 인조는 능원군이 상주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예조는 다시 사친(私親)의 상에 어찌 스스로 상주가 될 수 있겠느냐며 인조가 결코 상주가 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하고 나서지만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재론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또한 인조는 예조판서 김상용(金尙容)에게 “5일에 성빈(成殯)(빈소를 차림)하고, 6일에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 보통 초상난 지 나흘 되는 날부터 입는다)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번에도 예조는 이 예법은 대왕(大王)과 왕후(王后)의 상사에 쓰는 것으로 되어 있어 적용할 수 없음을 전달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 4년(1626) 1월 20일자 기사는 이와관련 태학생(太學生)(조선 시대에, 성균관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유생) 이행진(李行進) 등이 상소를 하게 된다.

상소는 왕의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극진히 하려는 뜻은 당연하나 지손(支孫)으로 대통을 이은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었고, 사방 만백성의 임금이 되었으니, 사친(私親)만을 생각해 상주(喪主)가 될 수 있겠느냐며 5일에 성빈하고, 6일에 성복하고 명정(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을 금전(金篆)으로 쓰고 염포(殮布)를 비단으로 쓰는 등 한결같이 예법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운궁(啓運宮)의 상사에 왕후(王后)의 예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사친을 위하여 상주가 된다는 것도 부당하다는 것이 판결난 것이므로 전례(典禮)를 지키고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해달라는 상소내용이다.

궐내에 빈소 만들어
이에 인조는 상주가 되는 등의 일은 조정에서 다루는 일이지 학생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며 학생은 학업에 전념하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태학생들은 상소를 3번이나 올렸다.

인조는 태학생들의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오자 시비(是非)의 결정은 조정에서 하는 것이며 학생들은 시비를 말할 수 있지만 시비를 결정하는 일은 학생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재차 거부한 후 인조 4년(1626) 1월 20일에 계운공의 공상을 줄이지 말고 당초에 지시했던대로 전부 진배(進排)(물건(物件)을 나라에 바침 물품(物品)을 진상(進上)함) 할 것을 해조(該曹)에 명령한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왕후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신념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이에 신하들 중 일부가 인조의 입장을 거들기 시작한다.

인조 4년(1626) 1월 24일자 기사는 인조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병조판서 이귀가 왕의 결정을 옹호하고 나섰다.

인조가 대원군의 장자로서 큰 공을 세우고 대통을 이었고, 복제(服制)(상례(喪禮)에서 정한 오복(五服)의 제도. ≒복(服). 옷차림에 대한 규정)만은 예제(禮制)에 따라 삼년복을 해야 되는 것이라고 인조를 추켜세우며 선조(宣祖)에게 나라를 전수받았으니 마땅히 선조를 아버지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계운궁(啓運宮)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옹호한다.

또한 인조 4년(1626) 2월 7일자 기사는 인조가 어머니 계운궁의 상사를 인경궁으로 반혼(返魂)(죽은 사람을 화장(火葬)하고 그 혼을 집안으로 다시 불러들임)하라는 지시에 간원(조선 시대에, 삼사 가운데 임금에게 간(諫)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즉 예장도감(禮葬都監)의 계사(조선시대에, 지방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숙배(肅拜)를 늦추던 일)에 대해 ‘계운궁은 협착하여 적합한 곳이 없으니 인경궁(仁慶宮)에 하도록 하라.’고 전교한 것은 인경궁은 왕자(王者)의 궁이므로 능원군이 상주로서 대궐에서 상사를 주관하고 궤전을 받을수가 있느냐며 도감으로 하여금 다시 조치를 취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자 인조는 궐내에 성빈(빈전(殯殿)을 차림. 빈소(殯所)를 만듦)하고 이를 옮길 수 없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모만(侮慢)(거만(倨慢)스러운 몸가짐으로 남을 업신여김)과 멸시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통분스럽다며 절규한다.

정통성 약점 만회하기 위한 의도
이에 인조는 인경궁은 명색이 궁궐이기는 하지만 조종(祖宗)의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이 아니며 버려진 빈 곳이 되어버린 곳인데 임시로 혼궁(왕세자(王世子)의 장례(葬禮)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궁전(宮殿))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리고 능원군 은 바깥 행랑(行廊)에 들어가 거처하는 것 또한 방해될 것이 없다며 도감이 참작하여 조처하고 다시 논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에 대해 인조 4년(1626) 2월 8일자의 기사는 인조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이윤우·심지원·여이징이 상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고 나서는데 인조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계운궁의 성빈(成殯)(빈소를 차림)이 대내(大內)에 있었던 것은 진실로 정례(正禮)(예절에 맞는)가 아니고 실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왔던 것이었는데 인조는 애통하고 황급한 가운데 지극한 정리에 가리워져 초종(初終)(초상이 난 뒤부터 졸곡(卒哭)까지 치러지는 온갖 일이나 예식)의 절목을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한 일이 많았다고 지적하고, 장(杖)을 짚고 위차에 나간일, 금전(金篆)으로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을 썼던 일, 6일 만에 성복(成服)한 일, 빈소(殯所)에 찬궁(빈전(殯殿)) 안에 임금의 관을 놓아두던 곳. 장례를 지낼 때까지 시체를 두었다)을 차린 일, 기타 예법을 어긴 일이 한둘이 아니므로 궐내에 성빈한 것 정도는 논할 것조차 없는 것이며 자신들이 인조가 예를 어기는 일을 목견하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했던 탓으로 엄한 비답을 내리게 한 죄가 크다며 자신들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원한다.

또한 영의정 이원익은 ‘상주가 되려하고 사친을 위해 국상을 고집하는 것은 참월할뿐 아니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인조는 신료들의 반발에 밀려 상주 역할을 동생 능원군에게 넘기고 만다.

   
 
 
 
인조가 상기(喪期)와 상주 문제를 놓고 신료들과 논란을 빚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계운궁의 상례를 ‘왕비’의 예로써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운궁의 상례와 관련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이렇듯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계운궁의 관을 궁궐 안에 두는 문제, 반혼(返魂) 의식을 궁궐에서 하는 문제, 인조가 산소까지 따라가는 문제 등도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고쳤다.

‘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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