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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姓氏)로 살펴 본 김포의 역사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22)

김포는 어느 성씨(姓氏)들이 살고 있었을까?  
 
2,000년도 통계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포시에 거주하는 성씨는 총 214개 종류로 조사됐다. 성씨 본관은 총 2,510개로 파악되었다.

거주자 중 1,000명 이상 거주하는 성씨별로는 김(金)씨 29,968명, 이(李)씨 24,715명, 박(朴)씨 10,778명, 최(崔)씨 6,526명, 정(鄭)씨 5,548명, 조(趙)씨 4,340명, 한(韓)씨 3,220명, 윤(尹)씨 3,054명, 장(張)씨 2,897명, 강(姜)씨 2,749명, 임(林)씨 2,740명, 신(申)씨 2,633명, 오(吳)씨 2,396명, 권(權)씨 2,388명, 유(柳)씨 2,282명, 황(黃)씨 2,213명, 홍(洪)씨 2,009명, 안(安)씨 2,007명, 서(徐)씨 1,842명, 송(宋)씨 1,826명, 심(沈)씨 1,603명, 전(全)씨 1,498명, 고(高)씨 1,435명, 민(閔)씨 1,405명, 유(劉)씨 1,396명, 문(文)씨 1,305명, 양(梁)씨 1,225명, 조(曺)씨 1,112명으로 총28개의 성씨로 조사됐다.

성씨 본관으로는 전주이씨가 11,443명으로 제일 많은 인원으로 파악되었으며, 김해김씨가 10,994명, 밀양박씨가 8,162명, 경주김씨가 5,790명 순으로 조사됐다. 또한 단 한명이 거주하고 있는 성씨도 18개나 조사됐다. 개(介), 견(甄), 내(奈), 대(大), 빈(彬), 빙, 사공(司空), 섭(葉), 소봉(小峰), 자(慈), 창(昌), 창(倉), 판(判), 편(扁), 평(平), 풍(馮), 호(鎬), 화(化)

한편 2003년 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를 보면, 2000년 11월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모두 286개였으며, 본관은 4,179개였다.

이 가운데 김(金)씨가 전체 인구의 21.6%인 992만6천명으로 가장 많았다. 따라서 김포에서는 전국 286개의 성씨 종류중 72개 성씨가 살지않는다. 또한 본관은 전국의 4,179개 중에서 2,510개의 종류이므로 1,669개 성씨 본관이 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김씨 다음으로는 이(李)씨와 박(朴)씨가 많았으며, 김씨, 이씨, 박씨 이들 3개 성씨 인구만 전체 인구의 44.9%이었다. 인구 100만명이 넘는 성씨는 이들 3개 성씨를 포함해 최(崔)씨, 정(鄭)씨, 강(姜)씨 등 6개였다.

성씨(姓氏)는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표지(標識)로,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며,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성(姓)과 씨(姓)의 구분이 없어져 성씨(姓氏)가 성(姓)을 높여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성씨'는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의 칭호로,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다.

성씨는 복잡하고도 지속적인 분화과정을 거친다. 이 때문에 같은 조상이면서 성을 달리하기도 하며, 같은 성이면서 조상을 달리하기도 한다. '본'은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등으로도 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성씨를 사용했을까?

자료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로 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다 한다.

백제는 '부여(扶餘)'씨, '여(餘)'씨 등을 썼으며, 신라는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씨, 정(鄭)씨, 손(孫)씨, 최(崔)씨, 배(裵)씨,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성을 쓴 사람보다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는데,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性)을 하사하여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다.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1)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다.

현행 민법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제781조), 성이 오칭(誤稱)2)되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성의 변경은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와 부가 외국인인 경우, 부를 알 수 없는 자,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과 본을 창설한다. 

성과 본을 창설한 후 부 또는 모를 알게 된 때에는 부 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또한 혼인외의 출생자가 인지된 경우 자는 부모의 협의에 따라 종전의 성과 본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부모가 협의할 수 없거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에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종전의 성과 본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

 자가 미성년자이고 법정대리인이 청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제777조의 규정에 따른 친족 또는 검사가 청구할 수 있다.


옛 김포에는 어떤 성들이 살았을까?

역사적으로 김포지역에는 어떤 성씨들이 살아왔을까?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김포지역의 성씨들의 현황을 살펴보자.

<세종실록 지리지> ‘김포현’편에 보면“<중략>토성(土姓)이 3이니, 정(鄭)·장(蔣)·금(琴)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안(安)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공(公)이다<중략>”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토성(土姓)은 쉽게 말해서 ‘토박이 성’을 말한다. 즉 고려초 성씨의 분정3)시(分定時) 그곳에 토착하면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유력한 씨족(氏族), 또는 그 곳을 본관(本貫)4)으로 하면서 지방관아를 구성하였던 성씨 집단을 가리키는데 정씨와 장씨 그리고 금씨 3개 토성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망성(亡姓)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고적(古籍)에는 기재되어 있었으나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인 15세기 초에는 이미 없어진 토성을 지칭하는데 안씨가 그렇다는 것이다. 촌성은 마을을 본관으로 하는 성을 말하는데 공씨가 촌성이라는 말이다.

같은 자료 ‘통진현’편을 보면
“<중략>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2이니, 석(石)·강(康)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양(梁)이며, 없어진 망차성[亡次姓]이 2이니, 길(吉)·종(宗)이요, 망래성(亡來姓)이 1이니, 이(李)이며, 없어진 망촌성[亡村姓]이 1이니, 구(仇)이다. 수안현(守安縣)의 성(姓)이 3이니, 윤(尹)·이(李)·안(安)이요, 내성(來姓)5)이 1이니, 오(吳)이며, 망성(亡姓)이 1이니, 진(陳)이다. 동성현의 성(姓)이 4이니, 노(盧)·우(祐)·부(附)·이(異)요, 내성(來姓)이 2이니, 강(康)·백(白)이다<중략>”

<동국여지승람>(1530) ‘김포’ <성씨>편을 보면“본현 정(鄭), 옹(翁, 일운 장蔣), 금(琴, 사성(賜姓)임), 공(公, 촌성(村姓)임)”과 ‘통진’편 <성씨>편에“본현 석(席,‘石’이라고도 함), 강(康), 양(梁), 길(吉), 종(宗), 위(位, 일운 구성(仇姓), 촌성(村姓)임, 이(李, 내성임)”“동성(童城) 노(盧), 우(祐), 부(附), 이(異), 강(康), 백(白), (모두 내성임)”“수안(守安) 윤(尹), 이(李), 안(安), 진(陳), 오(吳),(모두 내성임)”

<김포읍지>(1871) <성씨>편은
“금씨(琴氏), 공씨(公氏), 장씨(蔣氏), 정씨(鄭氏)”를 <통진읍지>에는“동성 최씨(童城, 崔氏), 수안 이씨(守安 李氏), 분진 강씨(汾津, 康氏), 분진 이씨(汾津, 李氏), 수안 윤씨(守安 尹氏)”가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또 금릉군지(1910) ‘성명’편에는“금(琴)씨 공(公)씨 정(鄭)씨가 있었다. 네 가지 성씨 가운데 금씨와 장씨는 현재는 살고 있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성족은 연안 이씨, 남원 양씨, 청송 심씨 세 성씨가 성하게 번창하고 남원 윤씨, 평산 신씨, 풍산 김씨, 남양 홍씨, 배천 조씨, 하동 정씨, 전주 이씨 등 모두가 많이 살고 있다. 각 성씨들의 예전 세거지(世居地)는 다 기록할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 조선왕조실록과 그 밖에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김포지역에서 살아왔던 성씨 종류는 강씨를 비롯하여 23개의 성씨가 거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191여개의 성씨가 새로이 김포지역에 살고 있다.

1977년 <김포군지> ‘성씨편’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1911년 <금릉군지(金陵郡誌)>에 ‘금(琴)씨, 공(公)씨, 장(莊)씨, 정(鄭)씨가 있는데 금씨와 장씨는 살고 있지않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66년이 지난 1977년도 조사에는 금씨는 양촌면에 1호, 하성면에 5호, 월곶면에 5호, 총11호가 살고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기록하고 하고 있다.

반면에 공씨와 장씨는 살고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 연안이씨, 남원양씨, 청송심씨 중 연안이씨가 이씨중 2위, 남원양씨가 25위, 청송심씨가 9위로 나타났다. 전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1ㆍ2ㆍ3위로 상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포군 전체 성씨는 127성, 807본 19,750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각주)

1) 민적법(民籍法 : 1909년 3월 4일 법률 제8호로 공포·실시한 호적법. 전문 8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졌다. 1896년 9월 1일 칙령 제61호에 의하면 분호(分戶)에 의한 분적(分籍), 호주의 교체·출생·사망에 의한 개적(改籍)은 20일 이내에 하여야 하고, 기타 신분상의 변동은 연 1회 개적하므로 1년간 호적에 반영되지 못하는 폐단이 있어 이를 제거·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생·사망·호주변경·혼인·이혼·양자·파양·분가·일가창립·입가(入家)·폐가(廢家)·폐절가재흥(廢絶家再興)·부적(附籍)·이거(移去)·개명 등은 그 사실 발생일부터 10일 이내에 호주가 본적지 관할 면장에게 의무적으로 신고하게 하였다. 이를 해태(懈怠)한 사람에게는 50이하의 태형(苔刑) 또는 5원(圓)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사위(詐僞)신고자는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태형이나,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였다. 이 법으로 모든 신분의 발생·변경·소멸 등을 공시·증명하였는데, 현행법의 호적법에 해당한다.

2) 오칭(誤稱) : 어떤 사물을 그릇되게 이름. 또는 잘못된 명칭.

3) 분정(分定) : 몫을 나누어 정함

4) 본관(本貫) : 시조(始祖), 혹은 중시조의 출신지(出身地), 또는 씨족의 세거지(世居地)를 근거로 설정하는 것인데, 본관을 일명 향적(鄕籍)이라 하였으니, 이를테면 시조나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5) 내성(來姓) : ‘내성'은 딴 고장에서 이주해 온 성을 뜻한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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