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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어머니는 작은 거인기고|권명희(유니티선교센터)

굴 한사발의 인연

세상에 어머니들이 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어머니처럼 갖은 풍파, 시집살이, 또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한 사람도 아마 드물 것이다. 나의 기도는 이것이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육신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사셨기 때문에 영혼만큼은 꼭 천국에서 안식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 짧은 지면에 다 표현할 수 있을까? 6.25가 끝나자 외할아버지 께서는 사윗감 선을 보시러 지금의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대명리 204번지에 오셨다가 굴을 대접 받으시고 엄마를 시집보내기로 정하셨단다. 그 당시 대명포구에는 굴이 많이 있고 조개와 고동도 많았었는데.

“내가 굴 한 사발에 팔려 왔단다”하고 고생될 때 마다 우리에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셨다. 어머니가 시집올 당시에는 최 서방 이라는 일꾼을 비롯하여 무려 16식구가 살고 있었고, 고모가 7명에 삼촌, 사촌 오빠 언니, 큰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의 자그마한 어깨에 지워진 짐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6.25때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식구까지 떠맡아야 했고 6.25때 산후 조리를 못해 중병이 들어있는 큰어머니까지 엄마의 몫이었다. 식구 수 는 속이고라도 며느리는 맞아야 하는 할머니도 이해가 갔다.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가마타고 시집을 오고 나서야 알았으니 그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이 작은 거인은 하루하루 고된 일을 견디며 살아야했다. 어떤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이제 내가 태어나고 열두 식구의 뒷바라지를 하랴 아이를 키우는 일도 예삿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늘 누룽지 조금 긁은 밥을 드셨고, 열두 식구 밥을 푸고 나면 항상 고만큼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맛있는 게 있으면 항상 “난 먹기 싫다 너희나 먹어라”하셨기 때문에 정말 드시기 싫은 줄 알았다.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등잔불이 켜지며 양말을 깁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이 애를 태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마도 지금 내가 새벽잠이 없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그때 엄마의 부지런함 때문이 아닌가하고 감사하고 싶다. 일곱 명 의 층층 시누이에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밥 짓는 일 빨래며 하루 한 시간도 편한 날이 없었다.

저녁에는 가마니 짜는 일도 엄마의 한 몫이기도 했으니 11시 12시가 돼서야 주무실 수 있었다. 아마 그 삶은 자식을 위한 위대한 어머니의 힘이었고 또한 삶의 대한 절규의 몸부림 이었으리라. 아침새참, 점심, 저녁새참, 저녁밥까지 머리위에 갖은 반찬과 밥을 광주리에 넣고 또아리에 이고 손도 잡지 않고 그냥 곡예사처럼 걸어 다니셨다.

“엄마 목이 짧은 이유는 머리에 무거운 것을 많이 이고 다녔기 때문 인가봐” 내가 엄마에게 하던 말이었다.“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외할아버지 생각에 친정으로 갈 생각을 엄두조차 못 내었다. 또한 “새끼 많이 나은 소가 길마 벗을 날이 없다”고 할머니는 아들 셋, 딸 여덟 모두 11명을 낳으셨다.

막내고모 4살 때 어머니가 시집을 왔으니 시집보내고 키우는 것까지 엄마의 몫 이었다. 할머니가 계셨던 관계로 정월 초 하루날 부터 손님이 한 달 동안 끊이지를 않았다. 한 달 내내 부엌에서 나오시지 못하는 어머니, 불을 때서 밥을 하고. 그렇게 50년 넘게 살고 나니 인생살이가 훤하시다.

그러나 아버지는 원래 말이 없으시고 어머니에게 사랑을 표현 못 하셔서 엄마의 불만을 사곤 하신다. 어머니는“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너희는 배워야 한다고”하고 다섯 남매를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소처럼 일을 하셨다. 30년 넘게 또 과수원을 하셨다. 어머니는 75세까지 아버지는 77세까지 그런 일을 계속 하셨다.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고 끊이지 않는 갈등에 고모들은 일곱이나 됐으니 그 고충이야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참 항상 앞서 가시고 트인 분이셨지만 우리에게 딱 한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 있었는데 화투를 하면 벼락같이 화를 내시면서 화를 내시고 여지없이 매를 맞았다.

외국 여행을 가시라고 해도 “늙은이가 여행을 가면 보고와도 나라에 보탬이 안 되니 젊은 사람들이 가서 보고 와야 나라에 보탬이 된다”고 절대 안 가신다. 아직도 딸 4명과 며느리, 다섯이 일을 해도 엄마 혼자 하시는 몫을 해내지 못한다. 얼마나 빠르고 잽싸신지 항상 먼저 일을 끝내신다. 아버지는 80세, 어머니는 78세이시지만 두 분은 아직 건강하셔서 우리가 태워드린다고 해도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

   
6.25때 박혔던 파편이 무릎에 아직 있어 아버지는 늘 무료주차 하시는 것이 자랑스러워서시겠지만 어머니는 너희 차는 기름 값이 많이 든다고 절대 안 타신다고 하신다. 쌀 한톨이라도 떨어지면 주워 담는 엄마를 보면서 자랐고 근면과 검소함, 이 나라는 이런 어머니들의 삶 때문에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어머니들의 그런 희생과 고된 삶이 없었으면 우리들의 이 삶의 질을 높이려고 추구하는 삶도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과 불을 무서워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믿음은 많이 없으시지만 “난 귀신도 이긴다”하며 그 담대함은 갖은 시집살이와 일을 너무 많이 하며 키웠던 강인함. 자식을 위한 집념 그 한가지로 캄캄한 밤에도 혼자 산길을 걸어오시는 무서운 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 어머니는 작은 거인이시다.

편집국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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