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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살인으로 ‘통진현’ 강등당하다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⑥

김포지역 옛 군·현 등은 폐지되어 다른 군(郡) 현(縣)에 흡수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주현의 속현이 되어 군·현의 형태가 축소되는가 하면 승격되어 현(縣)이 군(郡) 또는 부(府)가 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이와같이 군·현의 격이 오르내리는 것을 읍호승강(邑號陞降)이라고 한다. 읍호는 고을이름(邑面), 고을의 위격(位格) 즉 읍격(邑格) 또는 읍명과 읍격을 동시에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위격의 승강에 따라 여러 가지 상벌이 뒤따랐다. 어떤 고을에서 역적이나 부모, 친속, 남편, 주인, 관장(수령) 살해의 범죄가 발생하면 읍호가 강등되고 따라서 범죄 당사자는 물론 수령에서부터 주민들까지 벌을 받았다.

김포지역에서도 이같은 읍호를 강등당하는 역사적 사례가 있었다. 읍호를 강등당해야 했던 사건이 다름아닌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통진현에서 발생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중종 37년(1542년) 8월 26일자에 경기관찰사 신거관이 통진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임금에게 계본(啓本)(임금에게 큰일을 아뢸 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을 올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관찰사 계본의 내용은 ‘노비인 업이(業伊)라는 여성이 남편 손효손(孫孝善)과 공모하여 자신의 어머니 막금(莫今)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현장을 목격한 업이의 남자 동생 백송(白松)이의 말에 의하면 “밤에 어미가 우는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나서 보니 방문 밖에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이들이 어미를 마당가로 끌고가서 칼을 빼어 찔러 죽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통진(여기서 통진지역은 지금의 통진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당시의 통진현을 말하며 통진현은 양촌면, 대곶면, 월곶면, 하성면을 말한다)에서 발생한 인륜을 저버린 살인사건은 이렇게 해서 조정신하들의 치열한 ‘읍호강등(邑號降等)’ 논쟁에 불을 지폈고 통진현은 이름이 강등당하는 연대책임을 지게된 사건이 되었다.

그 논쟁의 과정을 따라가 본다.
1542년 8월 26일, 통진현의 살인사건 보도는 이틀 후 8월 28일 조강(朝講)(임금이 이른 아침 시간에 유학의 경서를 강론(講論)하던 일)에 나온 임금 중종이 이틀전 경기관찰사가 보고한 계본의 내용을 꺼내면서 ‘큰 변고로 규정하고 경차관(敬差官)(조선시대에, 지방에 파견하여 임시로 일을 보게 하던 벼슬)을 보내 조사할것을 말한다. 

집의(執義) 임호신은 ‘인륜의 변고가 경악스러움을 주장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아 변고가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영사 윤인경은 ‘교화하는 방도가 있지만 이런 변고가 간간이 발생하고 있어 끝까지 국문하여 통렬히 다스릴 것’을 건의한다.

 일주일 후(1542년 9월 4일) 풍속을 교정하며 규찰 탄핵하는 일을 관장하는 사헌부가 나섰다.
헌부는 임금에게 ‘풍속이 퇴폐함을 주장하면서 변고가 발생한 친족살인사건에 대해 형법으로 다스릴 것’을 요청하면서 형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사례가 있었으며 소급해 기필코 형벌을 바르게 시행함을 건의한다. 이에 중종은 형관(刑官)이 잘못 조율한 일은 이미 지난일이라도 추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죄인의 집을 파괴하고 못을 파는 일과 읍호를 강등하는 일을 진행하라고 지시한다.

다음날(1542년 9월 5일)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영사 윤인경이 중종에게 통진의 패륜사건에 대해 의견을 전달한다.

먼저 윤은보는 원주 패륜사건의 예를 들어 ‘시역(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 또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큰 죄여서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으므로 죄인이 살던 고을까지 강등시켜 왔던 것이며 따라서 원주지역의 패륜사건 처리가 형법에 미진했으므로 읍호를 강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윤인경도 찬성한다. 그러나 홍언필은 ‘이미 원주의 사건은 여러번 의논해 처리했고 수년이 지난일이므로 집을 파괴하여 못을 파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면서 읍호까지 강등시킨다면 통진도 읍호를 강등시켜야 하는데 현감을 더 이상 강등시킬 수 없음을 주장한다. 임금은 홍언필의 의견을 따른다.

통진현 살인사건에 대한 처리는 결국 해를 넘기고 만다
1543년 3월 9일 형조는 임금에게 최종적으로 형법시행에 대해 보고한다. 형조는 부모를 살해한 업이에 대해 능지처참을, 업이의 남편 손효선에 대해서는 참형과 능지처참 두가지 형중 어느것을 택할지 형조가 판단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한 후 조율하는 것 어떻겠느냐고 보고하자 임금은 삼공(3정승)과 의논하라고 지시한다.

1543년 4월 11일 사헌부는 통진현은 비록 강등 할 만한 호칭이 없더라도 옛 명칭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읍호를 고쳐야 하며 당시의 통진현감 신광국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 바꿔야 한다고 의견을 전달한다.

다음날 삼정승은 읍호 강등의 문제로 중종에게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한 의견을 전달한다.
영의정 윤은보는 ‘극악 대죄가 발생한 고을의 읍호를 강등시키는 것은 사형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죄인이 살던 군현을 강등시킴으로서 깊이 미워하고 엄하게 단절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통진현은 더 이상 강등할 만한 호칭이 없으므로 해조로 하여금 옛 호칭을 고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우의정 윤인경도 찬성한다. 그러나 좌의정 홍언필은 ‘읍호를 강등시키는 일은 근래 전례가 있으나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다. 죄인이 발생할때마다 읍호를 강등하게 되면 끝이 없는 일이다. 도리어 폐단이 많을 것이다’라고 의견을 내놓는다. 결국 중종 임금은 윤은보의 의견에 동조한다.

앞서 9월 5일 중종은 윤은보의 의견보다는 영사 홍언필의 의견을 따랐으나 입장이 새롭게 바뀌어 통진현의 읍호를 강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밝힌 윤은보의 의견을 따른다.

이렇게 해서 통진현의 친족 살인사건은 어미를 죽인 딸 업이와 남편인 손효손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이들의 출신지역인 통진현은 이름을 강등(읍으로)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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