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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의 옥(玉)을 사사로이 채취하지 못하게 하라기획연재|조선왕조실록 타고 떠나는 ‘옛 김포여행’⑤

1448년 5월 7일 세종대왕은 의정부 신하들에게 청주와 김포에서 생산되는 옥(玉)을 허락없이 캐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 ‘관민(官民)은 각각 장(杖) 1백에 도(徒) 3년에 처하고, 공장(工匠)은 장(杖) 1백대를 때려 통렬히 징계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당시 모리배들이 옥을 캐내서 기관몰래 판매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말씨로 표현하면 도굴꾼들이 활개를 친 듯하다.

김포에서 옥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하자 김포에서 옥이 생산된 사실을 밝혀주는 내용들이 검색되었다.

실록에 처음 기술된 곳은 세종26년(1444) 10월 26일자다. 본문기사는 “<중략>지금 서울·김포(金浦)·청주(淸州)에 옥 나는 곳이 꽤 많으나, 그 품질이 청옥·백옥·벽옥(碧玉)과는 아주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청주에서 나는 것이 진짜로 여겨지나, 앞서 의정부에서 옥 채굴을 금하는 수교(受敎)에 ‘진옥(眞玉)’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것이 참으로 진짜 옥이면 ‘진옥(眞玉)이라고 하는 것이 좋으나, 만약 진짜가 아니면 어찌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중략>”하는 내용으로 김포에서 옥이 생산되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다.

또 중종 11년(1516) 10월 4일 2번째 기사는 “부사정(副司正) 김사귀(金士貴)가 통진현(通津縣)에서 백옥을 채굴(採堀)하여 올리니, 상을 주도록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종 12년(1517) 2월 17일 1번째기사에 “삼공이 사인 김영을 보내어 아뢰기를, ‘통진(通津)에서 나는 옥(玉)은 마땅히 채취(採取)해야 합니다. 그러나 올해는 흉년이 심하고 더구나 동작(東作) 때가 되어 폐단이 장차 적지 않을 것이니, 추수를 기다려 채취함이 어떠하리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중종 12년(1517) 8월 24일 7번째 기사는 “도승지(都承旨) 이행(李荇) 등이 아뢰기를, ‘통진(通進)에서 캐는 옥(玉)이 별로 급하게 쓰일 데가 없으면 백성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중한 일이니, 풍년이 들거든 캐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옳다. 그러나 입식(笠飾)으로 쓰는 백옥(白玉)을 병인년 이래로 중국에서 구하였으나 사오지 못하였는데, 이 옥이 입식에 알맞을 만하므로 캐려는 것이다. 다만 한 갓(笠)을 꾸미는 것이라면 무슨 폐해가 있으랴마는 합당치 않다면 굳이 해서는 안 된다. 이 뜻을 상의원(尙衣院)에 일러 옥의 품질을 보아서 캐도록 하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포에서 옥이 생산되고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김포 어디에서 생산된다는 장소는 기술되어 있지 않아 아쉬었다. 옥이 생산된 구체적 장소를 알려주는 자료는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 ‘김포현 토산(土産)’부분에 “황옥(黃玉)이 현의 서쪽 검단리 애갈산에서 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옥이 생산된 김포의 지역은 검단면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검단면은 김포군이었으나 1995년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지금은 인천시 검단동이다. 이제는 김포시 지역이 아니나 오랜세월 김포지역으로 역사를 함께했던 검단면에서 아름다운 옥이 생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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