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시가 있는 공간
정리

              정리

                                    김근열

 

퇴직을 앞둔 중년이

깊은 밤에 혼자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

 

바람이 들췄던 시집

달빛이 물끄러미 보았던 평론집

두꺼운 문학서를 책꽂이에 끼워 넣는다

 

새벽에 비틀대고 들어온

자식 놈에게 한마디 한 것이

강박이 늘어난 것은 아니냐고 허리가 쿡쿡 꾸짖는다

*

마누라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던

지난주 일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는 또 무언가

파지를 버리면서

지난 말투들도 휴지통에 버리고 싶다

 

우울증이 생겨났을까

고추밭 잡초를 뽑아내다

계단을 쓸어내려 가다가 생각한다

지금 중년을 쓸어내리고 있는 건가

 

병원으로 출근하면서

중증 환자를 자주 보아 오면서

무심코 몸으로 익힌 철학들을 습관처럼 정리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방을 정리하고 창밖을 보니

붉은 태양이 서서히 또 새빨갛게 떠오르고 있다

 

(김근열 시집,『고요는 어떤 방인가』시산맥기획시선 102쪽, 2023년)

 

[작가소개]

김근열, 충남공주출생, 경희사이버대미디어문창과졸업, 『영남문학』신인상등단, 시집『콜라병 속에는 개구리가 산다』『고요는 어떤 방인가』

 

[시향]

퇴직을 앞둔 중년의 시인이 깊은 밤에 혼자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 정리란 얼마나 단정한 말인가? 사는 일은 생떼 같아 늘 설거짓거리를 남긴다(-우남정 「그렇게 꽃은 피었다 지네」 부분). 벌려 놓은 삶을 치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다. 곳곳에 잡동사니가 쌓이고, 어디에 두었는지 깜박할 때, 주의력 부족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어떤 일은 뜻밖에 미궁이어서 밖을 서성이게도 한다. 이때 흐트러진 상태를 제자리로, 잠시 마음 설거지 또한 유효하다. 한편 지나치게 청결을 앞세운 훼손은 무엇 한가지 건질 게 없다. 강의실이 아닌 어떤 교실, 어느 작업실 등에는 넉넉한 배려가 요구되기도 한다. 시인은

“무심코 몸으로 익힌 철학들을 습관처럼 정리하고 있다”

혹여 마음 상한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날, 시인은 연민으로 들쑤셔진 속을 파지와 함께 버리고 싶다. 시인의 시가 공감으로 메아리친다.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한다는 사람살이, 천사들의 성낸 말투를 들어본 일 없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말갛게 헹구는 일에 힘쓴다. 사람은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인가 보다.

“책방을 정리하고 창밖을 보니/붉은 태양이 서서히 또 새빨갛게 떠오르고 있다”

개운하다. 새날, 오늘의 태양이 붉게 떠오르고 있다. 밤새 단정해진 시인은 더욱 다정해져, 오직 믿고 사랑하는 가족을 등 두드려 주고 애정 깊이 포옹하는 날일 것이다.

글 : 심상숙(시인)

 

 

김근열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근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