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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구멍가게

      시인의 구멍가게

                                           심상숙

 

영랑슈퍼 영랑맨션, 그리고 영랑여관

죽은 시인의 이름으로 새우깡을 팔고

여관 빈방 열쇠를 내어주고

죽은 시인의 이름이 살아있는 자의 어깨를 부추기는 거리

 

붉게 피어나기까지

모란은 회색 뼈 모진 각을 품었다

여러 해째 사랑채 뒤란 대숲 바람은

돌담에 긴꼬리 새들 나르고

담쟁이넝쿨 손바닥엔 저녁물이 들었다

 

현판 문자들 조용히 귓속말 걸어오고

저녁을 기웃대는 갯바람에

영랑의 옷자락 부스럭거린다

바윗돌 멍을 이고 피워올렸을 모란의 봄은

얼음장 밑으로 흐르고 또 흘렀으리

 

길가의 작은 돌멩이 하나를 발로 찬다

생전의 영랑이 툭툭 차고 다녔을,

내 죽은 이름으로 누가

길모퉁이 구멍가게 한간인들 낼 수 있을까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시에

발목이 축축하게 어두워온다

 

영랑이 헤매고 다녔을 어둠이 건너오고 있다

석양빛에 어깨를 담은

영랑생가 대문짝 한 폭

꺼억 열리며

저녁 바닷물에 각혈을 한다

(심상숙 시집『흰 이마가 단단하구나』예술가 2018년)

 

[작가소개]

심상숙 충북 충주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2018). 2012년『목포문학』신인상, 2013년『조선여성문학』우수상, 김장생문학상 본상, 2014년『시와 소금』신인상, 2018년 <광남일보>신춘문예 당선, 시니어문학상, 예성천문예대전 입선,《문예바다》공모시선. 시집 『흰 이마가 단단하구나』

 

[시향]

 시인이 전남 강진 영랑문학제에 갔을 때다 그곳엔 영랑슈퍼 영랑맨션 영랑여관이 있다 죽은 시인의 이름을 걸고 새우깡을 팔고 여관 객실을 대여한다 죽은 시인의 이름이 살아있는 자들의 거리를 생기있게 만드는 현장을 목격한다

 영랑생가 붉게 피어난 모란은 회색 뼈 모진 각을 품었다 사랑채 뒤란 대숲에 부는 바람은 돌담 위로 긴꼬리 새들을 부르고 담쟁이 잎에 저녁놀이 물들었다 현판에 씐 문자들이 조용히 귓속말을 걸어오고 저녁 갯바람이 영랑의 옷자락을 스치는 듯하다 영랑의 모란은 일제강점기라는 바윗돌 멍을 이고 피워올렸으므로 모란의 봄은 얼음장 밑으로 숨어 흐르고 또 흘렀을 것이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를 발로 찬다/ 생전에 영랑이 툭툭 차고 다녔을”

같은 돌멩이를 차 보지만 훗날, “내 죽은 이름으로 누가/ 길모퉁이 구멍가게 한간인들 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구멍가게 상호에 깃든 죽은 시인의 명성을 느끼게 된 순간, 때맞춰『이성복 아포리즘』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란 경구가 떠오른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영랑은 고향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다 ‘영랑이 헤매고 다녔을 어둠이 건너오고 있’었을 때, 시인의 발목도 축축하게 어두워온다

해질녘 생가 대문짝 한 폭을 밀고 나오자 석양에 물든 저녁 바다가 영랑의 각혈인듯 붉게 비친다

글 : 박정인(시인)

심상숙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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