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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승인 2023.06.08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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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주목! - 사람들은 악해.

주목! - 사람들은 선해.

주목하는 동안 황무지가 만들어지고,

쉬는 동안 피땀 흘려 집들이 지어져.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 재빨리 정착하지.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

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

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한지

너는 표 값도 지불하지 않고, 행성의 회전목마를 탄 채 빙글 빙글 돌고 있어.

그리고 회전목마와 더불어 은하계의 눈보라에 무임승차를 해.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 지구에서는 그 무엇도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되지 않아.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탁자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서 있어.

 

책상 위에는 본래 있던 그대로 종이가 놓여 있고,

반쯤 열린 창으로 한 줌의 공기가 스며들어 오지.

벽에 무시무시한 틈바구니 따위는 없어.

혹시 널 어디론가 날려버릴지도 모를 틈바구니 따위는 말이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충분하다』문학과 지성사, 2016년)

 

[작가소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폴란드 쿠르닉 출생. 8세 때 남부 도시 크라쿠프로 이주. 1945년 <폴란드 일보>에 「단어를 찾아서」로 등단. 첫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1952년』부터 마지막 시집『여기, 2009년』까지 총 12권의 시집 출간을 했으며, 그해 시인은 다음 시집 제목을『충분하다』로 결정하여 선포함. 동료 시인 겸 편집자인 리샤르드 크리니츠키에 의해 유고 시집『충분하다, 2012』발간. 독일 괴테문학상, 독일 헤르드문학상, 폴란드펜클럽문학상, 노벨문학상(1996) 수상.

 

[시향]

첫연에서 시인은, 세상에 대해 주목하도록 권한다 사람들은 악하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은 선하다는 것을! 이들을 주목하는 동안, 수많은 격전들이 세상을 휩쓸고 가고, 황무지가 만들어지고, 그 틈에도 피땀 흘려 집들이 지어지고, 사람들은 그곳에 재빨리 정착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힘들게 만들어진 세상임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시인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다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꿈을 꾸고, 헛된 생각이나 공상(환상)에 대한 대가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치르게 되고, 육신을 소유하고도 조금씩 늙어가는 것으로 그 대가를 갚아나가고 있으니, 참으로 저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어디 그 뿐이랴! 표 값도 내지 않고 행성의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돌 수 있고, 회전목마를 탄 채 은하계의 눈보라에도 무임승차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거대한 시간 여행 속에서도 여기 지구에서는 그 어떤 흔들림도 느끼지 못한다

“가까이 와서 이걸 좀 보라고/ 탁자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서있”고 책상 위에 있던 종이도 그대로 놓여 있으며 반쯤 열린 창문으론 숨 쉴 수 있는 한 줌의 공기가 스며들 뿐, 벽엔 널 어디론가 날려버릴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틈이 생기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충돌하지 않고 가지런히 돌아가는 우주 생태계에 대해 마치 “감사하지 않니?”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10대에 세계 2차 대전을 겪은 시인이기에 더 그렇다

존재의 본질과 가치를 보는 혜안을 장착한 시인이기에, 흔히 있는 일상적인 대상을 향해 이렇듯 따뜻한 눈길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쉼보르스카만의 상상력과 사유로, 그리고 쉽고 단순한 詩語로 대상의 참된 가치를 찾아낸 대표적 詩라 하겠다

글 : 박정인(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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