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태양이 두 개라면? : ‘오늘날의 새로움과 복제성에 대하여’미디어와 예술 2화
  • 김희대 대표 ( 스튜디오메타)
  • 승인 2022.01.19 13:05
  • 댓글 0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디지털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일상의 대부분을 스마트폰을 통해 수많은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그만큼 디지털은 우리가 이를 자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실 디지털시대에 오면서 그간 물질적 형태로 존재 해왔던 예술작품은 그 존재형식의 변화로 인해 다소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작품을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서 ‘원본성’과 ‘저자성’에 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매우 논쟁적인 담론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 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저작권법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법률적 제도는 오늘날 현실에서 벌어지는 치열하고 복잡한 저작권 분쟁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대안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지난 예술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크고 작은 ‘대작사건’들은 결론적으로는 대법원판결에서 작품의 저자성에 대한 물음을 예술계에 남긴 채 예술사적 관습에 대해서는 사법적으로 그 과정과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판단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만큼 원작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방식을 예술계의 관습이나 문화적 방식에 근거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법적인 관점보다는 예술계에서 원작에 대한 개념은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9세기 이전만에도 예술작품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사회 계층의 수요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봉건사회의 몰락과 근대의 출현으로 인해 구텐베르크 활자 혁명과 미술계의 공방과 길드의 출현 이후 복제 기술과 협업방식이 등장하면서 예술작품 소비의 대상이 대중화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 힘입어 실제로 16~17세기 네덜란드의 회화시장은 매우 크게 발달 할 수 있었으며 예술가를 중심으로 대형 스튜디오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 작품의 원본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rer, 1471-1528)는 자신의 판화를 복제해서 판매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0~1534)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500년 전 이탈리아 베네치아 법원은 라이몬디에게 뒤러의 서명을 없애고, 위작임을 밝히고 뒤러에게는 모작이 나올 만큼 훌륭한 작품에 자부심을 느끼라고 말한다. 이후 두 화가는 도시를 떠나 다른 곳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표절사례와 달리 공식적인 협업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창작활동의 사례 또한 존재하는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 1640)와 동물화가 스니더르스(Snyders 1579 ~ 1667)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618)>가 그렇다. 당시 루벤스는 루벤스 공방을 운영하고 독립화가(Journeyman) 활동하면서 공방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당시 공방에서 제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것은 화가길드에 의해서 제도화되어 있었고 공방에 소속된 제자는 숙식과 교육의 대가로 그린 작품을 모두 스승에게 귀속하는 것으로 하였다.

자신의 공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들과 협업하기도 하였는데,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작품의 등장하는 인물을 루벤스 자신이 그리고 동물화가였던 스니더르스는 독수리를 그리는 식으로 작업하고 이후 시장에 이를 공표할 때, 두 작가의 이름이 공동으로 작품에 표기되어 발표되었다. 이는 당시에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진의 발달로 인해 이와 같은 원작에 대한 개념은 더욱 공고해진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 ~ 1940)은 자신의 저작인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와 같은 작품이 더 계급이 아닌 창작방식에 근거를 둔다고 밝힌다. 즉, 예술작품의 가치는 작품의 물질적인 형태뿐만이 아닌 그것을 창작하는 과정 또한 내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조품은 진품을 근거하고 있으나 진품이 가진 유일무이한 ‘아우라’를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판화와 같은 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모조품은 홍보 차원에서의 전시가치의 용도만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뒤샹과 같이 복제성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하는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원본성에 대한 문제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문제를 넘어 예술작품을 담아내는 매체의 형태에 따라서 예술의 본성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는 우려를 낳았다. 특히, 현재의 디지털 환경은 이와 같은 우려를 비웃고 있는 듯이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정보복제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터넷 밈이나 풍자물과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 원본성에 대한 대안으로서 NFT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NFT(Non-fungible token)는 디지털환경에서 코드로 구현된 예술작품의 코드를 변환되거나 복제되지 않도록 원본성을 유지해주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코드의 변환을 고정해주는 것뿐이지 디지털환경에서 보이는 이미지 자체의 복제는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한 대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디지털환경에서의 원본성이 유지된다고는 하나 이를 실물로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상상속의 물건을 나 혼자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디지털 원본성을 기술적으로 갖추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 소비되는 작품의 원본성은 작품자체에 대한 내용적 가치뿐만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존재하는 형태의 범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작품의 독창성에 의한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예술에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적인 과정이 동반된다. 오늘날의 복제성은 이와 같은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 세상에서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둘도, 셋도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한 우려 또한 존재 할 수 있다. 감히 알 수 없을 만한 고생을 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을 누군가가 홀라당 훔쳐 가는 억울한 일을 당하기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창작의 방식과 과정 자체가 작품자체로서 기록되고 작품에 포함되어 공표되는 방식이 필요하다. 마치 영화가 끝난 후 제작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크레딧에 표기된다던가 창작과정에 참고하는 레퍼런스 작품에 대한 원작자에게 양해와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작품의 원본성을 공고하게 할 수 있는 필연적 과정으로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

김희대는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 석사를 졸업하고 <스튜디오메타 미디어랩>에서 영화, 광고, 미디어아트 작품을 장착하고 있는 창작자이다.

김희대 대표 ( 스튜디오메타)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희대 대표 ( 스튜디오메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