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이 자당의 색채를 실용주의라 했을 때 한바탕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좌든 우든, 아니면 중도우든 중도좌든 전통적 분류기준에 따른 정체성 규정이 아니고 왜 실용주의냐, 이것이 사실은 기회주의적인 정체성 아니냐 하는 우려와 질타가 있었다. 실용주의가 이쪽 저쪽 가리지 않고 ‘이익’이 있는 쪽만 추종한다는 무원칙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원칙주의자’라고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낙선을 각오하고 부산에서의 연거푸 출마, 그리고 낙선의 고배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의 원칙적인 삶을 평가하였고 이윽고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밀어 올렸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취임이후 그의 원칙을 하나하나 무너뜨려가기 시작했다. 반미 좀 하면 어떠냐는 후보시절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라크파병을 결정하고 국회에 승인을 요청하여 파병을 집행해 버렸다. 서민대통령이라면서 공공주택분양원가공개라는 총선공약을 뒤집고 시장원리 운운하면서 원가연동제로 대체해 버렸다.

최근에는 15년전 공무원노조와 노동3권확보를 위한 법개정안을 발의했던 노대통령이 공무원노조 단체행동권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 전공노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도 서슴지 않고 있다. 누구보다 재벌을 잘 개혁할 것으로 믿었던 노무현정부가 경제살리기란 미명으로 재벌의 눈치를 살피고 있고, 재벌특혜법이라 불리우는 기업도시법도 제정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기회주의적인 처신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이 정당한가를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이들 정책으로 인해 그의 많은 지지자들이 이탈해나가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과연 이탈해간 지지자들의 평가가 온당한가는 살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우리안의 근본주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근본주의는 원칙주의와는 무관하며, 그 최대약점인 비실용주의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정책은 상황의 산물이다. 원래부터 지고지순한 정책이나 제도는 없다. 과거에 오른 쪽으로 휜 정책도 그 부작용이 실익보다 크게 나타나면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왼쪽으로 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그만큼 정책은 그 실효성이나 유효성에 무게를 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정책태도, 실사구시적 안목이 정책결정자들에게 필요한 법이다.  

그런 면에서 역시 문제는 원칙주의가 아닌 근본주의적 태도다. 특히 상황과 무관하게 문자적 근본주의에 매달리는 태도는 ‘과거에 그가 이런 말을 했으므로’ 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변증법적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 딱한 결과다. 특정한 상황에서 언급한 말을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적용하라는 문자주의적 근본주의다.

예를 들어보자.

민노당 단병호의원이 15년전 노무현의원이 공무원의 노동3권을 포함한 노조관련법을 발의했다는 사실을 들어 노정권의 전공노 탄압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노태우정권시절이었고,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은 지금과 달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주체였을 때였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노동운동은 지금 보다 강한 ‘공익성’을 띤 사회운동이었다는 뜻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노무현의원이 공무원노조법을 발의한 것은 요즘 전공노가 주장하는바 대로 공무원들이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것이 곧 권위주의적 정권의 성격을 민주화시킬수 있는 의미가 강한 때의 입법시도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반면 오늘의 전공노 투쟁은 과거와 같이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와 공익지향성이 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공무원조직의 부정부패를 차단하는 견제자의 역할을 하겠다고 하지만 역시 노조는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큰 흐름에서 볼 때 공익성보다는 자신의 이익추구행동을 더욱 강하게 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오히려 공무원조직의 부정과 부패는 시민사회의 견제와 감시, 그리고 참여와 내부고발자보호법의 강력한 시행등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이유야 어찌되었든 정권의 좌파논쟁과 이로 인한 자본의 투자마인드가 위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fact)이다. 수출에 비해 내수의 극심한 부진 때문에 정부가 애를 먹고 있고, 심지어 대통령이 재벌들에게조차 아부성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투자를 촉진시켜야 할 때 투자의욕을 꺽을 수 있는 정책, 즉 공무원노조의 파업권까지 허용하는 지나친 친노동정책은 자본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물어보나마나 뻔한 이치다.

 이같은 상황에서 노동2권만을 보장한, 그러나 역사적으로 공무원노조를 합법화한다는 전진적 의미를 두면서도 투자마인드위축을 고려하여 입법하는 정부와 집권당의 태도는 실용주의적 태도일 지언정 무원칙은 아니다. 다만 근본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무원칙으로 비치는 것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라크파병과 공공주택 분양원가공개, 그리고 기업도시법제정등도 모두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얼마든지 이해가능한 정책들이다.

내키진 않지만 공격적인 미국 네오콘 앞에 노출된 우리 안보를 위해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이라크 파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건설시장의 자본과 국민여론사이에서 원가연동제(나는 공공부문의 경우 시장조절을 위해서라도 공공주택만큼은 분양원가 공개가 옳다고 주장했지만)를 채택도 하는 것이다.

기업도시법도 대기업들에 특혜가 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국토균형개발을 민간재원을 통해 달성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큰 실익이 있다고 할수 있다. 특히 기업도시법의 경우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토지강제수용권을 주어 수천억원의 특혜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들 기업의 비용으로 지어야 하는 문화시설이나 교육시설 몇개 짓는다면 엄청난 특혜가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기업도시안에 우면산의 ‘예술의 전당’ 하나만 지어도 수천억원이 나가며 웬만한 학교 하나 짓는데도 수백억원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안의 근본주의적 시각을 혹여 원칙주의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자는 얘기다. 근본주의는 실용주의와 어울리지 못하지만 원칙주의는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고 또 제대로 된 원칙주의야말로 실사구시적 안목을 포괄할수 있다. 실사구시적 실용은 원칙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칙위에서 구현되는 또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풍부하게 철학을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도올이 지적한 바대로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지전능하지도 못하며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비판과 지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근본주의 시각이라는 오해에서 해방된 비판과 지적이라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근본주의적 시각을 원칙주의와 동일시하는 지적 미성숙은 ‘윈칙’과 ‘실용’을 대립시켜야만 속 시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이분법에서 우리가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김석수  pwkss@hanmail.net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