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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다러시아 인질극에서 나타난 권력의 인명 경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다.
워낙 인구가 많아 희소가치가 없어서인가.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인질극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것도 어린이들이 상당부분 포함된 인질극이다. 인질 구출보다 인질범 사살에 더 큰 의지를 둔 듯한 결과를 보면서 권력이 어디까지 인명을 경시할 수 있는지의 극단을 보는 느낌이다.

자살을 각오한 인질범, 그것도 체첸의 독립을 요구하는 테러리스트들이 벌인 인질극 앞에 권력을 쥔 자들이 생각하는 게 고작 ‘신속한 진압’ 이나 ‘테러리즘에 굴복할 수 없다’는 되뇌임이라면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이 국민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기능적 요구 때문에 국민이 들러리서야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본말의 전도다. 인질극과 테러리즘에 대해 이미 정해진 방침에 따르기만 한다면 거기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없고, 단지 추상적인 국가권력의 기계적인 기능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강변한다.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강경진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인질극과 테러에 굴복한다면 저들은 더욱 더 큰 테러로 자신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그런 푸틴은 이미 수 백명의 사상자를 낸 모스크바 극장인질극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로 국민의 죽음을 강요한 바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권력이 인명을 경시한 풍조는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피랍되어 죽임을 당한 김선일씨 사건에서 우리도 국가권력의 냉혹함을 겪은 바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권력이 아니라 관료들의 기능적 요구에 그대로 순응하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외교안보분야의 전문가들은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지식한 원리를 살아있는 현실에 그대로 대입함으로써 보호해야 할 국민을 죽음으로 빠뜨린 것이 옳다는 태도다.

그런데 정말 협상의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동료들을 풀어달라는 체첸반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러시아가 위험에 직면하는가. 그렇지 않다. 단지 소규모전투에서 러시아정부가 잠시 패배하는 것뿐이다. 그 잠시의 패배를 수용할 수 없어 수 백명의 생명과 바꾼 것이다.

설령 체첸반군이 이 같은 게릴라전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한다하여도 그것이 러시아에 치명적인 안보문제를 야기하진 않는다. 단지 수백년동안 억압받아온 작은 공화국이 독립하는 것뿐이다.

이라크에 파병하면 김선일을 죽이겠다는 인질범의 요구를 잠시 들어줄 순 없었는가. 그렇게 정책의 신축성과 융통성을 강조하는 정부가 잠시 추가파병의 의지를 완화하면서 ‘추가파병방침은 변함이 없다’는 선언보다 ‘우리는 우리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삼는다. 추가 파병방침은 김선일 구출을 위한 협상을 봐가며 조절할 수 있다’는 정도의 언급만 있었더라도 시간을 벌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김선일은 비등하는 국제 여론, 특히 아랍 여론에 힘입어 일본인 납치자들의 선례에 따라 무사히 풀려날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자국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을 미국정부와 여론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무서운 집단적 안보논리 때문에 개인의 희생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러시아 인질들이 재수없었고 김선일이 죽을 운명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더 큰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러리즘에 대한 강경진압과 비타협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국가권력의 논리는 국민들로부터 승인받은 것인가.

국가가 개별 국민의 인명을 이렇게 쉽사리 희생시키는 분위기에서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정말 나라면 이런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충성을 다할 수 있을까.

국가권력에게서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생명의 존엄에 기초한 개인주의가 활짝피는 현대민주주의는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야만적인 러시아 정권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주주의의 과제다.

글·김석수 김포시민사회연구소 대표

김석수  pwk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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