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아는 이가 기르던 토끼를 가져왔을 때 이 토끼는 매우 비만한 토끼였다. 사료, 말린 사과등 약간의 먹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기르기가 수월치 않아서 가져온 것이다. 배설물과 냄새 때문에 밖에다 토끼장을 만들어 음식물을 나우어주면서 키웠다.

그런데 토끼가 너무 자주 토끼우리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토끼장이 허술한  탓도 있겠지만 잡아다 넣으면 또다시 탈출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남편과 아들이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더라도 바깥바람을 쏘여본 토끼는 점점 날쌘돌이가 되어갔고 잡으려던 사람이 오히려 넘어져 상처를 입기도 했다.

결국 진돗개를 풀어서 잡으려 했지만 몇 번인가는 잡던 개도 헛수고만 했다. 그럭저럭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자유를 얻은 이 토끼는 제 생명을 스스로 지켜내고 있다. 처음에는 한 두 달 가면 산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거나 무슨 일이 있겠지하고 짐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녀석이 아주 잘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에 갇혀서 주어지는 먹이에 수동적으로 익숙해서 살 때는 그렇게 뚱뚱했던 몸이 완전히 몸짱이 되도록 날씬해졌다는 것이 제일 눈에 띄는 변화요, 창문으로 내다보면 같은 풀인데도 아무 풀이나 뜯어먹지 않고 선택해서 좋은 풀을 골라 먹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스스로 선택한 먹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똑똑해져가던 녀석은 이미 묶여있는 진돗개 코 앞까지 가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보이는가 하면 특히 나를 잘 사귀고 있는 중이다. 

이른 아침이 되면  토끼가 현관 아래에서 나를 기다기고 있다. 그러면 나는 한 웅큼의 음식물을 가져다 코앞에 놓아준다. 처음부터 우리의 사이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이 그렇게 그녀석을 다시 잡아넣으려고 해도 나는 단지 "토끼야 집으로 돌아와야해"라고 말할 뿐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보이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눈에 띌 때마다 그 이야기를 반복했고 그만큼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더니 드디어 반년만에 토끼는 완전히 나를 믿게 되었나보다. 이제는 이른 아침이면 현관아래까지 와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말이 안 통하는 토끼가 나를 믿고 내 손안에 있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 그리 신나고 행복한 일이 될 줄이야! 저절로 사랑스럽다. 얼마나 신기하고 가슴 설레는지 꼭 오랫만에 사랑을 얻은 사람의 기분 못지 않다.

토끼가 집을 나간 처음부터 "그냥 두어라"고 말하던 나는 토끼를 꼭 다시 가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세상에 죽을 일이 아니면 원만한 일이요, 그러면 살 일'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있어 지독한 미움이나 싸울 마음, 꼭 이래야 한다는 굳어진 사고는 없다.

암센터에 3개월에 한 번씩 가서 의사의 입을 바라보며 죽을지 살지의 확인과정을 거쳐야하는 내게 하루하루는 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즐거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어코 잡아넣으려는 시도를 버리지 않았던 남편도 이제는 스스로 화해를 하고 창문아래에 와서 수박껍질을 갉아먹는 토끼를 편안하게 바라본다.

내가 힘이 있다고 느낄 때는 상대방을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와 무리한 힘을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도 나도 똑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보면 그저 평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  어떤 존재도 자유로워야하며 제 생명을 스스로 그렇게 살려낼 수 있음도 알고 꼭 말이 아니라도 충분히 마음을 나눌수 있다.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순간 그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미 그와 나는 하나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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