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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거꾸로 돌아가는 동네
얼마전 한 여배우의 정신대를 빙자한 누드집 발표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라는 방송ㆍ언론ㆍ시민단체의 즉각적인 반응과 전 국민의 분노 앞에 제작자가 삭발하고 무릎 꿇어 사죄하는 모습을 보았다.

간혹 배우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누드를 다룰 때마다 외설이니 상업이니, 예술이니 하는 논란은 들어왔지만 이번 일 만큼은 어떠한 반론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국민정서의 공통분모이자 성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넘버3’라는 영화는 가벼운 터치의 차원을 애국심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결합하여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저잣거리 깡패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애국심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시사적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심지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 뻔한 스토리의 영화를 세 번 씩이나 보게 된 것도 우리 사회가 애국심을 확인하는 장치에 인색했기 때문에 느낀 갈증 탓일 것이다.

할리우드산 오락영화를 Pax America의 홍보물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내심 부러운 점이 있다면 스토리와 관계없이 애국심을 촉발시키는 대사가 반드시 삽입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심히 눈여겨 본다면 화면의 어느 귀퉁이에라도 성조기를 반드시 출연시키는 세심함을 발견하게 된다.

다중에 의한 태극기 행사, 3ㆍ1절은 올해로 85주년을 맞이했다.

그 나이먹음을 몰라도 좋다. 얼마나 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께서 목숨을 바쳤는지 그 숫자와 성명을 헤아리지 못해도 좋다. 유관순ㆍ윤봉길ㆍ안중근 선생께서 순국한 것은 황구(黃口)가 아닌 한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추위에 얼어죽고 굶어죽어간 이름없는 독립투사의 비참을 몰라도 좋다.

누가 항일을 빙자한 친일 매국을 했는지, 그 자손들이 누구인지 속속들이 몰라도 좋다. 오늘날 국기게양을 하지 않아도 그를 욕하지 않는 행복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기게양을 하지 않아도 3ㆍ1절은 3ㆍ1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3ㆍ1절에 이틀간 국기를 게양할 것을 골자로 정부에서 전국 통장ㆍ이장에게 지침을 보냈다.

그 지침에 따라 민족적ㆍ국가적인 이 행사에 대한 안내 및 안내방송을 못했거나 안했다고 그를 매국노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여행중이거나 집안의 경조사에 경황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3ㆍ1절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마을에서는 3ㆍ1절 방송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고희를 넘긴 순박한 통장님의 “×××놈들 해도 해도 너무해…”하는 애쓰는 소리만 잔뜩 들었다.

“뻑하면 생선대가리 사라는 방송은 밤낮없이 뻔질나게 하면서 3ㆍ1절 방송을 못하게 하는 ××…××…××한 놈들이 대한민국 놈이여?!”
3월2일 우리동네에 두 번씩이나 되풍이된 방송이 있었다.

“소수의 음해 세력이…법적 책임…”등등이다.

착란을 일으킨다. 지금이 일제시대인가. 유신독재시대인가. 5월 광주민주항쟁 시절인가. 인권변호사출신임을 자처하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가.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주민에게 캠코더와 소형녹음기를 작동하며 그 조건이 싫으면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내쫒거나 법이 그러하다고 강요한다.

언필칭 명예훼손과 고소ㆍ고발은 들먹이니 법 모르는 주민은 주눅들고 말문이 막힌다. 마을의 동대표가 주민을 상대로 이래도 되는 것인지, 마을의 동대표회의에서도 주민과 합의없이 독단으로 이런 법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주민의 안전과 생명보전을 위해 소방시설 개선과 방범순찰을 제외하면 묵살과 지연, 핀잔으로 일관한다. 무엇이 중요한가? 착란은 계속된다.

과거의 특정한 고생(45일간 구속수감)을 오늘날에 일반화시키는 것에 대해 논리학자 어빙 코피는 ‘연민에의 호소 오류’라고 분류했다.

즉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법이 오류라는 점을 지적하여 무차별 적용을 자제하라고 고지하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용해 누군가의 동의와 동조를 이끌어내왔다는 점은 현혹이거나 선동에 가까운 불합리가 된다.

착란은 계속된다. 이곳이 마을인가, 정치판인가, 교도소인가.

경남 진주에 살고 있는 유명한 다인(茶人)인 B씨가 그날 밤 하루 묶어갔다. 엊그제 느닷없이 전화로 ‘예(禮)’에 대해 물어왔다. “예란 기부지회와 근해지속을 상세히 하는데서 시작하여…”라고 주자를 인용해서 일러주었다.

그는 20여년 머릿속에서 맴돌던 문제가 그 한마디에 풀렸노라고, 기쁨에 찬 나머지 먼 길을 마다 않고 이곳 김포까지 달려왔다.

그렇게 달려온 그가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얼마나 당혹해 했던가.

그 사색가 B씨는 ‘동네 편싸움’이라고 일갈해 버렸다. 그래, 동네 편싸움에 이토록 살벌한 용어와 계략이 횡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의 마을 싸움은 돈 몇 푼이나 허영심에서 비롯되는 것을, 그래서 이기심이 움직이며 감정이 상

김수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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