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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은 피고 준(準)은 떨어지고
사무실에 걸어놓은 플래카드의 여성의 전화 ‘준(準)’자가 한 여름 더위 탓인지 모음하나 툭, 자음하나 툭, 어느 사이 슬금슬금 떨어져 내렸다. 여성의 전화 이야기가 나온 지 3년, 이러저러한 산고와 태교, 1년 이상의 준비위원회 기간, 제3차 평가를 받으며 드디어 지부가 탄생할 즈음 ‘준’이라는 딱지를 그러잖아도 떼어내야 할 판에 스스로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때를 맞추어 사무실 개소식 때에 받았던 동양란이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피어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의 깨달음을 준다.

지혜로운 사람도 좋지만 결국 모든 인생의 실마리는 기다림의 미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도 쉽게 얻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1년 안에 모두 완성하는 결혼조차도 7-8년이나 기다린 끝에 억울해서 결혼할 만큼(?) 고생바가지를 했다.

덕분에 우리는 피차 고단할 때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15년 전의 연애편지를 꺼내 읽으며 낄낄거린다. 얼마나 사랑하면서 얻은 결론이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한솥밥 먹는 일이었든가!남들에게는 하찮아 돌아보지도 않을 경험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경험으로 서로를 감싸준다.

“우리들이 만나온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오는 에너지. 분명 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낳고 어떻게 지켜왔는가에 따라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 달라진다.

어떤 광고회사의 카피 “혼(魂)을 담은 시공”처럼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살아야 함을 늘 느낀다.

현재, 주위를 돌아보면 상대적으로 가난을 느끼다가도 처음의 그 때를 떠올리면 부자가 된 마음이다.

결국 안달을 하든 말든 인생은 내 마음의 틀에 꼭 맞추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때가 있기 마련이 아닐까? 모든 일에 때가 있는데 때가 꽉 차 넘치기도 전에 우리는 흔히 열매를 맛보려 한다.

본인은 일컷 기다렸다고, 더 이상은 못 기다린다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간혹 부글부글 하면서 힘들어 한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왜 이리 일이 안 여물고 힘든가!

하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때는 우리의 얄팍한 소원이 거의 잊혀질 즈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여성의 전화 준비 1년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힘든 행군의 연속이었다.

대충이라는 것이 안 통하는 세월이었다.

다른 단체의 형성과정은 모르겠지만, 회원 한 사람 한사람의 리더십의 중요함, 사무실 자체 확보, 상근자 및 상근비체제 완비, 회원자체교육 이수 필수, 60% 이상의 회원회비에 의한 회의 운영 등 정말 회운영의 책임을 중요하게 배우는 시기였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러하듯이 끊임없는 계단 오르기란 없다.

계단을 오르다 쉬기도 하고 때로는 다 올랐다고 생각할 때에도 안심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 생각의 차이나 경험의 공감대를 함께 이끌어 내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물론 앞으로도 늘 풀어야 할 일상의 숙제가 되지 않을까?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단 없는 행보로 걸어간다는 것이다.
멈추어 있지 않고 배워나가다 보면 우리의 삶은 좋아지고 변할 것이라는 희망, 한 두 사람이 모인 단체가 아닌 이상, 다양한 목소리와 견해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원칙에 충실하면서 일을 풀어가야만 할 것이다.

원칙이란 바로 여성주의 원칙이다. 대 원칙이 서면 그 다음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눈 녹듯이 사라질 일이다.

원칙이 없는 조직은 이미 생명력이 있을 수 없다.

“처음처럼”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 이 일을 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늘 답은 찾아진다.
<제111호 4면/2001.7.9일자>

편집국  mirae@gimpo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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