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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속의 기적한익수 RBPS경영연구소 소장
   
▲ 한익수 RBPS경영연구소 소장

“공장장님, 저는 빨리 집에 돌아 가야 됩니다. 노모를 혼자 모시다가 이곳에 왔는데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저도 본사로 보내 주세요. 내년 봄에 결혼을 해야 되는데 이러다가는 파혼 당할 지경입니다. 결혼이 깨지면 공장장님이 책임질 수 있어요?”

우크라이나 자포로지에 간지 6개월쯤 지나 첫 겨울이 시작될 무렵, 직원들의 면담요청이 부쩍 늘었다. 3개월의 출장 기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말이 없으니, 열악한 환경에서 불안을 느끼는 직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대우자동차가 세계경영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국영회사인 오토쟈즈와 합작회사를 설립하면서 50여명의 직원들을 파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모두 단신 부임 이었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쌓이는데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경직된 사고를 가진 현지인들과 말도 잘 안 통한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봐야 심신을 달래줄 가족도 없다.

지방 도시라 인근에 교회도 없다. 주일이면 믿음 생활하는 동료들과 함께 식당 한 구석에 모여 예배를 드리곤 했다.

자포로지에서의 처음 1년은 전방 군부대 생활보다도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마땅한 숙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지은 지 60여 년이 지난 낡은 아파트 4층 건물을 빌려서 숙소로 사용했다.

겨울이 다가오니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 사흘이 멀다 하고 폭설이 내린다. 전기스토브가 있는데도 방안 온도는 5도를 넘지 못한다.

4평 남짓한 독방에 삐걱거리는 작은 침대 하나, 준비해간 침낭 속으로 들어가 새우잠을 자야 했다. 칠 흙 같이 어두운 기나긴 겨울 밤은 고국의 가족들을 더욱 그립게 했다.

숙소 한쪽에 마련된 휴게실 외에는 각 방에 TV, 냉장고 조차도 없다. 저녁에 퇴근하면 임원들은 예외 없이 휴게실에 모인다. 업무 이야기도 하고, 재담가인 사장님 무용담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휴게실 미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11시나 되야 마무리 되곤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는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피로가 겹친데다 감기 기운이 있어 열도 났다. 그래서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10시경 잠자리로 들어가 깊은 잠이 들었다.

잠이든지 얼마 안되어 악몽을 꾸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게 왠 일인가? 방안에 연기가 자욱하다. 벌떡 일어나 복도 쪽 문을 열자 숙소 전체가 연기로 꽉 차 있고, 한쪽에서는 화염이 일기 시작이다.

“불이야! 불이야!” 나는 정신 없이 뛰쳐나와 사장님부터 깨웠다. 그리고는 층계를 뛰어 오르내리며 층마다 한 사람씩을 먼저 깨운 다음, 전 직원들을 깨웠다. 직원들이 대피하는 동안 숙소는 이미 화염으로 휩싸였다.

화염과 연기 속을 헤치고 겨우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부분 직원들이 빠져 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인원 점검부터 했다. 미쳐 나오지 못해 2층, 3층에서 뛰어내린 직원들도 많았는데 기적적으로 큰 부상 없이 모두 구출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도 대부분 직원들은 가방과 귀중품까지 챙겨 가지고 탈출했다.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잠옷 바람에 맨몸이다.

귀중품을 챙길 생각조차 못했다.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을렸고, 여기저기 부딪혀서 밤 송이처럼 얼굴이 부어 올라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10분만 늦었어도 많은 희생자를 냈을 대형 화재였다. 그때 함께 했던 동료들은 지금도 만나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살아 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기적은 위기 속에서 일어난다.  

한익수소장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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