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아까운 옷가지들을 비롯, 아이들 장남감과 학용품, 책이 주종이고 부피가 나가는 가구들까지 손때는 묻었지만 그래서 더 온기가 느껴지는 살림살이가 한자리에 모였다. 한 아이는 가지고 놀다 싫증난 장난감을 팔아 생긴 5백원을 들고 슈퍼로 달려가고, 어떤 아주머니는 헌 옷가지들을 이리 저리 헤치며 박음질에 문제가 없는지, 자크는 고장이 나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다.
어지간한 재래시장이 부럽지 않은 생기가 이곳 아파트 단지를 휘감는다. 장터 여기 저기를 분주히 오가며 거래에 흥을 돋우고 주민들을 인사시키느라 바쁜 이 아파트 부녀회(회장 안인영 49) 아줌마들이 바로 장터를 만든 주인공들.
부녀회 안 회장은 "벼룩시장이 설 때면 다른 아파트 등지에서 원정을 오는 알뜰한 단골들이 생길 정도"라고 자랑이다.
부녀회가 결성된 것은 작년 10월. 서먹서먹하고 개별화된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의도로 시작된 사업이 바로 벼룩시장이다.
시작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홍보가 부족해 참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품도 많지 않았다. 부녀회 회원들은 주민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직접 이들을 찾아 나섰다. 각 동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방송을 통해 "쓰지 않는 물품 한 두 가지라도 가지고 나오라"고 당부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점차 부녀회 회원들보다 주민들이 더욱 장이 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고. 뿐만 아니라 장에 나오는 물건의 80% 이상이 팔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부녀회는 이 같은 주민들의 호응에 격주로 열던 벼룩시장을 이번주부터는 매주 연다는 계획이다.
안 회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 아니라 주민들의 만남과 화합의 장으로서 닫아놓았던 서로의 문과 마음을 여는 사랑방"이라는 설명이다.
비록 중고물품이지만 '확실한 애프터 서비스'를 위해 판매자의 주소와 연락처를 방명록에 기재하고 있는 것이 이곳 벼룩시장의 특징이다.
한 번은 인근 신동아 아파트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구경을 나왔다가 점찍어둔 5백원짜리 양복을 다른 주민에게 팔았다가 뒤늦게 나타난 할아버지의 호령에 구매자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되받아 오기도 했다. 방명록 덕분에 되찾을 수 있었던 에피소드. 또 어린이들이 부모 몰래 살림살이를 가져와 파는 것에 대한 예비대책이기도 하다.
부녀회는 벼룩시장 외에 다양한 봉사활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7일에는 어버이날을 맞아 단지내 노인정에서 직접 음식들을 마련해 경로잔치를 벌였고 올 초에는 야유회도 개최해 천안의 한 공원에서 주민 화합의 잔치를 마련했다.
부녀회 염혁진(49) 감사는 "폐쇄적이고 개인화되기 쉬운 일반적인 아파트 생활의 모습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보다 활기차고 재미있는 공동체적 삶의 기쁨을 알아나갔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부녀회 활동을 예쁘게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황인문 기자 p3344@gimpo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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