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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종실록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20. 경종실록

1)경종 10권, 2년(1722 임인/청 강희(康熙) 61년) 12월 15일 병인 2번째기사

●양사에서 탐학한 김포 군수 이서태와 전 병사 이휘 등을 삭거 사판할 것을 청하다

양사(兩司)【사간(司諫) 이진순(李眞淳)·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김포 군수(金浦郡守) 이서태(李瑞泰)는 더 많이 보고한 재결(災結)이 2백 결(結)에 이르렀는데, 민간에게 나누어 준 것은 그 수량이 매우 적었으며, 잡역(雜役)으로 징수한 돈이 전에 비하여 갑절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패선(敗船)의 증미(拯米) 수백 석을 가려 두고, 썩어서 상한 남은 쌀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고는 실속없이 성책(成冊)하며 그 사용(私用)한 자취를 엄폐하였습니다.

이른바 가려 둔 수백 석은 간 곳이 명확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탐학(貪虐)하고 불법(不法)한 사람은 자목(字牧)의 직임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전(前) 병사(兵使) 이휘(李暉)는 일찍이 옹곤(雄閫)과 유읍(腴邑)을 역임하면서 오로지 가렴 주구(苛斂誅求)하여 제몸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고, 집에 전포(錢布)를 쌓아 둔 채 물쓰듯 하였습니다. 널리 점유한 전토(田土)가 경기·충청도에 퍼져 있는데, 아직도 아정(阿鼎)에 안치(按治)하는 법에 벗어나 있으니, 오래도록 물정(物情)의 분완(憤惋)을 초래하였습니다.

작년에 무소(武所)에서 시강(試講)할 즈음에는 그가 친한 사람과 뇌물(賂物)을 보낸 사람은 정(丁)자조차 알지 못하는 자도 모두 다 통(通)을 매기고, 그 나머지 본시 모르는 사람은 비록 잘 독해(讀解)하더라도 문득 반드시 조(粗)를 매겼으므로, 중외(中外)의 원망과 비방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조카를 양자를 삼아 데려다 기른 지 십수 년이 지난 뒤에 양자의 동생인 이제항(李齊恒)이 문과(文科)에 등제하자, 이제항을 양자로 고치려고 하였으니, 놀랍고 가증스러운 자취가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탐도(貪饕)하며 불법(不法)하고 의리를 어겨 윤기(倫紀)가 없는 사람은 융원(戎垣)의 장병(將兵)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재해(災害)로 군포(軍布)를 견감한 것은 실로 조정의 진휼(軫恤)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외방(外方)의 영문(營門)에서 더러 일체(一體)로 봉행(奉行)할 수가 없습니다. 각 영문(營門)에서 상납(上納)하는 것은 장령(將令)에 의하여 감하여 받고, 영문에 소속된 진졸(鎭卒)에게는 다 2필(匹)을 받는데, 이와 같이 구별(區別)하여 하나는 받고 하나는 받지 않으니, 지극히 놀랄 만한 것입니다. 또 황해 병영(黃海兵營)에서 진졸(鎭卒)의 군포(軍布)를 강제로 세목(細木)으로 받는 것은 이미 잘못된 규례입니다.

2필을 판비하는 값이 6냥 전(錢)에 이르는데, 이는 곧 3필(匹)의 역(役)이 되어 배(倍)나 감당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각도와 해영(該營)에 분부(分付)하여 재년(災年)의 진졸의 군포는 한결같이 서울에 바치는 예에 의하고, 감징(減徵)하는 승수(升數) 또한 서울에 바치는 예에 의하여 수봉(收捧)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하소서.”하니, 말단(末端)의 세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영인본】41책 270면【분류】*정론-간쟁(諫諍)/*인사-임면(任免)/*사법-탄핵(彈劾)/*군사-군역(軍役)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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