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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영조실록(10-1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1. 영조실록(10-19)

10)영조 39권, 10년(1734 갑인/청 옹정(雍正) 12년) 9월 15일 정해 2번째기사

●김포군에 있는 조헌의 서원과 윤섬·윤계의 묘소 등에 치제할 것을 명하다
김포군(金浦郡)에 있는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서원(書院)과 증(贈) 영의정 윤섬(尹暹)·증 판서(判書) 윤계(尹棨)의 묘소와 과천현(果川縣)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묘소, 육신사(六臣祠)와 금천현(衿川縣) 명빈(䄙嬪) 박씨(朴氏)의 묘소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또 몸소 제문(祭文)을 짓고 금천현 연령군(延齡君) 헌(昍)의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영인본】42책 453면【분류】*풍속-예속(禮俗)/*인사-관리(管理) 

11)영조 39권, 10년(1734 갑인/청 옹정(雍正) 12년) 9월 16일 무자 2번째기사

●김포에서 유생들의 학문을 독려하고, 본군의 향교에 위전을 획급하도록 명하다
대가(大駕)가 김포(金浦)에 이르자 고을의 여러 유생(儒生)을 불러 보고 성현(聖賢)을 존중히 여기며 경전(經傳)을 독실히 강습(講習)하라고 면려하였다. 그리고 본군(本郡)의 향교(鄕校)에는 유독 위전(位田)이 없으므로 도신(道臣)에게 규례에 의하여 획급(劃給)하도록 명하였으며, 또 기로(耆老)에게 식물(食物)을 하사하고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영인본】42책 453면【분류】*왕실-행행(行幸)/*왕실-사급(賜給)/*농업-전제(田制)/*윤리-강상(綱常)/*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사법-행형(行刑)

12)영조 42권, 12년( 1736 병진 / 청 건륭(乾隆) 1년) 10월 13일 계유 1번째기사

●민택수가 통진 부사 유동무 등이 땔나무를 뇌물로 쓴 것 등을 아뢰다
정언 민택수(閔宅洙)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통진 부사(通津府使) 유동무(柳東茂)는 배를 빼앗아 땔나무를 운반하여 뇌물로 바쳤으며, 영암 군수(靈巖郡守) 윤하(尹㵑)는 전에 호남의 두 고을을 맡았을 적에 1천여 결(結)을 재결(災結)로 만들어 도용(盜用)했으므로 남쪽 고을 사람들이 적쉬(賊倅)라고 지목하고 있으니, 모두 삭직(削職)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수령은 이미 치효(治效)가 있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였다.
 
【영인본】 42 책 521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사법-탄핵(彈劾) / *교통-수운(水運)
 
 13)영조 42권, 12년(1736 병진/청 건륭(乾隆) 1년) 10월 27일 정해 1번째기사

●양역의 폐단을 막기 위해 양정 어사를 파견하는 일을 의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양정 어사(良丁御史)를 품지(稟旨)하여 발송하려 하고 있는데, 외부의 의논은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기도 하니, 먼저 아주 심한 고을에만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는 임금을 대신해서 여러 고을을 순행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성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니, 기읍(畿邑) 가운데 풍덕(豐德)·김포(金浦)와 호서의 아주 심한 고을에 우선 먼저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두서너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어찌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될 수 있겠는가?”하였다.
 
【영인본】42책 522면【분류】*왕실-국왕(國王)/*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14)영조 42권, 12년(1736 병진/청 건륭(乾隆) 1년) 12월 4일 계해 1번째기사

●황해도 장연부에 11월 23일 천둥이 치고, 경기 등지에 천둥이 치다
황해도 장연부(長淵府)에 11월 23일 크게 천둥하였고, 경기의 부평(富平)·인천(仁川)·김포(金浦)·양천(陽川) 등 고을에는 이달 초1일 오시(午時)에 햇빛이 어두침침하면서 크게 천둥하였다.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에는 10월 초5일 밤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 노도(怒濤)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소용돌이쳐서 해변의 촌락이 물에 뒤덮인 곳이 많았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천둥 벼락이 크게 쳤다.

영덕현(盈德縣)에는 10월 초6일에 천둥하며 벼락이 크게 쳤고, 사천현(泗川縣)에서는 10월 17일에 천둥하고 벼락이 크게 치면서 비가 내렸으며, 성산현(星山縣)에서는 11월 19일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천둥 소리 같았다.
 
【영인본】42책 528면【분류】*과학-천기(天氣)

15)영조 45권, 13년(1737 정사/청 건륭(乾隆) 2년) 9월 27일 임자 3번째기사

●태복시 주원의 낭관은 김취로와 인척이므로 다시 조사하자는 이우하의 상소
호군(護軍) 이우하(李宇夏)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신이 망령되게 한 소를 올려 김취로(金取魯)의 세 가지 일을 비방해 논한 데 대하여 엄히 조사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태복시(太僕寺)와 주원(廚院)의 두 낭관은 모두 김취로의 인척(姻戚)이어서 그 위세를 두려워해 곧바로 진술하지 못하였으니, 아!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공선(御供船) 한 조항은 신이 일찍이 위어소(葦魚所) 어부(漁夫)들에게 직접 들었는데 이제 그가 공초한 바는 분명 정상을 숨김이 있으니, 만약 다시 임자년 이후의 어관(漁官)에게 조사해 물으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가교마(駕轎馬) 한 조항은 신이 상소를 할 때 마적리(馬籍吏) 이유창(李裕昌)을 불러서 물으니, ‘변마(邊馬) 1필을 곧바로 김포(金浦) 늑방교(勒防橋) 가에서 바쳤는데 변마는 교마(轎馬)와 서로 교대해 어승(御乘)에 쓴다.’고 하였으니, 다른 아전과 헌부의 노복(奴僕)들도 모두 참여해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복마(卜馬)의 첩(帖)을 주었다는 말은 어찌 속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복마는 한번 나가면 원래 들어오는 규정이 없으니, 다시 바쳤다는 말 역시 아주 근거가 없습니다. 금오랑(金吾郞)의 공초에 이르러서는 바로 김취로의 전번 소 가운데 있는, ‘말에서 떨어졌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부합시켰습니다마는, 김취로는 성문 밖에서 유숙하여 원래 말을 탄 일이 없으니, 어찌 말에서 떨어져 다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전번 상소가 올려지기 전에 먼저 누설되어 김취로가 당로(當路)에 애걸하여 만류하고 두 번씩이나 그 집 사람을 보내어 조용히 말하였으니, 그의 방자하고 곤궁에 처한 정상은 사람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의 이 소를 내려 다시 그 실상을 구핵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이우하가 진달한 이유창을 해조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아뢰도록 하라. 예조 판서가 성문 밖에 나갈 때 말을 탔는지 가마를 탔는지도 나졸(羅卒)을 사문(査問)하여 아뢰고, 원소(原疏)는 정원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2책 571면【분류】*정론-정론(政論)/*교통(交通)/*사법-탄핵(彈劾)/*사법-재판(裁判)/*재정-상공(上供)

16)영조 47권, 14년( 1738 무오 / 청 건륭(乾隆) 3년) 7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사간 심성진이 용천 부사 정세장·통진 부사 이진환 등의 개차를 청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원에서【사간 심성진(沈星鎭)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오랑(金吾郞)은 음로(蔭路)의 청선(淸選)인데, 임환(林瑍)과 이필(李弼)은 모두 천얼(賤孼)로서 매술(賣術)하는 무리인데도 또한 의망(擬望) 받았으니, 마땅히 전조(銓曹)의 당상을 추고(推考)해야 합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세장(鄭世章)은 전혀 이력이 없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진환(李震煥)은 용렬하여 어리석고, 강령 현감(康翎縣監) 상이창(尙履昌)은 사람됨이 너무도 잔약하니, 아울러 개차(改差)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정세장은 어떠한 사람인가?”하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정세장은 일찍이 아산(牙山)을 맡았을 적에 잘 다스려서 승자(陞資)되었고, 또한 십고 십상(十考十上)9015) 에 들었습니다.”하고,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일찍이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진환을 물으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이진환을 보았는데 자못 직책을 거행하려고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하고,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 방백으로 있었을 때 이진환이 진주 영장(晋州營將)에서 과만(瓜滿)하여 체직되었으므로, 신이 그의 재질을 애석하게 여겨 전관(銓館)에게 서신을 보냈었는데, 이어 칠곡(漆谷)에 제배되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간관(諫官)과 재상(宰相)이 서로 왈가 왈부(曰可曰否)하는 마당에 비록 대신이 혹시 말이 있었다 하나, 이조 판서와 형조 판서가 어찌 감히 비답이 내리기도 전에 분소(分疏)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대관(臺官)이 아뢴 말은 그대로 윤허한다.”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정희보(鄭熙普)의 상소에 이른바 ‘만일 수창한 사람을 형벌한다면, 많은 선비들이 반드시 함께 죄 받기를 청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어찌 앞질러 이런 말을 하여 시끄럽게 하는 폐단을 야기(惹起)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遞差)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 42 책 600 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신분(身分)
[註 9015]십고 십상(十考十上) : 관리의 근무성적이 10차례 평정(評定)하여 10번 모두 상등(上等)인 것을 말함. ☞ 

17)영조 50권, 15년(1739 기미/청 건륭(乾隆) 4년) 8월 20일 갑오 1번째기사

●사묘에서 환궁하다. 경기 감사 등을 인견하여 농사 등을 묻고 감세하게 하다
임금이 사묘(私墓)에서 환궁(還宮)하였다. 교자(轎子)를 타려 할 때에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불러 목메어 하교하기를,
 
“신해년 이후 이제야 비로소 와 뵈었다. 그 사이가 이미 10년이 되었으니, 내 마음의 슬픈 느낌이 어떠하겠는가?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 먼저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천성이다. 묏자리를 잡을 때에 땅을 바친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곳을 잡았겠는가?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전조(銓曹)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다.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지만 또한 실신(失信)하여서도 안된다. 근래 명류(名流)가 매우 어려워하나, 명류에게도 부모가 있거니와 어찌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나왔겠는가?”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곧바로 전조에 명하여 그 사람을 녹용(錄用)하게 하신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김성응이 명을 받고 물러갔다. 임금이 또 의주(儀柱) 가운데에서 사묘를 극행(極行)으로 쓰지 않았다 하여 꾸짖는 하교를 내리고, 예판(禮判) 윤순(尹淳)을 체직하였다.

거가(車鴐)가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각무 차원(各務差員)·수령(守令)을 인견하여 농사의 형편과 백성의 고통과, 밞혀 상한 길가의 전곡(田穀)을 묻고 특별히 감세(減稅)하게 하였다. 교리 유최기(兪最基)가 염찰(廉察)한 뒤에 들어와 말하기를,
 
“김포(金浦)는 잔폐(殘弊)한 고을인데 도신(道臣)이 분정(分定)한 것이 매우 많아서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도신과 수령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최기가 또 말하기를,
 
“양성(陽城)에서는 절추(折芻) 2백 석(石)을 민간에서 더 거두었으니, 마땅히 파출(罷黜)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못 가운데에 있는 물고기까지 살필 수는 없으나, 더 거둔 것은 매우 터무니없다. 일이 매우 잗다니, 도신에게 알려 그가 스스로 교체하도록 하라.”하였다. 임금이 막차(幕次)에서 나와 가교(駕轎)를 타고 금훤랑(禁喧郞)이 누구냐고 물으니, 김성응이 대답하기를,

“위창조(魏昌祖)입니다.”하였다. 또 병랑(兵郞) 가운데에서 전에 시종(侍從)을 지낸 자는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송익휘(宋翼輝)입니다.”하니, 임금이 송익휘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잡아들이는 것이 지체되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결곤(決棍)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질러 송익휘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감히 서 있고 꿇어앉지 않는가?”하고, 드디어 결곤 준10도(決棍準十度)를 명하였다. 교리(校理) 정이검(鄭履儉)이 앞으로 나아가자, 임금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감히 구호하는가?”하고, 체차(遞差)한 뒤에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옥당(玉堂) 이덕중(李德重)·김광세(金光世)·유최기 등이 잇달아 앞으로 나아가니,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송익휘는 송인명(宋寅明)의 종질(從姪)이다.

처음에 송인명이 고령(古寧)의 길 닦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받았고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의주 가운데에 극행(極行)으로 쓰지 않은 것도 그가 참여하여 들은 것이므로, 이틀이 지나 송인명이 차자(箚子)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인본】42책 639면【분류】*왕실-행행(行幸)/*왕실-국왕(國王)/*왕실-의식(儀式)/*왕실-비빈(妃嬪)/*재정(財政)/*군사-중앙군(中央軍)/*인사(人事)/*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구휼(救恤)/*사법-탄핵(彈劾)/*사법-행형(行刑)

18)영조 52권, 16년(1740 경신/청 건륭(乾隆) 5년) 12월 3일 기해 1번째기사

●전 대사성 심성희가 김포 등 여덟 고을의 전결 세금을 면세시켜 줄 것을 청하다
전 대사성 심성희(沈聖希)가 본관의 물력(物力)이 조잔(凋殘)하다 하여 상소하여 김포(金浦) 등 여덟 고을의 전결(田結)에서 내는 세금을 도로 면세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뒤에 호조에서 곤란하다고 복계한 것으로 인하여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영인본】42책 689면【분류】*재정-전세(田稅)/*재정-국용(國用)/*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19)영조 57권, 19년( 1743 계해 / 청 건륭(乾隆) 8년) 1월 9일 갑자 5번째기사

●조명건이 기근에 안일했던 윤용 등을 벌주기를 청하다
정언 조명건(趙明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북로(北路)는 기근이 거듭 든데다가 전염병까지 겹쳤습니다. 이런 때에 안찰(按察)하는 관원은 참으로 여러 방면으로 구획(區劃)해 주휼(賙恤)하고 안정시키며 보호하는 방도로 삼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함경 감사 윤용(尹容)은 작년의 진정(賑政)이 이미 지극히 조잡하고 허술하였으므로 비방을 크게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처럼 근심거리가 눈에 가득한 날에 이르러서는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별달리 시설(施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사(政事)는 총애하는 편비(偏卑)에게 내맡겨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체개(遞改)를 명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세도(世道)가 점차 떨어져 관방(官方)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전 참의(參議) 김우철(金遇喆)은 누차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오로지 궤휼과 거짓을 행하여 그 추비(麤鄙)하고 탐오(貪汚)한 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 추세(趨勢)를 타서 후한 뇌물을 썼기에 외람되게도 그런 사실이 없다는 말을 얻어 곧 쓸 만한 사람이 되었으니, 전후의 통의(通擬)는 남우(濫竽)10148) 가 아님이 없습니다.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곤수(坤帥)의 직책은 책임이 심히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의풍(李義豐)은 북관(北關)에서 당한 바가 비록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무수(武帥)가 되어 아녀자의 손에 찔려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겁이 많고 형편없이 무능하여 융원(戎垣)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므로, 해곤(海閫)에 차견(差遣)한 것이 이미 물정(物情)에 어긋났는데 통제사(統制使)에 수의(首擬)하였으니, 더욱 적절하지 아니한 일입니다. 다시는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지 않음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윤용은 청백리(淸白吏)의 아들로 그 아비의 풍도가 있어 그 직무에 성실하고 부지런하였으며 기민(飢民)을 구제하였으니, 지금 논척(論斥)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김우철은 이치(吏治)에 부지런하였고, 이의풍이 지난 번에 논척받은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있다. 또 어찌하여 이 전례를 따른단 말인가? 마땅히 공정한 마음을 가지기에 힘써 새해와 더불어 함께 새로와지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3 책 79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註 10148]남우(濫竽) : 재주가 없으면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우(竽:생황)를 좋아하여 반드시 3백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우를 불게 하니 남곽 처사(南郭處士)라는 이가 자기도 같이 불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여 함께 두었는데, 선왕이 죽은 후 아들 민왕(湣王)이 한 사람씩 불게 하자 남곽 처사가 도망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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