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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영조살록(20-2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1. 영조살록(20-29)

20)영조 57권, 19년( 1743 계해 / 청 건륭(乾隆) 8년) 4월 5일 무자 2번째기사

●강화성의 축성과 문수 산성을 관방으로 만드는 일을 논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에 앞서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시혁(金始㷜)이 벽돌을 구워 성(城)을 쌓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장신(將臣)에게 가서 살펴보라고 명한 적이 있었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두루 살펴보고 돌아와 그 형편에 대해 진달하기를,
 
“강화는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천참(天塹)입니다. 선두포(船頭浦) 북일곶[北一串]과 같은 곳은 옛날에 돈대(墩臺)가 있었는데, 중간에 허물어졌으니, 다시 설치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토성(土城)은 애초부터 높거나 가파르지 않았고,

이번에 벽돌로 쌓은 것은 비록 보기는 좋으나 능히 두껍게 쌓을 수 없고 그 넓이도 겨우 반 길[丈]이라 쉽사리 허물어질 것 같으니, 토성과 이해(利害)가 어떠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류(中流)에서 대포를 쏘아 그 성가퀴를 맞추었더니, 성의 담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留守)를 구임(久任)시켜 그 성효(成效)를 책임지워야 마땅하다.”하였다. 김성응이 또 말하기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이 성 안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싸울 곳이 됩니다. 만약 통진부(通津府)를 문수 산성으로 옮겨 한 진(鎭)을 만들고, 수목을 성 안팎에 심어 울연(蔚然)히 하나의 관방(關防)이 되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대신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본 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특별히 고(故) 판서(判書) 김석연(金錫衍)에게 시호를 줄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장차 물러나려 하자, 임금이 삼상(三相)에게 머물러 있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접때 절사(節使)의 말을 들으니, 호황(胡皇)이 그 태후(太后)와 함께 거용관(居庸關)에서 몽고 땅을 지나 심양(瀋陽)에 올 것이라고 하였다. 백년의 운수가 이미 지나갔고 건륭(乾隆)의 사람됨이 강희(康熙)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제 멀리 관외(關外)로 오니, 심히 염려스럽다.

우리 나라는 태평 세월을 보낸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이런 기회를 당하였으니, 의당 묘당(廟堂)에서 먼저 자강(自强)의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이다. 강변(江邊)의 수령과 서로(西路)의 수신(帥臣) 또한 마땅히 가려서 보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강희 때 또한 배묘(拜墓)하는 일로 심양에 행차한 적이 있었으니, 이 또한 구례(舊例)를 따른 것인 듯합니다. 어찌 반드시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자강의 방도는 진실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령과 수신을 무단히 체개(遞改)하는 것은 인심이 반드시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천천히 도모함이 옳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양 행차는 비록 고례(古例)가 있기는 하지만, 피국(彼國)의 시상(時象)이 예전에 비할 바 아니어서 끝내 염려할 만한 것이 있다. 무릇 뜻하지 않은 일에 관계되는 것을 묘당에서 미리 조치함이 마땅하다.”하였다.
 
【영인본】 43 책 97 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21)영조 60권, 20년(1744 갑자/청 건륭(乾隆) 9년) 11월 21일 갑오 5번째기사

●바닷가에서 실농한 김포·통진이 북한산에 이전하는 쌀을 봄까지 연기시켜 주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바닷가에 있는 고을은 실농(失農)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김포(金浦)와 통진(通津)의 두 고을에서 북한산에 이전(移轉)하는 쌀은 마땅히 봄철까지 기다렸다가 갖추어서 바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43책 164면【분류】*재정(財政)

22)영조 61권, 21년( 1745 을축 / 청 건륭(乾隆) 10년) 1월 9일 신사 3번째기사

●어용을 봉안하는 전각과 그 호칭을 의결하고, 강화도 보장의 편의를 묻다
임금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상경(趙尙絅)을 인견하여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하는 일을 물었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나의 어용을 구장녕전(舊長寧殿)에 봉안하고자 하는데, 이제 듣건대, ‘선조(先朝)의 어용을 봉안한 신전(新殿)을 만약 수리하는 일이 있게 되면 임시로 구전(舊殿)에 봉안해야 하는데 이제 어용을 봉안한 후에는 마땅히 임시로 행궁(行宮)에 봉안해야 한다.’고 하니,

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제 내 어용은 구전 동쪽 전각에도 봉안하기에 족하니, 이 전각에 거행하고 또 이 전각에 만약 임시로 봉안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협실(夾室)을 씀이 마땅한데, 전각의 호칭을 어찌 구장녕전(舊長寧殿)이라 일컫겠는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여 호칭을 정하게 하라.”하였다. 이튿날 정원에서 아뢰기를,
 
“장녕전의 편액(扁額)은 성상께서 써서 내리셨는데, 소덕문(昭德門)의 호칭을 고칠 때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하여금 삼망(三望)을 갖추어 들인 예가 있습니다. 전각의 호칭은 사체가 더욱 중하니, 마땅히 제학으로 하여금 의망(擬望)10657) 해 들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전각의 호칭을 만녕전(萬寧殿)으로 의망해 들여 낙점(落點)하였다. 이어 장녕전(長寧殿) 절제 헌관(節祭獻官)은 강화 유수(江華留守)와 통진 부사(通津府使)로서 실차(實差)10658) ·예차(豫差)10659) 로 삼고, 만녕전의 수직관(守直官)은 장녕전의 예에 따라 참봉(參奉)으로서 별검(別檢)을 삼고 이어서 대축(大祝)의 실차·예차로 삼도록 명하였는데, 이병상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강도(江都) 보장(保障)의 편의(便宜)를 물으니, 이병상이 아뢰기를,
 
“숙묘(肅廟)께서 후릉(厚陵)10660) 에 행행(行幸)하실 때에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형세를 바라보고, 형세를 그려 들이라 명하고 정교하시기를, ‘통진(甬津)을 산성으로 읍(邑)을 옮긴 연후에야 보장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성모(聖謨)가 아주 예사롭지 않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읍을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아직껏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하겠다.”하였다. 이병상이 물러남에 임하여 나이가 70을 넘은 것으로써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신(舊臣)은 다만 경 등 몇 사람이 남아 있다.”하고, 드디어 허락하지 않았다.
 
【영인본】 43 책 167 면【분류】 *왕실(王室) / *군사(軍事)
 
[註 10657]의망(擬望) : 삼망(三望)을 추천하던 일. 삼망은 본래 관리의 임명 또는 시호 등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임금에게서 수점(受點)하기 위하여 합당하다고 여기는 세 사람 또는 세 개의 시호 등을 갖추어 올리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만녕전(萬寧殿)의 이름을 정하기에 앞서 삼망을 올려 임금의 낙점(落點)을 기다리는 것임. ☞
[註 10658]실차(實差) :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두는 차비관(差備官)의 정임자(正任者). ☞
[註 10659]예차(豫差) :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정한 차비관. ☞
[註 10660]후릉(厚陵) :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 ☞ 

 
23)영조 61권, 21년(1745 을축/청 건륭(乾隆) 10년) 2월 20일 임술 2번째기사

●어진을 강화부 만녕전에 봉안하게 하고 절목을 마련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승지 서명형(徐命珩)을 보내어 어진(御眞)을 강화부(江華府) 만녕전(萬寧殿)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는데 예조(禮曹)의 절목(節目)에,
 
“1. 연(輦) 앞에 소가(小駕)를 두어 가(駕)를 인도해 강을 건넌다. 그 후에는 본도의 감사와 지방관, 본부의 유수(留守) 및 경력(經歷)이 각자 그 경내(境內)에서 교체한다.
 
1. 가사복시정(假司僕寺正)이 연(輦)을 명정전(明政殿) 앞 계단으로 인도해 가면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먼저 명정전에 가 길 왼쪽에 차례로 늘어서 있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흑단령을 갖추고 대궐 문 밖에서 일제히 모여 동서(東西)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서 있는다. 2각(刻) 전에 왕세자(王世子)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홍화문(弘化門) 밖으로 나아가 막차(幕次)로 들어간다.

출발할 때가 되어 내시(內侍)가 어진궤(御眞櫃)를 받들고 나오면 집사관(執事官) 2명이 받들어 받아 연에 봉안하고 이어서 출발하는데, 대신 이하는 국궁(鞠躬)하여 공손히 맞이하고 차례대로 시위(侍衛)한다. 홍화문(弘化門) 밖에 이르러 왕세자가 막차에서 나와 공손히 맞이한 후 여(輿)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고, 종친과 문무 백관 역시 국궁하며 공손히 맞이한다.
 
1. 중사(中使)·승지(承旨)·사관(史官), 만녕전 관원 및 대신(大臣)·예관(禮官)은 연 뒤에서 배종(陪從)한다.
 
1. 도총부(都摠府)의 전후 사대(射隊) 시위 등의 일은 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한다.
 
1. 종묘(宗廟) 앞 길에서는 어진(御眞)을 모신 연이 잠시 멈춘다. 낮추 메는 절차 및 배설(排設)하는 여러 일은 각 해사(該司) 및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맡아 거행하게 한다.
 
1. 연 앞에 사금(司禁) 20명, 별감(別監) 20명이 흑단령을 갖추 입고 시위하여 강두(江頭)에 이르러 그치며, 별감 4명이 자건(紫巾)과 흑의(黑衣)를 갖추고 그대로 시위하여 만녕전에 이른다.
 
1. 받들어 모시고 갈 때의 숙소(宿所) 및 주정소(晝停所)는 객사(客舍) 대청(大廳)에 배설(排設)하고, 배 위의 악차(幄次)에 배설하는 여러 일은 공조(工曹)와 각 해사 및 사약(司鑰)이 거행하게 하며, 또한 본도(本道)와 본부(本府)로 하여금 정성들여 준비해 기다리게 한다.
 
1. 연 앞에 피우는 부용향(芙蓉香)은 내의원(內醫院)으로 하여금 진배(進拜)하게 한다.
 
1. 경성(京城)에서부터 경계에 도착해 주정소 및 숙소에 봉안한 후에는 본도의 감사 및 본부의 유수, 각 업무의 차사원(差使員)이 흑단령으로 대문 밖에서 숙배(肅拜)한다.
 
1. 시각을 아뢰는 등의 일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한다.
 
1. 군사를 교체하는 곳에서는 단지 땅의 지의(地衣)만 배설하고, 군사 교체는 혹 20리, 혹은 15리 정도로 편리함에 따라 장소를 정한다.
 
1. 어진을 봉안한 연이 강화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만녕전 대청에 봉안한다. 22일 오시(午時)에 만녕전 관원 2명이 흑단령을 착용하고 올라가 연 앞에서 꿇어앉아 어진궤를 가져다 좌석에 봉안하면 대신 이하는 사배(四拜)한 후 물러 나온다.
 
1. 어진궤를 받들어 전할 차비관(差備官) 2명은 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면 흑단령을 입고 어진궤를 가져다 연의 후면에 봉안한 후 물러 나온다. 가사복시 정(假司僕寺正)을 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면 흑단령을 입고 시위하여, 강두(江頭)에 이른다. 강을 건넌 후에는 역시 본도의 수령 가운데서 차출하여 시위하여 만녕전까지 이르게 한다.
 
1. 어진을 봉안한 후에는 본전(本殿) 관원 2명이 번갈아 직숙(直宿)하고 번(番)을 나누어 수직(守直)한다.
 
1. 전내(殿內)의 의물(儀物)은 청홍개(靑紅盖) 각 한 개, 봉작선(鳳雀扇) 각 1개씩을 좌우로 나누어 진설(陳設)한다. 입직(入直) 별감(別監)은 자건(紫巾) 홍의(紅衣)를 착용하고 수위(守衞)한다.
 
1. 본부의 유수는 봄·가을로 전의 안팎을 봉심(奉審)하고, 잡물(雜物)에 탈이 있으면 훼손되는 대로 제때에 고친다. 본전의 관원은 평상시에 홍단령을 입고 입직하며, 3일마다 봉심하는데, 비나 눈이 올 때에는 각별히 봉심한다. 만약 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유수에게 보고해 계문(啓聞)하여 시행하게 한다.
 
1. 본전 관원의 근만(勤慢)은 본부의 유수가 맡아 전최(殿最)한다.
 
1. 새로 제수된 본부의 유수 이하는 경계에 이르는 즉시 흑단령을 입고 전의 중문(中門) 밖에서 숙배한다.
 
1. 전의 온돌(溫突)에 땔 화목(火木) 및 금화(禁火)의 여러 도구는 본부에서 준비해 두어야 한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병조에서 아뢰기를,
 
“어진(御眞)을 받들고 갈 때의 진로(津路)를 양화도(楊花渡)로 결정하였는데, 비록 민력(民力)을 많이 들이더라도 선창(船艙)을 완전히 쌓을 형세가 없습니다.

노량진(露梁津)은 건너기가 편리하고 쉬움이 세 진(津) 가운데서 제일이고, 또 이는 장릉(章陵)의 연로(輦路)이니, 이 길로 받들어 가는 것이 사체에 당연합니다. 비록 20리를 돌아가 멀기는 하나 만약 일찍 출발하면 김포(金浦) 숙소에 밤 늦어 도착할 염려는 없으니, 노량진으로 길을 고쳐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어(傳語)는 마땅히 절목(節目)에 의해 각 고을의 마대(馬隊)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경기(京畿)의 복마(卜馬)가 부실하니, 경성의 예에 의해 보발(步撥)로 전어하게 해야 합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43책 173면【분류】*왕실(王室)/*행정(行政)

24)영조 61권, 21년( 1745 을축 / 청 건륭(乾隆) 10년) 3월 11일 계미 4번째기사

●비국 당상이 모여 강화도의 길목에 있는 문수 산성과 주위의 방비를 논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강도(江都)에 가는 길에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지형을 보았는데 밖은 좁고 안은 평평하며, 동쪽과 서쪽은 강이요, 북쪽은 철벽(鐵壁) 같은 높은 봉우리이며 남쪽은 치첩(雉堞)이 빙 둘렀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는 통진(通津)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산성으로 읍(邑)을 옮기고 부평(富平)과 양천(陽川)은 합쳐서 한 고을로 삼는 것이 가할 줄로 여깁니다.

또 부평은 서쪽으로 해변(海邊)에 가깝고 돌곶[石串]은 진소(津所)로 삼아 첨사(僉使)를 둠이 마땅하니, 덕포 첨사(德浦僉使)를 돌곶으로 옮긴다면 부평은 비록 이읍(移邑)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이는 모두 영상(領相)·우상(右相)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덕진(德津)은 인천(仁川) 땅에 있는데 당초에 설치한 뜻이 있으니 무기(武器)와 환곡(還穀)을 조치하여 수어(守禦)와 군량에 충분히 대비함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하였다.
 
형조 판서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효묘조(孝廟朝) 때부터 이미 보장(保障)의 중요한 땅이 되었습니다. 문수 산성은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의 계사(啓辭)에, ‘만약 의자(椅子)에 앉아서 바둑판을 보는 듯하여 그 곳을 적이 점거하면 강도 사람들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산성을 쌓았던 것인데, 신에게는 별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문수 산성으로 이읍(移邑)하여 나무를 기른 후에 적이 점거해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든다면 장차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수목이 자라고 백성들이 조밀하게 살면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기 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두고 때에 임하여 굳게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도 역시 적을 길러주는 밑천이 될까 염려됩니다. 통진은 그 형세가 반드시 다투게 되었는데, 통진을 만약 잃으면 이는 강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하였으며, 이종성이 말하기를,
 
“덕포(德浦)를 옮기는 일은, 갑곶(甲串)이 얼어붙어 뱃길이 막히면 광성(廣成)이 손돌목[孫石項] 아래에 있어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날 때 뱃길이 광성을 거치게 되니 당초 덕포(德浦)를 설치한 뜻이 있습니다. 덕진을 조치한 데에 대해서는 신의 의견 역시 이와 같으며, 양천(陽川)·부평(富平) 고을을 합치는 것은 신이 하고자 하던 바입니다.”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강화(江華)를 견고하게 하고자 하면 문수 산성을 버려서는 안 되는데, 한 별장(別將)으로서 지키게 한다면 매우 허술하니 군정(軍丁)을 만약 변통할 수만 있다면 통진을 독진(獨鎭)으로 하여 고을을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산성(山城) 안에는 끝내 배치하기 어렵고 성 밖 장항(獐項)이 넓어 고을을 수용할 수 있고, 만약 위급한 일을 당하면 산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호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에서 성을 쌓을 때 도형(圖刑)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 모두가 ‘문수 산성은 반드시 다툴 땅이 되는데 외따로 떨어진 성에 후원(後援)이 없으면 곤란하다.’라고 하였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읍기(邑基)는 장항(獐項)이 좋지 않아서 1년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중군(中軍)이 있으니 만약 군졸을 조련하여 성을 지킬 방도를 하게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 만약 양천과 부평을 합친다면 군정(軍丁)을 변통할 길이 있으니, 통진을 독진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강화에는 대선(大船)이 4척에 불과한데 삼남(三南)에 있는 배가 1백 척에 가까우니, 만약 조운(漕運)한 후에 올려 보내고 바람이 높을 때에는 강화에 머물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공조 판서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문수 산성은 수목을 기르기가 어렵고 수유현(水踰峴)은 바로 천험(天險)의 요새이니 만약 5리의 성을 쌓으면 관부(官府)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양천을 공암(孔巖) 진두(津頭)에 둔 것은 오로지 강도 땅을 위해서인데, 불행하게도 병자년10750) 같은 변이 있게 되면 나루에 배가 없으니 어떻게 급히 건너겠습니까? 나룻배 10여 척을 양화도(楊花渡)에서 더 준비해 내야 합니다.”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수성(守城)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방도가 있으니 장수(將帥)·군사(軍士)·지형(地形)·기계(器械)·양식(粮食)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수성을 하기가 어려운데 주위 2백 리나 되는 성 안을 채우지 않고서 다만 빈 성만 쌓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수성하는 방도는 마땅히 윤탁(尹鐸)이 그 호수(戶數)를 줄인 도리10751) 를 다해야 하는데,

근래에는 유수(留守)를 문득 명관(名官)이 승자(陞資)하는 계제(階梯)를 삼거나 아니면 나이 든 재상(宰相)이 병을 요양하는 장소를 삼아 이렇게 자주 교체되니, 어떻게 성을 지키겠습니까? 만약 수성을 하고자 한다면 성을 지키고 성을 쌓을 만한 자를 가려서 오래 재임시켜 혹 10여 년, 혹은 5, 6년을 한정해 효과를 이루기를 책임지워야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관방(關防)에 관계되니, 통진 부사(通津府使)를 불러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후일 등대(登對)할 때에 강정(講定)하는 것이 마땅하겠다.”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저축이 고갈되어 공가(貢價)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듣건대 관서(關西)의 도신(道臣) 김시형(金始炯)이 비용을 절약하여 별도로 돈 2만 냥과 무명 3백 동(同)을 준비해 본조의 불시의 수용에 대비하고 있다 합니다. 또 지난해 북관(北關)에 진구(賑救)를 실시할 때 기영(箕營)에서 호조에 돈 2만 냥을 보내어 우선 북관에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었는데,

이제 듣건대 그 때의 도신(道臣)이 돈을 주조(鑄造)하여 요리해 수만 냥을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두 곳의 별비전(別備錢) 4만 냥과 무명 3백 동을 우선 가져다가 목전의 급함을 구제함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어영청의 별초군(別抄軍)은 거둥 때와 습진(習陣) 때 이미 편곤(鞭棍)을 쓰는데 상시사(賞試射) 때에 이르러서는 편곤을 시험하지 않으니, 지니고서도 시험하지 않음은 매우 뜻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금군(禁軍)의 예(例)에 의해 시험해야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본영(本營)의 군기(軍器)가 많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청컨대 군작미(軍作米) 2천 곡(斛)을 얻어 바로 수리해 음우(陰雨)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가을 보리가 이미 흉년이 들고 농사도 풍년이 들기를 보장하기 어려우니, 저축하는 방책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관(西關)의 돈과 무명을 이미 이급(移給)하기를 허락하였고, 군작미를 또 획급해 주었는데 이는 비단 외방이 지탱하지 못할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단서가 있게 될 것이니, 마땅히 절약하는 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서 이종성(李宗城)에게 명하여 관북 심리사(關北審理使) 윤용(尹容)이 올린 옥안(獄案)에 대하여 경중을 분간해 차등을 두어 작처하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의옥(疑獄)을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이제 심리사가 간 후에야 비로소 조진(條陳)하였으니 전후의 도신(道臣)을 아울러 중추(重推)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3 책 177 면【분류】 *군사(軍事)
[註 10750]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0751]윤탁(尹鐸)이 그 호수(戶數)를 줄인 도리 : 윤탁(尹鐸)은 춘추 전국 시대 조간자(趙簡子)의 신하로, 진양(晋陽)을 다스리면서 세금을 줄이고 어진 정사를 베풀었음. 후에 난리가 나 조간자의 아들 조양자(趙襄子)가 진양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 백성들이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음. ☞ 

25)영조 61권, 21년( 1745 을축 / 청 건륭(乾隆) 10년) 4월 25일 정묘 1번째기사

●어영 대장 박문수가 강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어영 대장(御營大將) 박문수(朴文秀)를 보내어 강도(江都)를 간심(看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하여 형편을 두루 진달하기를,
 
“전에 비록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치욕을 당했지만 만약 한때의 적을 피하려면 남한 산성이 더 좋으며, 만약 지구책(持久策)을 쓰려면 강도가 조금 낫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경이 이미 살펴 보았으니 방략(方略)을 지획(指畫)함이 옳다.”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천시(天時)는 지리(地理)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백성을 보호하는 도리를 생각하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너진 성첩(城堞)이 얼마나 되는가?”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50여 리의 성 가운데 단지 4리 남짓만 무너졌습니다.”하고,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김시혁(金始㷜)이 70세가 된 늙은 신하로서 이 중대한 역사를 완료했으니, 비록 조금 무너졌다 하더라도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은 어떠한가?”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바로 금성 탕지(金城湯池)입니다. 비록 북한 산성과 남한 산성을 지킨다 하더라도 도성(都城)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어찌 한 성을 지켜 보장(保障)의 장소를 두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문수 산성(文殊山城)을 만약 수호한다면 강도의 외원(外援)이 되겠는가?”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통진(通津)을 독진(獨鎭)으로 삼아 문수 산성을 수호하게 하여 혹 위급한 일이 있게 되더라도 그대로 성 안으로 들어간다면 강도를 바라볼 때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실로 안팎이 서로 호응하는 형세가 있겠습니다.”하였다.
 
【영인본】 43 책 180 면【분류】 *군사(軍事)
 
26)영조 63권, 22년( 1746 병인 / 청 건륭(乾隆) 11년) 2월 15일 신해 1번째기사

●통진의 읍치를 문수 산성으로 옮기고, 육상궁에 억매된 장연의 민전을 내어주도록 청하다
장령 박첨(朴)이 상소하여 청하기를,“통진(通津)의 읍치(邑治)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으로 옮겨 강도(江都)의 방어가 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장연(長淵)의 민전(民田) 가운데 육상궁(毓祥宮)에 억매(抑買)된 것은 일체 아울러 도로 내어주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첫 번째 일은 이미 강구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의 일은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 폐단을 엄히 징계하도록 하겠다.”하였다.
 
【영인본】 43 책 204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농업(農業) / *군사-관방(關防) / *사법(司法)
 

27)영조 66권, 23년( 1747 정묘 / 청 건륭(乾隆) 12년) 9월 20일 정미 3번째기사

●좌의정 조현명이 흉작 해일의 피해를 입은 지역의 진휼에 관한 차자를 올리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 국내의 농사 형편은 대개 흉년이 들었고, 연해(沿海)의 고을은 해일이 몹시 참혹하게 일어서 바닷물이 넘쳐서 적지(赤地)가 되었습니다.

만약 홍수·가뭄이 아니었으면 오히려 남은 이삭이라도 먹을 수 있었겠지만, 백성들은 한 톨의 낟알도 거두어들일 것이 없는데 그들로 하여금 속미(粟米)·마사(麻絲)를 내게 한다면 장차 어디에서 마련하겠습니까? 아! 고혈(膏血)은 오히려 빼앗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고혈도 또한 다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금년 비총(比摠)11367) 이외에 따로 해일에 의한 재앙의 명목으로 지급하되, 그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은 고을의 정공(正供) 및 신미포(身米布)를 백성에게 내게 하는 것을 특별히 견감시켜 주어 약간이라도 안보(安保)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상평법(常平法)은 곡가(穀價)를 공평하게 하여 백성이 먹는 것을 여유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경진청(京賑廳)의 곡물을 보건대, 거의 7, 8만 석에 이르는데, 들어오는 것은 있어도 나가는 것이 없어서 대체로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3만 석을 한도로 획출(劃出)하여 2만 석은 충청도에 지급하고, 1만 석은 경기도에 지급해서 그들로 하여금 추위에 얼지 않게 해야 하며, 배를 마련해 실어 날라 연읍(沿邑)에 나누어 보내어 봄에 진휼(賑恤)할 때까지 한정해서 값을 감하여 발매하게 해서 백성의 위급함을 구제하고, 그 본전(本錢)은 가을 쌀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본청에 다시 쌓아 두어 훗날 불시에 쓸 것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유사(有司)가 진휼하는 비용에 대해 그 힘을 논하나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하는 혜택이 두루 미치지 못하고, 묘당(廟堂)에서 진정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을 논하나 불에 타는 듯한 위급을 구제하는 일은 항상 느슨하니, 선왕께서 백성을 다친 사람을 보듯이 하는 인정(仁政)에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항상 대명(大明)의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탁지(度支)로 하여금 그것을 알지 말게 하라는 가르침에 유의하소서.
 
진휼은 백급(白給)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절동(浙東)을 진휼하고, 부필(富弼)이 청주(靑州)를 진휼하였을 때 모두 죽을 마련했었습니다. 두 현인이 어찌 백급하는 것이 죽보다 나음을 알지 못했겠습니까마는, 백급은 잇대어 주기가 어려우므로 부득이 죽으로 했던 것입니다.

근래에 각도에서 진휼을 베풀 때 오로지 백급을 위주로 하고 있으므로, 간위(奸僞)가 날로 늘어나고 비용은 절제가 없습니다. 만약 거듭 흉년을 만나게 되면 국력이 장차 고갈되고 말 것이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급이 부족하면 설식(設食)·설찬(設饌)하고, 심한 경우 간혹 소를 잡아 먹이는 것은 명예를 구하고 상(賞)을 기대하는 습관이니, 마땅히 선조(先朝) 병진년(丙辰年)11368) 의 예에 의거해서 엄중하게 금지시키고, 2월 30일 이전에는 죽을 마련하고 3월 초하루 이후부터는 급량(給糧)하는 것을 기록하여 법령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마땅히 하교하겠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충청 감사 이창의(李昌誼)가 해일로 계문(啓聞)하였는데, 이때 기내(畿內)의 통진(通津)·남양(南陽) 등 연해의 여러 곳에 해일로 입은 피해가 더욱 심했으므로, 조현명이 차자에서 언급한 것이었다.
 
【영인본】 43 책 262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농업-권농(勸農) / *구휼(救恤) / *과학-천기(天氣)
[註 11367]비총(比摠) : 전세(田稅) 수입의 총액. ☞
[註 11368]병진년(丙辰年) : 1676 숙종 2년. ☞ 

28)영조 67권, 24년( 1748 무진 / 청 건륭(乾隆) 13년) 4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통진의 전 부사 이은춘에게 말을 내려주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수형(宋秀衡)을 체포하여 하옥하고, 통진(通津)의 전 부사 이은춘(李殷春)에게 말을 내려 주었는데, 암행 어사 권숭(權崇)의 회주(回奏)로 인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영인본】 43 책 289 면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29)영조 68권, 24년( 1748 무진 / 청 건륭(乾隆) 13년) 7월 20일 임인 2번째기사

●경기 암행 어사 권숭이 돌아와 통진·교하·양성의 수령들을 논죄할 것을 아뢰다
경기 암행 어사 권숭(權崇)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통진(通津)·교하(交河)·양성(陽城) 세 고을에서는 군보(軍保)를 어린아이로 충정(充定)시켰는가 하면 도망한 사람에 대한 기한이 넘었는데도 보충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도 노제(老除)11533)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이 법 밖에 관계되는 것이니, 전후 수령들을 아울러 논죄해야 합니다.”하였다.

유사(有司)가 《속대전(續大典)》의 감등률(減等律)을 모방하여 이미 체직된 사람은 의금부에서 결장(決杖)하게 하고 직임에 있는 사람은 영문(營門)에서 결장하게 하였는데, 일에 좌죄(坐罪)되어 방태(榜笞)당한 사람이 13인이었다.
 
【영인본】 43 책 300 면【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사법(司法)
[註 11533]노제(老除) : 나이가 많은 군인을 역(役)에서 면제시킴. ☞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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