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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영조실록(30-3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1. 영조실록(30-39)

30)영조 70권, 25년(1749 기사/청 건륭(乾隆) 14년) 12월 13일 정해 5번째기사

●이이장이 김포와 남양에 암행하고 돌아와서 민간의 역질로 사망한 상황을 고하다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이장(李彛章)이 김포(金浦)와 남양(南陽)에 암행(暗行)하고 돌아와서 민간(民間)에서 역질(疫疾)로 사망한 상황을 말하니, 임금이 이를 민망히 여기고는 제도(諸道)에 하교하여 조세와 포적(逋糴)을 면제하게 하고 전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지태(尹志泰)와 전 김포 군수(金浦郡守) 이광진(李光進)은 모두 잡아다가 처리하게 하였다.
 
【영인본】43책 357면【분류】*행정(行政)/*사법(司法)/*재정(財政)

31)영조 77권, 28년(1752 임신/청 건륭(乾隆) 17년) 8월 3일 신묘 1번째기사

●김포군 명화적의 난동에 빨리 대처하지 못한 군수 윤득중 등을 잡아들이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김포군의 명화적(明火賊) 수백 명이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고서 포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곳곳에서 도둑질을 하여 다친 사람이 많은데, 본군(本郡)에서 감영(監營)에 보고한 것이 지극히 더디었으니, 군수 윤득중(尹得中)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오고, 감사(監司) 및 토포사(討捕使)는 중추(重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찰(譏察)해 잡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인본】43책 459면【분류】*사법(司法)/*인사(人事)
 
32)영조 81권, 30년(1754 갑술/청 건륭(乾隆) 19년) 2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김포 군수 심영·영평 현령 이시건 등을 체차하다
진청(賑廳)의 쌀 2만 곡(斛)을 팔아서 경기 백성의 진자(賑資)에 보태는 것을 허락하고, 파주 목사 신종하(申宗夏)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리고, 고양 군수 이석희(李錫禧)·교하 군수 유언탁(兪彦鐸)을 모두 승서(陞敍)하며, 김포 군수 심영(沈坽)·영평 현령(永平縣令) 이시건(李蓍建)·적성 현감(積城縣監) 이현경(李顯慶)·포천 현감 조명욱(趙明勖)·양천 현감(陽川縣監) 정찬교(鄭纘僑)·개성 경력(開城經歷) 이인호(李仁好)를 모두 체개(遞改)하라고 명하였다. 심휼사(審恤使) 한광조(韓光肇)가 아뢴 바에 따른 것이다.
 
【영인본】43책 513면【분류】*구휼(救恤)/*인사(人事)/*행정(行政)

33)영조 83권, 31년( 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1월 14일 무자 4번째기사

●지평 정석천의 상서에 의해 통진 부사·포천 현감 등을 추문토록 하다
지평 정석천(丁錫天)이 상서하여 논하기를, “통진 부사(通津府使) 김양정(金養正)은 간활한 향리(鄕吏)와 부동(符同)하였으며,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도길(李道吉)은 오로지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것만 일삼았으니, 청컨대 모두 삭직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왕세자가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추문하게 하였다.
 
【영인본】 43 책 555 면【분류】 *사법(司法)
 
34)영조 83권, 31년( 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14일 정해 3번째기사

●김주천의 공초
김주천(金柱天)이 공초하기를, “신이 윤광철(尹光哲)과는 이웃에서 5, 6년을 살았기에 자연히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하므로, 김주천을 형추(刑推)하니, 공초하기를,“이수경(李修敬)·이수범(李修範)·윤득정(尹得貞)·윤득명(尹得明)·윤득삼(尹得三)·윤득구(尹得九)·이재하(李載夏)·민효달(閔孝達)·윤상백(尹尙白)은 모두 신 등의 도당(徒黨)이며, 윤광철과 감싸며 함께 모의하여 일변(一邊)의 사람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4, 5년 전에 신이 윤광철의 집에 갔더니 이수경이 윤광철과 서로 말을 하다가 신을 보고서는 중지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군(君)의 무리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였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너같이 용렬한 군사가 하필이면 이를 알려고 하는가?

방금 피차가 칼을 어루만지며 서로 노려보고 있으니 일변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제거하는 방법은 불궤(不軌)하는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고 하였으며, 윤상백·민효달 또한 일찍이 윤광철의 집에서 만나 보았는데, 윤광철이 입으로 신을 가리키며 윤득정의 형제에게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하는 바를 이 사람도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 윤득삼·윤득구 형제를 보자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윤광철의 말을 들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바로 일변을 제거하려고 하는 계획이다.’ 하니, 윤득삼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윤광철은 나주에서 이미 모두 체결하였으며, 경중(京中)은 윤상백·윤득정·이수경 등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여 사람을 모은다고 하였습니다.

윤광철이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방(榜)을 내다 걸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또 명화적(明火賊)과 체결하여 군기(軍器)를 훔져내려고 하며 거사(擧事)하는 시기는 단지 해를 쌓아가면서 경영(經營)하려고 하였지만 당초에 날짜를 약속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술을 잘 마셨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술에 취하여 말하는 즈음에 그것을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늘 외면적으로 대우하였고 이면(裏面)의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하므로, 다시 김주천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윤광철이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누설시킬 것이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누설시킬 자이겠습니까? 그 일은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였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나는 호남(湖南)을 담당하여 초적(草賊)과 체결할 터이니, 너는 서울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주장하는 것이 적합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 또한 전재(錢財)를 내어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하였으며, 김주천이 또 공초하기를,
 
“윤광철은 말하기를, ‘제 집 값은 응당 6백 냥(兩)이 되고, 윤상백의 전답(田畓)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돈으로 환산한 숫자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효달(閔孝達)은 말하기를, ‘내가 윤광철을 보았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너 또한 어찌하여 논을 팔아 일을 함께하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통진(通津)의 논값이 매우 헐한데 어떻게 속히 팔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하였습니다.”하였다. 김주천이 또 공초하기를,
 
“윤광철이 정법(正法)되고 윤희철이 물고(物故)된 뒤에 신이 민효달을 가서 보았을 적에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 것은 정말 민효달의 말과 같았습니다.”하였다.
 
【영인본】 43 책 565 면【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

 35)영조 87권, 32년(1756 병자/청 건륭(乾隆) 21년) 2월 16일 갑인 5번째기사

●경기 암행 어사 정상순·비국 당상 이성중·김치인을 소견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기 암행 어사 정상순(鄭尙淳)과 비국당상 이성중(李成中)·김치인(金致仁)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방납(防納)과 양호(養戶)의 폐단을 물으니, 정상순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고을마다 모두 있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제읍(諸邑)이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금천(衿川)에 이르러 정상순이 말하기를,
 
“현감이 사재(私財)로써 번번이 민역(民役)에 대비하니 백성들은 국역(國役)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이것은 계속하기 어려운 방도이다.”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이것은 명예를 노리는 데 불과하며 선치(善治)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이성중이 말하기를,
“일은 비록 그러하나 그래도 침학(侵虐)하는 관리보다는 낫습니다. 이는 위에 있는 자들의 간여(干與)할 바가 아닙니다.”하였다.

임금이 방납(防納)에 폐해가 있다 하여 통진(通津)·진위(振威)·금천(衿川)·부평(富平)·양천(陽川)·김포(金浦) 등 여섯 고을의 수령을 아울러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진위는 적미(糴米)에 빈껍질이 많다 하여 먼저 파직하고, 도신(道臣)은 능히 양호(養戶)를 신칙하지 못하였다 하여 중추(重推)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경외(京外)에서 상납할 때 조종하는 쓸데없는 비용을 일체 금하라고 엄히 신칙토록 하였다.

또 8도·3도(三都)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진정(賑政)을 거듭 신칙하였다. 어사·비국 당상에게 먼저 물러 나가라 명하고 이어서 전교(傳敎)를 내려 김상도를 대정현(大靜縣)에다 면직시켜 서인(庶人)으로 삼되 즉시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그리고 검열 김화택(金和澤)은 김상도의 숙부로서 그를 진장(陳章)토록 유도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당습을 했다 하여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명하였다.

또 승지 홍종해(洪宗海)를 전교를 쓰라고 명할 때에 김상도를 영호(營護)했다 하여 체직시켰다. 대개 좌상이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므로 이로 인하여 김상도가 동궁에게 올린 글을 들이라고 명하여 보았는데, 그 글 가운데 무한한 의사(意思)를 포함하고 옛날의 당습을 이루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같은 명이 있었던 것이다.
 
【영인본】43책 611면【분류】*왕실(王室)/*재정-공물(貢物)/*사법(司法)/*구휼(救恤)/*인사(人事)/*정론-간쟁(諫諍)/*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36)영조 88권, 32년( 1756 병자 / 청 건륭(乾隆) 21년) 윤9월 4일 기해 1번째기사

●사간원에서 이정철·민우수·이성중 등을 체직하라는 상달
간원【정언 윤시동(尹蓍東)이다.】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성후(聖候)가 편찮으셨을 적에 신민(臣民)들이 애를 태우며 근심히였으니, 무릇 생명이 있는 무리들은 꼭 같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원·진사의 방(榜)이 나붙은 뒤에 약원에서 함께 직숙할 때 낭자하게 풍악을 잡히는 일이 많았으니, 의분(義分)이 땅을 쓴 듯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청컨대 각부(各部)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내어 무겁게 감죄(勘罪)하게 하소서.”하고, 또 상달하기를,
 
“대각(臺閣)의 선발이야말로 얼마나 지중(至重)한 것이며, 통청(通淸)의 규례(規例)야말로 얼마나 지엄(至嚴)한 것입니까? 그런데 지난날 정목(政目)에서 전 현감 이정철(李廷喆)은 난데없이 지평(持平)의 망(望)에 주의(注擬)되었습니다.

산함(散銜)이 새로 통의(通擬)된 것은 진실로 이미 너무 외람되었고, 해유(解由)13843) 에 구애되지 아니함도 또한 상격(常格)을 잃었으니, 물정(物情)이 놀라고 의혹스럽게 여겨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정철은 대망(臺望)에서 개정(改正)토록 하소서.”하고, 또 상달하기를,
 
“조정에서 유현(儒賢)을 예(禮)로 대우함은 체례(體例)가 본디 남다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찬선 민우수(閔遇洙)는 대조(大朝)께서 별유(別諭)를 내리신 데 대해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한다고 현도 봉소(縣道封疏)13844)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금령(禁令)이 있다하여 마음대로 스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시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부르고 계시는데, 승선(承宣)은 그 사장(辭章)을 물리치기를 보통 신료와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이미 대조께서 예로 대우하는 뜻을 어겼으며 출납을 오직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전적으로 상실한 것입니다. 사체상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하고, 또 상달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소중히 여기는 바는 윤상(倫常)일 뿐이니, 한번 혹시라도 거꾸로 되면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 흉변(凶變) 이후로 의(義)에 어긋난 부류들이 많이 있어 하늘이 내린 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습니다.

외조(外祖)가 역(逆)이 되자 홍정보(洪靖輔)는 본종(本宗)으로 도로 돌아갔으니, 부자의 윤리가 끊어졌고 처부(妻父)가 역을 범하자 원경렴(元景濂)은 죽은 아내와 이혼하였으니, 부부의 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성중(李成中)의 경우는 그 누이가 역적의 처자로서 연좌를 당하자 그녀가 자살한 날 국청의 좌기(坐起)에 나아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등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렬(同列)에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이서(吏胥)들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하였으니, 이것은 또 형제의 의(義)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교화를 도타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홍정보는 먼 곳에 정배하고, 원경렴은 사판(仕版)에서 삭거하며, 이성중은 관작을 삭탈하소서.”하고, 또 상달하기를,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탐풍(貪風)은 날로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조(大朝)께서 전후로 칙려(飭勵)하신 것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유배·금고(禁錮)의 율은 보잘것없는 음관(蔭官)이나 한미한 무반(武班)에게만 베풀어지고 숭반(崇班)·준질(峻秩)에게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죄를 입는 자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복종하는 마음이 없고, 탐묵(貪墨)하는 자는 감히 제멋대로 간악하고 외람된 수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민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곤궁해지고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서지 아니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은 누차 기름진 지방을 맡아 본디 추악한 비방이 많았고, 심도(沁都)13845) 를 다스릴 적에는 오로지 사복을 채우는 것 만을 일삼았습니다.

전 유수 정형복(鄭亨復)은 진자(賑資)에 보태고자 군향미(軍餉米) 3천 석을 얻기를 청해 장차 싼값으로 본부(本府)의 백성에게 팔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전을 세우고 이자를 취해 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진휼하기로 구획(區劃)이 이미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영국이 후임으로 부임한 이후 경상(京商)과 송도(松都) 사람들을 데려가서 매 석마다 7냥으로 값을 정해 팔도록 허락하고 배에 실어 보냈으니 그 수가 거의 2만여 냥을 넘었는데 문서로 본전을 세울 때는 곧 전 유수가 정한 바 매 석마다 3냥 1전(錢)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진정(賑政)이라 약간의 기민(飢民)만을 뽑아내어 약간의 미곡(米斛)만을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1만여 냥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온 섬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한 됫박의 곡물도 혜택을 입지 못하였고, 군수(軍需)의 획급(劃給)은 죄다 개인의 주머니를 윤택하게 하는 데로 돌아가 굶어죽은 사람이 즐비하였고 노하고 욕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또 뭇사람이 눈으로 본 바로서 말하건대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사간 1백 70여 석의 쌀을 창고 뜰에 내어두고 미처 운반해 가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데, 그 쌀 빛깔의 좋음을 듣자 그 서녀(庶女)의 남편인 김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가져와 마치 제 물건을 가지듯 실어가게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불법하고 꺼림이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 밖에도 군수목(軍需木)·진청미(賑廳米)를 진휼한다며 청해 얻자 시가(市價)에 준하여 팔고 줄여서 기록하여 사용(私用)한 것이 또한 1만여 냥의 수를 밑돌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먹여 살려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에게는 필경 한 톨의 쌀 한 푼의 돈의 혜택도 입지 못하였고, 한갓 수신(守臣)이 빙자하여 이익을 독차지하는 밑천이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섬 안의 생재(生財)는 다른 곳과는 달라서 재해가 든 해에 백성들이 생활하는 바는 전적으로 관의 환곡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응당 돌아갈 몫까지 빼앗고 굶어 죽어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우두커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으니,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팽아(烹阿)의 법13846) 을 베풀어야 마땅한 것인데, 죄를 가하지 않고 이름이 매복(枚卜)13847) 에 올랐으니 이 어찌 탐욕스런 자를 징계하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청컨대 엄하게 실상을 밝혀내어 통쾌히 해당한 율을 베푸소서.”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해부(該部)의 조사할 일과 승지를 파직하는 일은 모두 상달한 대로 하라. 대망(臺望)을 개정하는 일은 또한 지나치다. 홍정보·원경렴·이성중의 일은 이미 역률(逆律)에 관계되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있으니, 또한 지나치다. 전 유수의 일은 결코 이와 같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미 대각의 상달이 올랐으니, 관계됨이 무겁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알리도록 하라.”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이 피혐(避嫌)하기를,
 
“이정철은 노음직(老蔭職)의 상조(常調)로서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아 바야흐로 산지(散地)에 있는데, 난데없이 대망(臺望)에 주의(注擬)되었으니, 정사(政事)의 체례를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논박해 시정하고자 하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홍정보는 본종(本宗)으로 돌아가기를 도모하여 스스로 대륜(大倫)을 끊었으니, 그 인기(人紀)와 풍교(風敎)를 무너뜨림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홍정보와 처지가 서로 같았던 사람들을 조정에서 자신의 수조(守操)함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으니, 홍정보 같은 사람이야 더욱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원경렴은 자신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죽은 아내와 이혼해 억지로 나랏법에 벗어난 일을 행함으로써 오륜의 하나를 무너뜨렸으니, 옛말에 이른바 ‘잔인하고 야박한 행실’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이성중의 경우는 동기간이 노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자살하도록 방임한 것은 그래도 혹 용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죽은 뒤라면 애달파하고 슬퍼하는 것은 마땅히 상정(常情)이 참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친구를 찾아가 앉아서 스스로 아무런 일이 없는 것과 같이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하고 웃었으니, 도무지 사람의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가 먼 곳에 유배보내고 벼슬을 깎는 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이번에 논열(論列)한 것은 오로지 구구한 우분(憂憤)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 반드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고 즐겨 들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비지(批旨)는 의도했던 바를 크게 잃었으니, 이는 신의 성의가 천박하며 능히 위에 미덥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한 시각인들 태연히 대차(臺次)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임을 갈고 물리치라 명하소서.”하니,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영인본】 43 책 631 면【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윤리(倫理) / *변란(變亂) / *가족(家族)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금융(金融) / *군사(軍事)

[註 13843]해유(解由)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 중의 회계 물품 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解由文字)를 발급하였음. ☞
[註 13844]현도 봉소(縣道封疏) : 시골에 있는 재상(宰相)이 현(縣)이나 도(道)를 통하여 올리는 상소(上疏). ☞
[註 13845]심도(沁都) : 강화. ☞
[註 13846]팽아(烹阿)의 법 : 탐관(貪官)을 처벌하는 극형을 의미함.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처음에 모든 지방 정치를 경대부(卿大夫)에게 위임하였는데, 여러 경대부 중 아 대부(阿大夫)가 정치를 가장 잘한다고 예찬의 소리가 날로 들리기에, 사람을 보내어 아(阿) 땅을 살펴보았더니, 실제로는 정치는 가장 못하고, 왕의 좌우에 뇌물을 써서 칭찬을 구한 것이었음. 그리하여 당장 아 대부를 불러다 삶았다는 고사. ☞
[註 13847]매복(枚卜) : 여러 사람을 전형(銓衡)하여 그 가운데서 적임자(適任者)를 선택하는 것. ☞ 

37)영조 89권, 33년(1757 정축/청 건륭(乾隆) 22년) 5월 23일 계축 2번째기사

●삼강 어사 남태저·홍양한이 복명에 따라 폐단을 조치토록 하다
삼강 어사(三江御史) 남태저(南泰著)·홍양한(洪良漢)이 복명하니,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의 여차(廬次)에서 소견하였다. 남태저가 종신(宗臣) 서청수(西淸守) 축(蹴)이 이웃에 사는 박씨 성[朴姓]의 사람을 죽인 일을 아뢰니, 잡아다 추문(推問)하여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또 아산(牙山)에 살고 있는 홍호(洪暠)의 아들이 역적(逆賊) 이성(李)의 딸로 본부(本夫)와 이이(離移)한 자와 몰래 간통한 일을 아뢰니, 임금이 홍호의 자식은 정의현(旌義縣)에 형배(刑配)하고, 이성의 딸은 비(婢)로 삼아 절도(絶島)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홍양한이, 광흥수(廣興守) 이태상(李泰祥)이 지나치게 공인(貢人)의 종[奴]에게 곤장을 때려 죽이기에 이른 정상을 아뢰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엄중히 조사하게 하였다. 홍양한이 인하여 양창(兩倉)에 거짓으로 기록된 실상과 빙호(氷戶)에게 돈을 거두는 폐단을 아뢰니, 모두 낭관(郞官)을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홍양한이 또 통진(通津)·김포(金浦)·양천(陽川)·부평(富平) 등 고을의 유민(流民)이 강가에 와서 살며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호적에도 누락되었고 더러는 폐단을 일으킨다고 아뢰고, 한성부로 하여금 찾아 모아 입적(入籍)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들이다. 모두 모아서 경적(京籍)에 소속시키도록 하고, 네 고을의 수령은 잡아다 처분하도록 하라.”하였다. 홍양한이 또 아뢰기를,
 
“서잠실(西蠶室)이 한강(漢江)가에 있는데, 이는 바로 공상(公桑)의 중지(重地)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말라 죽은 나무를 베어내고, 인하여 그 지역 안에서 경작하고 있는데, 내시부(內侍府)에서는 그 지역의 지세(地稅)를 이롭게 여겨 또한 묻지 않으므로, 뽕나무 밭이 아주 없어지기에 이르렀으니, 자못 설치한 본 뜻이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잠실(蠶室)은 후비(后妃)를 위해 설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궐 안에도 일찍이 잠판(蠶板)이 있었는데, 지금 이와 같은 사실을 듣건대, 내시들이 뽕나무를 없애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신하보다 심하다. 특별히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고, 단지기[壇直]는 형배(刑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강촌(江村)의 호강(豪强)한 사람을 정배(定配)하고 합몰(合歿)한 가호에 대하여 돌보아 구휼할 것을 아뢰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영인본】43책 649면【분류】*왕실(王室)/*사법-치안(治安)/*사법-행형(行刑)/*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재정(財政)/*호구(戶口)/*농업(農業)/*구휼(救恤)

38)영조 94권, 35년(1759 기묘/청 건륭(乾隆) 24년) 12월 21일 정유 3번째기사

●김포 군수 김근행이 권학에 힘쓰자 《소학》 1부를 내리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어사 김응순(金應淳)이 아뢴 바에 의하면, 김포 군수(金浦郡守) 김근행(金謹行)이 지성(至誠)으로 학문을 권장(勸奬)하였다고 하니, 《소학(小學)》 1부를 특별히 본군(本郡)에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용동(聳動)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4책 27면【분류】*왕실-사급(賜給)/*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인사-관리(管理)/*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39)영조 96권, 36년( 1760 경진 / 청 건륭(乾隆) 25년) 11월 12일 임자 6번째기사

●경기 암행 어사 김응순의 복명에 의해 수령들의 치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다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김응순(金應淳)이 복명(復命)하였다. 금천 현감(衿川縣監) 신희(申暿)가 치적(治績)이 제일임으로써 승서(陞敍)하였고, 죽산 부사(竹山府使) 이석유(李碩儒)는 치정(治政)이 하(下)에 있음으로써 파직하였으며, 광주 부윤(廣州府尹) 원경렴(元景濂)은 환곡[糴]을 대신 돈으로 받았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윤병연(尹秉淵)은 죄수를 사역한 것으로써 모두 나처(拿處)를 명하였으니, 암행 어사의 아뢴 바에 인한 것이었다.
 
【영인본】 44 책 51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금융-화폐(貨幣)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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