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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조실록(10-1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10)정조 31권, 14년( 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년) 11월 15일 신묘 2번째기사

●승지 이경오를 통진 부사에 보임시키다
승지 이경오(李敬五)를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보임하였다. 이경오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신기현(申驥顯)은 얼마나 극악한 역적인데 승지의 특별 제수가 갑자기 내린단 말입니까. 성명한 세상에 이런 예사롭지 못한 조치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빨리 하명을 거두고 해당되는 율문을 적용하기 바랍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경오의 경연 진술은 몹시 시끄럽고 외람되다. 통진 부사로 제수하라.”하였다.
 
【영인본】 46 책 181 면【분류】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11)정조 31권, 14년( 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년) 11월 18일 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교외의 처소에서 머무는 것을 여러 각신들이 만류하다
진시(辰時)에 상이 융복(戎服) 차림에 가교(駕轎)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가자 여러 각신들이 가교를 잡고 길을 막아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번갈아 간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은 아뢰기를,“전하께서 오늘날 취하신 처사는 천만 부당합니다. 신 등은 초조하고 황급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비록 파직을 당하더라도 감히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즉시 궐내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하고,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교외의 처소에서 행차가 머무는 것은 건강을 돌보는 방법에 크게 어긋납니다. 사람들의 심정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지금 시원하게 바람쐬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데 경들은 왜 이처럼 답답하게 고집하는가.”하고, 이어 신하들을 끌어내라고 명하였으나 신하들은 부여잡고 떠나지 않았다. 행차가 협양문(協陽門)에 이르자,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과 영돈녕 홍낙성(洪樂性)이 황급히 앞으로 나갔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장차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하고, 명선은 아뢰기를,
“승지를 모두 체직하고 시신도 갖추지 않은 채 가승지 한 사람과 어느 곳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미 말을 하였으므로 승지와 옥당의 처분을 취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차를 따르게 하겠다.”하고,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대신을 부축하여 내보내게 하였다. 이어 대신의 관직을 삭탈, 출송할 것과 제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명하고, 이어 행차를 재촉하여 단양문(端陽門) 밖에 도착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속 아뢰고 부여잡는 바람에 행차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파자교(把子橋)에 도착하여 승지 홍의호(洪義浩)를 불러 전교를 쓰게 하려 할 때 홍의호가 아뢰기를,

“처분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자, 삭직을 명하였다. 숭례문(崇禮門)을 나가 자연암(紫烟巖) 앞길에 이르러 행차를 돌려 염초교(焰硝橋)로 향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어느 곳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가시는 곳을 알고 싶습니다.”하니, 그를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아현(阿峴)에 이르렀을 때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앞에 나서서 말 재갈을 잡고 행차를 돌릴 것을 간청하니 그 죄명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선두가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하여 어영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파직하고 서유대를 명하여 대신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 별영(別營)의 관사(官舍)에 나아가 머물고 문단속을 엄히 하게 하였다.
 
앞서 은언군(恩彦君)5063) 을 데려오기 위해 교자 3채를 꾸며서 강화로 보냈는데, 한 교자에는 내수사 관속 중 가장 용맹이 있다고 하는 자를 태우고, 한 교자에는 의복을 넣은 농짝을 싣고, 한 교자는 빈 것이었다. 각각 사납고 억센 종들을 수십 명씩 뽑아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타도록 허락하고 관원 한 사람이 이를 통솔하게 한 다음, 또 한 사람은 선전관이란 칭호를 가지고 통행 신표를 차고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차비를 갖춘 다음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성문을 빠져나가 밤새도록 갑진(甲津)으로 달려갔으나 나루에는 배가 없었고 성장(城將)이 길을 막았다. 해당 관원이 밀지(密旨)를 내보이고 먼저 성장을 결박한 다음에 사공들을 매질하자 여러 배가 모여들어 정비하였다.

즉시 나루를 건너 강화의 성문 밖에 이르렀으나 성문을 3일 동안이나 열어주지 않았다. 전지(傳旨)를 보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통행 신표를 보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반드시 진짜 선전관이 신표를 받들고 내려와야 말을 들어주겠다.”
 
하였다. 해당 관원이 사실을 갖추어 급히 보고하자, 또 선전관 및 가선전관(假宣傳官)을 각각 한 사람씩 보내 한 사람은 통진(通津)의 수령을 붙잡아 묶어 오게 하고 한 사람은 말을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렀으나 성문을 굳게 닫고 응하지 않았다.

강화의 수령 구협(具埉)은 뒷문으로 몰래 나오다가 잡혔고 선전관 김진정(金鎭鼎)은 성 위에서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유수만 데리고 발길을 돌렸고, 가선전관도 앞질러 돌아오고 말았다. 상이 곧 따로 선전관을 보내 다시 신표를 전하고 성문을 열게 하였다. 조금 뒤에 또 보냈으나,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 지체될까 염려되어 세번째로 선전관을 보냈다.

이에 선전관이 신표를 가지고 충돌하면서 성중으로 들어가 가중군(假中軍) 이하 명령에 항거한 여러 장수들을 덮쳐 조리를 돌리고 호되게 곤장을 쳤다. 이때에 와서 해당 관원이 또 급보를 올리기를,
 
“성문을 열지 않고 굳게 지키는 것을 풀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몹시 노하여 이미 앞서 잡아온 유수의 중군부터 우선 군법을 적용하고자 하여 표미기(豹尾旗)를 세우고 기병을 먼저 백사장에다 대오를 정돈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따로 보낸 선전관이 달려와 성문을 열었다는 사유를 보고하자, 유수와 중군의 군법 시행이 비로소 중지되었고, 먼저 돌아온 가선전관을 잡아들여 곤장 30대를 쳤다. 구협을 잡아들여 성문을 닫은 죄를 문책하니, 대답하기를,
 
“부의 전례가 본래 그러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잡아오라는 명령만 전하고 문을 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자, 진정(鎭鼎)과 대질을 명한 결과 진정의 말이 꿀리는 편이었다. 이에 진정에게는 호된 곤장을 치고 구협은 놓아주었다. 이때 말을 탄 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겨우 탈출시켜 교자에 싣고 빨리 달려 팽포(彭浦)에 이르니 자전께서 보낸 내시가 자전의 지시를 받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곧장 덤벼들어 전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해당 관원이 어명을 봉행하는 것이라고 외치니, 내시 또한 말하기를 ‘내 머리를 내일에는 바칠 수 있으나 오늘은 자전의 하명을 받든 이상 죽어도 놓아줄 수 없다.’고 하면서 머리로 사람을 받고 손으로 교자를 막으므로 데리고간 하인들도 합세하여 죽을 힘을 다해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내시에 대해서는 자전의 하명이 지중하기 때문에 해당 관원이 손을 댈 수가 없어 우선 빈 교자로 머뭇거리고 있고 사람을 실은 교자를 가지고 사잇길로 빠져 몰래 오려고 하였습니다.

내시가 이 기미를 알고 해당 관원에게 이르기를 ‘이미 부녀자가 탄 교자가 아니니 내가 직접 대면하여 자전의 하명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관원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좌우로 가로막으면서 세 교자를 주막집 각 방에다 넣어두었기에 우선 급한 사정을 보고합니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50명의 기병을 연로에 염탐으로 깔아놓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각 기병의 염탐꾼을 팽포로 달려보내 해당 내시는 전교로 불러오게 하고 세 교자는 다른 길을 잡아 전진하여 양진(楊津)을 건너지 말고 곧바로 삼포(三浦)로 건너도록 하였다.
 
【영인본】 46 책 182 면【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註 5063]은언군(恩彦君) : 장헌 세자의 서자. ☞ 

12)정조 31권, 14년( 1790 경술 / 청 건륭(乾隆) 55년) 8월 2일 경술 4번째기사

●형조가 신문고를 친 사람의 내용을 보고하다
형조가 아뢰기를, “신문고를 친 사람인 통진(通津)의 진사 유득로(柳得魯)가 남경용(南景容)의 벼슬을 회복한 실례를 들어 자기 아비인 유채(柳綵)의 죄명을 벗겨달라고 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원통함을 호소하니 그의 사람됨이 매우 용렬하다. 어떤 사람은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회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남경용의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라.”하였다.
 
【영인본】 46 책 161 면【분류】 *사법(司法)
 

13)정조 33권, 15년(1791 신해/청 건륭(乾隆) 56년) 9월 7일 기묘 1번째기사

●경기 지방 고을 중 재해를 입은 곳의 환곡과 신포를 탕감하도록 명하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를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사관을 보내서 양천(陽川) 백성들을 위로하고 효유하여 각기 믿고 안정되게 살도록 하였다. 이제 가을도 늦어가니 세금을 줄여주고 구제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 미루고 있었던 것은 도백이 산하 고을들을 순행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제 조정으로 돌아온 기회에 백성들의 실정을 자세히 물으니, 전에 들은 것과 차이가 없다.

재해를 특히 심하게 당한 양천의 면리(面里)에 대해서는 환곡과 신포(身布)를 탕감해주고 기한을 물려주는 것을 마땅히 조정의 명령대로 거행하되, 비록 물려주거나 탕감해주는 등급에 끼지 못한 자라도 반드시 규례대로 징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환곡과 신포를 3분의 1은 기한을 물려주고 군량미는 받아두도록 하라.
 
부평(富平)·김포(金浦)·금천(衿川)·고양(高陽) 등 강변 고을의 면리(面里) 가운데 재해를 특히 심하게 당한 곳은 비록 양천과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재해를 입은 곳의 백성들 실정이 황급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니, 구제해주는 정사를 어찌 한 곳에는 실시하고 한 곳에는 실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의 네 고을은 면리 단위로 등급을 나누는 일반 규례에 구애받지 말고, 한개 면 한개 리 가운데서도 각별히 가려내고 정밀하게 조사하여 양천의 사례대로 세금 징수를 중지하고 감면해주도록 하라. 그 수량도 꼭 3분의 2에 구애받지 말고, 비록 절반 이하라도 도백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절충해 배당함으로써 한 명의 백성이라도 소외를 당한 탄식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6책 241면【분류】*구휼(救恤)/*재정(財政)

14)정조 35권, 16년( 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7월 3일 경자 2번째기사

●영남 후조창의 배 4척이 통진에서 침몰하니, 관련된 관리들을 문책하다
영남의 후조창(後漕倉) 조선(漕船) 4척이 다시 통진(通津) 지경에서 침몰되니, 도차사원(都差使員) 밀양 부사 이복섭(李復燮)은 곧바로 그곳에서 정배하고, 기선 차사원(騎船差使員) 제포 만호(薺浦萬戶) 남궁심(南宮深)은 결곤(決棍)하고, 해도 영호 차사원(領護差使員) 장봉 만호(長峰萬戶) 김경희(金慶禧), 지방관(地方官)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달관(李達觀)은 결곤하여 파출(罷黜)하였으며, 경희는 해당 진(鎭)의 노군(櫓軍)으로 충원하였다.
 
【영인본】 46 책 320 면【분류】 *교통(交通) / *사법(司法) / *인사(人事)
 
15)정조 35권, 16년( 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9월 25일 신유 5번째기사

●고 부사 이장옥의 아내 김씨가 연호궁의 제사 비용 문제로 아뢰다
이에 앞서 고 부사(府使) 이장옥(李章玉)의 아내 김씨(金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연호궁(延祜宮)을 봉원(封園)하기 전에는 본궁(本宮)에서 도와주는 제수(祭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길이 없어졌고 약간의 전토(田土)가 진위(振威)·통진(通津) 등지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매매되어 제사에 이바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로서 바라는 바는 이미 매각된 전토를 도로 물러서 제사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뿐입니다.”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호조가 복주(覆奏)하기를,

“본가(本家)의 궁색하고 가난한 상황은 이미 보고한 바 있거니와 진념(軫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연호궁을 봉원한 뒤로 전결(田結)에서 나오는 세금을 본조로 옮긴 것이 꽤 많으니 이 중에서 해마다 쌀 20석(石)을 지급하게 하소서.”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쌀을 지급하는 것이 체모에 어떨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나오는 결세(結稅) 중에서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적당량을 지급하게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이 성장하거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요미(料米)를 주고 무예를 익히게 한 다음 수용하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46 책 340 면【분류】 *왕실(王室) / *농업(農業) / *인사(人事)

16)정조 37권, 17년( 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20일 임오 2번째기사

●경기 관찰사 박우원이 법성포에 침몰한 조운선의 쌀 문제로 장계하다
경기 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이 장계하기를, “법성포(法聖浦)의 조운선 2척이 쌀 2천 70여 석을 싣고 교하(交河)의 통진(通津) 경계에 이르러 침몰하였습니다. 건져낸 쌀 1천 3백 29석과 황두(黃豆) 1백 26석은 법전에 따라 민간에 나누어 주겠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상납하는 쌀과 황두는 병오년5519) , 연품(筵稟)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한결같이 작년의 영남 조운선이 침몰되었을 때 다른 곡식으로 바꾼 규례와 같이 하여 각각 해당 고을들로 하여금 스스로 원하는 것을 좇아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호조 판서 심이지에게 이르기를,
 
“기백의 장계 내용은 해괴하다. 이미 ‘건져낸 조악한 쌀은 규례에 따라 나누어 징수하겠다’ 하고서, 또 말하기를, ‘해당 고을들로 하여금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납부하게 하겠다’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두 번 세 번을 백성들에게 징수한단 말인가.”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건져낸 쌀은 배가 침몰한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상납할 고을에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징수하기를 청했으니, 어찌 이러한 법조문이 있겠는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백성들이 장차 두 번 세 번 징수당하는 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기백의 장계 내용은 천만 해괴하다. 의당 파직하고 붙잡아들이는 법전을 급히 시행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하나, 자꾸 교체하는 것도 의당 염려할 바이니, 우선 함사(緘辭)로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우원의 장계에 ‘병오년 연품에서 정한 규정’이라는 것은 바로 서유방이 기백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마침 유방이 각신으로 등대해 있다가 아뢰기를,
 
“신의 처음 뜻은, 큰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거나 일부러 꾀를 써서 범행을 저지른 것을 제외하고, 이와 같이 일시적인 침수로 온 배의 곡식을 다 버릴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수령과 감색배(監色輩)의 소원을 그대로 따라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백성과 나라 양쪽을 위하는 도리가 될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관문(關文)을 묘당을 통해 연변의 고을에 보내어 알게 하였던 것이며, 과연 약간의 배가 다른 곡식으로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들으니, 각도에서 비록 큰 바다에서 전선(全船)이 침몰한 경우라도 일체 억지로 일시 침수한 것으로 돌려서 애당초 장계도 올리지 않고 다른 곡식으로 바꾼다고 이름하여 백성들을 소요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신이 애당초 신중하지 못하고 지레 시험부터 해본 것이 마침내 점차로 더욱 그릇된 일이 발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만일 이 일을 즉시 바로 잡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공문을 내서 엄히 신칙하도록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법을 야박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 폐단은 탐욕스럽게 되는 것이다. 하(夏)의 충(忠), 은(殷)의 질(質), 주(周)의 문(文)도 또한 보태거나 더는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법이라 이름한 것으로서 오래도록 폐단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진실로 혹 일분의 이익이라도 된다면 수시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처음부터 허락을 아꼈던 것은 바로 당장의 이익은 적고 후일의 폐단은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침몰하여 썩은 것을 침수한 것이라고 혼동해 말한다면 이는 명칭은 비록 다른 곡식으로 바꾼다 하나 실상은 재차 징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령은 이로써 벼슬을 보전하는 데에 유리하게 여기고 선격(船格)들은 이로써 죄를 면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오직 고통과 곤궁을 겪는 사람은 백성들 뿐이다. 그 당시의 열거한 조항들을 애당초 계하하지 않았더라면 여러 도의 이같은 행위들이 어디에서 기인되었겠는가. 여러 도에 거듭 단속시켜 한결같이 법전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6 책 383 면【분류】 *교통(交通) / *재정(財政)

[註 5519]병오년 : 1786 정조 10년. ☞ 

17)정조 39권, 18년(1794 갑인/청 건륭(乾隆) 59년) 1월 9일 정유 4번째기사

●총융사 정민시가 북한 산성의 환곡 폐단을 아뢰다
총융사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북한 산성의 환곡에 대한 폐단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합니다. 이른바 환곡을 뉘어두고 그에 대한 이자만을 받아들이는 일[臥還], 환곡을 빼내어 유용하고 허위 문서를 꾸미는 일[反秩], 사사로이 나누어주는 일[私分], 도거리로 받아가는 일[都受], 남의 환곡을 대신 바치고 그 댓가를 불려 받는 일[防納],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주는 일[移施], 남을 시켜 대신 받는 일[代點], 허위 장부를 꾸며 횡령하는 일[虛逋] 등의 모든 폐단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올해의 새 환곡은 대부분 여러 해 묵은 환곡을 그대로 허위 문서를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그 친족에게 물리지 않을 수 없으니, 실로 도민(都民)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단서가 됩니다. 이는 오로지 보환(保還)과 부환(部還)의 소치입니다.

해마다 당연히 나누어주어야 할 환곡이 2만 섬에 가까운데 이를 오로지 60, 70명의 보주인(保主人)의 손에 맡기니 각 사람의 이름 아래에 적어도 수백 섬씩이 돌아갑니다. 부환은 보주인들이 성 안의 무뢰배들을 거짓으로 꾀어서 많은 수량을 타가게 하여 모두 낭비하게 하고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이르러서는 그 친족들에게 물립니다. 이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군량미는 필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면 기사년에 정한 절목(節目)에는 각 고을에 옮겨주는 것이 그래도 백성들이 제각기 받아가는 것보다 낫다 하여 서울 부근 기읍(畿邑)에 분배하여 내어주고, 남은 수량은 능군(陵軍)과 역졸(驛卒)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와서 다시 보환과 부환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부당합니다. 지금부터 옛 규례를 회복하여 각 고을에 모두 옮겨주고 능군과 역졸들이 제각기 받아가는 것도 폐단이 많으니 이것도 지방의 각 고을로 넘겨서 그 곳에서 받아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북한산성의 평창(平倉) 부근에 사는 백성들과 부역을 진 무리들이 등환(等還)이라고 일컬으면서 한 사람이 받아가는 수량이 수십 섬이나 됩니다. 이 역시 지방 고을의 예에 따라 통환(統還)으로 나누어주어 함부로 받아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다만 보환을 없애버리면 평창에서 모집하여 들어오게 한 백성들은 의지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됩니다.
 
평상시의 보주인들이 봄에는 한 섬에 3되[升]씩의 이자를 받아먹고 가을에는 2말[斗]씩을 받아먹는데 이를 전부 지방 고을로 옮겨주면 백성들에게 미치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겨주는 환곡 중에서 1섬마다 봄에는 전처럼 3되를, 가을에는 1말씩을 보주인에게 제급(題給)하면 공사간에 양쪽이 다 편리할 것입니다.
 
다만 현재 산성의 군량이 과반수나 축나서 8만 섬의 군량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만 섬도 되지 않고 이번에 받아들인 것은 겨우 3만 섬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지방 고을로 옮겨준 뒤에 한 번 흉년이나 만나고, 또 경기 감영에서 받아서 그대로 유치하겠다고 요청하거나, 바치는 기한을 물려주거나 돈으로 대신 바치기를 요청한다면 북한 산성에는 장차 남아 있는 곡식이 없을 것입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明)은 받아서 그대로 유치하는 것은 한때의 작은 은혜에 지나지 않고 산성에 곡식을 저장하는 것은 국가의 대계(大計)인만큼 그 일의 시행을 허락할 수 없다 하였고, 고 중신 원경하(元景夏)는 고을로 옮겨준 환곡을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고을의 수령은 해유(解由)에 구애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진달하여 규정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의당 옛 제도를 다시 밝혀서, 도신이 받아서 유치시키겠다거나 바치는 기한을 물려달라거나 돈으로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역시 규정을 어긴 법조문에 따라 처벌하고, 본청(本廳)이 특별 환곡이라는 명목으로 사사로이 주는 경우에도 무겁게 처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환곡을 나누어주고 수량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묘당에서 절목을 만들어 계하(啓下)를 받아서 이를 준수하여 시행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이 일을 물었다. 좌의정 김이소가 그 말대로 따르고 수신(帥臣)을 모두 논죄할 것을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서 아주 형편없고 가장 살피지 못한 자는 이방일(李邦一)이다. 그에게는 경들의 말대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라. 이주국(李柱國)은 허위 문서를 꾸며 횡령한 환곡의 수량이 신해년과 임자년의 두 해에 가장 많았으니 살피지 못한 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방일에 비하면 불법을 저지른 죄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으니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주국에게는 우선 관직을 삭탈하는 법을 시행하라.
 
보환과 부환을 혁파하는 일은 지금 이미 규정을 정하였으니, 이 뒤로 만일 규정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해당 총융사는 도형(徒刑) 3년에 처하여 귀양보내고 2년 동안 금고(禁錮)하며, 특별 환곡의 금령을 어기고 법을 범한 자도 같은 죄로 처벌하라.
 
해마다 환곡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장계가 있는데도 유명무실함이 이러하다. 묘당의 문관 출신 비변사 낭청을 시켜 초기를 올리고, 임명하여 보낼 때에 창고의 물품을 조사하는 일도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기내(畿內) 천 리의 지역도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도성 밑에 사는 백성들이겠는가. 이 뒤로 도민(都民)들은 절대로 환곡을 받지 말 것이요 설혹 강제로 환곡을 주는 경우에는 한성부에 와서 고발하여 해당 총융사의 죄를 따져 처벌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보환과 능졸·역졸들이 불법으로 받거나 미리 지급하는 따위의 잘못된 규정을 모두 혁파하고, 경리청(經理廳)의 예에 따라 양주(楊州)·파주(坡州)·통진(通津)·인천(仁川)·부평(富平)·고양(高陽)·김포(金浦)·교하(交河)·안산(安山)·양천(陽川)·적성(積城)·포천(抱川)·과천(果川)·금천(衿川) 등의 14개 고을에 옮겨주고, 승창(僧倉)의 환곡은 예전대로 총섭(摠攝)을 시켜 주관하도록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영인본】46책 437면【분류】*재정(財政)/*구휼(救恤)/*군사(軍事)/*사법(司法)

18)정조 39권, 18년(1794 갑인/청 건륭(乾隆) 59년) 4월 10일 병인 5번째기사

●경기 도사·중군·경력·통진 부사·김포 군수를 모두 잡아오도록 명하다
경기 도사·중군·경력·통진 부사·김포 군수를 모두 잡아오고, 경기 관찰사와 강화 유수의 병부는 후임이 교대할 동안 기역(畿驛)의 찰방을 가도사(假都事)로 임명하여 임시로 차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46책 461면【분류】*사법(司法)

19)정조 39권, 18년(1794 갑인/청 건륭(乾隆) 59년) 4월 12일 무진 10번째기사

●전 강화 유수 이홍재, 통진 부사 김이용 등을 석방하다
전 강화 유수 이홍재(李洪載), 통진 부사(通津府事) 김이용(金履容), 김포 군수(金浦郡守) 유한준(兪漢雋), 양천 현감(陽川縣監) 김반(金鎜), 경기 도사(京畿都事) 김기상(金基象), 강화 경력(江華經歷) 권이성(權彛性) 등을 석방하였다.
 
【영인본】46책 463면【분류】*사법(司法)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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