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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조실록(30-3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30)정조 45권, 20년( 1796 병진 / 청 순치(順治) 1년) 10월 24일 병신 1번째기사

●경진년 온천에 행차할 때 배종했던 이들에게 추증 또는 시상하다
전교하기를, “경진년 온천에 행차할 때에 배종했던 사람들을 이번 봄에 찾아내어 기록하는 조치가 있었는데, 지방에서는 경기와 호서(湖西) 두 도가 비로소 나란히 보고해 왔다. 그중 나이 90세인 경기 포천(抱川)에 사는 정헌(正憲) 이세걸(李世傑)과 통진(通津)에 사는 정헌(正憲) 조흥복(趙興馥)은 가자하여 실직 동지(同知)에 단독으로 천망하고,

백 살에 가까운 충청도의 서두금(徐豆金)은 첨지에 단독으로 천망하라. 아울러 경기인(京畿人)의 예대로 한 대(代)만 추증하도록 하라. 그 밖에 지방 관아의 아전, 향임(鄕任) 이하와 경기의 84세 12명과 충청도의 82세 17명에게 첩지를 내리고, 경기와 호서의 7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쌀 세 말을, 6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두 말을 주도록 하라.”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4백30명이었다.
 
【영인본】 46 책 675 면【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31)정조 45권, 20년( 1796 병진 / 청 순치(順治) 1년) 9월 10일 임자 2번째기사

●어가가 지날 도로의 보수를 백성에게 맡기지 말고 삯군을 쓰게 하다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이 아뢰기를, “어가가 지나갈 양천(陽川)의 도로도 인근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힘을 합하여 보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양천과 김포의 백성에게 해마다 폐를 끼치고 있는데 또 어떻게 노역을 시키겠는가. 전부 삯군을 쓰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6 책 671 면【분류】 *왕실(王室) / *재정(財政)
 

32)정조 46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1월 24일 을축 1번째기사

●부른 명에 따르지 않은 홍대협·최헌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승지 홍대협(洪大協)을 김포 군수(金浦郡守)로, 최헌중(崔獻中)을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교리 정동관(鄭東觀)을 강령 현감(康翎縣監)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이는 부른 명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인본】47책 5면【분류】*인사(人事)/*사법(司法)

33)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15일 신해 2번째기사

●장릉을 배알하고 김포 행궁에 가면서 김수동 등의 묘에 치제하다
상이 고(故) 상신(相臣) 김수동(金壽童)·김응남(金應南)·심수경(沈守慶)·김익(金熤)의 무덤이 어가가 지나가는 길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고 영의정 김수동은 중흥 때를 당하여 위아래로 두루 다스렸으니 노성(老成)의 전형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그 무덤이 고을에서 7리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다. 고 우의정 김응남은 황제 앞에서 정책을 주달하여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고 중간에 군사에 관한 소임을 담당하면서 임기응변하였으니, 호종(扈從)한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 우의정 심수경은 김응남과 동시의 명 재상으로 국가의 일에 근로하였는데 그들의 무덤이 또한 행차하는 길가에 있다고 한다. 세 대신의 무덤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고 영의정 김익의 무덤에도 그 아들인 중신(重臣) 김재찬(金載瓚)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물러갔을 때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신광리(申光履)가, 역적 인(裀)이 위리(圍籬)를 뛰쳐나간 일로 치계(馳啓)하니, 상이 그 장계를 물리쳤다. 이에 대신·경재(卿宰)·각신·승지·삼사(三司)의 제신이 번갈아가며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시(午時)가 지난 뒤에 상이 비로소 양천(陽川)의 행궁(行宮)으로부터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말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 신하의 죄가 하늘에 사무쳐서 또 섬의 역적이 위리를 뛰쳐 나간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사태가 너무도 위급하기만 합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대신의 직에 있는 이상 일이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므로 의리상 일각도 지체할 수가 없어 곧장 환배(還配)하라는 뜻으로 방금 강화 유수에게 분부하였습니다만, 또한 감히 다급히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환배하라는 청을 어서 윤허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일단 환배를 청하였으니 나도 윤허한다. 비국(備局)에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비답을 받은 뒤에야 문적(文蹟)을 작성하고 문적이 있은 뒤에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고,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설사 문적이 있다 하더라도 죄인을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지 않으면 신들이 장차 어떻게 거행하겠습니까.”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고 마침내 출발하여 2, 3리(里)를 갔다. 이익운 등이 따라가면서 아뢰기를,
 
“대신이 주달한 말에 비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는 내용으로 비지(批旨)를 써서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김달순(金達淳), 집의 이기양(李基讓), 부수찬 한치응(韓致應) 등이 소회를 진달하고, 배소(配所)로 잡아 돌려보내는 동시에 원계(原啓) 안에서 청한 바를 윤허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의 청을 따랐다.”하였다. 천등현(天登峴)에 이르러 본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보고 고통을 물었다. 장릉(章陵)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한 다음 능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승지에게 이르기를,
 
“산의 형세가 비단을 펼친 듯하고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양쪽에서 호위하여 기세가 길게 멀리 뻗었으니 만년의 큰 복이 실로 여기서 기인하였다.”
 
하였다. 재실(齋室)로 돌아와서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의 후손 구규석(具圭錫) 등과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 등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서구에게 하문하기를,
 
“선조(先朝) 갑인년에 장릉에 행행하셨을 때에 연로(沿路)에 조세를 감면한 혜택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이서구가 대답하기를,
 
“연로의 고을에는 대동미(大同米) 2두를 모두 감면하였고, 본 지방에는 정퇴(停退)한 그 해의 봄 대동미를 특명으로 탕감하였습니다. 대동미를 감면하는 것은 진실로 큰 혜택이기는 하나 전지가 없는 백성은 혜택을 고루 입지 못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혹 요역(徭役)을 감면하기도 하고 혹은 예전 환곡(還穀)을 감면하기도 하는 것이 혜택을 널리 베푸는 방도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가을에 행행하여 장릉(章陵)을 배알(拜謁)하는 것은 우리 영고(寧考)의 갑인년의 성적(聖蹟)을 우러러 계술(繼述)하려는 것이다. 자리에 나아가 예를 행하니 이미 슬퍼져 감회가 일어난다.
 
삼가 생각건대, 매년 남전(南殿)을 참배할 적에 제3실(室)의 수용(睟容)을 공손히 보면 마치 친히 말씀을 듣는 것만 같았다. 지금 와서 상설(象設) 앞에서 주선하니 혼령의 오르내림이 더욱 가까워서 지척에 임하신 것 같다. 간절한 소원을 조금 펴니 슬픔과 기쁨이 함께 이른다.

내가 여기에서 더욱 느껴지는 바가 있다. 배알하는 일을 봉행한 끝에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큰 강의 남쪽에 높은 산이 천연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용이 오르고 봉황새가 날아 올라가는 듯하고, 강물이 빙 둘러서 빛나고 있다. 이미 이어지면서 멀리 뻗었으며 험준하지 않으면서 높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어린 바이고 길한 운세가 발원(發源)된 바로서 억만년토록 무궁한 복을 받게 될 형세라 하겠다.
 
우리 장릉(長陵)의 지극한 효성이 위로 하늘에 사무쳐서 마침내 이 기막힌 명당 자리를 내려주셨다. 그리하여 먼저 부장(祔葬)하는 예를 경영하고 능을 옮김으로써 우리의 태산 반석과 같은 크나큰 터전을 열게끔 하셨다. 이날 이 땅에 마땅히 이 감회를 적고 이 뜻을 표시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본릉(本陵)의 국구(國舅)의 집은 공신의 집인 동시에 외척의 집이기도 하니, 대대로 우례(優禮)를 받는 것이 다른 외척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 신씨(申氏)의 묘소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집의 봉사손(奉祀孫)은 당연히 조용(調用)해야 하나 나이가 차지 않았으니 어느 때인들 할 수 없겠는가.

직계파(直系派)인 유학(幼學) 구규석(具圭錫)을 본릉 능관(陵官)에 단부(單付)하라. 그리고 본릉의 능관 홍석(洪)은 승서(陞敍)하고, 참봉 한백연(韓百衍)은 승륙(陞六)시키고, 수복(守僕)·수호군(守護軍) 등에게는 넉넉하게 시상하라. 본군의 지방관 홍대협(洪大協)에게는 대내에서 내리는 녹피(鹿皮) 1령(令)을 사급(賜給)하고, 도백(道伯) 이재학(李在學)에게는 표비(豹皮) 1령을 전례에 의하여 사급하도록 하라.
 
부로(父老)들에게는, 고을에 가면 고통을 물어보겠지만 우선 1년 동안 급복(給復)해 주되 근례(近例)에 따라 환향(還餉)의 모곡(耗穀)을 대신 감면하도록 하라. 이 고을의 오래된 환곡이 소민들의 뼈에 사무치는 폐해가 된다는 것을 익히 들었다. 향곡(餉穀)·환곡(還穀)을 막론하고 오래된 환곡으로 이름 지어진 것은 호방 승지(戶房承旨)가 읍민을 모아서 그 문서를 가져다가 불에 태움으로써 일분의 폐해라도 제거하도록 하라.

그리고 갑인년 행행 때의 의장(儀仗)의 아름다움을 보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나이 70, 80 이상인 조관(朝官)·사인(士人)·서인은 각각 한 자급(資級)씩 올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상이 재실(齋室)에서 출발하여 장차 김포군(金浦郡)으로 나가려 하였다. 이때 외정(外廷)에서는 역적 인(裀)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우의정 이병모가 어가 앞에 나아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아뢴 것에 대해 이미 비답을 받기는 하였으나, 신들이 추환(推還)하지 못하는 것을 강화 유수가 또한 어떻게 찾아내어 잡아가겠습니까. 신들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고, 승지 조진관 등이 번갈아가며 속히 유사(有司)에게 회부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엄숙하고 공경해야 할 자리에서 이렇게 번거롭게 한단 말인가.”하였다. 은행교(銀杏橋)에 이르러 경기 관찰사 이재학과 지방관 홍대협을 불러 보고 길가의 부로(父老)에게 고통을 물어보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오래된 환곡이라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하교한 바가 있다.”하였다. 어가가 김포 궁문 밖에 이르러 진무영(鎭撫營)의 호위 군사를 점열(點閱)하고 진무사 신광리(申光履)에게 호피 1령(令)을 하사하였다. 저녁에 김포 행궁에서 묵었다.
 
【영인본】47책 37면
【분류】*왕실-행행(行幸)/*왕실-사급(賜給)/*왕실-의식(儀式)/*왕실-비빈(妃嬪)/*윤리(倫理)/*인사-관리(管理)/*군사(軍事)/*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사법(司法)/*재정-공물(貢物)/*재정-역(役)/*풍속-예속(禮俗)

[註 6331]갑인년 : 1734 영조 10년. ☞
[註 6332]영고(寧考) : 영조를 말함. ☞
[註 6333]갑인년 : 1734 영조 10년. ☞
[註 6334]수용(睟容) : 임금의 초상화. ☞
[註 6335]장릉(長陵) : 인조의 능 곧 인조. ☞ 

34)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15일 신해 3번째기사

●유배지를 이탈한 인의 일을 논의하고, 조헌·윤우신 등을 치제하게 하다
대신·경재(卿宰)·승지·각신(閣臣)·삼사(三司)의 제신(諸臣)이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이 면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이 재차 상차(上箚)하여 속히 압송(押送)을 명하라고 청하고,

여러 승지가 아뢰어 속히 대신(大臣)·대신(臺臣)의 청을 윤허하라고 청하고, 삼사의 제신이 아뢰어 속히 아침에 하교한 대로 섬의 배소(配所)로 압송해 보내는 동시에 삼사의 원계(原啓)의 청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보지 않았다. 우의정 이병모가 경재를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서 아뢰기를,
 
“신들이 강화의 보고를 잇달아 접하건대 섬에 유배된 역적이 뛰쳐나간 자취가 김포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 합니다. 이는 신들이 모두 알 뿐만 아니라 실로 군민(軍民)이 모두 함께 본 사실입니다. 도로 유배보내라는 청을 윤허하셨으니 받들어 주선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만, 강화부에서는 형세상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묘당에서도 어떻게 지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외면상으로는 신들의 소청을 윤허하였으나 실은 윤허하지 않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습속이 참되지 못함을 민망히 여겨 일찍이 성(誠)이라는 한 글자에 간절히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강화의 역적 한 가지 일에 있어 지나친 거조가 없었던 바는 아니었으나 또한 일찍이 왔으면 왔다고 말하고 돌아갔으면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환하게 밝히셨기 때문에 그가 돌아감에 미쳐서는 백관과 만백성이 금석(金石)처럼 봉행하였습니다. 그 근심은 지나친 거조가 정말 비상함에서 나온 것에 있을 뿐이었지 흉인의 종적이 향한 곳을 알지 못함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강화 유수의 보고를 보니, 어리둥절하여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배소로 돌려보내려 해도 사세가 미치지 못하고 지휘도 할 수 없는 것은 앞서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 신들이 어찌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행궁(行宮)의 합문(閤門)에서 이런 거조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밝은 명을 내리시어 섬의 배소로 돌려보내도록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아침에 경들의 말을 윤허한 것은 분란을 그치게 하려 함이었지 윤허한 뒤에 아끼거나 막으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조가(朝家)에서 상관할 바가 아닌데, 경들이 복합(伏閤)하니 이 무슨 거조인가. 이미 백일(白日)에 날아서 올라간 것이 아닌 바에는 참으로 이른바 ‘다만 이 산속에 있을 뿐이다.[只在此山中]’라는 것인데, 도리어 어리둥절하다는 등의 말을 계사(啓辭) 안에 어려움 없이 쓰는 것은 정말 어떻다 하겠는가.”하였다. 이병모 등이 재차 진계(陳啓)하니, 비답하기를,
 
“금방 돌려보냈다. 이미 보낸 뒤에 만 사람이 모두 보았으니 경들은 물러가도록 하라.”하자, 이에 제신이 물러갔다. 승지를 보내어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우저서원(牛渚書院)과 정헌공(貞獻公) 윤우신(尹又新)·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충강공(忠康公) 윤형갑(尹衡甲)·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의 무덤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열공 조헌의 도덕과 절의는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므로 그 유집(遺集)을 열람할 적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곤 한다. 지난해 김 문정공(金文正公)을 문묘(文廟)에 올려 제향할 적에 어찌 혹시라도 그 사이에 취하고 버리며 높이고 낮춤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는가. 다만 아울러 거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마음속에 걸려 잊혀지지 않는다.

듣건대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여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거리에 있다 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정헌공 윤우신·문열공 윤섬·충간공 윤형갑·충간공 윤계의 일문(一門)의 충절은 항상 개연(愾然)히 흠모하던 바이다. 지금 그 묘소를 지나가면서 어찌 뜻을 보이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갑인년의 고사에 의거하여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7책 38면
【분류】*왕실(王室)/*정론(政論)/*사법-행형(行刑)/*인물(人物)/*윤리-강상(綱常)/*풍속-예속(禮俗)/*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6336]김 문정공(金文正公) : 김인후(金麟厚). ☞ 

35)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16일 임자 1번째기사

●김포 군수와 과천 현감을 불러 고을의 폐단을 묻고, 화성으로 출발하다
김포 군수(金浦郡守) 홍대협(洪大協)과 과천 현감(果川縣監) 김이유(金履裕)를 불러 보고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물어보았다. 홍대협이 아뢰기를,
 
“본군의 민호(民戶)는 1천여 호에 지나지 않는데 군액(軍額)은 1천 7백여 명이니, 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김이유가 아뢰기를,
 
“개울이 되어버린 옛날 재결(災結) 13결(結)이 영재(永災)에 들어가지 않아서 해마다 생판으로 징수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화성(華城)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김포 행궁에서 출발하였다. 수찬 한치응(韓致應)이 도중에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의 일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바로 환송(還送)한 것은 만 사람이 눈으로 본 바라고 확답하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믿지 않을 수 없어 모두 즉시 물러갔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서 들으니 분위기가 전혀 바뀌지 않았으며 밤부터 새벽까지 또한 한 사람도 돌려보낸 일에 대해 들어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교외의 황벽(荒僻)한 처소에서 홀로 역적 놈과 안온히 밤을 지냈는데, 대신·각신(閣臣)·삼사·시위(侍衛)의 신하는 태연히 사처(私處)에 물러가 거처하고 있었으니, 오늘날 신하의 분의(分義)가 쓸어낸 듯 다 없어졌습니다. 신들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으니, 처분을 내려 신들의 불충(不忠)한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만 사람이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여러 신하들이 대면을 청하며 합문(閤門)에 엎드려 있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어서 삼사의 소청대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도록 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가가 능곡리(能谷里)에 이르러 머물러서 조금 쉬었다. 승지가 아뢰기를, “대신이 옥당(玉堂)의 차자의 말과 관련하여 감히 반차(班次)에 태연히 있지 못하겠다 하여 산반(散班)으로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가를 수행하는 대신은 오직 한 사람뿐인데, 이처럼 의리를 내세워 피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낮에 부평(富平) 행궁에서 쉴 때 지방관 윤광석(尹光碩)을 불러 보고 조금 뒤에 출발하여 안산(安山)의 행궁으로 향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숙원(淑媛) 조씨(趙氏)의 묘소가 화유귀주(和柔貴主)의 무덤과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예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어찌 슬픈 감회를 견딜 수 있겠는가. 어가가 지나갈 때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은 선릉(宣陵)의 의빈(儀賓)으로서 그 묘소가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 옆에 있고, 영신군(永新君)과 함원군(咸原君)은 모두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후예로 그 묘소가 바라다 보이니,

또한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고 영의정 문간공(文簡公) 이천보(李天輔)가 수립한 우뚝한 공로를 내가 어찌 차마 잊겠는가. 지금 그 묘소가 있는 고을을 지나가니, 헌걸차게 조정에 출사하던 의용(儀容)을 마치 엄숙하게 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어가를 멈춰 출발을 늦추고 치유(致侑)의 제문(祭文)을 부르는 대로 쓰게 하여 그 손자인 대교(待敎) 이존수(李存秀)를 보내 유제(侑祭)하도록 하라.

고(故) 중신(重臣) 이문원(李文源)은 바로 훌륭한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는데도 아직까지 시호(諡號)가 내려지지 않았으니, 곧 본가로 하여금 속히 시장(諡狀)을 지어 홍문관으로 이송(移送)하도록 하라.”
 
【영인본】47책 38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인사(人事)/*군사-군정(軍政)/*왕실-행행(行幸) /*왕실-비빈(妃嬪)/*정론(政論)/*사법(司法)/*풍속(風俗)/*가족(家族)/*재정(財政)/*농업(農業)/*호구-호구(戶口)

[註 6337]영재(永災) : 영구히 재결(災結)로 처리하는 것. ☞
[註 6338]선릉(宣陵) : 성종의 능. 곧 성종을 가리킴. ☞ 

36)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18일 갑인 2번째기사

●김포·안산 등의 구환을 면제해 주도록 하고, 제술 등의 시험을 지시하다
득중정(得中亭)에 나아가 작은 표적을 설치하고 왕이 다섯 차례 쏘았는데 화살 8발이 맞았다. 여러 장신(將臣)에게 편을 갈라서 활을 쏘도록 명하였다. 상이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에게 이르기를,
 
“행차가 지나온 고을 가운데 김포는 구환(舊還)을 탕감하였고, 안산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인천과 부평의 제읍(諸邑)은 어떻게 혜택을 베풀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남양 부사의 말을 들으니, 민정(民情)이 모두 구환의 감면을 원하나, 외람되이 감히 아뢰지 못한다 합니다.”하고, 장용 내사(壯勇內使)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근래 외읍의 환곡은 분부를 받들어 정퇴(停退)한 것도 있고 그대로 수납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혼동하여 구환이라 일컫고 있는 등 너무도 뒤죽박죽입니다. 감면하는 절차를 차라리 간략하게 할지언정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곡에서 모곡(耗穀)을 받는 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다. 백성에게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너무 많은데, 어찌 구환의 감면을 아끼겠는가.”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에 장릉(章陵) 참배를 인하여 다행히 한 해 안에 재차 원침(園寢)을 배알(拜謁)하게 되었는데, 경유한 길이 과천·시흥·김포·부평·인천·안산·광주·남양·수원 등 모두 10개 고을이다. 우리 백성의 혜택을 바라는 마음을 생각하건대 어찌 한갓 의장(儀仗)의 성대함만을 바라보게 할 수야 있겠는가.
 
김포는 처음 역참에서 묵을 때 선조(先朝) 갑인년 이후로 처음인 점을 감안하여 이미 특별히 혜택을 베풀었고, 양천도 감면하는 조처가 있어서 구환(舊還) 중 가장 오래된 연조(年條)의 것을 탕감하였다. 부평·안산의 구환은 가장 오래된 1년 조를 탕감하고, 당년의 환곡(還穀)에 대한 모곡을 특별히 면제하라. 인천·남양은 비록 행차가 지나가기만 한 고을이나 처음으로 의장을 본 곳이다.

지나간 곳의 백성들이 지고 있는 구환으로서 문서에 실려 있는 것은, 원근을 논하지 말고 지방관이 백성을 모아 놓고 효유한 뒤에 문권(文券)을 불태우라. 시흥·과천·광주만 유독 누락시킬 수는 없다. 하물며 처음 지나간 곳인데 또한 어찌 달리하겠는가. 출궁(出宮)과 환궁(還宮) 때 행차가 지나간 곳의 백성이 지고 있는 구환은 또한 그 문권을 불태우도록 하라.

구포(鷗浦) 역시 처음 지나간 곳인데 기유년 이후로 백성들의 편중된 노고가 많았다. 구환은 문권을 불태우고 환모(還耗)는 탕척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뜻을 보이도록 하라. 행차가 지나간 지방의 벼가 혹 짓밟힌 곳이 있으면 해당 도로 하여금 곡식 소출(所出)의 수량만을 환산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유생은 제술(製述)에 응시하고 장교와 군졸은 활 쏘기를 시험 보게 하되 지난해 하교한 대로 거행토록 하라.”하였다.
 
【영인본】47책 39면
【분류】*왕실-행행(行幸)/*왕실-의식(儀式)/*구휼(救恤)/*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군사(軍事)/*재정(財政)/*인사-선발(選拔)
 
[註 6352]구환(舊還) : 오래된 환곡. ☞
[註 6353]갑인년 : 1734 영조 10년. ☞
[註 6354]기유년 : 1789 정조 13년. ☞ 

37)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25일 신유 1번째기사

●이재학의 건의에 따라 양천의 백성들도 환곡의 모곡을 감면받게 하다
경기 관찰사 이재학(李在學)이 아뢰기를, “이번 연로(輦路)의 고을로서 김포·부평·안산 등의 고을 백성들은 모두 당년의 환곡의 모곡을 감면받는 혜택을 입었으나 양천만은 홀로 동일하게 대우받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똑같이 모곡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영인본】47책 40면【분류】*왕실-행행(行幸)/*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재정(財政)
 
38)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 가경(嘉慶) 2년) 8월 7일 계묘 1번째기사

●15일에 장릉을 참배할 때 진무사가 나가 주둔하게 하다
이달 15일에 상이 장릉(章陵)을 참배하려 하는 일과 관련, 병조에서 행행할 때의 척후와 복병을 표신(標信)과 병부(兵符)를 내어 징발하기를 청하는 일로 계품하니,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진무사(鎭撫使)가 중군(中軍) 종사관(從事官)을 거느리고 장려(壯旅)와 의려(義旅) 각 1초(哨)씩을 뽑아내어 통진 부사(通津府使)와 함께 어가(御駕)가 가기 하루 전에 김포(金浦) 숙소에 주둔해 있다가 표신을 기다려 계엄을 풀도록 하라.”하였다. 우의정 이병모가 상차(上箚)하기를,
 
“병조의 계목(啓目)에 대해 판부(判付)하신 것을 보고는 밤새도록 지극히 방황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후로 성상께서 하교하시어 정신(廷臣)을 준절히 책망하시면서 매양 망령되게 헤아리고 억측으로 요량하는 것은 큰 죄라고 하셨는데,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긴 합니다.

그러나 망령된 헤아림과 억측의 요량도 매양 혹 불행히도 맞는 적이 있으니,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 북향하여 섬기는 자가 깜짝 놀라며 움찔 두려워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설사 참으로 다른 일은 없고 다만 보장(保障)의 군용(軍容)을 보고자 하실 뿐이라 하더라도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전하의 지나친 거조가 이미 적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국가가 군민(軍民)과 굳게 결속하여 위급한 때에 의뢰함이 있는 것은 하나의 신(信)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막 섬 지방의 농사가 여물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조련을 정지시켜 뭇 민정(民情)이 기뻐하고 감격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홀연히 장려(壯旅)와 의려(義旅)를 뽑아내어 주둔시켜 하룻밤을 지내게 한다면 기뻐하던 자가 시름겨워하며 기가 죽고 감사하며 축원하던 자가 놀라 의심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대중을 따라 급히 서두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정성이 조금도 미더움을 받지 못하여 죄만 더욱 쌓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국가 형세를 논하건대, 반드시 정항(鄭沆)처럼 불가(不可)한 도신(道臣)만을 얻은 뒤에야 유지할 수가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진무사(鎭撫使)가 나가 주둔하라는 명을 특별히 중지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조(先朝)께서 행행하여 서교(西郊)에서 묵을 때의 호위도 진무영(鎭撫營)의 군병을 썼는데, 하물며 김포(金浦)의 숙소는 진무영과의 거리가 다만 근교(近郊) 사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해영(該營)의 군병을 조발(調發)하여 해군(該郡)의 숙소를 호위하는 것은 옛날의 전례에 비하면 크게 폐해를 제거했다고 할 만하고 또한 크게 비용을 줄였다고 할 만하다. 이에 앞서 조련을 정지하라는 명은 바로 이번에 뽑아내어 쓰기 위함이었다.

2만여 명을 휴식시키는 것을 2백여 명의 징발과 비교하면 그 많고 적음과 어려움과 쉬움이 또 과연 어떠하겠는가. 경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도리어 근래의 지레 헤아리는 속습(俗習)을 본받은 것임을 면하지 못하니, 저으기 경을 위해 취하지 않는 바이다. 의사로써 뜻을 지레 헤아리며 뜻으로써 일을 지레 헤아려 일마다 모두 지레 추측하는 공부를 쓰려 한다면 세상에 어찌 조처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또 진실로 이와 같다면 장릉(章陵)에 행행하는 것까지도 어찌 명령을 내리던 초기에 중지하기를 청하지 않았는가.”하였다.
 
【영인본】47책 37면
【분류】*왕실-행행(行幸)/*군사-군정(軍政)/*군사-중앙군(中央軍)/*군사-병법(兵法)

 
39)정조 52권, 23년(1799 기미/청 가경(嘉慶) 4년) 11월 6일 경신 4번째기사

●경기 관찰사 서정수가 노복들의 약탈 행위에 대한 장계를 올리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장계를 올리기를,
“이달 초하루에 내사(內司)의 노복 10여 명이 김포(金浦)의 민가에 돌입하여 문을 부수고 수색하면서 사람들을 구타한 뒤 돈과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만약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난동 부린 내사 소속의 노복들에 대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법 규정을 살펴 엄히 단속토록 하고, 내사의 관원에 대해서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
 
“내사에 소속된 자들이 민간에 폐를 끼치면서 허다하게 범법 행위를 저지르다니 정말 증오스럽기 그지없다. 형조에 엄히 신칙하여 형장(刑杖)을 되우쳐서 공초(供招)를 받은 뒤 보고하라고 분부하라. 그리고 만일 한 명이라도 누락될 경우에는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또한 엄히 처치할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라.
 
요즘 듣건대 사복시에 소속된 자들이 지방에 내려갈 때에도 폐단을 끼치는 것이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몰이꾼들을 각별히 단속하라는 뜻으로 해랑(該郞)이 패(牌)를 내줄 적에 엄히 신칙토록 하라. 그리고 이 뒤로 사(司)에 속한 자들이 폐단을 일으킬 경우에는 일일이 감영에 보고토록 하고, 만약 혹시라도 덮어둘 때에는 그 수령 역시 죄를 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뜻으로 형조에 회유(回諭)하고 공초를 받아 보고토록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 일이 있기 전에 얼마나 엄하게 신칙했던가. 그런데도 단속할 줄 모르다니 정말 증오스럽기 그지없다. 이른바 재복(再福)이라는 자는 경기 감영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즉시 해(該) 군수로 하여금 그 고을의 양반과 천민들을 그 일이 발생한 곳에 모이도록 한 뒤 그를 엄히 다스리게 하고 나서 바로 갑곶진(甲串鎭)의 사공(沙工)으로 충정(充定)토록 하라.

그리고 앞으로 사(司)에서 강화에 내려가는 자들이 폐단을 일으킬 경우, 그 당사자는 우선 놔두고라도 당해(當該) 차지 중관은 양화도(楊花渡)의 관령(管領)으로 충정하고, 두목과 이예(吏隷)들은 모두 형추(刑推)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고, 이를 관아의 벽에 써 붙여놓고 준행토록 하라.” 하였다.
 
【영인본】47책 217면【분류】*신분-천인(賤人)/*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사법-치안(治安)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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