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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순조실록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3. 순조실록 15건  
 
1)순조 4권, 2년(1802 임술/청 가경(嘉慶) 7년) 9월 12일 경진 3번째기사

●비국에서 장용영의 철파·호조 등의 노비공 급대에 관해 아뢰다
비국에서 말하기를,
“장용영(壯勇營)을 철파한 뒤에 돈·곡식·무명·베, 둔토(屯土)·군기(軍器)·공해(公廨)를 구처하여 이속(移屬)하고 군병(軍兵)을 접제(接濟)하는 것과 호조·내수사 각 아문(衙門)의 노비공(奴婢貢) 급대(給代)를 조처하는 방도를 각각 별단(別單)을 갖추어서 올립니다.”하였다.【돈·곡식·무명·베의 구처 별단 각항 쌀의 합계 2만 3백 62석은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각항 쌀의 합계 6천 8백 23석은 호조에 소속시킨다.

○각항 콩의 합계 2천 1백 66석은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각항 콩의 합계 2천 6백 92석은 호조에 소속시킨다. ○각항 무명의 합계 2백 15동은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각항 무명의 합계 2백 40동은 호조에 소속시키며, 각항 무명의 합계 4동은 병조(兵曹)에 소속시키고, 각항 목 합계 24동은 훈국(訓局)에 소속시키며, 각항 무명의 합계 22동은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키고, 무명 8동은 어영청(御營廳)에 소속키시며, 무명 20동은 영남에 소속시킨다. ○각항 베의 합계 24동은 호조에 소속시키고, 각항 베의 합계 15동은 병조에 소속시키다.

○각항 돈의 합계 4천 6백 냥은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 합계 2천 1백 55냥은 호조에 소속시키며, 각항 돈의 합계 4백 53냥은 금위영에 소속시키고, 각항 전 합계 3백 13냥은 어영청에 소속시킨다. 돈 44냥은 군기시(軍器寺)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의 합계 2천 8백 88냥은 병조에 소속시킨다. 각항 돈의 합계 1천 8백냥은 경기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의 합계 1만 4천 6백 7냥은 호서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의 합계 6만 5천 9백 38냥은 관서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의 합계 1만 6천 2백 13냥은 호남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의 합계 7천 6백 70냥은 영남에 소속시키고,

각항 돈 합계 9천 6백 79냥은 호서에 소속시키고, 돈 3천 냥은 관동에 소속시키고, 돈 1천 냥은 관북에 소속시키고, 돈 9천 냥은 광주(廣州)에 소속시킨다. ○별고(別庫)에서 관할하는 것 및 향색(餉色) 환곡(還穀)의 그대로 나누어 주었다가 모곡(耗轂)을 취하는 질(秩). 각항 벼의 합계 6만 3천 6백 75석, 좁쌀 1백 11석은 경기에 소속시킨다. ○각항 좁쌀의 합계 1만 4천 석은 관서에 소속시키고, 좁쌀 9백 석은 해서에 소속시키고, 쌀과 좁쌀 합계 1천 1백 94석은 호서에 소속시키고,

각항 쌀의 합계 2백 86석은 호남에 소속시키고, 쌀 4천 석은 영남에 소속시키고, 각항 쌀의 합계 3천 5백 석은 관동에 소속시킨다. ○배봉(拜峯)의 쌀 2천 7백 석, 벼 7천 석, 노량(鷺梁) 환곡미 1천 20석, 고성(古城)의 환곡미 1천 석, 벼 3천 2백 28석은 각각 해당 진(鎭)에 소속시킨다. ○둔토(屯土)를 구처하는 질(秩), 부안·고부·고성·김해·창원·횡성·홍주(洪州)의 둔토는 광주(廣州)에 소속키시고, 어지(於支)의 둔토는 어영청에 소속시키고, 진위·음죽·연천·시흥의 둔토는 균역청에 소속시키고,

봉산·황주·옹진·안주·박천·장흥·정주(定州)·진위(振威)·고양·김포·지평(砥平)·양근(陽根)·가평의 둔토와 전곶(箭串)의 내전세(萊田稅), 흥덕동(興德洞)의 포전세(圃田稅), 도저동(桃渚洞)의 포전세, 연곡사(鷰谷寺) 백지(白紙)는 내수사에 소속시키고, 수원·안산·시흥·용인의 둔토는 수원부에 소속시키고, 장연(長淵)·광주(廣州)·가산(嘉山)·고성·영유(永柔)·공주·이천(伊川)·용강(龍岡)·음죽·파주의 둔토는 군역청에 소속시키고, 과천의 둔토는 노량진(鷺梁鎭)에 소속시키고, 배봉의 둔토는 해당 목관(牧官)에 소속시킨다.

○외별고(外別庫)에서 관할하는 유천(柳川)·평산(平山)·신천(信川)의 둔세(屯稅), 장수사(長水寺) 세와 수성고(修城庫)에서 관할하는 대유(大有)의 둔토, 도지(賭地)의 조(租)와 울천고(蔚千庫)에서 관할하는 화소 내세(火巢內稅)·연산 둔세(連山屯稅)·평신 둔세곡(平薪屯稅穀)과 아병(牙兵)의 수포(收布) 7백 동 이상은 본래 오영(五營)에서 관할하던 것이나 그대로 수원부에 소속시킨다.】
 
【영인본】 47 책 438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재정(財政)

2)순조 6권, 4년( 1804 갑자 / 청 가경(嘉慶) 9년) 6월 13일 경오 1번째기사

●경기·해서에서 진휼을 끝마치다
경기·해서에서 진휼(賑恤)을 끝마쳤다.【경기 통진(通津) 등 다섯 읍진(邑鎭)의 기민(饑民)이 3만 3천 9백 78구(口), 진휼 곡식이 3천 1백 70석 영(零)이었고, 해서는 연안(延安)·배천(白川) 두 읍의 기민이 5만 6천 4백 95구, 진휼 곡식이 2천 6백 70석 영이었다.】
 
【영인본】 47 책 482 면【분류】 *구휼(救恤)
 
3)순조 10권, 7년( 1807 정묘 / 청 가경(嘉慶) 12년) 3월 17일 기미 2번째기사

●효자 이복운 등에게 증직하고 급복하다
예조에서 효자인 양주(楊州)의 선비 이복운(李復運)과 공주(公州)의 선비 민언수(民彦洙)를 증직(贈職)하고, 효부(孝婦)인 민언수의 처 박씨를 급복(給復)하며, 효자인 덕산(德山)의 선비 이덕채(李德采)와 서원(西原)의 고 통덕랑(通德郞) 이규관(李奎觀)을 증직하고, 자인(慈仁)의 고 장사랑(將士郞) 김경복(金景復)을 급복하며, 열녀인 통진(通津)의 고 통덕랑 권화언(權崋彦)의 처 이씨와 효부인 춘천(春川)의 고 통덕랑 이현정(李鉉鼎)의 처 신씨(申氏)를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모두 유생(儒生)들이 상언(上言)하였기 때문이다.
 
【영인본】 47 책 576 면【분류】 *윤리-강상(綱常) / *인사(人事) / *재정-역(役)

 4)순조 11권, 8년( 1808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2월 17일 무신 2번째기사

●경기 암행 어사 홍의영이 수원 유수 이집두 등 각 고을 수령의 실정을 아뢰다
경기 암행 어사 홍의영(洪儀泳)이 서계(書啓)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 송면재(宋冕載), 장단 부사(長湍府使) 유상엽(柳相燁), 인천 부사(仁川府使) 송윤재(宋倫載), 고양 군수(高陽郡守) 서교수(徐敎修), 교하 군수(交河郡守) 이규신(李奎新),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형수(李馨秀), 통진 부사(通津府使) 성진은(成鎭殷),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인식(李寅植),

풍덕 부사(豊德府使) 장현택(張鉉宅), 광주 판관(廣州判官) 홍대형(洪大衡), 개성 경력(開城經歷) 홍병신(洪秉臣), 양천 현령(陽川縣令) 이공무(李功懋), 진위 현령(振威縣令) 박영수(朴榮壽), 양성 현감(陽城縣監) 정재중(鄭在中), 포천 현감(抱川縣監) 허임(許)이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경중(輕重)에 따라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또 마전 군수(麻田郡守) 이백(李)의 치적을 말하니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베풀게 하였다. 또 전 개성 유수(開城留守) 유한모(兪漢謨)에 대해 논하기를,
 
“본도(本都)의 유안(儒案)은 예로부터 이두(利竇)2359) 로 일컬어져 왔으므로,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는 자들은 범수(犯手)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유안궤(儒案櫃)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서 고을 안의 간사한 장교·교활한 아전과 부내(府內)의 거간꾼[駔僧]·모리배(謀利輩)들을 빠짐없이 끌어들이어 무수하게 첨입(添入)하여 은밀한 길을 통해 청촉(請囑)을 꾀하였고 암지(暗地)에서 뇌물을 요구하였으니, 일신의 뇌물을 탐내는 것은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조정에 오욕(汚辱)을 끼치는 것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하고, 또 수원 유수(水原留守) 이집두(李集斗)에 대해 논하기를,
 
“《서경(書敬)》 이훈(伊訓)의 상품 십건(三風十愆)2360) 을 대체로 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기악(妓樂)은 더러 폐지하는 때가 없이 행궁(行宮)의 엄숙하고 깨끗한 곳에서 시끄럽게 하고, 사후(射帿)는 어디나 불가(不可)한데도 선조(先朝) 때 봉식(封植)한 나무를 베어냈으며, 별효청(別驍廳)을 폐하여 교방(敎坊)을 만들자 거듭 살아 남는 구신(舊臣)들이 한탄하며 상심(傷心)함이 되었고, 도회시(都會試)에서 외람되게 상민(常民)과 천민(賤民)들을 선발하여 사림(士林)의 추담(醜談)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총애하는 기생이 정사(政事)에 간여하여 아문(牙門)의 기율(紀律)이 전도되었고 간사한 비장(裨將)이 재산과 뇌물을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영고(營庫)의 저축이 판탕(板蕩)되었으며, 성안에 신사(神祠)를 관명(官名)으로 창설함은 이미 저절로 의리가 없는데도 전패(殿牌) 앞에서 사은(謝恩)하였으니, 대저 무슨 거조가 이렇게 경솔하고 외람되기만 합니까? 경내의 백성들이 우박으로 인한 재해를 호소함이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장두(狀頭)인 백성에게 결곤(決棍)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근심을 나누는 체면이겠습니까?”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유한모는 어사의 서계에서 이와 같이 논열하였으니, 일이 속한 해가 오래 되었다 하여 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감단하게 하소서. 이집두는 연좌된 바가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린 것이 아니고 논한 바가 핵실(核實)이 부족하지만, 그 처지에서 이런 제목(題目)을 얻은 것 또한 이미 죄가 되니, 파직(罷職)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별단(別單)을 올려 전정(田政)이 잘못되어 재실(災實)·양호(養戶)·방결(防結)·조적(糶糴)을 범하는 여러 폐단과, 저치미(儲置米)를 남하(濫下)하여 군정(軍政)이 사고를 범한다는 일을 말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데 따라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영인본】 47 책 616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풍속(風俗)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법(司法) / *사상-유학(儒學)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재정(財政) / *군사(軍事)
[註 2359]이두(利竇) : 재물의 이익이 생길 만한 길. ☞

[註 2360]상품 십건(三風十愆) : 무풍(巫風)·음풍(淫風)·난풍(亂風)과 항상 춤추고[恒舞], 술에 취하여 노래하고[酣歌], 재화에 빠지고[殉貸], 여색에 빠지고[殉色], 항상 놀고[恒遊], 언제나 사냥하고[恒畋], 성인의 말을 모욕하고[侮聖言], 충직한 이를 거스르고[逆忠直],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이를 멀리하고[遠耆德], 미련하고 유치한 자와 친압하는 것[比頑童]. ☞ 

5)순조 14권, 11년( 1811 신미 / 청 가경(嘉慶) 16년) 3월 30일 무인 2번째기사
비국에서 제도와 각도의 전후 진폐 책자를 가지고 조목조목 회계하다
비국(備局)에서 제도(諸道)와 각도(各都)의 전·후 진폐 책자(陳弊冊子)를 가지고 회계(回啓)하기를,
 “경상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안동(安東)의 세은(稅銀)에 관한 것은 숫자가 너무 적어 보잘것 없으니, 특별히 영구히 감하여 줄 것을 해조(該曹)에 분부토록 하고, 제읍(諸邑) 가운데 금산(金山)·함창(咸昌) 두 고을의 수령이 진달한 바가 가장 수고로움이 크고 채택할 만한 것과 다른 제읍에서 조진(條陳)한 내용 가운데서도 시행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금산에는 환곡이 너무 많아 해가 갈수록 증가하므로 국가에서 주관하는 곡식만 남기고 각사(各司)에서 취모(取耗)하는 곡식은 모두 폐지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논하는 바가 생각 없는 견해는 아닙니다만, 각 아문(衙門)에서 소관(所管)하는 것에는 또한 제각기 경비로 없앨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혁파를 발의하여 논할 바가 아니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첨정(簽丁)에 대한 폐단은 전적으로 양반이라고 사칭하면서 신역(身役)을 면하려고 도모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첨군(簽軍)과 납포 규정을 모두 폐지하고 다시 신역(身役)의 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양반과 상민을 호적에서 조사한 후에 그에 따른 역가(役價)를 바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옛날 ‘몸[身]이 있는 곳에는 용(庸)2798) 도 있다는 법[有身有庸之法]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양반과 천인을 따지지 않고 호적을 조사하여 역가(役價)를 바치도록 제도를 정하여 시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선배의 논의가 있어 그것을 검토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하여 십분 행할 만한 실마리가 잡힌 연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전결(田結)에 대한 폐단은 전적으로 다시 측량을 하지 않고 온 나라의 전지(田地)에 대한 등급을 크게 평균화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측량하는 척수(尺數)를 9등(九等)의 법에 의거하여 통일시켜 결부(結負)의 제도를 모두 개혁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요즈음의 결속 수세(結束收稅)하는 법을 없애고, 건국 초기 이랑 수를 계산하여 등급을 나누던 제도를 시행하여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과 각 궁방전(宮房田)의 면세를 모두 혁파하여 양세(兩稅)의 액(額)을 모두 편입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였는데,

옛날식으로 이랑을 계산하는 것은, 오늘날 척량(尺量)하는 것이 설령 그 요긴함을 얻지 못했다는 탄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경장(更張)하기가 어려우며, 둔전이니 면세전이니 하는 등의 명색(名色)도 하루 아침에 혁파해 버릴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덕(盈德)의 선세(船稅)는 명색이 매우 많아 바닷가의 주민들이 폐해를 받고 있으니, 탈(頉)이 생기는 데 따라 감해 주어 사실대로 선총(船摠)을 작성토록 하여 불법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면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선총(船摠)이 줄어들었는데도 세금 바치는 것은 전과 같으니 이야말로 바닷가 주민들에게 쌓인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바다에 연한 여러 곳에서는 대저 이렇게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사단이 많으니 이미 보고를 받은 뒤에도 그것을 이와 같이 계속 방임할 수는 없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해청(該廳)과 의견을 교환하여 좀더 나은 방법에 따라 바로잡아 구제하도록 하소서.
 
1.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2799) 는 순전히 무명[木]으로 받아들이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보(軍保)는 돈[錢]과 무명을 반씩 섞어서 징수하게 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른 군보의 사례에 따라 반씩 섞어서 징수하거나 순전히 돈[錢]으로 징수하는 것을 그때마다 일례로 시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의 토성(土性)은 목화가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목(錢木)을 각각 반분하여 징수하게 하라는 청원이 비록 편의(便宜)한 방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포보의 사체(事體)는 다른 군보와 다르니 가령 흉년을 만나거나 임시로 적당히 해야 할 때가 있을 터인데, 만약 항식(恒式)으로 만들어 해마다 돈으로 대납하게 한다면 사체(事體)에 구애됨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하양(河陽)의 군정(軍丁)이 문란한 것과 역(役)에 대한 부담이 고르지 않은 것은 모두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속(冒屬)한 것을 태정(汰定)2800) 할 수 없어서 초래된 것이니, 금지를 무릅쓰고 투탁(投托)2801) 한 자는 조사하고 구명하여 채워 보충시키되, 그 본현(本縣) 시산(匙山)의 봉수군(烽燧軍) 1백 명을 양역(良役)의 각종 사고[頉]에 대신하도록 이충(移充)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고을로 역을 부담하는 호(戶)가 매우 적은데, 군총(軍摠)은 두루 두세 배를 넘습니다.

이것과 다른 것을 비교하면 너무나 서로 형평이 맞지 않으니 뼈에 사무치는 폐단은 당연한 염려로 되어 있으나, 고통을 다른 고을에다 옮기는 것은 이미 그런 방법이 없으니 봉수를 혁파하고 그곳의 군사를 얻어다 궐액(闕額)에 옮겨 채우라는 논의가 있기에 이르렀으나, 그 진달한 내용을 살펴보면, 앞에는 경산(慶山)의 성산(城山) 봉수가 있고 뒤에는 영천(永川)의 성황(城隍) 봉수가 있어 각각 조응(照應)함이 있어야 하는데,

해읍(該邑)의 봉수가 읍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원래부터 달리 거쳐서 전해 보낼 만한 곳이 없으며, 단지 영천·경산 두 곳의 봉수에만 의지한다면 스스로 올렸다가 스스로 꺼버릴 뿐이니, 일의 적합함을 잃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혁파하여 버리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만, 일이 변방(邊方) 경보에 관계되는 만큼 끝까지 어렵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형편의 긴박하고 느슨함을 자세히 살펴서 사리를 논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환곡(還穀) 장부가 문란한 것은 명색(名色)이 너무 많은 데서 말미암았으니, 군자곡(軍資穀)과 상진곡(常賑穀)만 비치하게 하여, 각영(各營) 등의 곡식 명색을 절반은 유치시키고 절반은 방출하되, 각영의 모조(耗條)는 시장에 내놓아 취용(取用)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비록 이것이 각 고을의 공통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매우 작은 고을에서는 더욱 절실하고 고통스런 폐단이 있으니,

바로잡아 구제할 방법으로는 의당 절반을 유치시키게 하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 아문(衙門)에서 모조(耗條)를 취하는 방법은 본래 균일하지 않았으니, 감분(減分)하는 행정을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고 많은 것은 줄이고 부족한 것은 보태는 방법을 별도로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소복(蘇復)시키고 구제하는 바탕을 삼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전대동(田大同)을 바칠 때에 서울과 지방의 이속(吏屬)에게 주는 정비(情費)2802) 가 해마다 증가하니 엄중히 금단(禁斷)을 가하여 각영(各營)의 예납(例納) 및 별복정(別卜定)의 정채(情債)와 각읍(各邑)의 무역 등의 명색을 정식(定式)으로 마련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정채에 대한 폐단은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심해지므로 앞서 거듭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본현(本縣) 한 곳의 폐단일 뿐만이 아니니,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에 공문을 보내어 경계하고 거듭 금지하는 뜻을 엄중히 더하게 하소서.
 
1. 봉화(奉化)는 매우 쇠잔한 고을이어서 사각(史閣)의 수호(守護)를 실로 혼자서 감당할 형편이 못되니, 안동(安東)의 춘양(春陽) 일부를 떼어 받아 수호하는 밑천으로 삼기를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계(地界)를 분할하여 옮기는 것은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으며, 그전에도 이런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다 서로 저촉되어 성사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금 갑자기 의논하여 이속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화사(覺華寺)의 승군(僧軍)에게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승군의 예(例)에 의해서 특별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각화사 승군의 요미에 대해서는 비록 강릉(江陵)·무주(茂朱)·강화(江華) 세 곳의 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함창(咸昌)의 금위군과 어영청 군사의 결원을 채우면서 매번 민호(民戶) 가운데서 비교적 충실(充實)한 자를 파정(疤定)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면역하는 것을 생각하여 역속(驛屬)으로 투입(投入)하니, 특별히 파즐(爬櫛)2803) 을 더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민이 역속으로 투입하는 것은 부역을 모면하려는 계책이니 이는 실로 여러 고을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도신(道臣)에게 공문을 보내어 경계하고 특별히 더 살피고 신칙하게 하소서.
 
1. 환곡이 가호(家戶)에 비하여 크게 서로 맞지 않으니 5,6천 석(石)을 이무(移貿)하게 하고, 당년의 모조(耗條)는 본읍(本邑)에서 시장 가격에 따라 돈으로 바꾸도록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값을 감하여 이무(移貿)하는 것은 이미 상정(詳定)한 법식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무(移貿)하는 곳의 석수(石數)에 따라서 감하게 되니 이는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은 것이며, 백성들의 고통에 관계되는 바입니다. 법은 늦추어 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해야 합니다. 앞서 한두 곳의 고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에 시행을 허락한 사례가 있으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일의 형세에 맞게 헤아려 계문(啓聞)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조령(鳥嶺)의 군향(軍餉)은 그 폐단이 더욱 심각하니 금년 가을 적곡(糴穀)을 수납할 때에 절반을 평창(平倉)에 이획(移劃)하고, 또 관할하는 다섯 고을 안에서 고을의 능력과 호구를 참작하여 알맞게 조절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령의 향미(餉米)는 사체가 엄중하며 흉년이 든 해에 수량을 나누어 바치게 하고 유치하는 것은 한때의 임시 편의에 불과한 것이니, 평년의 경우에 이 규정을 인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고을의 능력에 있어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각기 사정에 구애됨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 고을에서 상납할 때에 인정(人情)의 명색이 매우 많으니, 만일 법 외에 사사로이 바치는 자가 있으면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여러 고을의 폐단이 같으니 하양(河陽)의 예에 의거하여 일체로 신칙하소서.
 
1. 산청(山淸)에서 전세(田稅)로 바치는 무명을 다른 고을에서 사오는 것이 주민들의 큰 폐단이 되니, 돈으로 대납(代納)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읍은 바로 산협(山峽)의 고을이며 목면(木綿)은 토산[土宜]이 아니니, 사서 바치는 어려움은 그 형편상 본래 그러한 것이며, 유정지공(惟正之供)2804) 은 사체가 가볍지 않으므로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更張)하기에는 불가한 바가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정(軍丁)의 액수(額數)가 많으니 다른 고을의 이정(移定)한 예에 의거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액이 많은 폐단 역시 당연히 염려해야 할 것이기는 하나 다른 고을에 옮겨 보내면 다른 고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위(軍威) 가산(架山)의 향곡(餉穀)은 칠곡(漆谷)에 이속(移屬)하고, 칠곡 평창(平倉)의 곡식은 본현에 환봉(換捧)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가산(架山) 성향곡(城餉穀)의 폐단이 적지 않지만, 평창에서 받아들여 유치하는 것과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일은 구애됨이 많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종의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는 것이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않아서, 면포(綿布) 값이 오를 때를 만날 것 같으면 더러는 네 냥씩이나 되기도 하며, 원납(元納) 외의 잡비와 마감채(磨勘債)는 간혹 깎거나 감(減)하기도 하므로 다시 일정한 제도를 정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각양의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는 규정은 본래부터 들쭉날쭉하였으므로, 고루 일정하게 법을 정하는 것을 갑자기 의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연일(延日)의 여석(礪石)을 상공(常貢) 외에 각사(各司)에서 별도로 정하여 〈바치게 하는〉 폐단에 대하여 엄중히 신칙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여석은 채취하기가 매우 어려워 폐단이 아주 심각합니다. 의례히 바치는 숫자도 오히려 많아 민망하게 여길 정도인데, 더구나 이렇게 별도로 정한 명색이겠습니까? 더욱 진념(軫念)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앞서 거듭 경계한 것이 으레 하는 투로 돌아갈까 염려되니, 다시 해시(該寺)에다 거듭 경계하여 이런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1. 갈평(葛坪)·대송(大松)·북송(北松)의 세 봉산(封山)을 즉시 혁파하여 주민들에게 경작과 개간을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 곳의 봉산이 들 가운데 위치하여 동탁(童濯)2805) 의 근심을 면하지 못합니다. 경작을 하게 되면 주민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지지만 봉산을 하게 되면 주민에게 고통을 끼치게 된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 말과 같다면 그 명분 때문에 한갓 피해만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공문으로 도신에게 하문하여 형지(形止)를 상세히 탐지하도록 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1. 장기(長鬐)에서 상납하는 훈련 도감과 금위영·어영청 및 다른 아문의 군포를 모두 순전한 돈으로 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는 데 대한 일입니다. 비록 목화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군포는 사체(事體)가 중하니 영구히 순전한 돈으로 하도록 정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불가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상납하는 대동목(大同木)을 먼 지역에서 환무(換貿)하는데는 그 값이 갑절 이상 다섯 배나 되니 쌀로 바꾸어 하납(下納)에 이관시키게 하고, 상납하는 대동목은 서울에서 가까운 바닷가 고을에서 대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대동목을 상납하는 것이 쌀을 하납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일의 형세가 그러하지만 나누어 획급하는 일의 이해(利害)는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일의 형세를 참작하고 헤아려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사천(泗川)의 기병과 보병이 세 차례 번을 드는데 매번 정채(情債)가 있어 허비하는 바가 갑절이니, 지금부터는 나누어 바치지 말도록 하고 합해서 한차례 번을 들게 하여 금위영과 어영청의 보전(保錢)과 함께 일시에 상납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기병과 보병에 대하여 셋으로 똑같이 나누어 상납하게 한 것이 어떠한 법의(法意)에 근거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누어 바치는 것이 정말 폐단이 된다면 경비를 줄이는 일을 당연히 진념해야 할 것이며, 봉감(捧甘)은 각 해당 영(營)에서 편리한 대로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1. 기장(機張)에 표류되어 온 왜인에 대하여 단지 배를 정박하였다가 출발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 치보(馳報)하였는데, 그 병영(兵營)이 좌표(左漂)일 때에는 수영(水營)의 예규에 의거하여 치보하고, 우표(右漂)일 때에는 역시 순영(巡營)과 통영(統營)의 예규에 의거하여 1, 2차를 치보하는데, 합하여 한 첩(牒)으로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표류되어 온 왜인에 대하여 실정을 묻는 것은 본래 관계됨이 있지만 아홉 곳에다 치보하며 7, 8차례나 중첩되게 보내는 것은 비록 중대한 바에 연유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폐단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보고한 것에 의거하여 좌표인 때에는 수영의 예규에 의거하고 우표인 때에는 통영의 예규에 의거하여 합해서 한 첩으로 작성하게 하는 것이 크게 구애됨이 없다면 역시 폐단을 줄이는 방도가 될 것이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시행하게 하소서.
 
1. 왜료(倭料)2806) 로 환상미(還上米)를 찧어서 지급하는 것은 실로 저치미(儲置米)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니, 새로운 결미(結米)를 하납(下納)하는 조목 가운데서 2, 3백 석을 저치미로 덜어 내어 왜료로 지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왜료를 저치미에서 회감(會減)2807) 하는 것이 비록 옳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저치미가 없어서 쌀을 바꾸어다 지급해야 하니 이것이 실제로 폐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 폐단을 없애려고 해도 사정(事情)에 또한 구애됨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지자(持者)2808) 에 대한 품삯은 도내(道內)의 원회미(元會米) 가운데서 2천 2백 석을 본현(本縣)에 바꾸어 획급하게 하고 반분(半分)한 모곡(耗穀) 가운데서 1백 석을 해마다 가져다 쓰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자에 대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히 염려해야 하겠지만 원회미 가운데서 바꾸어 획급하는 것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웅천(熊川)에 표류되어 온 왜인의 양료(粮料)로 마련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어서 남상(濫觴)의 폐단이 되니, 지금부터는 평목(枰木)으로 교준(較準)2809) 하는 것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표류되어 온 왜인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할 때에 남상(濫觴)의 폐단이 적지 않으니 평목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바로잡고 구제하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전례(前例)에 따라 더 절약하는 뜻을 힘쓰도록 도신에게 분부하여 거듭 경계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1. 파손되어 부서진 어선이 세총(稅摠)에 묶여 현탈(懸頉)되지 못하는 것을 전파된 선척(船隻)을 현탈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결같이 영덕(盈德)에서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1. 문경(聞慶)의 고을 사정이 조잔(調殘)하니 상주(尙州)의 산양(山陽) 다섯 지역을 본현(本縣)에다 도로 예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산양 다섯 지역을 저쪽에서 나누어 이쪽에다 보태는 것은 진실로 병폐를 소복(蘇復)시키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만, 지역의 경계는 한정이 있으며 제도를 정하는 것은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갑자기 의논하여 이속(移屬)시킬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향(軍餉)의 좁쌀[小米]을 많이 축적하였다가 썩고 상하여 도리어 백성들이 해를 받으니, 해마다 2천 석을 한정하여 돈으로 마련하게 하고 8천 석에 이를 때까지 감축시킨 뒤에 비로소 반(半)을 방출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향인 좁쌀을 많이 축적하여 썩고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 진실로 그 말과 같아서 만일 돈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전(移轉)할 사정(事情)이 함창(咸昌)과 일반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서 변통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1. 경주(慶州)의 봉산(封山)이 주민들에게 고질적인 폐단이 되니 특별히 혁파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봉산의 폐단은 나무는 있는데 용도가 적합하지 않아 한갓 주민들에게 허다한 폐단만 끼치는 것이니, 명목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아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방 고을의 사정은 상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도신에게 공문으로 물어서 보고를 기다렸다가 품처하도록 하소서.
 
1. 안동(安東)의 군액(軍額)은 잡탈(雜頉)을 제외하면 군액을 채우기 어렵고, 신역(身役)을 겸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탱하여 견디지 못하겠으니, 역속(驛屬)으로 투입(投入)하는 것을 엄히 신칙하여 조사하여 규명하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민으로 역을 피하여 역속으로 투입하는 것은 단지 이 고을에서만 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역(驛)이 있는 여러 고을이 곳곳마다 이와 같아서, 우부(郵簿)나 관첩(關牒)2810) 이 한갓 시끄럽기만 하고 사체에 놀라움이 있으니,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조사·검토해서 만일 간계를 부렸다고 의심할 만한 자가 있으면 낱낱이 조사·규명하여 군액으로 옮겨 보충함으로써 뒷날의 폐단을 끊게 하소서.
 
1. 전정(田政)의 문란이 개혁되도록 하는 것은 오직 개량(改量)하는 데 달려 있으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경륜하여 다스리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전정의 문란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습니다. 경자년2811) 의 양전(量田)이 이제 1백여 년이 되었는데, 기름지거나 척박한 것이 전과 다르고 경계(境界)가 분명하지 않아서 세금이 점차로 줄어들고 백성 또한 곤란을 당하니,

개량하는 한 가지 일은 당연히 행해야 하는 바입니다. 종전에 한두 고을에서 역시 가능한가를 시험했었지만, 이해가 서로 수반됨이 없는지 보장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오직 수령이 단속하고 경계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해서 거행하라는 뜻으로 도신으로 하여금 알리게 하도록 하소서.
 
1. 환상(還上)이 많은 폐단이 되니 어느 아문의 곡모조(穀耗條)인가를 따질 것 없이 회록(會錄)하지 말게 하고, 당년에 돈으로 바꾸어서 다시 환상에 추가시키지 말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곡(耗穀) 위에 다시 모곡이 생기게 하여 점차로 많은 석(石)에 이르게 되니 참으로 폐단을 늘리는 단서가 됩니다. 각 아문의 곡모조를 기필코 당년에 돈으로 바꾸어서 첨록(添錄)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폐단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됩니다. 그전에도 이 일을 가지고 연품(筵稟)하여 행회(行會)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다시 더 거듭 경계하여 뒷날의 폐단을 끊게 하소서.
 
1. 우구치점(牛邱峙店)에는 주민들이 모두 흩어지고 은맥(銀脈)도 이미 끊어졌으니 세은(稅銀)을 영원히 감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영원히 감하도록 하는 특별한 은혜는 백성을 위하는 성대한 생각임을 나타내야 하니, 해조(該曹)에 분부해서 해도(該道)에 통보하여 여러 해 동안 고통을 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들 하늘 같은 혜택을 알리도록 하소서.
 
1. 양(羊)을 기르는 목장이 폐단이 되니 만일 혁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양을 기르기에 적합한 고을로 이송하게 하고, 양을 기르는 백성은 모두 양역(良役)으로 정하여 군액에 대신 보충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에서 양을 기르는 도리를 소홀하게 여겨 회안(會案)2812) 하여 회부한 바는 명목은 있으나 실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다 액수를 채우기까지 한다면 폐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구제하는 방법을 깊이 헤아려 장점을 따라 변통하게 하소서.
 
1. 상납할 때 인정으로 바치는 경비가 지나치니 먼저 경비(京費)에서부터 바로잡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마다 정도의 지나침을 더하고 명색도 여러 갈래이니, 지방 고을의 폐단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전후로 신칙함이 엄하였을 뿐 아니라 분명하였는데도 고을의 폐단은 그전과 같고, 여러 고을에서 말하는 폐단이 한결같은 내용들입니다. 청하(淸河)·함창(咸昌) 등의 고을은 이미 논열(論列)한 바가 있으니 다시 거듭 엄중히 하는 뜻을 더하여 각 해당 아문에 분부하도록 하소서.
 
1. 본읍(本邑)은 곡식이 귀하고 주민들은 가난하니 한전(旱田)의 밭두둑을 잇달아 물을 끌어 대어 논[畓]으로 개간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 해의 풍흉은 오로지 수전(水田)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으며, 길고(桔槹)2813) 로 물을 대는 것은 그 힘이 작아서 수차(水車)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백성들의 풍속이 평소의 습관에만 익숙하고 처음 보는 것에는 관심이 적어 비록 수차가 있다 하더라도 필시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관아에서 앞장서 권고하여 따라 익혀서 익숙하게 한다면 반드시 시행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한번 이용해 본 뒤에 이로우면 반드시 일반화 될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창원(昌原)에서는 이미 이 법을 시험삼아 사용한 적이 있으며 또한 성과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본주(本州)에서 역시 이 사례를 본받아 편리한 대로 시험삼아 이용해 보라는 뜻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당 읍에 모두 알리게 하소서.
 
1. 상주(尙州)에는 환총(還摠)이 너무 많으니 아문의 진분(盡分)하는 곡식은 줄이고 상진곡(常賑穀)으로 절반만 유치(留置)하는 숫자는 늘이며, 한전(旱田)으로 수전(水田)이 된 것은 수전의 예(例)에 따라 재탈(災頉)하게 해달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환상(還上)에 대한 폐단은 대체로 여러 고을의 공통된 문제인데, 진분하는 곡식을 줄여서 절반만을 유치하는 숫자로 만들게 하려고 하는 것이 감분(減分)하여 구폐(捄弊)하는 방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에 장애되는 점이 많아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전이었다가 논이 된 경우에는 급재(給災)하지 않는 것이 그전부터의 전례인데, 만약 개량(改量)하기 전에 변통하도록 허락한다면 전정(田政)이 더욱 문란해져 반드시 폐단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포보(砲保)는 다른 군포(軍布)의 사례에 의거하여 평년에는 전(錢)과 포(布)를 참반(參半)하게 하고, 면(綿)이 귀할 때에는 순전(純錢)으로 대납[代捧]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도감(都監)의 사체(事體)는 군문(軍門)과 차이가 있으니, 비록 한때 임시 편의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고정된 규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성주(星州)의 양정(良丁) 가운데 역속(驛屬)에 투입(投入)된 자는 조사하여 본역(本役)에 환입(還入)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정으로 역속에 투입된 자를 조사해서 캐내어 본역에 환입시키는 것은 본래 그만둘 수 없는 정사로서, 호포(戶布)의 일에 대해서는 선배들의 의논이 있어 여러 차례 시행하려고 하였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조목은 이미 안동(安東) 및 금산(金山)·함창(咸昌)에서 논열(論列)한 바 있으니, 한 가지로 시행하게 하소서.
 
1. 환상(還上)의 폐단은 일일이 지적하기 어렵습니다. 군향(軍餉)과 진자(賑資)를 제외하고는 각처(各處)의 구관(句管)을 모두 폐지하고 간혹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별도의 방법으로 설시(設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폐단을 말하면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각처의 구관을 모두 폐지하고 둔전의 설시를 의논하는 것은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갑작스럽게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정(軍政)이 문란하니 속오군(束伍軍)의 명색은 혁파하고 보포(保布)를 받는 제군(諸軍)에 대해서는 조련(操鍊)에 환부(還付)하여 속오군에 편입될 양정(良丁)과 더불어 정병(正兵)으로 통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노(雇奴)와 양정을 정병으로 통합하여 조련하게 하고서, 그들의 용겁(勇㤼)을 관찰하여 정병과 보병(保兵)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이 군제(軍制)에 관계되므로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1. 양전(量田)한 햇수가 오래 되어 전결(田結)이 문란하므로 쌀과 면포를 상납하면서 인정으로 바치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은 데 대한 일입니다. 전결이 문란하여 인정으로 바치는 비용이 번거롭게 많은 것은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곳곳마다 모두 그러한데, 이미 안동(安東) 등의 고을에서 논열(論列)하였으니 한 가지로 시행하게 하소서.
 
1. 대구(大邱)의 상납·하납(下納)하는 쌀과 포목을 한결같이 경사(京司)에서 수조(收租)를 분획(分劃)하는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상납·하납하는 쌀과 무명의 다과(多寡)와 편부(便否)는 가을의 수확이 풍년인가 흉년인가에 달려 있으므로, 사전에 미리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또 여러 고을에서도 반드시 이와 비슷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낱낱이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제언(堤堰)에 들어간 결복(結卜)으로 아직 사고[頉] 처리를 받지 못하였거나, 제언 아래 경작자가 백지(白地) 상태로 나누어 떠맡고 있는 경우에는 양안(量案)의 제언과 진전(陳田)의 사례에 의거 탈감(頉減)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상세히 조사해서 해조(該曹)와 왕복하여 좋은 점을 따라 변통(變通)하도록 하소서.
 
1. 김해(金海)의 강변[沿江]에는 전결(田結)의 포락(浦落)2814) 이 빈번하여 재탈(災頉)이 치우치게 많다는 것과, 토질이 척박한데 등급이 높은 곳을 적합하게 헤아려 등급을 낮추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강변 곳곳의 등급이 높은 전지에 대하여 적합하게 헤아려 등급을 낮추는 것이 비록 폐단을 소복(蘇復)시키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이미 개량(改量)을 하지 않고서 한갓 등급만 낮추려고 한다면 일에 구애됨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명도(鳴島)와 녹도(菉島) 두 섬의 염호(鹽戶)가 날마다 줄어드니 공화(公貨) 가운데서 2만 냥의 돈을 내어 이자 없이 도민(島民)에게 나누어 주고, 햇수를 한정하여 나누어 바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종전에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할 만한데도 폐단이 곧 뒤따라서 생겨 구제할 만한 약(藥)이 없고 이렇게 2만 냥을 대하(貸下)하라는 논의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한 섬에 까마귀처럼 모여 사는 백성들이 소금을 자본으로 하여 생업을 삼고 있어 본래 항심(恒心)이 없으니, 비록 한때의 요행은 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영구한 폐단이 될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전죽(箭竹)에 대한 공사(公私)의 책응(責應)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대나무를 생산하는 밭은 단지 두 곳뿐이니 다른 고을로 이송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대나무의 생산이 점점 그전만 못하니 해당 읍의 폐단이 됨은 미루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여러 읍의 대나무에 따른 폐단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고통을 옮기려고 해도 그 형세로 보아 방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바닷가의 주민들이 조잔(凋殘)한 것은 전적으로 고기 잡는 사역과 배를 빌리는 자본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본읍(本邑)의 어선 4, 5척을 다른 고을로 이송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의 고기잡이 배가 다른 여러 고을보다 많으니, 당초 배정할 때에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본읍에서 말하는 폐단만 듣고서 다른 고을의 사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갑자기 이송하도록 의논하는 것은 아마도 문제점이 있을 듯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구제하는 방도를 상세히 조사하게 하여 편리함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소서.
 
1. 군총(軍摠)의 액수가 많아 폐단이 치우치게 심하니 옮겨 온 군사를 도로 각읍(各邑)에 소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애당초 해읍(該邑)에다 나누어 배치한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행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환송(還送)하는 것을 의논하는 것은 허용키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해(寧海)의 황장목(黃膓木)을 봉진(封進)할 때, 판자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돈을 거두어 사서 봉진하는 것을 장점을 따라 변통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산은 모두 악석(惡石)으로 되어 있고 토질은 소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돈을 거두어 바꾸어 바치게 하니, 일이 매우 절실하고 민망합니다. 황장목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하므로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更張)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본부(本府)의 경계를 나누기 전부터 대소(大所)와 덕현(德峴) 두 봉수(烽燧)가 있었고, 봉군(烽軍)이 2백 명이기 때문에 군액(軍額)을 채우기에 몹시 어려우므로, 덕현의 봉수를 영양(英陽)에 소속시키고 1백 명은 영양현(英陽縣)에서 충정(充定)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곳의 봉수가 폐단이 된 것은 영양과 경계를 나눈 이후에 있게 되었는데, 지금 만약 봉수(烽守) 봉군을 영양으로 이송한다면, 영양의 사정에도 반드시 구애됨이 있어 피차간에 폐단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포 가운데 포보(砲保)와 악공보(樂工保)는 같은 포(布)인데도 값이 같지 않아 주민들이 어렵게 여깁니다. 사체(事體)는 그렇지만 정례(定例)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고치거나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소금 굽는 가마솥 여덟 좌(坐) 가운데 한 좌의 가마솥이 파손되었는데 다시 개비(改備)하지 않았으니, 세전(稅錢)을 탈감(頉減)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가마솥이 파손되고 가호(家戶)가 없어진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백지(白地)에다 세금을 징수하도록 책임지우니 참으로 매우 민망한 노릇입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적간(摘奸)하게 한 뒤에 해당 관청과 의견을 교환해서 잘 헤아려 변통하게 하소서.
 
1. 밀양(密陽)의 동서 남북에는 모두 밤나무 숲이 있는데, 남북의 두 밤나무 숲은 갑자년2815) 에 개간을 하였지만 토질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도로 밤나무 숲을 만들려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동서의 밤나무 숲은 바로 천년이나 된 오랜 숲이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단 공헌(供獻)의 소중함 뿐만 아니라, 그 밤나무 숲이 있음으로 해서 숙천(肅川)의 격류(激流)를 크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므로 주민들의 전지(田地)가 이것에 힘입어 터지거나 파손됨을 모면할 수 있으니,

민생(民生)의 이해(利害)에 관계된 바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중간에 그 숲을 베어 논을 만드는 계획은 상량(商量)함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한번 논을 조성한 뒤에는 이익을 얻는 것이 너무 적고 폐단이 되는 것은 매우 많습니다. 듣건대, 본읍(本邑)의 민정(民情)은 모두들 도로 밤나무 숲을 만들도록 원하고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상세하게 살피고 사리를 따져 장문(狀聞)하도록 해서 바로잡아 구제하는 조치를 취하소서.
 
1. 본부(本府)의 두 봉산(封山)을 양산(梁山)의 사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혁파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봉산에 대하여 여러 읍에서 말하는 폐단은 기본적인 줄거리가 대략 동일합니다. 경주(慶州) 등 고을의 사례에 의거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관찰하게 해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작원(鵲院)은 천혜의 관방(關防)이니 성을 쌓아 방비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 형편을 논한다면 진실로 관방을 설치해야 할 지역이며 환란[陰雨]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종전부터 이것을 의논하여 온 것이 또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래부(東萊府)에다 금정 산성(金井山城)을 쌓아 준공 보고를 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배치[制置]를 아직도 완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력(事力)이 조금 넉넉해지기를 천천히 기다려 다시 더 진지하게 의논하게 하더라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1. 동래(東萊)의 금정 산성(金井山城)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되, 둔전을 설치하는 자본은 매년 순영(巡營)에서 산성전(山城錢)으로 남아 있는 3만 냥 내에서 1만 냥을 한도로 획급하여 차차 이부(移付)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산성을 위해서 조치하는 방법으로는 토지를 소유하게 해서 둔전을 설치하고 주민을 모집하여 식량 거리를 경작하게 하는 것이 정말로 방어하는 요긴한 방법이 됩니다. 옛날부터 변경 수비에 대한 의논 가운데 이것을 우선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해 고을에서 논한 바는 매우 의의가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충분하게 더 상의하여 확정하도록 해서 소상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해안의 폐단은 다른 것에 비하여 가장 심하니, 어조(漁條)·방렴(防簾)은 한결같이 사목(事目) 가운데 8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에 의거하여 모두 하등(下等)으로 납세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부(該府)에서는 변방의 중요한 지역에 이러한 고질적인 폐단이 있어 주민들이 애오라지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니 참으로 민망스럽고 측은합니다. 당초 어조·방렴에 대해서 8분 1을 세금으로 내는 데 들어 있었던 것으로 가끔 3등(等)으로 했던 것은 어떠한 일의 단서에 인연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변천되어 내려온 사정도 상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해당 관청에 상세하게 보고하게 한 다음 장점을 따라 구처(區處)하도록 하소서.
 
1. 거제(巨濟)의 어장(漁場)에 어조(漁條)·방렴(防簾)·거처(去處) 등의 세 가지 명색이 있어 여러 갈래로 폐단이 많으니, 본읍에 소속시켜 한결같이 원총(元摠)에 의거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의 어조·방렴 등 세 가지 폐단은 실로 치료하기 어려운 병폐인데, 그것을 조종(操縱)하는 것은 오로지 통영(統營)2816) 에 있습니다. 영문(營門)에서 직접 집세(執稅)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감관(監官)을 차출하여 배를 추적해서 납부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있기도 하며, 또 실권을 잡고서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경우가 있어서, 바닷가 주민에게 뼈를 자르는 듯한 폐단은 진실로 당해 수령이 논한 바와 같습니다. 당해 영(營)에 거듭 경계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바로잡고 고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는 바닷가 주민들로 하여금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치우치게 당하지 않도록 하소서.
 
1. 바람에 꺾였거나 저절로 말라 버린 소나무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데, 경내(境內)의 주집(舟楫) 또한 망가지고 파손된 것이 많으니, 3년에 한차례씩 베어다 수선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어민들의 사정상 배 만들기가 어려운 것은 본래 그러한 형편이었으나, 허다한 선민(船民)에게 고루 혜택을 줄 방법이 없고, 봉산(封山)의 소나무 목재는 법의(法意)가 중대하며, 원할 때마다 번번이 따라주는 것 또한 형편상 어려우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천(永川)의 군총(軍摠)에 남칭(濫稱)하여 도탈(圖頉)하는 자가 있으니, 별도 조사하여 밝히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폐(軍弊)에 대해서는 이미 성주(星州)·함창(咸昌) 등의 고을에서 논열(論列)하였으니, 일체로 공문을 보내어 신칙하되 외람되게 유학(幼學)으로 일컫거나 역속(驛屬)으로 투탁(投托)하려는 경우는 도신(道臣)이 엄중히 거듭 경계를 가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1. 전총(田摠)으로 답(畓)의 지목(地目)에 들어간 것은 비록 재해를 만났다 하더라도 해마다 재탈(災頉)을 받지 못하니, 여러번 한재(旱災)를 당한 것은 한전(旱田)으로 환원해 달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전과 수답(水畓)을 반전(反轉)시켜 서로 바꾸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개량(改量)하기 전에는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천(榮川)의 전결(田結)이 문란한데, 묵은 전지[陳田]와 다시 일군 것이 서로 뒤섞였으니 특별히 개량(改量)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읍(該邑)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두 산 사이에 있으므로, 토질이 척박하고 주민은 가난하며 산이 무너지고 모래둑이 터져, 신유년2817) ·임술년2818) 의 큰 물을 겪으면서 문득 하나의 겁운(劫運)을 이루어, 강계(疆界)의 구분이 없어지고 세결(稅結)이 많이들 뒤섞여서 개량하는 행정이 실제로 시급한 업무가 되었으니, 당해 수령이 청한 바는 반드시 의견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사정을 헤아려서 편리함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1. 양산(梁山)은 무비(武備)가 허술하니 본군(本郡)의 환상미(還上米) 1천 석을 취모(取耗)에 획부(劃付)하여 요(料)와 시상(施賞)을 마련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 변경에 가까운 고을은 이교(吏校)를 격려하여 씩씩하게 방위를 잘하도록 하는 방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도(本道) 바닷가 고을의 곡부(穀簿)가 근래에 매우 빈 듯하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겠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경서(經書)를 반강(頒降)하여 유생을 권과(勸課)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먼 지방의 풍속은 어두우니 진흥시키고 권면하여 작성(作成)하는 방도를 당연히 진념(軫念)해야 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인쇄하여 지급하고 앞장서서 권면하여 실질적인 효과가 있게 하소서.
 
1. 각 궁방(宮房)의 둔세(屯稅) 징수를 위하여 차인(差人)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근래 지방의 고을에 차인으로 인한 폐단은 듣기에 놀랄 만한 것이 많으며 소민(小民)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연전에 먼저 한두 곳에서 보고를 받음에 따라 연품(筵稟)하여 신칙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해당 고을에서 폐단을 진술하였으니 역시 유추(類推)할 만합니다. 이미 그런 사실을 들은 뒤에는 별도로 신칙함이 없을 수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폐단을 당하는 단서를 조사하고 캐물어 엄중히 금단(禁斷)을 더하고 또한 사리를 따져 보고하게 하여 바로잡아 구제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소서.
 
1. 군포의 상납을 전운(轉運)하는 것이 폐단이 되는데, 상도(上道)의 각 고을은 서울과의 거리가 조금 가깝고, 또한 동래부(東萊府) 등의 지역은 하납(下納)할 군(軍)이 있습니다. 본군(本郡)의 경우는 동래부와 가까우니 본군에서 상납할 군(軍)을 상도에서 하납하는 군(軍)으로 바꾸어 정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도(該道)의 사정에 있어서 서울에다 바치는 노고를 줄이기 위해 가까운 이웃 고을로 옮겨서 바치게 하자는 것인즉, 이것은 폐단을 없애는 대단(大段)이라고 말할 만하나 바꾸어질 각 고을의 형편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는 역시 헤아려서 알기에 불가능한 점이 있으니,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할 만한 것은 품처하도록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이천(利川)의 환곡(還穀)으로 해마다 응분(應分)한 것이 거의 2만 4천 석에 가까운데, 환호(還戶)는 3천 6백에 불과하여 인족(隣族)에 대한 침징(侵徵)이 형세로 보아 피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 민호(民戶)를 헤아려서 분조(分糶)를 참작 결정하고, 그 나머지는 더러 환곡이 적은 고을로 이전하고, 더러는 모작(耗作)하는 조목에다 배수(倍數)로 분정(分定)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응분하는 환상곡은 거의 2만 4천 석에 가까운데 응수(應受)하는 환호는 3천 6백에 불과하니, 많은 양을 분배 받아 바치기 어려운 근심이 두루 인족(隣族)에게 미치게 됨은 형세로 보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환호와 환곡을 비교해서 헤아려 남는 것은 덜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야 하는데, 이는 바로 도신의 책임이니, 비록 경기의 사정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환상곡이 많은 폐단이 어찌 유독 이천만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반드시 원환상곡(元還上穀)의 숫자가 적어 순조(巡糶)를 잇대기 어려운 고을이 있을 것이니, 이쪽의 것을 옮겨 저쪽에다 보태면 진실로 적의(適宜)하여 곧 일거(一擧)에 두 가지가 편리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고을을 따라 금년부터 결단하여 도신이 세밀하게 더 참작하고 헤아려서 점차로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저 여러 고을의 적정(糴政)이 치우치게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지만 폐단은 균일합니다. 이는 오로지 곡품(穀品)의 정조(精粗)에 서로 차이가 나고 두곡(斗斛)의 대소(大小)가 같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두곡이 기준에 맞고 곡물의 품질이 정결한 곳에서는 곡물의 값이 본디 높기 때문에 연례(年例)로 각 항목의 작전(作錢)을 이곳에다 치우치게 떼어 주어 당연히 작전해야 할 예(例)보다 더 초과되는 것은 헤아리지 않으면서 유치(留置)하게 되어 있는 원곡(元穀)에다 모미(耗米)를 뒤섞어 놓기를 해마다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환상곡이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두곡에 흠이 있고 곡물의 품질이 나쁜 고을은 곡물 값이 언제나 낮기 때문에 연례로 작전하는 것 또한 모두 점점 유치하게 되어 이자 위에 이자가 생겨 많은 데는 더 많게 되고 적은 데는 더 적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고을의 수령이 논한 바, 모작조(耗作條)에 배수(倍數)를 분정(分定)하라고 말한 것은 이 고을의 이런 폐단 역시 여기에서 연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은 왕정(王政)에 있어 반드시 동일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크거나 작으며 규정에 맞거나 부족하여 일정하지 않으니 진실로 크게 놀라고 한탄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조적(糶糴)은 전적으로 백성의 식량이 되는데, 정결하게 바치고 정결하게 나누어 준다면 백성 또한 어찌 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간혹 능히 이와 같이 하지 못하여 바칠 때는 비록 정결하게 하였으나 나누어 줄 때에는 번번이 거친 것으로 주기 때문에 관아에서 실제로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서 백성 역시 관아에 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곡물이 거칠게 되는 폐단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러한 정결함과 거침을 가지고 관리들의 치적(治績)을 판단할 수 있으니,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는 인사 행정을 이러한 기준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정결하게 바치도록 경계하는 것은 별도로 거론할 것이 못되며, 가장 바로잡아야 할 것은 각 항목의 작전(作錢)을 각기 그 본곡(本穀)이 있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높은 가격이면 곧바로 추리(趨利)하여 응작(應作)할 것인데도 더러 전체를 유치하게 하기도 하고, 원곡(元穀)인데도 더러 침범하여 내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도신과 묘당(廟堂)이 있으니 다만 당장 그것이 법을 준수하는 것인지 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인지를 살필 따름입니다. 또한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울 필요는 없으니 사전에 이 뜻을 도신에게 분부하고 또 아울러 제도(諸道)에 공문을 내려 신칙하소서.
 
1. 통진(通津)은 각 궁방(宮房)의 무토 면세(無土免稅)2819) 가 해마다 내부(來付)하므로 전례에 따라 민결(民結)이 가장 많고 면세가 조금인 고을로 이송하게 하며, 각 묘소(墓所)의 면세조(免稅租)를 징수하는 즈음에는 원역(員役)의 무리들이 사단을 일으킬 근심이 없지 않다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토에 대한 면세를 윤정(輪定)하는 데에는 이미 정해진 규정과 연한이 있으니, 본읍(本邑)에서 정한 바가 이처럼 치우치게 많은 것에 대해서 만일 기한이 차지 않아서 윤이(輪移)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미리 기한이 차기 전에 정해 두고서 또 겹으로 정한 소치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개정하고 정리하게 하며,

각 묘소의 면세조에 관한 일은 무릇 절수(折受)한 토전(土田)에 차인(差人)이 함부로 수납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조정의 법령이 본래부터 아주 엄격한데, 요마(幺麿)한 원역의 무리가 공무를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풍습은 극도로 놀랍고 가슴 아픕니다. 이미 하송(下送)할 적에 조절(操切)2820) 하지 못했고 또 징수할 무렵에 금지시키거나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묘관(墓官)도 진실로 실수가 있었으나 도신 또한 어째서 신칙함이 없었습니까? 뒤에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바로 경기 감영에서부터 해당 원역을 추문하여 다스리도록 하되, 즉시 본사(本司)에 논보(論報)하여 엄중히 징계하는 바탕을 삼게 하소서.
 
1. 양근(楊根)에 있는 수어청(守禦廳) 아병(牙兵)의 신포(身布)는 다른 곳에 비하여 가장 무겁습니다. 따라서 노아병(奴牙兵)의 사례에 의거하여 숫자를 감하도록 규정을 정해야 하는 일과 서울의 문벌이 좋은 사족(士族)의 발인(發靷) 때에 예선군(曳船軍)을 세우도록 책임지우는 경우가 실로 많으니, 지금부터는 도선생(道先生)·읍선생(邑先生)의 사상(四喪)2821) 및 대신(大臣)·경재(卿宰)의 상사(喪事) 외에는 일체 막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수어청의 아병은 바로 단속하고 청조(聽調)하는 군사로,

신포(身布)가 다른 군사들 보다 본래 헐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가장 무겁다는 논의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지를 모르겠으며, 또한 단지 고을 수령의 말에만 의거하여 갑자기 변통을 더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해당 영(營)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그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도록 하고, 예선군에 대한 일은 일이 비록 잗달기는 하지만 백성들에게 폐단이 크니, 그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도신에게 분부해 규정을 정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1. 양천(陽川)은 군액(軍額)이 가장 적으나 보충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형태이건 군역(軍役)을 회피하려고 도모하는 부류는 개인적으로 서울에 있는 각영문(各營門)에 투속(投屬)하는 자들인데, 이를 일체 막고 금지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정(軍丁)이 몹시 구차한 폐단은 어느 고을이건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기전(畿甸)2822) 이 더욱 심하며, 본읍은 기전의 고을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고 외진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5백 명의 원액(原額)도 숫자를 채우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 원액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망하고 회피하니 투속을 금지시키지 않는다면, 전첨(塡簽)2823) 하는 데 대한 근심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각 해당 영문(營門)에 분부하여 만일 먼저 정해 두었거나 혹은 당연히 정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스스로 와서 투속하는 자는 일체 쇄환(刷還)하게 하소서.
 
1. 음죽(陰竹)의 읍기(邑基)를 옮겨서 설치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을 관아의 터를 옮기는 것의 편부(便否)는 멀리서 헤아려 결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고을의 수령과 충분히 상의하고 고을의 여론을 상세히 탐지해서 만일 정말로 옛터에서는 결단코 그대로 살기가 어렵고 새로 점지한 곳이 확실히 편리하고 낫다면, 청컨대 이치를 따져 장문(狀聞)하게 한 뒤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부(江華府)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두 가지 조목의 폐단은 급대(給代)나 견감(蠲減)을 따질 것 없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품처하게 하되, 목장(牧場)을 혁파하고 경작을 허락하게 하는 일은 해시(該寺)에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진강 목장(鎭江牧場)에 둔세(屯稅)를 더 바치도록 한 데 대해서는 이미 원세(元稅)를 징수하고 있는데다 또 둔세를 두어 주민들의 뼈를 깎는 듯한 폐단이 되고 있으며, 또한 선두포(船頭浦)·언답결(堰畓結)로 바치는 세미(稅米)가 많게는 70두(斗)나 되어 경작하는 주민들이 모두 다 흩어져 버렸으므로, 이 두 곳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도록 하는 청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논한 바 두 가지 조목을 살펴보면 윗 항의 수세(收稅)는 모두 해부(該府)의 수성고(修城庫)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 감해 주는 숫자는 형세로 보아 장차 급대(給代)를 해야 하는데, 급대하는 방법으로는 길상 목장(吉祥牧場)의 목축이 그전부터 번성하지 않아 지금은 버려 둔 목장이 되었으니, 이곳에 나아가 경작하도록 허락한다면 1백여 결(結)의 숫자를 바칠 수 있을 것이며, 수성고에서의 급대도 넉넉하게 남아 도는 숫자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달한 바가 진실로 의견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해시(該寺)의 사정도 이미 상세히 알지 못하고 목장의 형편도 역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해부(該府)에 고시(告示)하여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하고 해시와 의견을 서로 교환하도록 해서 편리한 데로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공충도(公忠道)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홍주(洪州) 등 14고을에서 더러는 사진(査陳)을 청하기도 하고 더러는 개량(改量)을 청하기도 하였으니, 전정(田政)의 문란함을 알 만하며, 왕정(王政)에는 경계(經界)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데, 이 고을이 이와 같다면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이 도(道)가 이와 같다면 다른 도도 알 만하다. 전정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민부(民賦)를 고르게 하겠는가? 지금 만약 일시에 행하려고 한다면 함께 거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폐단이 될 듯하니,

만약 각도의 도신과 수령으로 하여금 가장 문란한 곳부터 금년에 몇 고을을 개량해 나가게 한다면 10년이 못되어 거의 개량을 마치게 될 것이며, 번거롭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아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묘당에서 널리 의논하고 강구(講究)한 뒤에 품처하게 하라.’ 하시고, 군정(軍政)과 환곡(還穀) 등 절실하고 고질화된 병폐 외에 여러 가지 잡폐 또한 많이 있으니, 일체로 장점을 따라 품처할 일을 명하하였습니다.
 
1. 홍주(洪州) 등 14고을에서 혹은 개량(改量)을, 혹은 사진(査陳)을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전정의 문란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있지 않았으며, 그 폐단이 본래 한결같지 않아 고을마다 각기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사진과 개량을 청한 데 대해서는 마땅히 즉시 시행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만 이렇게 잇달아 흉년이 든 뒤에 갑자기 의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다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우선 가장 시급한 곳에 시험하되, 만일 실질적인 효과가 있으면 의당 차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공주(公州)의 충순위(忠順衛)·충익위(忠翊衛)의 군액(軍額)에서 회피하려고 도모한 자에 대해서는 해부(該府)와 해조(該曹)에 엄히 신칙하여 각별히 금단(禁斷)하도록 하고, 양정(良丁)의 포수(逋藪)2824) 에 대해서는 각 고을에 행회(行會)하여 낱낱이 조사해서 없애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지금의 생치(生齒)2825) 를 가지고 이들 군액과 비교해 보면 반드시 대신 보충하거나 빠진 것을 채우기에 어려움이 없을 터인데, 빠진 양정에 대한 허오(虛伍)가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여 백골(白骨)에 대한 징포(徵布)와 황구(黃口)에 대한 첨정(簽丁)이 백성들에게는 뼈를 깎는 듯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 보면, 정말로 충순위와 충익위에 거짓 기록으로 도첩(圖帖)하여 교묘히 군역을 회피하려고 하는 까닭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고을이 이와 같다면 한 도를 알 만하며 이 도가 이와 같다면 다른 도도 알 만합니다. 그러나 군역을 교묘히 회피하려는 것에 있어서는 충순위와 충익위에 거짓 기록하는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향교나 서원에 투탁(投托)하거나 지방 관아의 아전과 시골의 향임(鄕任)이 사사로이 모집하여 이름을 유학(幼學)이라고 속이거나,

선원 계파(璿源系派)2826) 라고 거짓으로 일컫는 부류와, 세력을 믿거나 부유함을 끼고 생활하며 한가하게 노는 무리들을 충순위나 충익위에 비교한다면, 그 숫자가 몇 갑절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군정이 어떻게 구차하고 어렵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폐단이 그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 오래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이로 말미암아 곤궁해지고 초췌해지며 군부(軍簿)는 이로 말미암아 문란하게 되었으니, 한결같이 도신의 발사(跋辭)2827) 에 의거하여 우선 본읍(本邑)에서부터 시행하되, 타도와 타읍에도 일체로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충주(忠州)와 양진(楊津)의 군향 미태(軍餉米太) 가운데 1만 석(石)을 한도로 정해진 수량의 반을 방출하고 남은 수량 및 반분(半分)에 대한 모미는 아울러 상정(詳定)으로 작전(作錢)하고 곡물이 적은 고을로 이송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향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향(城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민결(民結)을 따라 배비(排比)하여 나누어 준다면 백성들이 폐단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한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고을 수령의 보고와 도신의 말에는 반드시 참작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 있으니, 다시 새 도백에게 공문으로 하문한 연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서원(西原)의 환곡은 호수(戶數)와 비교하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또 병영(兵營)의 환곡 및 상당(上黨)의 군향(軍餉)도 있어 폐단됨이 너무 심하나, 병영의 환곡은 이미 지방(支放)하였고 군향의 숫자 또한 늘리지 않았으므로 병폐가 될 것이 없으니, 고을 환곡은 반분하여 취모(取耗)하고 풍년과 흉년을 따질 것 없이 상정(詳定)으로 작전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읍환(邑還)과 영환(營還)은 성향(城餉)과 함께 모두 백성들이 많이 받게 되는 폐단이 되니 오늘날에 이르러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영환과 성향을 당장은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읍환에 있어서는 더 늘리도록 하는 것으로 한결같이 도신의 말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1. 평택(平澤) 등 다섯 고을에 바닷물이 넘쳤을 때인 정묘년2828) 과 무진년2829) 두 해의 신포(身布)와 환포(還布)를 정감(停減)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려움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한산(韓山)과 비인(庇仁)에서 방병선(防兵船)을 개조할 때 부유한 주민을 대신 장수로 차출해서 부족한 것을 담당시킨 것은 실로 휼민(恤民)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호남(湖南)의 전병선(戰兵船)의 사례에 의거하여 공곡(公穀)을 나누어 주고 그 이자를 받아 보태어 쓰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산 등 두 고을의 방병선을 개조하거나 개삭(改槊)할 때에 부유한 주민을 대신 장수로 차출해서 부족한 숫자를 담당하게 했다고 하니, 듣고서 매우 놀라웠습니다. 다시 새 도백에게 좋은 방안을 찾아 폐단을 혁파하라는 뜻으로써 공문으로 하문하여, 상세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1. 청풍(淸風)·단양(丹陽)의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보미(保米) 및 포보(砲保)를 상납할 때에 서울과 지방의 쓸데 없는 비용을 중간에서 조종(操縱)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여 금단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청풍 등 두 고을의 대전(代錢)에 대한 청(請)은, 진실로 산골의 주민들이 마련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으나, 보미와 보목(保木)은 법을 만든 뜻이 있고, 군수(軍需)의 지방(支放)에 관계된 것이니, 갑자기 의논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것은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근래에 각 관사(官司)에서 정비(情費)를 과외(科外)로 거둬 들이는 것이 해마다 불어나고, 또 점퇴(點退)로 주구(誅求)하는 폐단이 있는 것은 이 두 고을뿐만이 아닙니다. 각별히 엄중하게 경계하여 정식(定式) 외에는 조종할 수 없도록 한다면, 대개는 조금이나마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터이니, 이로써 분부하게 하소서.
 
1. 태안(泰安) 등 세 고을의 각종 군포(軍布)에 대하여 옛 사례를 회복하여 모두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태안 등 세 고을의 각종 군포를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한 것이 비록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참반(參半)하도록 한 것도 여러 해가 되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하속(下屬)들이 〈담당 업무를〉 인연하여 징색(徵索)하는 것은 공통된 근심거리라 할 수 있으니, 일체로 각 관사(官司)에다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제천(堤川)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영춘(永春)의 사례에 의거하여 모두 돈으로 대신 바치게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가지 세금을 본래의 명목으로 운송 납부하게 한 것이 본래 정식(正式)인 바, 갑자기 의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것은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1. 황간(黃澗)에 있는 수어청(守禦廳)의 둔토(屯土)는 양향청(糧餉廳) 둔전(屯田)의 사례에 의거하여 둔감(屯監)을 보내지 말고 자관(自官)에 상납하게 하며, 둔우(屯牛)에 대한 세전(稅錢) 및 송아지 값은 지금부터 영영 줄이도록 하고, 천안(天安)의 둔전은 해마다 답험(踏驗)하여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며, 옛날의 둔세(屯稅)는 다른 둔전 사례에 의거하여 돈으로 상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황간 등 두 고을의 둔토에다 경감(京監)을 하송(下送)하는 것은 바로 해당 관청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폐단을 일으키는 한 가지 건에 대해서만 단연코 엄금(嚴禁)하는 것이 합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둔우를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60여 년을 경과하여 현재 남아 있는 우척(牛隻)이 거의 없고, 둔민(屯民)이 죽거나 유망한 지도 역시 오래되어, 인족(隣族)에 대한 징수가 반드시 따르게 될 형편이니, 특별히 영실(寧失)2830) 의 뜻으로 모두 혁파하게 하소서.

그리고 천안 네 곳 둔토의 재해(災害)로 인한 곡물의 손상과 백징 또한 매우 놀랄 만하니, 해당 관청에서 한차례 답험한 뒤에 당년(當年)에 면제해야 할 것 및 영구히 면제해야 할 것을 구별해서 규정을 정하고, 옛날의 둔토에 대하여 쌀을 바치게 한 것은 애당초 규정을 어떻게 정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세를 바치는 명목으로 수납하게 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양쪽이 편리하여 둔민이 힘을 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1. 음성(陰城)은 지역이 좁고 주민도 적으니 충주(忠州)의 석우(石隅) 이서(以西) 지역을 본현(本縣)에다 이속(移屬)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충주 석우의 이서(以西) 지역을 본현에다 이속하게 하는 것이 비록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등철(登徹)되지 못한 상소에 있었으나, 이쪽을 분할하여 저쪽에 주는 일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도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두 고을의 수령과 편부(便否)를 충분히 상의하여 다시 보고하도록 해서 품처하게 하소서.
 
1. 영춘(永春)에서 조자선(調字船) 한 척을 홀로 담당하게 되어 치우친 괴로움이 없지 않으니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다시 음성(陰城)과 나누어서 담당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자 참선(調字站船)을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일을 영세한 고을에서 홀로 담당하니 치우치게 괴롭다는 탄식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경신년2831) 에 이정(釐正)한 정식(定式)에 따라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관서(關西) 여러 고을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것과 도백(道伯)이 논한 것에서 만일 채택하여 시행할 만한 것이 있으면, 묘당(廟堂)에서 사리를 따져 품처하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은 그대로 두게 하며, 그 열 고을의 일 가운데 스스로 결단할 일에 속하는 것이라도 역시 개정하거나 혁파해야 할 것이 있으면, 도백으로 하여금 각각 그 고을에 거듭 경계시킬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안주(安州)는 청천강(淸川江) 가의 포락(浦落)한 토지에 대한 전세(田稅)를 연안(延安)의 사례에 의거하여 영영 사고처리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무릇 전제(田制)는 이쪽편에서 포락으로 잃게 될 것 같으면 반드시 저쪽편의 이생지(泥生地)에서 징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청천강 일대는 물길이 이미 변경되어 강가의 전지(田地)가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듯 하였으니, 옛날의 장부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당연히 전민(田民)들에게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됩니다. 별도로 더 조사하고 헤아린 뒤에 포락지와 이생지를 서로 참고하고 샅샅이 따져서 반드시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게 하소서.
 
삼화(三和)·중화(中和)·삭주(朔州)·증산(甑山)·영유(永柔)·태천(泰川) 등의 고을은 전정(田政)이 너무 문란하고 전세(田稅)도 균일하지 않으며 백징과 가집(加執)으로 주민들이 지탱해 살아가지 못하겠으므로 아울러 양전(量田)과 사진(査陳)을 청원하였습니다. 양전법(量田法)은 크게 하는 것을 개량(改量)이라 하고, 작게 하는 것을 사진이라 하는데, 대체로 묵은 전지와 개간한 전지를 모두 측량하여 강리(疆理)를 개정(改定)하는 것을 개량이라고 말하며, 먼저 묵은 곳부터 그 허실(虛實)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을 사진이라고 말합니다.

개량과 사진을 논할 것 없이 오늘날 전정이 문란하기는 팔도가 마찬가지나, 관서의 경우는 등급이 가볍고 세금이 헐하다는 것 때문에 제도를 정한 것이 처음부터 엄격하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러 가장 폐단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개량과 사진은 바로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급선무입니다.

다만, 양전(量田)하는 데 대한 의논은 선배들로부터 벌써 그러하였지만, 결국 손을 대지 못한 것이 이미 1백 년을 지날 정도로 오래 되어, 장차 전지가 있는데도 장부에 없고 전지가 없는데도 세금이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양전이 혹시라도 실(實)을 잃게 되면 백성이나 국가에 해로움이 도리어 양전하지 않은 것보다 심하게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양전하는 행정을 크게 시행하여 한꺼번에 통틀어 개정하려고 한다면 적합한 인재를 임명하지 않고 경솔하게 거론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한두 고을의 가장 심각한 곳부터 더러는 개량하고 더러는 사진하여, 한 지경(地境)의 절실히 원망스런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어 전삼세(田三稅)의 정규적인 세금을 균일하게 하는 것은, 실로 별반 시행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며, 오직 도신과 수령이 조처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시간을 두고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깊이 헤아리고 사리를 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창성(昌城)에서는 새로 일군 전지를 가록(加錄)하고 실제대로 세금을 부과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한정이 있는 토지를 반드시 해마다 새로 개간하지는 못합니다만, 허위로 기록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정말 아주 민망스런 폐단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결국 사험(査驗)하여 별도로 더 묵히거나 일구는 것은 바로 수령의 현명함과 어두움, 근면과 태만에 달려 있으니, 이로써 다시 더 거듭 경계하게 하소서.
 
자산(慈山)·삭주(朔州) 등의 고을에서 아울러 개량하고 답험(踏驗)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곳은 삼화(三和)·중화(中和)와 다름이 없으니 일체로 분부하소서. 그리고 함종(咸從)·희천(熙川)·용강(龍岡) 등의 고을에서는 모두 묵은 전지에 대하여 허탈(許頉)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묵히거나 일군 전지의 거짓과 사실이 이리 저리 섞여 있지만, 일군 경우는 기록하고 묵히는 경우는 사고 처리하는 것이 바로 전제(田制)입니다. 지금 만약 묵힌 밭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곧바로 허탈해 주어, 그 묵히는 것은 있고 일군 것은 없다는 것으로 전적으로 맡겨 두게 되면 법전에 있는 대로 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맹산(孟山)은 원전세(元田稅)에 첨향(添餉)한 조목 중 부족한 것이 1백 36결(結)인데, 관용(官用)의 화세(火稅) 55석으로 원전세에 옮겨 채우고 원향(元餉)에다 보태서 보충하기 때문에 고을의 능력과 주민들의 형세로 보아 지탱해 나갈 수가 없으니, 화속(火粟)을 옮겨다 보충하는 규례를 영영 혁파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당해 고을이 주민들은 흩어지고 원세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조정에서 모두 환하게 아는 바입니다마는,

다만 봉세(捧稅)와 첨향 또한 바꿀 수 없는 규정인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조잔(凋殘)한 창고 화속 50포(包)를 이쪽에서 떼어다 저쪽에 보충하였으므로, 관아(官衙)에서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주민들 또한 보전하기 어려운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약간의 곡식 석으로 나머지 숫자를 더 경작하게 하여도 정향(正餉)에는 크게 득실이 없으며, 해당 읍의 영굴(羸詘)2832) 에는 크게 관계됨이 있으니, 55석의 첨향을 특별히 견감(蠲減)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변(寧邊)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고 처리되도록 도모하는 자 및 승음(承蔭)하여 역(役)이 없는 부류에게 향교나 서원에 입속(入屬)하도록 하여, 한결같이 강생(講生)2833) 의 자격을 주는 사례에 따라 사람마다 각기 한 냥(兩)을 봄과 가을에 나누어 바치게 해서, 허액(虛額)에 대한 족징(族徵)·이징(里徵)을 면제해 주도록 청원하였으며, 도신도 청하였습니다. 우선 해당 읍으로 하여금 앞서 그것이 가(可)한지를 시험하게 하소서. 일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고 말이 진실로 근거가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허락하게 하되, 해당 읍에서부터 우선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삼화(三和)는 유군(遺軍) 1백 명을 원액(元額)에서 줄이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속한 7백 30명은 군(軍)이 적은 고을에다 이송하며, 마병(馬兵) 2초(哨)는 혁파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유군의 원액을 줄여 달라는 청원은 군제(軍制)에 크게 구애됨이 없고, 주민들의 폐단 또한 조금 펴지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소서. 하지만 영군(營軍)을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데 대해서는 도내에 어찌 군사가 적고 폐단이 없는 고을이 있겠습니까?

폐단을 구제하려다가 폐단을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군(馬軍)을 혁파하도록 말하는 것은 사리에 통달하지 못해서이니, 기병과 보병의 제도는 형세가 광대뼈[輔]와 잇몸[車]이 서로 의존하는 것과 같아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 사람이 정총(定摠)한 것은 본래 의의가 있는 것이니, 갑자기 혁파하도록 의논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상원(祥原)은 호총(戶摠)이 3천 7백여 호가 되며, 군액(軍額)이 7천 6백여 명인데, 그 잡탈(雜頉)을 제하면 군호(軍戶)가 3분의 1에 불과하니 호수와 군정(軍丁)을 비교 계산 하면 배정(排定)할 방법이 없고 유망(流亡)이 서로 잇따르게 되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습니다.

본읍(本邑)의 결복(結卜)은 4결(結)을 1통(統)으로 삼아 합계가 6백 60여 통이 되는데, 부(負)마다 6분의 1을 바치며, 1통에서 바치는 것이 24냥(兩)이니 그 당연히 부역을 바쳐야 할 실제 숫자를 제하면 남는 것이 8냥 영(零)이 됩니다. 그러나 모두 통수(統首)가 개인적으로 건몰(乾沒)2834) 하는 데로 귀속되며, 결세(結稅)는 정규적으로 바치는 국가의 세금인데, 나머지를 도리어 사용(私用)으로 귀속되게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사례이니, 참으로 적합함을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여전(結餘錢) 합계 5천여 냥 내에서 2천 냥은 군포(軍布)의 허액(虛額)으로 급대(給代)하여 백징(白徵)하는 폐단을 면하게 하고, 3천 냥은 민고(民庫)에 귀속시켜 해고(該庫)의 부족한 비용에 보충하도록 청원하였는데, 도신이 논하는 바 역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결역(結役)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 만약 당연히 지불해야 할 것에 잉여가 많다면 공적(公的)인 것은 공적인 것을 보충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지금 이러한 군포의 무면(無麵)2835) 을 대신하여 결여전(結餘錢)으로 충대(充代)한다면 군민(軍民)의 뼈를 깎는 듯한 원망이 조금은 해소될 것이며, 또 남는 돈을 가지고 민고(民庫)와 공용(公用)에 보태 쓰게 한다면 정말로 편리하고 적합하겠습니다. 이로써 분부하도록 하소서.
 
개천(价川)은 교생(校生)을 3대(代)로 제한하고 만약 교생의 자식이나 손자가 아니면 향교에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아비나 할아버지 모두 교생이 아니면 모두 내쳐서 군오(軍伍)로 충정(充定)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교생일지라도 낙강(落講)한 자에 대해서는 군역을 강정(降定)하는 것이 곧 법전입니다. 더구나 근거도 없으면서 모록(冒錄)한 자에 대해서는 더욱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 뒤로 모든 모록한 것에 대해서는 시강(試講)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쫓아내어 정역(定役)하며, 비록 이미 원안(元案)에 소속된 부류라 하더라도 고강(考講)하는 법을 거듭 밝혀 낙제할 경우 모두 즉시 군오(軍伍)로 보충한다는 뜻을 거듭 경계해야 합니다. 개천 한 고을 뿐만이 아니고 도내의 열읍(列邑)에 대해서도 이로써 법령으로 반포하여 한결같이 준행할 정식(定式)으로 삼아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일체로 분부하게 하소서. 이로 인하여 또 별도로 경계할 것이 있으니,

근래 군정의 폐단은 오로지 투속(投屬)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도피하는 것이 더욱 심해진 탓으로 초래된 것이니, 각청(各廳)의 보솔(保率)이나 서원에 투탁한 자 및 이른바 계방(稧房)의 명색(名色) 같은 경우는 모두 간책(刊冊)에서 제외된 것인데도, 별도로 명목을 세워 조금도 제한하거나 절제함이 없어서 바로잡거나 혁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곧 수령이 사사로움을 쫓고 공적인 것을 없애는데 대하여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 즉시 낱낱이 조사하여 쇄환(刷還)시켜 그때그때 군오를 채우게 하되, 만약 혹시라도 옛날의 습관을 고치지 아니하고 엄폐하거나 방치하기만을 일삼는다면, 해당 수령에게 우선 찬배(竄配)하거나 금고(禁固)하는 형률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희천(熙川)과 위원(渭原) 등의 고을에서는 다른 고을에서 옮겨온 군사를 해당 읍으로 환송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당초에 옮겨올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였지만 지금에 와서 환송하는 것은 그 형세로 보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우선 모두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삼등(三登)에서는 감영(監營)에서 어떠한 형태이든 변리(邊利)2836) 없는 돈으로 납번(納番)하는 전포(錢布)를 대신 지급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지금 군정의 폐단은 고을마다 그렇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공화(公貨)를 덜어내어 고을마다 수시로 대납하게 하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그리고 강서(江西)에서는 평양(平壤)에서 이사(移徙)한 군사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대신 채우도록 하고 본현(本縣)에는 책임을 지우지 말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부역을 회피하려는 백성들이 강서를 토끼굴로 여기는 자가 해마다 점점 많아져 금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거(移居)하는 고을로 하여금 대신 채우도록 새로 법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증산(甑山)의 군관(軍官)을 양감(量減)하여 군오(軍伍)에다 옮겨 보충하되, 군관의 신역(身役)은 별도로 급대(給代)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삼등(三登)에서 감영(監營)의 무변전(無邊錢)을 얻으려고 청한 말과 다름이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태천(泰川)과 영원(寧遠)은 옮겨온 군관을 다른 고을로 나누어 보낼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희천과 위원에서 청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은산(殷山)은 자체의 면(面)·리(里) 사이에 대정(代定)하는 법을 융통성 없이 고수할 필요가 없으니, 부근 마을의 여정(餘丁)을 추이(推移)하여 대신 채울 수 있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관서의 부근 마을 사이에 대정하는 법은 기묘년2837) 부터 시작하여 이미 60년 동안 바꿀 수 없는 규정을 이루었는데, 지금 융통성 없이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는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당초 부근 마을에 대정하게 할 때에 벌써 그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無常)한 것과 잔약하고 풍성함이 같지 않은 데 대한 근심을 염려하여 반드시 십년마다 한차례 통(統)을 고치도록 하였습니다.

대저 만약 이 마을의 군(軍)이 10정(丁)이면 이 10정은 이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저 마을의 군이 만약 1백 정이면 이 1백정은 저 마을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른바 마을을 대정[里代定]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마을의 잔성(殘盛)과 사람의 취산(聚散)은 1기(紀)이면 반드시 변하게 되니, 연수(年數)를 제한하지 말고 한번 정하면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10년마다 한차례 통을 고치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통을 고친 뒤에는 반드시 그 현재 있는 실제의 숫자를 가지고 추이(推移)하여 골고루 분배하여 그때그때 변통하는 규정을 삼게 한 것이니, 이것은 실로 아름답고 훌륭한 법규(法規)로 영구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단지 부근의 마을에 대정(代定)하는 법만 지키고 통(統)을 고치는 규정을 시행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잘못을 부근의 마을에 대정하는 것에다 돌립니다.

이것이 어찌 법이 잘못된 까닭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법을 행하면서 그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이같은 폐단이 가장 심한 고을이나 아주 고질화된 마을에는 반드시 이정법(里定法)과 개통법(改統法)을 때에 따라 섞어서 시행하거나 두 가지를 병행하여 다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신칙하소서.
 
총론하건대, 폐단으로 말하자면 백성들의 고통을 곡진히 살펴야 하고, 폐단을 구제하려면 요긴한 방법을 깊이 터득해야 하는데, 그 근본을 말한다면 수령을 가려 뽑는 것이며, 뇌물 받는 문을 막는 것입니다. 일이 뇌물로써 이루어지고 백성들에게 정지(定志)가 없으며 갖가지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데, 군정의 폐단은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심한 것입니다.

무릇 오늘날 거짓으로 칭탁하거나 투탁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면하려고 도모하는데 뇌물이 아니면 어떻게 그 문이 열리고 그 간교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수령의 잘못입니다. 이 길을 막지 않으면 폐단이 제거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며, 백성을 모조리 죽이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수령을 가려 뽑아야 하는 까닭이며, 군정의 폐단을 구제하는 급선무입니다. 이 뜻을 가지고 전조(銓曹)에 거듭 경계하소서.
 
영변(寧邊)에서는 본읍(本邑)의 환상곡(還上穀)에 대한 폐단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그 조목에 두 가지가 있었으니, 부호가 이를 모면하려고 도모하여 영세한 주민들이 치우치게 폐단을 받게 되는 것과 곡명(穀名)과 사명(司名)의 명목이 아주 많아 아전들의 간교(奸巧)가 쉽게 먹혀든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부호가 모면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바로 수령의 잘못입니다. 진실로 장부를 살피고 통(統)을 비교해서 가좌(家座)의 법을 엄격히 하고, 호수(戶數)를 따지고 등급을 나누어 구식(口食)의 규정을 균일하게 하며, 먼저 수향(首鄕)2838) ·대민(大民)에서부터 흔들리지 않고 빠뜨리지 않는다면, 다시 어떻게 모면하기를 도모하며 치우치게 받아야 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종핵(綜核)하여 추쇄(推刷)하는 데 힘쓰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형으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도신으로 하여금 살펴서 경계하게 하소서. 그리고 곡명과 사명이 요즈음 더욱 구별[門]이 많은데, 실로 이것이 각도(各道)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연전(年前)에 바로잡아 고치려는 계책을 여러 도에 널리 물었지만, 지금까지 대양(對揚)하는 논의가 없었습니다. 만약 크게 변통하는 방법을 행하지 않고서는 정말로 한꺼번에 개혁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앞으로 충분하게 상의할 때까지 기다리소서. 그 대곡(代穀)하는 법과 같은 것은 저절로 준절(準折)2839) 하게 되어 있으나, 수령의 경우 감부(勘簿)하는 데 급하고 이향(吏鄕)은 환색(換色)2840) 하는 데 교묘하여, 곡물 장부를 어지럽혀서 고즐(考櫛)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방백으로 하여금 바르고 분명하게 집사(執事)를 장악하게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종합하여 다스려서 상부의 지시를 따르게 한다면, 비록 일제히 조사 정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례대로 점점 고쳐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서울 각 아문(衙門)의 집전(執錢)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백성과 곡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탄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것은 일조일석의 사고가 아니며 이미 각 해사(該司)의 경비로 쓰여 그것을 시행해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으니, 혁파하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며, 바로잡고 개혁하는 것을 지금 갑자기 의논할 수도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폐단의 근본을 모두 말하였는데, 결국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진실로 이 폐단을 구제하려면 상정(詳定)일 뿐입니다. 지금 한 도의 모든 공사(公私) 작전(作錢)을 한결같이 상정(詳定)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이미 바꿀 수 없는 정제(定制)가 되었으니, 지금 다시 의논하자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창성(昌城)은 당직(唐稷)을 두태(豆太)로 환작(換作)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곡식 장부를 상세히 검토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세밀히 살핀 뒤에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삭주(朔州)는 환곡미조(還穀米條)에 대해서 흉년에 대봉(代捧)하였던 것을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환색(換色)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일의 형편을 헤아려서 장점을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용강(龍岡) 황룡진(黃龍鎭)의 크고 작은 환미(還米) 각 5백 석을 읍창(邑倉)에다 이부(移付)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그 읍창과 진창(鎭倉)이 같은 성(城)에 함께 있다고 하여 시행을 허락할 것을 또한 한 것이니, 이에 따라 이부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삼등(三登)에서 관리하는 평양성(平壤城)의 성향(城餉) 1천 2백 석은 평양 사창(司倉)으로 나누어 주도록 청원하였습니다. 1백 리(里)안에서 조적(糶糴)하는 것은 폐단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성향은 체모가 중요하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도신이 본도(本道)의 환상곡(還上穀)의 폐단으로 가장 절실하고 고민하는 것을 총괄하여 논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산골과 바닷가 고을에 균등하게 분배하지 않는 것과 경사(京司)에서 모미(耗米)를 돈으로 환산하여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정(詳定)한 법을 시행한 지 몇 년이 되어 이미 항전(恒典)이 되었고 이것을 한결같이 고치지 말고 영원히 준행할 규정으로 삼는다면, 산골과 바닷가 고을이 균일해질 수 있으며 비거나 쌓이거나 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경작전(京作錢) 한 가지 일은 실제로 서곡(西穀)의 미려(尾閭)이며 서민(西民)에게 화(禍)를 불러오는 단서가 됩니다.

비록 지금에 와서 영영 혁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신이 이른바 그 취모(取耗)를 줄이는 것은 거의 가장 심한 것을 없앨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것은 묘당에서 획일적으로 분배할 것이 아니며, 오직 각 해당 아문(衙門)에서 각기 스스로 적당히 헤아리는 데 달려 있으니, 이 뜻으로 거듭 경계하게 하소서.
 
중화(中和)는 민고(民庫)를 가하(加下)하여 영전(營錢) 3천 냥을 돌려 갚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추상(推上)할 일이 아니니,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소서.
 
상원(祥原)은 본군(本郡)의 백성들이 해가 오래 되도록 바치지 못한 각 고(各庫)의 식리전(殖利錢)에 대하여 결여전(結餘錢) 3천 냥으로 급대(給代)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군폐(軍弊)의 조목 가운데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은산(殷山)은 주민 가운데 삼고(三庫)의 식리전을 받아 낼 곳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본현의 결역(結役)이 다른 고을과 비교하여 가장 헐하니, 매 부(負)마다 한 푼[分]씩 가봉(加捧)해서 민고(民庫)에 급대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민고의 형편으로 보아 당연히 급대해야 하고 결전(結錢)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정말로 헐하며, 가봉해서 대신 채우는 것에 대해 도신이 이미 시행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에 따라 구처(區處)하게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도신이 총괄하여 논한 관서의 민고에 대한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몇 년 전에 암행 어사가 복주(覆奏)한 것으로 인하여 엄중히 신칙하였지만 과연 뉘우치고 고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감령(勘令)이 비록 도신에게 관계되기는 하지만, 조종하는 것은 실제로 본읍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공하(公下)를 칭탁하고서 그대로 사사로이 쓰기도 하고, 더러는 식례(式例)를 원용하나 규정을 잘못 적용치 않음이 없어서 분수(分數)가 전몰(全沒)되고 점차로 계한(階限)을 잃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외공방(外工房)이라 일컬으면서도 만약 하등(夏等)이나 동등(冬等)의 회상(會上)할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깍는 것을 많이 해서 적게 만들고, 거짓을 늘어 놓아 사실인 것처럼 미혹시켜 장부를 날조하여 만듭니다. 의심이 나고 분명치 않은 것을 주목하지만 도신이 총감(摠勘)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멀리 헤아려서 전례대로 성송(成送)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감영과 본읍에서 서로 관리하는 성과를 논하겠습니까? 도신은 10년을 염려해야 하는데 현재의 형편을 보면, 관서에 민고가 비어 있는 것이 조석(朝夕)에 박두해서 반드시 10년 씩이나 오래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무릇 가하(加下)한 고을이 있으면 적고 많은 것을 논하지 말고 5년을 기한으로 하여 아울러 보충해서 보고하게 한 뒤에, 도신이 보고가 끝난 형지(形止)를 가지고 고을마다 조목으로 열거하여 상세하게 장문하도록 하되, 만일 기한이 지났는데도 갚지 않거나 법을 어기고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장률(贓律)로 결단한다는 뜻으로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평양(平壤)은 시전(市廛)이 조잔하고 허물어진다는 것으로써 공전(公錢)을 빌려 주도록 청하였으며, 도신 또한 별비전(別備錢)을 빌려 주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본부의 36정(井)이 부유하기는 서울의 다음입니다. 그런데 화재가 난 나머지 쇠잔하고 허물어져 대전(大廛)이 이 때문에 철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영의 재물을 빌려서 사업을 회복하는 밑천을 삼도록 하는 것은 그만 두지 못할 바입니다. 다만 별비전(別備錢)은 벌써 곡식으로 바꾸어 환상곡(還上穀)에 보태게 하였으니 지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달리 길거(拮据)2841) 하는 방법이 있으면, 형편을 헤아리고 힘을 저울질해서 편리에 따라 시행을 허락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정주(定州)는 갈마창(渴馬倉)에 바치는 환상곡을 본읍(本邑)에 환속(還屬)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감영(監營)에 소속된 것을 본읍의 환상곡으로 바치게 하는 것은 본래 끼치는 폐단이 많습니다. 무술년2842) 에 본읍에다 소속시킨 것은 반드시 그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본읍에다 소속시키도록 하니 백성의 폐단을 없애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창고를 옮기는 데 대해서는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에서 소유한 토지에 대한 세금의 징수는 도장(導掌)을 보내지 말고 그 고을에 봉납(捧納)하도록 하며, 둔토(屯土)를 진고(陳告)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전에 엄중히 금지시킬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경차(京差)가 둔민(屯民)을 주구(誅求)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원한 바, 자기 고을에다 봉납하는 것은 정말로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각궁과 각사의 속사정과 형세를 상세하게 살필 수 없으니, 갑자기 혁파하도록 영을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간교한 주민들이 진고(陳告)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선조(先朝)에서 경계하고 금지시키기를 매우 엄중히 하였습니다. 지금 혹시라도 다시 범할 경우 허실을 논할 것 없이 아울러 형배(刑配)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관과 무관을 아울러 기용한다는 데 있어서는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폐할 수 없으니 진실로 상자(賞資)를 골고루 배분하여 양편에서 서로 격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이곳의 유름(儒廩)을 깎아서 저곳의 무상(武賞)에 보태는 것은 일의 체모가 합당함에 극히 어긋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영변(寧邊)은 본도의 권무(勸武)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초사(初仕)의 취재(取才)를 봄에는 감영에서 행하고 가을에는 병영에서 마련하되, 별무사(別武士) 시취(試取)에서 과거 출신이 수석을 차지하면 초사로 비의(備擬)하게 하고, 전함(前啣)이 수석을 차지하면 승자(陞資)하게 하며, 이미 승자한 사람은 오위 장(五衛將)으로 비의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서북의 과거 출신을 시재(試才)하여 서사(筮仕)하게 한 것은 본래 옛날부터의 규정입니다마는 근래에는 오래도록 폐각(廢却)하였으니, 전조(銓曹)에 분부해서 전례(前例)를 수명(修明)케 하고, 별도로 수용(收用)을 더하소서. 별무사를 시취한 뒤에 승자하고 제직(除職)하는 것은 비록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처음으로 거행하는 일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세히 전례를 고찰하게 해서 사리를 따져 초기(草記)한 뒤에 다시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성천(成川)의 자모 산성(慈母山城)에 소속된 일곱 고을 가운데 본읍이 가장 멀기 때문에 받을 성향미(城餉米)를 부근 여섯 고을에다 나누어 귀속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산골의 성향미가 지역이 멀어 폐단이 된 것은 옛날부터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곱 고을에다 나누어 귀속시킨 것은 본래 의의(意義)가 있어서인데, 지금 어떻게 폐단을 다른 고을에다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대곡궁세(大谷宮稅)를 고가(高價)로 억지로 바치게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폐단이 될 뿐만 아니라, 법의(法意)에도 크게 어긋납니다. 더구나 근년에 서울과 지방에서 돈으로 바꾸는 것은 모두 상정(詳定)을 따르도록 하였는데, 궁납(宮納)에 법 밖의 징가(徵價)를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한결같이 상정(詳定)의 뜻을 준행하여 감영(監營)에서부터 특별히 더 엄금토록 하소서.
 
삭주(朔州)는 별무사 도시(別武士都試)를 창성(昌城)의 방영(防營)에 직부(直赴)하게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의주(義州)와 강계(江界)의 사례에 의거하여 방영에 직부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해서는 그것의 편부(便否)가 장차 어떠할런지 상세하지 않으니, 다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삼화(三和)는 선세(船稅)를 백징(白徵)하고 있으니, 이를 사실대로 허탈(許頉)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배가 없는데 세금을 징수한다면, 토지가 없는데 결세(結稅)를 부담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분명하게 즉시 바로 잡으라는 뜻으로 해청에 분부하소서.
 
용천(龍川)은 군정(軍丁)으로 신도(薪島)에 투입(投入)한 자는 가려서 돌려보냄으로써 쌍방을 구제하고, 제도(諸島)에서 의주(義州)로 이속(移屬)한 자는 양책참(良策站)으로 추환(推還)하거나 읍으로 이입(移入)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진달한 바가 과연 모두 합당하다 할 수 있으나, 그대로 하게 하소서.
 
철산(鐵山)은 군정(軍丁)에 있어서 이정(里定)의 법을 따르지 말게 하고, 신포(身布)는 호렴(戶斂)하는 제도를 처음 시행하며, 읍치(邑治)를 거련(車輦)에 옮겨 세울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대정(里代定)은 바로 50년 동안 한 도에서 통용하던 바꿀 수 없는 규정인데,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변혁하도록 가볍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호포(戶布)는 한 고을에서 처음 시작할 수 있는 법이 아니므로 더욱 경솔하게 진청(陳請)할 수 없으며, 읍치(邑治)를 옮기는 것 또한 어렵고 신중히 생각해야 합당할 것이니,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자산 산성(慈山山城)에 소속된 일곱 고을의 산성 군량미에 대한 모곡(耗穀)을 본읍에 도부(都付)한 것을 일곱 고을의 민호(民戶)에 분급(分給)하고, 본읍에 독진(獨鎭)의 수성장(守城將)을 두며, 일곱 고을의 군교(軍校)를 봄·가을에 산성에서 돌아가며 조련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산성의 군량이 고을 사람들에게 폐단을 끼친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반드시 곡식을 저축하는 것으로써 성을 수호하는 방도로 삼았던 것은 대체로 곡식이 없으면 성을 수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 모조(耗條)를 일곱 고을에다 분산하는 것은 설시(設施)한 본뜻을 크게 잃은 것이며, 본읍을 독진(獨鎭)으로 만드는 것은 벌써 관방(關防)에 관계되며 또 경장(更張)하는데 관계되므로, 지금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정(城丁)을 돌아가면서 조련시키는 것은 의도는 좋으나 일이 많고 온편하기 어려우니, 모두 우선은 그대로 두게 하소서.
 
덕천(德川)은 신삼(信蔘)2843) 의 원가를 가분(加分)하여 더 보태도록 하고, 지칙(支勅)2844) 은 참(站)에 병합하여 희천(熙川)에 이송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삼값은 본래 정례(定例)가 있으며 각읍에서 균일하게 이 숫자를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올리거나 낮출 수 있겠으며, 지칙을 참에 나누게 한 것 또한 이미 정간(井間)이 이루어져 있어 옮기거나 바꿀 수 없으며 또한 변통할 수도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박천(博川)은 경내(境內)의 파괴된 동막이[坰]에다 도로 동막이를 쌓고, 고을 남쪽의 옛날 창고를 지금 다시 수성(修城)하여 본군(本郡)을 독진(獨鎭)으로 만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동막이를 쌓고 성을 쌓으며 진(鎭)을 설치하는 것은 도신이 시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영원(寧遠)은 읍치(邑治)를 도리(道里)가 균일하고 적합한 지역에다 옮기고, 지경 안에 있는 열세 곳의 창고를 3분의 1로 통합해서 설치하며, 목물(木物)을 베도록 허락하여 요역(徭役)을 막게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읍치를 옮기는 일은 진실로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우며, 창고를 합하는 일도 당연히 본읍에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서 할 것이고 상부 관청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으며, 나무를 베어 요역을 막도록 하는 일은 크게 살피지 못한 논의입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운산(雲山)의 칙참(勅站)을 옮겨 정하도록 한 청원과 맹산(孟山)에서 신삼(信蔘)을 모면하려고 도모한 청원은 덕천(德川)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태천(泰川)에서 청한 바 여러 조목은 모두 의견이 있으며, 도신이 덧붙여 진달한 것 또한 매우 적당합니다. 청컨대 도신의 말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해서(海西)의 제읍(諸邑)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군적(軍糴)에 대한 폐단은 대동 소이해서, 역시 단지 진달한 바에 따라 갑자기 변통을 가할 수는 없지만, 소는 보고 양은 보지 않았다2845) 는 탄식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강구하도록 하여 바로잡을 만한 것은 바로잡게 하고 그대로 둘 만한 것은 그대로 두게 하며, 이쪽의 폐단을 제거하면서 저쪽에다 폐단이 생기게 함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평산(平山)의 관리영(管理營)에서 관리하는 점석(粘石)과 둔곡(屯穀)은 폐단이 되니 혁파하며, 둔창(屯倉)을 본부에 넘겨 취모(取耗)를 돈으로 환산하여 해당 영(營)으로 보내게 하고, 아병(牙兵)의 번전(番錢) 또한 본부에서 수봉(收捧)하여 상부로 보내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사가 있으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둔환(屯還)을 설치하여 절반을 소속 아병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거둬 들이게 한 것은 참으로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아병일지라도 다른 고을에 흩어져 있는 자는 먼 지역에서 수납(受納)해야 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니, 본부에 있는 아병 가운데 근처에 살고 있는 자를 대장(隊長)으로 차출하여 3백 60여 명이 받는 것을 17명의 대장에게 전부 도급(都給)하나, 대장 역시 나누어 줄 방법이 없어 그들이 모두 받아 먹는데 받아 먹은 것은 모두가 둔속배(屯屬輩)의 잡비로 들어가버려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되며, 기한이 되어 비납(備納)하는 것이 곧 백징(白徵)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금년에 대장을 차출하고 명년에 대장을 차출하니, 시행한 지 몇 년 만에 아병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서로 돌아가면서 폐단을 받게 됩니다. 군역을 싫어하며 회피하려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똑같은 바인데 아병의 역에 있어서는 이같은 환폐 때문에 마치 죽을 곳처럼 여겨 백성들에게 뼈를 깎는 듯한 폐막이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본부에 넘겨 주어 민환(民還)의 예(例)에 따라 균일하게 나누어 주도록 한다면 숫자를 그리 늘리지 않아 환상곡을 보태게 되는 염려는 없을 듯하며, 모조(耗條)를 돈으로 환산하여 곧바로 보내도록 한다면 아병으로서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분부하소서.
 
1. 풍천(豊川)에서 납부하는 금위영(禁衛營)의 군보태(軍保太)를 돈으로 환산하여 상납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보(軍保)에 관한 법의(法意)는 다른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한 가지 항목만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서흥(瑞興)의 첨정(簽丁)으로 나이를 속이고 노제(老除)2846) 한 자에 대해서는 나이를 뒤로 물려서 환속(還屬)하게 하며, 이를 사정(査正)할 때는 서울이나 지방에서 정채(情債)를 일체 엄히 금지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역의 나이를 속인 자에 대하여 환속하게 하는 것은 이미 수령의 불찰이며, 심지어 이름을 고치고 사정하여 신군(新軍)처럼 대신 채우는 것 또한 조정의 법령이 아니니, 이 폐단의 근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수령의 책임이라 여깁니다. 경사(京司)의 이서(吏胥)가 어떻게 나이를 속인 자가 이름을 고친 것을 알고서도 사정하는 정채를 침징(侵徵)하지 않겠습니까? 본읍에서 먼저 적합한 사람을 첨정으로 하여 서울이나 지방의 이속들이 침징함이 없도록 하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원군(元軍) 번상(番上) 때에 경영(京營)의 교리가 절제 없이 징구 토색(徵求討索)하며, 또 군안(軍案)을 수납(收納)할 때에 이름마다 돈을 바치게 하였는데, 작년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에 대하여 번(番)드는 것을 면제한 일은 한가지 폐단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군(保軍)은 해마다 면포를 납부하지만 원군은 당번 때에 면포를 납부합니다. 지금의 경우 4년에 한번 번들던 원군에게 해마다 면포를 징수하니 백성을 속이는 혐의가 없지 않은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군영 상번군(上番軍)의 경영(京營) 잡비는 명색이 여러 가지로 많아 그것이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으니 정말 극히 민망하게 여길 만합니다. 복마군(卜馬軍)에 있어서는 한달에 두 차례 시태(試駄)하게 한 법의(法意)가 있으며, 군안을 수정할 때에 경영(京營)에서 마감(磨勘)하기를 한성부에서 호적을 마감하는 사례와 같이 하여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음을 이미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넘치도록 바치게 하고 더 징수하여 해마다 증가된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놀랄만 합니다.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두 군영의 교리배(校吏輩)가 만약 범과(犯科)한 것이 있으면, 별도로 엄중히 조처하여 징계하고 면려하게 해야 합니다. 작년에 두 군영의 상번(上番) 5초(哨) 가운데 1초는 번(番)에서 제외하였습니다. 그것은 선조(先朝) 계축년2847) 에 당번군(當番軍)에 대한 제번(除番)이 한때의 임시 편의에서 나왔던 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경우, 원군(元軍)을 군보(軍保)로 강등시켜 영영 번드는 것을 면제하고 면포를 거두어 중초 경군(中哨京軍)을 접제(接濟)하는 비용으로 삼게 한 것과는 다름이 없는데, 어찌 당번이냐 당번이 아니냐는 뜻을 논하겠습니까? 이것은 해당 읍에서 두 군영의 새로 정한 본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경사(京司)의 곡식을 돈으로 환산할 때 곡물의 값이 싸면 상정(詳定)을 기준하고 값이 올라가면 시장의 값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하민(下民)을 돕는 뜻이 아니니, 우선 경사에서부터 금석(金石)처럼 변함없는 법을 강구하여 밝히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곡물 값을 상정하는 규정은 온 나라로 하여금 공통으로 시행하는 것이어서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당초에 법의(法意)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시가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게 하여 조정에서 융통성 있게 가격을 조절하는 정사가 없지 않았던 것은, 상정가(詳定價)가 흉년이 든 경우에는 간혹 그 혜택을 베풀기도 하지만 풍년이 든 경우에는 도리어 그 해로움을 받게 하니, 모조리 시장의 값을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풍년이 든 해에는 풍년이 든 해의 값을 따르고 흉년이 든 해에는 흉년이 든 해의 값을 따르는 것만 같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나 백성들이나 당초에는 득실이 없었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나라에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되겠습니까? 정말로 높은 값을 정하여 강제로 바치게 하는 폐단이 있다면, 이것은 경사에서 행관(行關)할 적에 고시(告示)한 일이 아니고, 영읍(營邑)의 감색배(監色輩)가 정채(情債)라고 핑계대고 억지로 명색(名色)을 세워 그것으로 인연하여 간교한 짓을 하는 것이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닌 소치인 것입니다. 비록 이것은 상정할 때라 하더라도 역시 이런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조정의 법령을 대양(對揚)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 그치도록 하려고 한다면 먼저 영읍에서부터 그 폐단의 근원을 강구해야 하니, 이로써 신칙하소서.
 
1. 선적(善積)·소이(所已) 두 진영(鎭營)의 소속들이 송금(松禁)을 빙자하여 주민들에게 강제로 재물을 빼앗으니, 그 병폐를 구제하려면 두 진영을 폐지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과, 대현 산성(大峴山城)에 있어서는 이미 요해처[要衝]가 아니며 현재의 가호(家戶)도 20호 미만인데, 창고를 쓸데 없이 설치하고 조적(糶糴)이 문란하여 환민(還民)이 탕패(蕩敗)2848) 하였으니, 별장(別將)을 폐지하고 전체를 본부에 소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송금이 느슨하게 풀려 곳곳마다 민둥산인데, 이제는 이처럼 해당 진(鎭)에서는 남이 한다고 덩달아서 금지하여 경계가 민전(民田)을 침범해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들이 금양(禁養)을 잘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상(嶺上)에서는 나무를 멋대로 베고 산하(山下)에서는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 이미 아주 놀랄 만한데, 또 진속(鎭屬)들로 하여금 송금을 빙자하여 강제로 재물을 빼앗기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백성들은 그 전지(田地)를 잃고 또 그 산업(産業)을 망치게 되니, 양쪽으로 폐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해 영(營)에서 분부하고 해당 진(鎭)에 엄히 신칙하도록 분부하여, 그 옛 경계[舊界]를 정해서 주민들이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하고 또한 진속(鎭屬)들로 하여금 재[嶺] 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재산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게 하시되,

만일 이렇게 거듭 경계한 뒤에 다시 이런 폐단이 있다고 보고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당장 별도로 엄중한 조처를 가한다는 뜻으로 일체 분부하소서. 당해 진을 설치한 것은 관방(關防) 때문인데 살고 있는 주민이 20호에도 차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이 되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성향(城餉)도 따라서 텅비었을 터이니, 더욱 심히 놀랄 만 합니다. 이미 보고되었으므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해도(該道)에 공문으로 하문하고 폐단을 혁파하는 데 대한 한 가지 조목만은 도신으로 하여금 논열(論列)하여 장문(狀聞)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연안(延安)의 전적(田糴)에 폐단 있는 것으로는, 경술년2849) 의 해일 후에 영영 개간하기 어려운 곳에도 백지 징세(白地徵稅)하며, 계묘년2850) ·갑진년2851) 의 참혹한 흉년이 든 뒤에 환향(還餉) 및 군민(軍民)의 신미전포(身米錢布)를 더러는 전부 정봉(停捧)하게 하고 더러는 절반을 정봉하게 하였는데, 그 뒤 유리(流離)한 자에 대한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은 백지 징세를 면치 못하는 데 대한 것입니다. 해일로 인한 재결(災結)은 이제 20여 년을 지났으니 비록 더러 영영 개간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표재(俵災)2852) 할 사목(事目)은 있으나 또한 전결(田結)을 영탈(永頉)할 사목은 없으며, 몇 해 전에 호조에서의 공문도 수경(守經)하는 논의에서 나왔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계묘년과 갑진년에 정퇴(停退)하게 한 것은 이미 연안(延安)의 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것이며, 무진년2853) 에 그대로 정퇴하게 한 것은 더욱 보기 드문 혜택이 되는데, 그 신구(新舊)를 아울러 징수하는 것을 가지고 조절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으니, 역시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봉산(鳳山)에서 안부(案付)2854) 한 사옹원(司饔院)과 제원(諸院)의 작미보(作米保)에 대하여 그 쌀로 납부하게 한 규정을 폐지하고, 매 섬[石]마다 잡비 6냥(兩) 5전(錢)을 함께 재정(裁定)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보미(保米) 매 석(石) 7말[斗] 영(零)의 값은 6냥이 넘으며 거기다 잡비가 있기 때문에 비록 더러 이와 같을지라도, 지금은 장산(長山) 이북의 세납(稅納)을 이미 선운(船運)하도록 하였으니,

다른 고을에 장발(裝發)하는 폐단은 지금 논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다른 고을에 장발할 적에 수봉(收捧)하는 값을 본읍(本邑)에서 선운할 때에 내도록 책임지운다면 그것이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색(本色)으로 직접 내게 하여 일체로 본군(本郡)의 세선(稅船)에 장발(裝發)하게 한다면 절로 쌀값을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분부하소서.
 
1. 금천(金川)의 태창(泰倉)과 북창(北倉) 두 창고가 모두 대흥 산성(大興山城)에 있으며 송도 유영(松都留營)에서 구관(句管)하는데, 본군(本郡)의 방민(坊民)2855) 이 분배(分排)하여 납부하는 즈음에 사람과 말이 다치게 되니, 태창의 경우는 청석진(靑石鎭)에 이봉(移捧)하고 북창의 경우는 군창(郡倉)에 하봉(下捧)하게 하며, 또 크고 작은 남쪽 면(面)들을 송도 유영에 이속(移屬)한 뒤에 각 군문(軍門)의 가포(價布)와 보미(保米)를 송도 유영에서 수봉(收捧)하게 하고, 통어영(統禦營)의 경우는 수군(水軍)의 납포(納布)와 탈(頉)이 있는 것을 본군으로 하여금 대신 담당하게 하며, 앞서 두 면(面)의 백성으로 경사(京司)의 상납(上納)이나 각사(各司)의 정채(情債)를 대신 채우게 한 것에 의거하여 절목을 재성(裁成)하여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 배치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태창과 북창 두 창고에 있는 곡물은 바로 성향(城餉)입니다. 더러 흉년이 든 해를 만나 성향을 읍창(邑倉)에다 봉류(捧留)하는 것을 일시 허락한 사례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영영 다른 진영(鎭營)이나 군창(郡倉)으로 이봉(移捧)하게 하는 것은 설시(設施)한 본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해당 도(道) 및 송도 유영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크고 작은 남쪽의 면(面)들은 지금 이미 송도 유영에 이속하였으며 군민(軍民)의 납포(納布)와 충대(充代)를 송도 유영에서 거행하게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수군 9명에 대하여 본군(本郡)에 독책(獨責)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당해 도(道) 및 송도 유영에 공문으로 하문하게 한 뒤에 편리에 따라 결정하고 조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경사(京司)에 상납하는 정채가 해마다 증가하여 정말로 폐단이 되고 있는 만큼, 정식(定式) 외에 증가된 숫자에 대해서도 해당 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도신이 진달한 바 구재(舊災)의 변통 및 모작전(耗作錢)에 대한 한 가지 항목은 묘당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처토록 하며, 해당 읍(邑) 가운데 담양(潭陽) 수령이 진달한 것은 한 고을에서 논할 뿐만이 아니라 팔도에서 공통으로 시행할 만하니, 채택하여 시행할 만한 것은 여러 고을에서 진달한 것과 아울러, 일체로 품처토록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본도(本道)의 구재(舊災)는 병신년2856) 에 묵은 것을 조사한 뒤로 그대로 묵은 것이 3천 5백 54결(結)인데, 해마다 백징(白徵)을 하는 만큼 합쳐서 변통함이 있어야 하며, 서울과 지방 아문(衙門)의 모작전(耗作錢)은 감히 나이(挪移)2857) 하지 말도록 하고, 반드시 원곡(元穀)이 있는 곳에서 모곡(耗穀)을 취하여 집전(執錢)하게 하며, 각 궁방(宮房)이나 아문의 둔세(屯稅)는 도장(導掌)을 보내지 말고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직접 살펴 집복(執卜)2858)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청한 세 가지 조목은 다만 본도에서 이러할 뿐만 아니고, 여러 도에서도 이러한 폐단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구재(舊災)는 바로 그전부터 이미 묵어 있는 것인데 영탈(永頉)에 편입하지 않고, 매번 무면(無麵)2859) 이라는 핑계로 곡식이 안되는 척박한 토지에다 세금을 징수하고야 마니, 이것은 크게 인정(仁政)으로서 행할 바가 아니며 실로 소민(小民)들의 절실한 원망이 됩니다.

그렇지만 전부(田賦)에 대한 정제(定制)가 이미 금석처럼 되어 있으니 반드시 새로 일군 것과 옛날에 묵힌 것을 서로 참고하고 대대(對待)하여 새로 일군 것으로 묵힌 것을 보충하도록 함으로써 원결(元結)의 총액을 감함이 없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진탈(陳頉)을 허락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토(王土)에 대한 경상적 세공(稅貢)의 제도가 장차 점차로 훼획(毁劃)되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러한 점이 비록 백징(白徵)의 폐단을 알지라도 끝내 그것을 감해 주도록 청할 방법이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지금 곡식이 나는 토지는 거의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옛날에 비하면 거의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닌데, 오히려 원총(元摠)은 점점 줄어들고 정세(正稅)도 점차로 줄어들게 되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지역을 다스리는 자가 모두 전제(田制)에 어두워, 묵히거나 개간하는 즈음에 제대로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조사하거나 측량하는 절차를 주관하는 것도 능하지 못해 한결같이 아전들의 손에만 맡기고 멋대로 일을 보살피지 않은 소치입니다. 별도로 여러 고을에 경계하여 더욱더 조심스럽게 고치기를 도모하라는 뜻으로 제도(諸道)에 행회(行會)하게 해야 하며,

서울과 지방의 모작전(耗作錢)에 대하여 한결같이 본곡(本穀)의 실제 숫자를 따르게 하고 혹시라도 값을 따라서 나이(挪移)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병진년2860) 의 수교(受敎)가 지극히 엄중하여 그 당시 도신(道臣)이 찬배(竄配)의 처벌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개관(改觀)하는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몇 년을 겨우 지나자마자 또다시 처음과 같이 되었으며, 근년의 경우는 더욱 제멋대로 하고 있으며 산골과 바닷가가 균일하지 않은 것은 더욱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경사(京司)의 작전(作錢)에 있어서도 만약 도신으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고을에 나누어주게 하고 수시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면, 치우치게 많거나 치우치게 적으며 이쪽에는 쌓이고 저쪽에는 비게 되는 폐단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앞으로 만약 범과(犯科)하면 먼저 도신을 처벌한다는 뜻으로 엄중히 공문을 보내어 별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도장(導掌)을 혁파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관서(關西)의 진폐 책자에 대한 회계(回啓) 가운데 진달하였으니, 이것 또한 일체로 시행하게 하소서.
 
담양(潭陽)에서는 산송(山訟)의 폐단을 크게 진달하면서 영갑(令甲)을 정하고 별도로 절목을 만들도록 청원하였으며, 저채(邸債)2861) 하는 풍습을 갖추어 논하면서 분수(分數)를 짐작해서 결정하는 데 대하여 엄격하게 금단(禁斷)을 가하며, 아울러 서원(書院)과 소청(疏廳)에서 경저(京邸)에게 징색(徵索)하는 것을 영영 막도록 청하였습니다. 군정(軍政)은 계해년2862) 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廳)을 설치해서 첨정(簽丁)하고, 군포(軍布)의 경우에는 호렴법(戶斂法)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천민이나 골고루 징수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송(山訟)에 대한 법은 품(品)을 따라 계보(計步)하여 각각 등급에 따른 제한이 있으니, 법을 상세하게 마련한 것에 산송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되자 점점 느슨해졌으며, 요즈음에는 더욱 문란하여, 넓게 차지하고 몰래 매장하는 등 온갖 놀라운 일이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법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관리는 법을 지키지 않고 백성은 법을 두렵게 여기지 않아 법이 저절로 시행될 수가 없어 거의 법이 없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금석같은 과조(科條)가 옛날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영갑(令甲)을 정하고 새로 절목을 간행할 수 있겠습니까?

안팎의 산송을 관장하는 관원에게 엄중히 경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력이 있는〉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말고 〈의지할 데 없는〉 고경(孤惸)을 가볍게 보지 말며, 한결같이 조종조(祖宗朝)에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고 감히 마음대로 유추 해석함이 없도록 하며 오직 법대로 결단하게 한다면, 시끄럽게 떠드는 소송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무덤을〉 파는 죄는 형률이 본래 유형(流刑)에 해당되는데 사면을 받게 되면 번번이 석방되므로 억지를 쓰면서 〈처벌을〉 두려워 할 줄을 모르고, 사사로이 추매(椎埋)2863) 하여 정범(情犯)이 몹시 참혹한 일이 달마다 생기는데도 관리가 금지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그들이 자수(自首)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기필코 계획을 꾸민 원범(元犯)을 조사하여 형률을 적용한 뒤에는, 비록 널리 사면[曠蕩]하는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사면하는 은전에 뽑아서 넣지 말도록 한다면, 거의 악한 자를 징계하고 간사한 짓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팔도에 행회(行會)하고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저채(邸債)에 대한 폐단은 묘당으로부터 절목을 만들고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우는 등 근래에 더욱 절실하게 하고 엄중히 하였는데도, 끝내 쌓인 폐단을 시원스럽게 혁파하지 못한 것은 바로 수령의 죄입니다.

관아에서 쓴 것은 그때그때 보상하고 관리가 진 빚은 즉시 갚도록 하며, 사사로이 민간에 빚을 놓아 이자를 받거나 와채(臥債)2864) 를 친족에게 징수하는 것과 같은 유형에 대해서는 모두 본전은 탕감하게 하고 범한 자를 형배(刑配)하게 한다면, 저리(邸吏)와 백성 사이에 양쪽이 서로 관계가 없게 되어 온갖 폐단이 저절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 뜻을 절목에 보태 넣어 각도(各道)에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서원(書院)과 소청(疏廳)에서 저전(邸錢)을 곧바로 바치지 못하도록 몇 년 전에 이미 연품(筵稟)하여 영구히 금지하게 하였습니다. 양역(良役) 대상의 장정을 찾아내어 첨오(簽伍)하는 것은 오직 수령이 원망을 떠맡으면서 법을 지키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서부터 청(廳)을 설치하여 한갓 시끄러운 단서만 보태게 할 필요는 없으며, 호포법(戶布法)은 이미 지금으로서는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으로써 관서(關西)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회계(回啓)에서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광주(光州)는 환곡을 2만 석에 한하여 돈으로 환산하도록 해서 곡식이 적은 다른 고을에다 옮겨서 나누어주게 하며, 적법(籍法)을 엄중하게 세워 첨정(簽丁)의 충역(充役)과 서울·지방의 상납(上納)에 원래의 인정(人情) 외에 더 징수하는 것을 묘당(廟堂)에서 거론하여 경계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곡총(穀摠)이 많은 것은 줄이고 적은 것은 보태도록 하는 것이 도신의 직분이며, 적정(籍政)은 사실대로 빠뜨림이 없게 하는 것이 수령의 책임입니다.

환곡은 도신으로 하여금 장부를 고찰하여 균일하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치우치게 많아지는 근심이 없도록 하며, 적법(籍法)은 지나간 것은 비록 논하지 않더라도 이 뒤로 식년(式年)부터 시작하여 반드시 가좌(家座)를 따라 낱낱이 입적(入籍)하도록 해서 군정이 빠지거나 부역을 도피하는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의 정채(情債)에 대한 폐단은 해마다 증가하여 갖가지 간교함이 더 생겨나 마지막에 생기는 피해는 전부 소민(小民)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전후로 거듭 경계한 것이 엄중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조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폐단이 다시 심하여 하속(下屬)들의 횡포가 심할 뿐만이 아니니, 바로 관장(官長)이 분명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고 안으로는 해당 관사(官司)에 충분히 경계하되, 그 뒤에도 만약 고치지 않으면 먼저 관장부터 무겁게 죄를 주고, 범(犯)한 자를 조사해 가려 먼 섬에다 형배하도록 하소서.
 
영광(靈光)에 있는 궁둔(宮屯)과 각둔(閣屯)에 궁차(宮差)나 각속(閣屬)을 보내지 말고 무토 면세(無土免稅)의 사례에 의거하여 본읍(本邑)에 넘겨 주어 봉납(奉納)하게 하며, 호조의 어염세(魚鹽稅)와 선세(船稅)는 한결같이 배와 염분(鹽盆)의 실제 숫자에 따라 세금을 바치도록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지방의 고을에 대한 도장(導掌)의 폐단과 어염세(魚鹽稅)를 치우치게 징수하는 원망은 이미 전후의 회계(回啓)에서 진달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도나 저 도의 도신(道臣)과 수령이 논한 바를 관찰하건대, 폐단이 다르지 않고 그 말이 같습니다. 그것은 공적으로는 지나치게 바치도록 한 것이며 백성에게는 원통하게 징수한 것이니, 공통으로 각도에서 고루 뼈를 깎는 원통함이 됩니다. 이 뜻을 각 궁방(宮房) 및 내각(內閣)과 해청(該廳)에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사하여 바로잡고 개정하여 구제하게 하소서.
 
나주(羅州)는 환곡의 아문 명색(衙問名色)이 번거로운 것을 줄이고 간략하게 하여 서리(胥吏)들의 간교함을 막도록 하며, 각사(各司)의 작전(作錢)은 한결같이 해서(海西)의 원모곡(元耗穀)을 작전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반드시 상정(詳定)한 것을 따르되, 두곡(斗斛)의 대소(大小)는 유곡(鍮斛)으로 교정(校正)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곡명(穀名)과 사명(司名)을 개정하는 논의는 그전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며, 지난번 관서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하여 회계(回啓)하면서 역시 낱낱이 펴서 진달한 바가 있었으니 지금 거듭 번거롭게 할 수 없습니다. 상정하여 작전하는데 대해서는 관서의 경우 시행한 지 몇 년이 되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 다른 도에서도 의당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 편부(便否)를 작전(作錢)하는 아문에다 충분히 물어서 한 가지를 지목하여 품정(稟定)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두곡을 유곡으로 교정하는 것은 이미 조정의 법령과 규정이 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오가며 충분히 상의하면 족히 규정을 준용하여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번거롭게 아뢸 필요는 없겠습니다.
 
순창(淳昌)의 환곡 3만 석을 다른 고을에 이송하게 하는 청원은 도신으로 하여금 장부[簿]를 상고하여 균일하게 나누어주도록 하며, 순천(順天)의 통모(統耗)를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수송하여 가게 해달라는 청원은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고 헤아려서 조처하게 해야 합니다.
 
무안(務安)에서는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는 즈음에 부유한 주민들이 탈하(頉下)하도록 도모하여 가난한 자로 구차스럽게 보충시키니, 〈승호군을〉 뽑아 올리는 법을 영영 혁파하고 서울에서 정밀하게 뽑도록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훈련 도감의 승호군을 〈뽑아 올리는 법은〉 바로 숙위 친병(宿衛親兵)을 선발해 올리는 법으로 본래 엄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고을 원이 진달한 바 가려 뽑을 즈음에 누구는 그대로 두고 누구는 빼어버리는 것이 폐단이 되어, 상호(上戶)인 부유한 주민은 갖가지 방법으로 탈하하려고 도모하며, 가난하고 잔약하여 의지할 데 없는 자들만 구차스럽게 강제로 채우므로 도피하는 일이 서로 잇따르고 피해가 이웃과 친척에게 미친다고 말한 것은 폐단이 실로 그러하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오로지 고을 원들이 능히 법의(法意)를 무섭게 생각하여 준수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거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부유한 주민은 탈하를 도모하게 하고는 가난하고 잔약한 자로 구차하게 채운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직접 가려 뽑는 업무를 잘 집행하고 아전이나 향임(鄕任)에게 맡기지 말았더라면, 부유한 주민도 당초에는 모면할 수 없었을 터이며, 가난하고 잔약한 자도 당초에는 구차하게 뽑히지 않았을 것이고, 뇌물을 받고 일부러 빼버리거나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 불법으로 침해하는 등, 허다한 간교와 농간이 저절로 행해질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가려 뽑은 군사도 날래고 근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법은 본래 이와 같은데 폐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더구나 선발하여 올려보내는 일 또한 해마다 늘 있는 일이 아니고 비록 식년(式年)인 때라고는 하지만, 열읍(列邑)이 본래 정간(井間)에 정해진 당차(當次)가 있고 그 가운데에도 분정(分定)한 명수(名數)가 있으므로 고을마다 십수년에 한두 명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폐단이 있다고 말하면서 막중한 군제를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폐단에 대한 등문(登聞)을 허락하였으니, 비록 살피지 못한 데 관계되기는 하지만 지금 해당 고을의 원을 논박하며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로써 신칙하소서. 승호군을 뽑아 올릴 즈음에는 한결같이 구법(舊法)을 준행하고 폐단에 가까운 것은 따르지 말도록 하라는 뜻으로 각 고을에 미리 경계하게 하소서.
 
함평(咸平)은 분정(分定)한 인책(印冊)의 비용이 결역(結役)에서부터 나오지만 주민들에게 백징(白徵)하는 것이 많으니, 만일 진강(進講)하는 책자(冊子)가 아니면 인출(印出)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인역(印役)을 당하게 되더라도 매우 줄여 간략히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주민과 고을에 폐단을 끼치는 것이 이와 같이 치우치게 심하니, 진강하는 책자가 아닌 것 및 긴급하게 쓰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쉽사리 공문을 발송하여 자주 인역(印役)을 올릴 수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옥당과 내각(內閣) 그리고 성균관에 분부하소서.
 
함열(咸悅)은 영운(領運)에 실제로 네 가지 폐단이 있으니 창속(倉屬)을 일곱 고을에서 돌아가며 차원(差員)을 정하도록 청원하였는데, 도신(道臣)의 논의 또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임자년2865) 에 규정을 정하였는데 오래되지 않아 또다시 규정을 고친다면, 그것이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일이 조운(遭運)하는 제도를 변통(變通)하는 데 관계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처하게 하소서.
 
장수(長水)는 본래 순포(純布)로 수납(收納)하게 하였었는데 지난 신해년2866) 에 별도로 규정을 정하여 순전(純錢)으로 대납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면포가 귀할 때에 주민들의 청원을 따라 경장(更張)한 것에 불과하며, 이번에 도로 본색포(本色布)로 비납(備納)하게 한 것도 역시 주민들의 청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돈으로 받거나 면포로 받거나 공가(公家)에 있어서는 또한 득실이 없으니, 청원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강진(康津)은 세위태(稅位太)를 영암(靈巖)과 해남(海南)의 사례에 의거하여 콩 2석(石)에 대미(大米) 1석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본현(本縣)은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므로 염분이 많아 콩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또한 영암·해남과 다름이 없으니, 세납(稅納)을 판비(辦備)하기 어려운 것은 주민들의 형편으로 보아 진실로 그러합니다. 영암의 경우는 숙종(肅宗) 경자년2867) 에 그곳은 콩농사가 적합하지 않은 땅이라고 하여 주민들의 청에 따라 쌀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며,

해남에도 쌀로 대납하게 하면서 모두 콩 2석을 쌀 1석으로 대납하게 하고 준절(準折)해서 대환(代換)하도록 하였습니다. 강진이 영암·해남 지역과 이미 잇달아 닿아 있고 토산물 또한 같은데, 두 고을에는 이미 변통하게 하였으니 강진의 주민들이 이를 끌어다 청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위태(位太)로 본청(本廳)에 있는 것 가운데 각 공(各貢)으로 먼저 받은 것 또한 2석의 콩을 1석의 쌀로 환작(換作)하게 한다면 더욱 구애됨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고을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전주(全州)·여산(礪山)의 양향(粮餉)과 둔토(屯土), 그리고 옥구(沃溝)의 양궁방(兩宮房) 및 기로소(耆老所)의 전답은 모두 지역적으로는 묵히거나 폐지한 것이 있고 세금은 정액이 있는데, 경납(京納)은 반드시 고총(高摠)을 책임지게 하므로 주민들의 세금은 갑절의 징수를 모면하지 못하니, 세 고을에서 묵히고 있는 것은 모두 타량(打量)2868) 때를 기점으로 하여 실제대로 세금을 정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대체로 양향이나 각 둔토는 바로 적몰(籍沒)한 전답을 관아에다 귀속시킨 것인데,

토민(土民)들은 주인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관리들은 보기를 이굴(利窟)로 여기므로 세금이 헐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주민들은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바치는 것은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도 관리들은 반드시 더 징수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폐단이 자연 겹으로 생겨나는데 이는 또한 경청(京廳)에서 아는 바가 아닙니다. 당초에 세금을 정한 것이 비록 실제의 결수(結數)를 따랐다 하더라도 해가 오래된 뒤에는 묵히거나 일군 것이 없지 않으니,

별도로 타량하도록 파견하여 한차례 이정(釐正)하는 것 역시 주민들의 청원을 따라주는 한 가지 일이 됩니다. 해청(該廳)에 분부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게 하소서. 양궁방 및 기로소의 전답에 대하여 그 폐단을 말한 것 역시 양향·둔토와 다름이 없습니다. 각기 둔감(屯監)을 보내어 실제대로 세금을 정하라는 뜻으로 일체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주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제주 등 세 고을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가운데 목자(牧子)와 긴요하지 않은 봉대(烽臺)를 혁파하도록 한 논의는 세 고을이 모두 그러하니, 봉대의 경우는 보존시키느냐 혁파하느냐 하는 것을 잘 헤아릴 일을 해도(該道)에 분부하도록 하고, 목자에 대한 폐단은 3년에 한 번 점고하는 편부(便否)를 태복시(太僕寺)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품처토록 하며, 그 나머지 여러 조목은 묘당에서 조처하도록 하는 일을 명하(命下)하셨습니다.

제주목의 별저곡(別儲穀)을 오래도록 창고 안에 유치시켜 두게 한 것은 뜻하지 않는 일을 대비해서이니, 원환(原還)으로 새로 바치는 보리와 쌀은 해마다 숫자를 나누어 환색(換色)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별저곡은 이미 경오년2869) 봄에 호남(湖南)의 진자(賑資)로 삼아 호남에 이전하고서 아직 미처 되돌려 받지 못하였으니, 되돌려 받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정(議定)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세 고을의 연대(煙臺)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곳은 혁파하도록 청원한 데 대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보존시키거나 혁파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다시 본목(本牧)에 공문을 보내어, 긴요하지 않아 당장 혁파해야 할 곳이 몇 군데인가를 묻고 논열(論列)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각 목장의 목자(牧子)에 대하여 식년(式年)에 한 번 점고할 것을 청원한 데 대하여 태복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한 명이 있었습니다. 3년이나 해마다 편부(便否)를 묻도록 해시(該寺)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정하게 하소서.
 
대정(大靜)과 정의(旌義)의 주민들은 영역(營役)에 배정하지 말고 한결같이 현재 살고 있는 고을에다 입적(入籍)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본목(本牧)과 양읍(兩邑)에서 청원한 바가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각반(各般)의 신역(身役)은 아비의 역(役)을 따라 채우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청원한 바가 적합함을 얻었으니 이에 따라 규정을 정해서 시행하게 하며, 대정(大靜)의 양전(量田)은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정말로 그대로 두도록 하고, 정의(旌義)는 이교(吏校)의 원액(元額) 외에 투속(投屬)을 원하는 자는 일체 허락하지 말고, 아울러 군역에 보충하도록 한 것은 실제로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는 데서 출발하여 군정(軍政)을 엄히 하라는 뜻으로 의시(依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경도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에서 품처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삼수(三水)·갑산(甲山)·경성(鏡城) 등의 고을에서 녹용을 봉진(封進)할 때에 수렴(收斂)하는 폐단입니다. 한 대(對)의 값이 1백 냥이라는 것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심약(審藥)의 무리가 중간에서 조종하여 트집을 잡아 점퇴(點退)2870) 하기도 하며, 아울러 값을 보태어 징출(徵出)하게 하고는 그의 개인 주머니로 돌리니 극도로 놀랍습니다. 도신이 청한 바에 의거하여 원회(元會)에서 1백 냥을 감하게 하며, 태가(駄價) 18냥 외에는 다시 감히 값에 보탠다는 명색(名色)으로 민간에서 수렴하는 것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하소서.

약용으로 하는 녹용은 중량이나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오직 성미(性味)의 좋고 좋지 않음만을 가리도록 이미 선조(先朝) 때 규정을 정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 뒤로는 만약 정말로 진품(眞品)일 경우 양수(兩數)가 조금 가볍거나 무겁더라도 트집을 잡아 점퇴하지 말고, 정해진 규정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함흥(咸興)·정평(定平)·북청(北靑)에서 천신(薦新)하거나 진상(進上)하는 생과어(生瓜魚)와 생대구(生大口)에 대하여 월령(月令)의 기한을 물리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제때에 하는 것이 없고 매번 기한을 물려주기를 청원하니, 사체(事體)가 극도로 지저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삼가 항상 기한을 물려 주기를 청원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월령을 개정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품처하게 하소서.
 
1. 무산(茂山)·갑산(甲山)·경흥(慶興) 세 고을은 환곡은 많고 주민이 적으므로 가까운 고을에 이전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육진(六鎭)에 환상곡(還上穀)이 많은 폐단은 고을마다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도리(道里) 또한 멀어서 전수(轉輸)하는 데 폐단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각 해당 읍과 의견을 교환하여 장점을 따르고 적합함을 헤아려 변통하되, 이쪽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저쪽으로 병폐를 옮기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1. 삼수(三水)의 지방곡(支放穀) 가운데 부족한 숫자는 본읍(本邑)의 군향곡(軍餉穀)·상평곡(常平穀)·진휼곡(賑恤穀)·사진곡(私賑穀)을 가지고 나누어주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읍은 한쪽 모퉁이에 위치하여 도리(道里)가 아주 먼데, 방하(放下)하는 물품을 다른 고을에 나누어 주도록 한다면 전수(轉輸)하는 즈음에 여러 가지로 폐단이 될 터이니, 변통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원한 가운데 상평곡과 진휼곡은 이용(移用)할 수 없도록 하는 뜻을 새로 연품(筵稟)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것은 논할 것 없지만, 군향이 비록 중하더라도 지방(支放)하는 물자 역시 가볍게 하지 못할 것이니, 관서(關西)에서의 사례에 의거하여 모조(耗條) 중에서 나누어 주도록 허락하고, 아울러 사진곡과 모조를 적당히 헤아려 가져다 쓰도록 하되, 감히 원곡(元穀)을 축내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중 경계하도록 하소서.
 
1. 단천(端川)과 길주(吉州)의 당미(䅯米)와 명천(明川)·고원(高原)의 태환(太還)을 변통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단천·길주·고원에 대해서는 준절(準折)에 의해 다른 곡식으로 환작(換作)하는 것을 청원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되, 반드시 정곡(正穀)으로 환작하게 하여 감히 피곡(皮穀)으로 준절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거듭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천에는 조(租)·속(粟)·태(太)를 서로 대납하게 하고, 단천의 피당(皮䅯)을 개록(改錄)하라는 말은 크게 법의(法意)에 어긋나므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무산(茂山)의 원전(元田)을 속전(續田)으로 시행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정전(正田)을 낮추어서 속전에다 부치는 것은 바로 법 밖의 사안에 관계되며 아래에서부터 앙청(仰請)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역시 경솔하게 시행하도록 허락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산의 환곡이 많은 폐단이 된다는 것은 바로 조정에서 평소에 항상 진념(軫念)하면서도 바로잡거나 구제할 요점을 얻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전(火田)이나 더 일군 것을 모두 정결(正結)에 넣어 세금을 바치게 하고 환곡으로 기록하였으므로 그 숫자가 매우 많고, 묵히거나 폐기한 데 대한 백징(白徵)이 수천 결에 이르는데, 정말 도신이 논한 바와 같다면 정전이나 속전을 옮기거나 바꾸기 어렵다는 것으로 일체 미루어 나갈 수 만은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별도로 차관(差官)을 정하여 본 고을의 원과 함께 입회하여 적간(摘奸)하게 하며, 화전 가운데 정전에 뒤섞여 들어간 것은 사실대로 구별해서 장문(狀聞)하게 한 뒤에 다시 품처하도록 하소서.
 
1. 함흥(咸興)의 원전(元田)과 속전(續田) 가운데 묵힌 곳에 대한 탈급(頉給)과 새로 일군 곳으로 더 드러난 것에 대하여 변통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묵힌 전지에 대하여는 경작을 권하고, 새로 일군 토지를 결수에 충당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정해진 것이니, 지금 원전과 속전 가운데 묵거나 황폐해진 곳에 대하여 한꺼번에 모두 탈급하도록 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며, 새로 일군 것을 수효에다 강제로 정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규정이 아니나, 해마다 1파(把)의 가감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각 고을의 잘못된 사례일 것입니다. 이 뒤로는 해마다 집복(執卜)하여 실제 숫자대로 입총(入摠)하게 하라는 뜻으로 지위(知委)하여 시행하게 하며, 이와 같이 한 뒤에도 각 고을에서 한갓 감하고 줄이기만을 일삼거나 혹은 은닉·누락시키는 폐단이 있어 뒤에 발각이 되면, 해당 수령은 결단코 전결(田結)을 환롱(幻弄)한 죄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니, 이로써 일체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장진(長津)의 〈전지(田地)를〉 개량(改量)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의 토지는 모두가 속전(續田)인데다 묵히고 일군 것이 서로 뒤섞여 부역(賦役)이 고르지 않아 온 고을의 주민들이 모두 개량하기를 청원하였다고 합니다. 청원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되, 개량할 즈음에는 잘 살피거나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일경(一頃)이나 반묘(半畝)라도 혹시 실(實)을 잃어버릴 것 같으면, 주민이나 국가가 폐단을 받게 되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해당 수령을 엄중 경계하여 감히 그릇되게 하여 죄에 저촉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1. 문천(文川)·홍원(洪原)·북청(北靑)의 어선세(漁船稅)를 감총(減摠)하는데 대한 일입니다. 어장(漁場)과 선척(船隻)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어 세납(稅納)과 수용(需用)을 보태거나 줄일 수 없도록 해청(該廳)의 절목(節目)이 극히 거듭 엄격하니, 감총하는 한 가지 일 만은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장이 허물어지고 폐기되었거나 선척이 부서지고 손상된 곳에 대해서는 반드시 새로 설치하는 어장과 새로 만드는 선척으로 원총(元摠)을 대신 채우도록 하는 것은 곧 바꿀 수 없는 법이니, 이로써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온성(穩城)과 경흥(慶興) 목장말의 자산(孶産)2871) 과 고실(故失)2872) 을 감수(減數)하고 달종(㺚種)을 정파(停罷)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실(故失)이 세 번 탈나면 하나를 징수하게 하고 새끼를 낳은 세 마리의 암컷 가운데 한 마리를 바치게 하는 것은, 바로 각도의 목장에서 당연히 행하여야 할 규정이니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달마(㺚馬)를 무역하여 들이는 것은 바로 종자를 얻고자 하는 뜻에서인데,

수초(水草)에 익숙하지 않아 한 마리도 생존하지 못하니, 공적으로는 해마다 곡식을 허비하게 되고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필(匹)마다 대금을 징수하게 되어, 해로움은 있고 유익함은 없는 것이 참으로 도신이 논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풍토와 기후가 이미 저쪽 땅[彼地]과 가깝기 때문에 번식시켜서 달종(㺚種)을 취하려고 한 것은 반드시 당초부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니, 갑자기 정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흥(永興) 말응도(末鷹島)의 말을 문천(文川)의 사로도(獅老島)로 옮겨 기르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마필을 외양(喂養)하면서 목호(牧戶)를 주지 아니하고, 빈 목장을 수축(修築)하게 하면서 촌민(村民)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되어 일이 너무나 의의가 없이 되며, 도연포(都淵浦)에 옮겨서 기르도록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니 청원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되, 마필만 옮겨 가도록 할 수 없으니 목호를 문천에 함께 보내도록, 이로써 분부하소서.
 
1. 갑산(甲山)의 행전(行錢)2873) 에 대한 일입니다. 서변(西邊)은 저쪽 땅과 서로 닿아 있는 곳으로 기한을 정하여 〈전지(田地)를〉 묵히거나 폐기하므로 주민들의 살고 있는 곳과의 거리가 서로 모두 수백 리가 넘습니다. 그러나 북변(北邊)은 경원(慶源)과 회령(會寧) 등의 지역이 더러는 강을 사이에 두고서 닭 소리와 개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서변에서는 행전하게 하였으나, 북변에서는 막도록 한 것입니다. 갑산은 저쪽 땅과의 거리가 서변과 다름이 없고 동일한 한 도(道) 안의 변지(邊地)인데, 육진(六鎭)에는 허락하지 않고 갑산에서만 허락한다면, 일이 원칙 없이 처리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두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원도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에서 품처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도내 26고을의 인삼값이 해마다 증가하고 가호마다 결렴(結斂)과 번전(番錢)·이전(利錢)을 거두는 것이 뼈를 자르는 듯이 지탱하기 어려운 병폐가 되니, 특별히 경작공(京作貢)을 허락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관동(關東)의 인삼에 대한 폐단은 크고 작은 여러 고을을 따질 것 없이 공통된 근심거리여서, 지나간 적에 그 일년 동안 쓰고 남을 것을 계산하여 작공(作貢)하도록 변통하였습니다. 만약 폐단이 있을 때마다 변통하게 한다면, 막중(莫重)한 탕제(湯劑)에 사용하는 데 남을 것이 거의 없게 될 터이니, 토공(土貢)의 뜻이 또한 정말로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의 체모가 있는 바 갑자기 작공을 의논할 수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철원(鐵原) 등 개량(改量)을 하지 않은 9고을에 대하여 양전(量田)을 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전결(田結)이 문란한 폐단은 여러 도가 마찬가지이지만 호서(湖西)의 진폐 책자(陳弊冊子) 가운데 양전에 대한 한 가지 일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우선 가장 시급한 곳을 시험하게 하고서 만일 실제 효과가 있으면 마땅히 차례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회계(回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강릉(江陵) 등 9고을의 바닷가 주민에 대한 폐단을 변통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 주민에 대한 폐단을 신칙한 것이 전후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공헌(貢獻)을 특별히 줄이고 별복(別卜)을 영원히 막 폐지하였으니 바로잡고 구제하는 효과가 있어야 할 터인데, 폐단이 여전하여 주민들이 애오라지 살아가지를 못하는 데 대한, 도신이 발본 색원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그 요령을 얻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바닷가의 가호(家戶) 가운데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본역(本役)을 모면하려고 도모하여 간혹 교안(校案)에 의탁하거나 더러는 군임(軍任)에 오르거나 하여, 한번 들어간 뒤로는 그 자질(子姪)과 함께 육지로 이거(移居)해 버리므로 바닷가의 가호로 남은 것은 열에 한두 집도 없으니, 당연히 치루어야 할 역(役)이 치우치게 괴로운 것은 형세로 보아 필지(必至)의 것입니다. 제안(除案)한 수령을 별도로 논감(論勘)하고 육지에 사는 바닷가의 주민에게는 일례로 부역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을 얻는 것이니,

도신이 논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진주인(津主人)이 점퇴(點退)하거나 조종(操縱)하는 것은 진실로 이 폐단이 심한 것이니 해호(海戶)가 직납(直納)해서 고을의 수령이 친봉(親捧)토록 하고, 진주인 명색(名色)은 영구히 혁파하도록 처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이나, 트집을 잡아 개비(改備)하고 값을 후하게 해서 환봉(還捧)하는 풍습은 진주인보다 감영과 고을 관속들이 더 심하니, 이와 같은 곳에 대해서는 엄중히 규찰과 신칙을 더하여 나중이나 처음이나 하나같은 효과가 있도록 하소서. 가전(價錢)의 수봉(收捧)은 자기 고을에서 가져다 바꾸게 하는 것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듯합니다만,

자기 고을에서 바꾸는 즈음에 헐값으로 강제로 취하려는 폐단 또한 반드시 있게 될 터이니, 다시 상의하고 헤아려 결정하여 폐단을 제거하려다가 폐단을 생기게 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소서. 모든 계하(啓下) 절목(節目) 외에 만일 첨가하여 넣을 만한 것이 있으면 서울이나 지방을 논할 것 없이 추후에 마련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 기미년2874) 의 절목을 첨가하여 넣는 것은 반드시 마음대로 편리하게 논할 것이 아니라 같은 사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1. 강릉(江陵)의 인삼과 화전의 세금에 대하여 10결(結)을 감하여 주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강릉의 대관령(大關嶺) 서쪽은 땅이 넓으면서도 메말라 살고 있는 주민이 드물고 화전으로 옛날에 일군 것도 지금은 묵히고 있으니, 지금이 지금이 아닐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1백 24결 내의 양 성조(聖朝)에서 특명으로 탕감해 준 숫자가 1백결이 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아랫사람에게 보탬을 주려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10결을 탕감하는 것을 아까워하여 승낙을 유보할 수 없습니다. 급대(給代)한 수효가 3백여 냥이나 된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어디를 쫓아 판비(辦備)해 내야 할 지 모르겠으며, 또 1결의 세전(稅錢)이 30냥이나 되도록 많은 것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조목을 나열하여 보고하게 한 뒤, 다시 품처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47 책 678 면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외교(外交) / *재정(財政) / *금융(金融) / *상업(商業) / *교통(交通) / *도량형(度量衡) / *농업(農業) / *수산업(水産業) / *광업(鑛業) / *신분(身分) / *사상(思想) / *역사(歷史)

[註 2798]용(庸) : 구실. ☞
[註 2799]포보(砲保) : 군보(軍保)의 하나. 포군(砲軍) 네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군역(軍役)에 복무하고, 세 사람은 그 보(保)로 쌀이나 베를 바치던 일. ☞
[註 2800]태정(汰定) : 면직(免職) 시킴. ☞
[註 2801]투탁(投托) : 세력있는 자의 가족으로 위장하여 행세함. ☞
[註 2802]정비(情費) : 구실을 바칠 때에 비공식으로 이원(吏員)에게 주는 잡비. ☞
[註 2803]파즐(爬櫛) : 정리(整理). ☞
[註 2804]유정지공(惟正之供) : 경상적 세공(稅貢)으로 전삼세(田三稅)를 이름. ☞
[註 2805]동탁(童濯) : 산에 나무가 아주 없음. ☞
[註 2806]왜료(倭料) : 왜관(倭館)에 주재하는 왜인에게 공급하는 식량. ☞
[註 2807]회감(會減) : 받을 것과 줄 것을상쇄하여 회계 처리함. ☞
[註 2808]지자(持者) : 지방 관청 사이에 공문을 전달하는 차인. ☞
[註 2809]교준(較準) : 표준(標準)함. ☞
[註 2810]관첩(關牒) : 관문(關文)과 첩정(牒呈). 관문은 상급 관청에서 동등이하 관청에 대해서 발행하는 공문서 또는 허가서이며, 첩정은 첩보(牒報)를 말함. ☞
[註 2811]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2812]회안(會案) : 성안(成案). ☞
[註 2813]길고(桔槹) : 돌을 매달아 그 무게로 물을 긷게 된 두레박. ☞
[註 2814]포락(浦落) : 강물에 논밭이 허물어져 떨어져 나감. ☞
[註 2815]갑자년 : 1804 순조 4년. ☞
[註 2816]통영(統營) : 통제사(統制使)의 군영. ☞
[註 2817]신유년 : 1801 순조 원년. ☞
[註 2818]임술년 : 1802 순조 2년. ☞
[註 2819]무토 면세(無土免稅) : 궁방전(宮房田)의 절수 전결(折受田結)에 대한 조세 면제의 한 가지. 궁방전의 면세에는 유토 면세(有土免稅)와 무토 면세(無土免稅)의 구별이 있는데, 호조에서 실결(實結)을 획급(劃給)하되 기한을 3년에 준하여 도내 각 고을에 윤차(輪次)로 정하는 것을 무토 면세(無土免稅)라 함. ☞
[註 2820]조절(操切) : 법령을 엄하게 지켜 백성을 억누름. ☞
[註 2821]사상(四喪) : 부(父)·모(母)·처(妻)·본인의 상. ☞
[註 2822]기전(畿甸) : 경기도. ☞
[註 2823]전첨(塡簽) : 군역을 메우는 일. ☞
[註 2824]포수(逋藪) :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들이 숨어 있는 소굴. ☞
[註 2825]생치(生齒) : 인구(人口). ☞
[註 2826]선원 계파(璿源系派) : 왕실의 계파. ☞
[註 2827]발사(跋辭) : 끝부분에 적은 글. 발문(跋文). ☞
[註 2828]정묘년 : 1807 순조 7년. ☞
[註 2829]무진년 : 1808 순조 8년. ☞
[註 2830]영실(寧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무고(無辜)한 사람을 살해하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잘못을 책임지겠다[與其殺不章 寧失不經].”는 내용을 가리킴. ☞
[註 2831]경신년 : 1800 순조 즉위년. ☞
[註 2832]영굴(羸詘) : 남고 모자람. ☞
[註 2833]강생(講生) : 강경과(講經科)를 보는 유생. ☞
[註 2834]건몰(乾沒) : 관아에서 범과(犯科)한 물건을 몰수함. ☞
[註 2835]무면(無麵) : 돈이나 물건이 축나는 일. ☞
[註 2836]변리(邊利) : 이자. ☞
[註 2837]기묘년 : 1759 영조 35년. ☞
[註 2838]수향(首鄕) : 좌수(座首)의 별칭. ☞
[註 2839]준절(準折) : 비준(比準)하여 정함. ☞
[註 2840]환색(換色) : 어떤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바꿈. ☞
[註 2841]길거(拮据) : 임시 변통. ☞
[註 2842]무술년 : 1778 정조 2년. ☞
[註 2843]신삼(信蔘) : 통신사의 경비 조달을 위해 주는 삼. ☞
[註 2844]지칙(支勅) : 칙사(勅使)를 지대(支待)함. ☞
[註 2845]소는 보고 양은 보지 않았다 : 《맹자(孟子)》 양혜왕장(梁惠王章) 상에 보임. 제 선왕(齊宣王)이 흔종(釁鍾)에 끌려가는 소를 보고 측은히 여기어 양(羊)으로 바꾸라고 하였는데, 제 선왕은 자신의 행동이 실상 양보다 소를 아까워 한 것이 아닌데도 재물을 아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백성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말하자, 맹자(孟子)가, ‘괴로워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곧 인술(仁術)입니다. 소는 보시고 양은 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라고 하며, 제 선왕이 왕도(王道)를 행할 자질이 있음을 일깨워 준 대목을 인용한 것임. 즉 눈앞에 당장 제기된 문제이니 동정심이 생겨,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나타낸 말임. ☞
[註 2846]노제(老除) : 나이가 많은 군인을 역(役)에서 면제시킴. ☞
[註 2847]계축년 : 1793 정조 17년. ☞
[註 2848]탕패(蕩敗) : 가산을 탕진함. ☞
[註 2849]경술년 : 1790 정조 14년. ☞
[註 2850]계묘년 : 1783 정조 7년. ☞
[註 2851]갑진년 : 1784 정조 8년. ☞
[註 2852]표재(俵災) : 흉년에 조세를 감함. ☞
[註 2853]무진년 : 1808 순조 8년. ☞
[註 2854]안부(案付) : 대장(臺帳)에 기록함. ☞
[註 2855]방민(坊民) : 방(坊) 안에 사는 백성. ☞
[註 2856]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2857]나이(挪移) : 돈이나 물건을 유용하는 일. ☞
[註 2858]집복(執卜) : 관리가 농사의 풍흉을 현장 조사하여 세액을 매기는 일. ☞
[註 2859]무면(無麵) : 돈이나 물건이 축나는 일. ☞
[註 2860]병진년 : 1796 정조 20년. ☞
[註 2861]저채(邸債) :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가 백성의 공납(貢納)을 대납(代納)함으로써 백성이 이들에게 진 빚. 이를 구실 삼아 그 배(倍)로 횡취(橫取)하는 등 작폐(作弊)가 심하였음. ☞
[註 2862]계해년 : 1803 순조 3년. ☞
[註 2863]추매(椎埋) : 사람을 때려 죽이고 파묻어 그 죄적을 감춤. ☞
[註 2864]와채(臥債) : 버려둔 빚. ☞
[註 2865]임자년 : 1792 정조 16년. ☞
[註 2866]신해년 : 1791 정조 15년. ☞
[註 2867]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2868]타량(打量) : 측량(測量). ☞
[註 2869]경오년 : 1810 순조 10년. ☞
[註 2870]점퇴(點退) : 공물의 검사에 불합격되어 수납하지 아니함. ☞
[註 2871]자산(孶産) : 새끼를 낳음. ☞
[註 2872]고실(故失) : 말의 폐사. ☞
[註 2873]행전(行錢) : 물화(物貨)의 유통 과정에 돈을 주고 받음. ☞
[註 2874]기미년 : 1799 정조 23년. ☞ 

6)순조 15권, 12년( 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3일 을유 2번째기사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효·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의 경외(京外)의 충·효·열의 문서’를 정부(政府)에 보고했는데, 등급을 나누어 초계(抄啓)하였다.
 
충신 정려질(忠臣旌閭秩)【보은(報恩)의 고 부호군 이명백(李命百)은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으로 왜변(倭變) 때 창의(倡義)하여 보은을 지키다가 적암(赤巖)의 전투에서 죽었고, 청산(靑山)의 고 주부 박문강(朴文綱)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음죽(陰竹)에서 죽었다.】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서울 사는 고 참봉 오재능(吳載能)·고 교관(敎官) 홍석보(洪錫普)·고 현령 홍헌유(洪獻猷)·고 도정 윤면원(尹勉遠)·고 참판 유의(柳誼)·고 학생 장후근(張厚根)·고 생원 이광유(李光裕)·고 학생 김치형(金致亨)·고 생원 홍헌모(洪憲謨), 경주부(慶州府) 고 사인(士人) 허호(許浩), 개성부(開城府) 고 사인 한광겸(韓光謙), 여주(驪州) 고학생 구석의(具錫儀), 영동(永同) 고 통덕랑(通德郞) 이현규(李顯揆), 목천(木川) 고 사인 김수필(金壽弼), 옥구(沃溝) 고 양인(良人) 정시손(鄭時孫), 전주(全州) 고 한량 백행량(白行良), 상주(尙州) 고 사인 홍도운(洪道運), 금산(金山) 고 학생 조응방(曹應邦), 안동(安東) 고 학생 금홍달(琴弘達), 고 학생 이한오(李漢伍), 거제(巨濟) 고 학생 정유(鄭游), 평산(平山) 고 동지(同知) 조만길(趙萬吉), 평양(平壤) 고 사인 김취의(金就義), 위원(渭原) 고 사인 강건항(姜建恒), 안변(安邊)장교 신만화(申萬和), 함흥(咸興) 고 부사 위광익(魏光翼)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姜彦成)의 처 이씨(李氏)·고 학생 이원식(李元植)의 처 최씨(崔氏)·고 통덕랑 김노직(金魯直)의 처 송씨(宋氏)·고 교관 홍석보(洪碩普)의 처 조씨(曹氏)·고 학생 이철운(李轍運)의 처 유씨(柳氏)·고 생원 홍헌모(洪憲謨)의 처 윤씨·고 사인 임우전(林雨田)의 처 정씨(鄭氏)·고 한량 김유항(金有恒)의 처 신씨(辛氏)와 고 학생 장후근(張厚根)의 처 이씨·고 군수 정문재(鄭文在)의 처 김씨·무의공(武毅公) 조심태(趙心泰)의 처 송씨·고 생원 정우영(鄭祐榮)의 처 윤씨·고 헌납 정지원(丁志元)의 처 이씨·고 목사 홍술조(洪述祖)의 처 이씨·고 생원 조의철(趙宜喆)의 처 이씨·고 학생 서경보(徐慶輔)의 처 김씨·고 현령 남성로(南省老)의 처 조씨(趙氏)·

양인 김세봉(金世鳳)의 처 박성(朴姓)·고 학생 박종건(朴宗謇)의 처 김씨·고 동지 이사룡(李思龍)의 처 고씨(高氏)·고 학생 이장철(李章喆)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秦得忠)의 처 임씨(林氏), 고 사인 이영필(李英弼)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從姪)인 이응번(李應蕃)의 처 김씨, 영평(永平) 고 학생 김순인(金順仁)의 처 변씨(邊氏), 안산(安山) 고 사인 이도용(李道容)의 처 김씨, 적성(積城) 고 학생 경육(慶焴)의 처 남씨(南氏), 파주(坡州) 고 사인 김한규(金漢奎)의 처 조씨(趙氏), 통진(通津) 고 주부 윤재익(尹在益)의 처 이씨, 과천(果川) 고 학생 홍유룡(洪有龍)의 처 전씨(全氏), 양주(楊州) 고 사인 홍선영(洪善泳)의 처 조씨(曹氏), 여주(驪州) 고 학생 이광모(李光模)의 처 박씨·고사인 권순건(權順健)의 처 이씨, 연산(連山) 고 사인 백상준(白尙準)의 처 송씨,

서원(西原) 고 사인 오세환(吳世煥)의 처 김씨, 목천(木川) 고 사인 남섭(南燮)의 처 김씨, 공주(公州) 고 부사 유회원(柳晦源)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李翼善)의 처 한씨(韓氏), 회덕(懷德) 고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의 처 이씨, 홍산(鴻山) 고 처녀 윤씨, 익산(益山) 고 사인 권시하(權時夏)의 처 조씨(趙氏), 창평(昌平) 고 사인 양학언(梁學彦)의 처 이씨, 남평(南平) 고 양인 박처준(朴處俊)의 처 김성(金姓), 함평(咸平) 고 부장(部將) 윤해(尹海)의 처 강씨(康氏)와 고 사인 김석규(金碩圭)의 처 진씨(陳氏), 무안(務安) 고 사인 서익천(徐益天)의 처 정씨(鄭氏), 남원(南原) 고 사인 김익(金釴)의 처 이씨, 고부(古阜) 고 사인 김방수(金芳洙)의 처 정씨(丁氏), 동복(同福) 고 양인 정쌍룡(鄭雙龍)의 처 이성(李姓), 창녕(昌寧) 고 사인 성효열(成孝悅)의 처 손씨(孫氏), 경주(慶州) 관노(官奴) 현옥(顯玉)의 처 황아(黃娥), 안의(安義) 고 사인 김세적(金世績)의 처 허씨(許氏),

영덕(盈德) 고 사인 신길환(申吉煥)의 처 권씨(權氏), 선산(善山) 사노(私奴) 복재(卜才)의 처 김녀(金女), 밀양(密陽) 고 사인 이석린(李錫麟)의 처 박씨, 통천(通川) 고 사인 임붕원(林鵬遠)의 처 고씨(高氏), 원주(原州) 고 사인 권유(權愉)의 처 원씨(元氏), 금성(金城) 고 사인 배정로(裵廷老)의 처 진씨(秦氏), 금화(金化) 고 사인 이한유(李漢裕)의 처 한씨(韓氏), 횡성(橫城) 고 사인 김광한(金光漢)의 처 원씨(元氏), 정선(旌善) 고 공생(貢生) 고지걸(高志屹)의 처 김성(金姓), 삼척(三陟) 고 공생 김윤근(金允瑾)의 처 남성(南姓), 재령(載寧) 고 업무(業武) 손언장(孫彦章)의 처 한씨(韓氏), 장연(長淵) 고 사인 박한성(朴漢成)의 처 김씨, 서흥(瑞興) 고 사인 신재순(申在舜)의 처 유씨(柳氏), 해주(海州) 고 영리(營吏) 지상함(池相涵)의 처 김성(金姓),

의주(義州) 고 사인 백광련(白光鍊)의 처 최씨, 곽산(郭山) 고 학생 지덕룡(池德龍)의 처 김씨, 삼등(三登) 고 통덕랑 주평(朱坪)의 처 김씨, 강계(江界) 고 학생 김성삼(金省三)의 처 김씨, 평양(平壤) 고 사인 김이곤(金理坤)의 처 이씨, 개천(价川) 고 사인 이일초(李日初)의 처 김씨, 영흥(永興) 고 학생 김왕추(金旺秋)의 처 장씨(張氏), 함흥(咸興)의 고 학생 이종눌(李宗訥)의 처 김씨·고 학생 한명갑(韓命甲)의 처 진씨(秦氏)·고 급제(及第) 유혜중(柳惠重)의 처 이씨, 삼수(三水) 전 권관(權管) 김성정(金聖鼎)의 처 박씨, 부령(富寧) 출신(出身) 이원배(李元培)의 자부(子婦) 장씨(張氏)·양씨(楊氏), 이원(利原) 고 무인 연재협(延再協)의 처 엄씨(嚴氏)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洪獻猷)의 처 이씨, 예천(禮泉) 고 사인 이진헌(李鎭憲)의 처 권씨(權氏)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영동(永同)의 고 목사(牧使) 이수(李洙)는 기사년 곤전(坤殿)께서 손위(遜位)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廢)했던 사람이다. 청도(淸道)의 고 만호(萬戶) 박경선(朴慶宣)·고 장사랑(將仕郞) 박경인(朴慶因)은 왜변(倭變)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戰死)했던 사람이다. 안의(安義)의 고 사인 김우석(金虞錫)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변 때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람이다.

대구(大丘)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從弟) 고 정(正) 허복량(許復良)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 병사 민영(閔栐)을 따라 쌍령(雙嶺)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崔誡)와 그 아우 최인(崔認)과 그 종자(從子) 최동보(崔東輔)는 왜변 때 창의하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密陽)의 고 참의(參議) 손조서(孫肇瑞)는 단묘(端廟) 때 육신(六臣)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廢棄)했던 사람이다. 상주(尙州)의 고 처사(處士) 채득기(蔡得沂)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孝子贈職秩)【서울 사는 고 지사(知事) 황운하(黃運河)·고 학생 유해균(柳海均)·고 남학 교수(南學敎授) 현계정(玄啓楨)·고 학생 이혼(李混)·고 감역(監役) 김정주(金鼎柱)·고 학생 심사정(沈師定)·고 사인 홍병오(洪秉五)·고 서윤(庶尹) 홍계서(洪啓瑞)·고 동지(同知) 이사룡(李思龍), 수원부(水原府) 고 참봉(參奉) 윤형로(尹衡老), 양주(楊州) 고 학생 이삼석(李三錫), 장단(長湍) 고 사인 한광세(韓光世), 양천(陽川) 고 통덕랑 김숭제(金嵩濟), 부여(扶餘) 고 사인 최사백(崔賜百), 영동(永同) 고 사인 최복원(崔復源), 목천(木川) 고 정랑(正郞) 조명(趙銘), 공주(公州) 고 사인 윤박(尹搏), 서원(西原) 고 사인 송상휘(宋尙輝)·홍귀서(洪龜瑞), 진천(鎭川) 고 통덕랑 정도(鄭棹),

전주(全州) 고 사인 조대수(趙大壽)·이진운(李鎭運), 영암(靈巖) 고 직장(直長) 신사준(愼師浚), 장수(長水) 고 동지 김성보(金聖輔), 능주(綾州) 고 사인 박헌가(朴獻可), 고부(古阜) 고 사인 송수현(宋守賢), 금구(金溝) 고 사인 송정모(宋廷模), 지례(知禮) 고 사인 이수호(李遂浩), 함창(咸昌) 고 사인 조수구(趙守球), 고성(固城) 고 사인 백봉래(白鳳來), 영월(寧越) 고 사인 엄계태(嚴啓泰), 강릉(江陵) 고 사인 신갑동(辛甲東)·고 생원 최현민(崔顯珉), 성천(成川) 고 현감 나홍점(羅弘漸), 강서(江西)고 학생 한태형(韓泰亨), 상원(祥原) 고 학생 방덕일(方德一), 중화(中和) 고 학생 한창대(韓昌岱), 용강(龍岡) 고 사인 김진수(金震秀), 삼화(三和) 고 사인 김처겸(金處謙)이다.】
 
【영인본】 48 책 15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7)순조 17권, 14년( 1814 갑술 / 청 가경(嘉慶) 19년) 5월 8일 무술 2번째기사

●경기·호서·영남·관동의 진제를 마치다
경기·호서·영남·관동의 진제(賑濟)를 마쳤다.【경기는 통진(通津)·풍덕(豊德) 두 고을의 기민 4만 7백 15구에게 곡물 3천 7백 8석을 진휼하였고, 호서는 공주(公州) 등 53읍·진의 기민 16만 8천 1백 79구에게 곡물 2만 8천 9백 4석을 진휼하였고, 영남은 대구(大邱) 등 71읍·진의 기민 56만 6천 88구에게 곡물 4만 3천 4백 62석을 진휼하였고, 관동은 고성(高城) 등 14읍의 기민 2만 구에게 곡물 1만 3천 7백 64석을 진휼하였다.】
 
【영인본】 48 책 61 면【분류】 *재정(財政) / *구휼(救恤)
 

8)순조 25권, 22년( 1822 임오 / 청 도광(道光) 2년) 5월 29일 임인 3번째기사

●경기·관서·북관·관동의 진휼을 끝마치다
경기(京畿), 관서(關西), 북관(北關), 관동(關東)의 진휼을 끝마쳤다.【경기는 통진(通津) 등 8읍진(邑鎭)에 기민(飢民)이 4만 9천 1백 79구(口)이고 분진(分賑)은 각곡(各穀) 6천 3백 79석 영(零)이며, 관서는 자산(慈山) 등 5읍에 기민이 5만 6천 7백 31구이고 분진은 절미(折米) 1천 9백 97석 영이며, 북관은 안변(安邊) 등 7읍에 기민이 5만 1천 6백 34구이고 분진은 절미 1천 3백 91석 영이며, 관동은 춘천(春川) 등 8읍에 기민이 1만 6천 8백 12구이고 분진은 각곡 2천 8백 43석 영이었다.】
 
【영인본】 48 책 204 면【분류】 *구휼(救恤)

9)순조 27권, 24년( 1824 갑신 / 청 도광(道光) 4년) 3월 21일 갑신 2번째기사

●고 이돈서·박심원·김성에게 증직하다
이조에서 상주(尙州)의 유학(幼學) 이중림(李重林)의 상언을 인해 회계하여, 강도(江都)에서 순절한 사람 이돈서(李惇敍)에게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충렬사에 입향(入享)된 여러 현인들은 모두 증작(贈爵)·증시(贈諡)의 은전을 입었는데, 유독 이돈서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으니 실로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제 후손의 호소로 인하여서 이미 정경을 증직하였으니 특별히 증시하는 것이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정사에 합치될 듯싶습니다.”
 
하고, 또 통진(通津)의 고 학생 박심원(朴深源)의 효행과 충원(忠原)의 고 처사(處士) 김성(金聲)에게 아울러 증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김성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으로 명(明)나라를 존숭했던 자이다.
 
【영인본】 48 책 239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10)순조 28권, 26년( 1826 병술 / 청 도광(道光) 6년) 1월 25일 정미 2번째기사

●호조에서 아뢰어 재결을 마음대로 편리하게 한 도신·수재를 벌하게 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 을유년4876) 조 연분(年分)4877) 성책(成冊)을 가져다 상고하건대, 파주(坡州) 등 12읍(邑)에 재결(災結)을 분표(分俵)한 수효가 실재의 논[畓] 원총수(元摠數)보다 더함이 자그마치 9백 50결(結)에 이르렀습니다. 각 궁방(宮房)의 면세답(免稅畓)은 도로 출세(出稅)하는 것으로 기록하여 모두 재탈(災頉)로 돌려 놓았으며, 호조(戶曹)의 출세전(出稅田)은 새로 면세(免稅)하는 것으로 기록하여 마음대로 실제의 총수를 감하였으니, 일이 몹시 의혹됩니다. 해도(該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물으니,

말하기를, ‘면세전의 재상(災傷)은 급재(給災)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미 획급(劃給)할 수 있는 논이 없으니, 그 형편이 밭으로 충당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급재의 법은 스스로 한계가 있으므로, 각양(各樣)의 무세(無稅)와 면세는 모두 제외시키고, 다만 그 세금을 내는 실답(實畓)을 전제한 가운데 거론(擧論)해야합니다. 만약 12읍의 재상(災傷)이 참으로 출세할 실답보다 지나치고 각 궁방의 면세로 과연 수납(收納)할 방도가 없다면,

마땅히 해읍(該邑)에서 순영(巡營)에 논보(論報)하여 급대(給代)하기를 장청(狀請)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데, 이렇게 하지 않고 이제 곧 별도의 명색(名色)을 만들어 마음대로 스스로 서로 바꿔치기 하면서 혹은 도로 출세를 한다느니, 혹은 새로이 면세를 한다느니 하면서, 심지어는 면세하는 논을 출세하는 것으로 옮겨 만들면서 아무 까닭 없이 급재하였고, 출세하는 밭을 면세하는 것으로 옮겨 만들어 어려움 없이 총수를 감하였으니,

법례(法例)로써 헤아려 보건대 절대로 부당합니다. 그리고 해도(該道)에서 비록 각 궁방의 무토 면세(無土免稅)4878) 를 충납(充納)할 곳이 없다고 핑계대어 무토 면세의 밖에 또 다시 급재하고 급대(給代)한 것이 있으며, 파주(坡州)·장단(長湍)·지평(砥平) 3읍(邑)에는 궁방과 균역청(均役廳)의 유토 면세(有土免稅)4879) 도 혼동(混同)하여 급재(給災)한 것이 있었고, 적성(積城)은 면세한 본래의 전결에 수효를 더하여 함부로 기록하였으며, 장단은 면세한 것이 없는 것을 허위로 첨입(添入)하여 만들어서 구차하게 그 9백 50결(結)의 수효를 채웠으니,

이는 그 급재한 것이 어느 곳에 돌아갔으며, 그 급대(給代)한 것은 어느 땅에 소속하였는지, 거행한 바가 착란(錯亂)됨이 이와 같이 낭자하였으니, 청컨대 파주·장단·통진(通津)·부평(富平)·안산(安山)·교하(交河)·양근(楊根)·마전(麻田)·적성·연천(漣川)·지평·포천(抱川) 등 읍의 수령을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定罪)하고, 그 착란하도록 맡겨 두어 능히 살펴서 단속하지 못한 해당 도신(道臣)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며, 재결(災結)에 가표(加俵)한 것은 모두 낱낱이 실지대로 환원시키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재결에 대한 정사는 본래 스스로 엄격히 하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도신(道臣)과 수재(守宰)가 마음대로 편리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죄를 주어야 하나, 이미 분표한 재결을 다시 실제로 환원하게 한다면 도리어 백성을 소요하게 할 염려가 있으니, 차라리 실수된 의리에 부칠지언정 실제로 환원하는 한 조항은 특별히 그만 두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48 책 260 면【분류】 *재정-전세(田稅)
 
[註 4876]을유년 : 1825 순조 25년. ☞
[註 4877]연분(年分) : 그 해의 농사의 풍흉에 따라 해마다 토지를 상상(上上)·상중·상하·중상·중중(中中)·중하·하상·하중·하하(下下)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제도. 세종 28년(1446년)부터 실시함. 연분 구등(年分九等)이라고도 함. ☞
[註 4878]무토 면세(無土免稅) : 호조(戶曹)에서 거두어들일 수조권(收租權)을 궁방(宮房)이나 관청에 끊어주거나 베어주던 일. 즉 호조에서 실결(實結)을 획급하되 면세의 기한을 3년에 준하여 도내 각읍에 윤차(輪次)로 정함. 3년 주기의 윤차는 정조 때 다시 10년으로 한정하였음. ☞
[註 4879]유토 면세(有土免稅) : 궁방전 면세의 한 가지. 대개 절수 전결(折受田結)의 경우, 해상 궁방에서 토지를 사들여 호조에 망(望)을 바쳐 영구히 궁둔(宮屯)으로 만드는데, 혹 진폐(陳廢)되더라도 이환(移換)할 수 없음. 토지의 소유권과 수조권을 모두 가짐으로써 궁방의 사적 대토지 집적을 가능케 함. ☞ 

11)순조 28권, 26년( 1826 병술 / 청 도광(道光) 6년) 6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경기 암행 어사 권복의 서계대로 상법을 시행하다
경기 암행 어사 권복(權馥)이 서계(書啓)를 올려, 이천(利川) 부사 오철상(吳徹常), 장단(長湍) 부사 이주풍(李周豊), 광주(廣州) 판관 이익재(李翼在), 고양(高陽) 전 군수 이유(李游)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을 분간하여 감처(勘處)하였다. 안성(安城) 군수 김영(金鑅), 마전(麻田) 군수 현인복(玄仁福)에게는 아마(兒馬)를 하사하고, 시흥(始興) 현령 임현철(林顯喆), 과천(果川) 전 현감 이인수(李麟秀)는 승직(陞職)시켜 서용(敍用)하였으니,

모두 치적(治績)을 포장(褒奬)하도록 아뢰었기 때문이다. 별단(別單)에서 말한 순영(巡營)의 방채(放債)에 저치미(儲置米)를 가하(加下)한 것과 순청(巡廳)·고마청(雇馬廳) 두 청(廳)의 곡식과 통진(通津) 등읍의 환모곡(還耗穀)과 과천 고마조(雇馬條)의 가하와 각역(各驛)의 성향(城餉)과 삭녕(朔寧)의 전세(田稅)와 양주(楊州)의 목장(牧場)을 침범하여 경작(耕作)하는 등의 폐단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해 시행하게 하였다.
 
【영인본】 48 책 264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12)순조 30권, 28년(1828 무자/청 도광(道光) 8년) 10월 9일 을해 1번째기사

●전국의 효자·충신 등에게 정려 등을 내리다
효자(孝子)로 뽑힌, 고 승지(故承旨) 심규로(沈奎魯), 김제(金堤)의 사인(士人) 김한명(金漢明), 무장(茂長)의 고 동지(故同知) 김치관(金致瓘), 단양(丹陽)의 사인(士人) 이상문(李尙文)에게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문의(文義)의 사인(士人) 김성대(金聲大), 흥양(興陽)의 사인(士人) 김경집(金慶集), 원주의 통덕랑 이사원(李思遠), 김포의 통덕랑 이재직(李載稷), 철원(鐵原)의 사인(士人) 이훈(李燻), 무안(務安)의 사인(士人) 김약화(金躍華), 영암(靈巖)의 사인(士人) 조성윤(曹聖允)에게는 증직(贈職)을 내렸으며, 전주(全州)의 사인 권내언(權來彦)에게는 호역을 면제하였다.

단종 때의 충신인 진사 조완규(趙完珪)에게는 증직을 내리고, 병자란(丙子亂)에 순절한 증(贈) 참판(參判) 배명순(裵命純)에게는 정려를 내렸으며, 고부(古阜)의 증(贈) 집의(執義) 김남식(金南式)은 충절로써 증직하였고, 그 아들 김이성(金履成)은 효행으로써 정려하였다. 부안의 고(故) 주부(主簿) 김억일(金億鎰)은 순효비(純孝碑)를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는 선묘조(宣廟朝)에 특명으로 비를 세운 것이었으나 광해군(光海君) 때에 그 전에 세자 책봉을 간쟁하였다는 이유로 그 비석을 허물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예조에서 회달한 것이었다.
 
【영인본】 48 책 315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윤리-강상(綱常)

13)순조 32권, 31년(1831 신묘/청 도광(道光) 11년) 7월 14일 갑자 1번째기사

●효행과 열행을 한 유생들에게 포상하기를 예조에서 복계하다
예조에서 여러 도(道)의 유생(儒生)의 상언(上言)으로써 복계(覆啓)하였는데, 광주(廣州)의 통덕랑(通德郞) 이희범(李僖範)과 김포(金浦)의 사인(士人) 이지화(李至和)와 과천(果川)의 사인 이명해(李命海)와 통진(通津)의 사인 박종륜(朴宗倫)과 수원(水原)의 사인 신사하(辛師夏)·최정린(崔廷麟)·장용현(張龍見)과 충주(忠州)의 사인 권국화(權國華)와 서원(西原)의 통덕랑 박세미(朴世美)와 부여(扶餘)의 통덕랑 유한승(兪漢昇)과 황간(黃澗)의 생원(生員) 남치형(南致亨)과

광주의 사인 임일기(任日箕)와 통천(通川)의 사인 조상린(趙相藺)과 평택(平澤)의 사인 장준(張濬)과 서산(瑞山)의 사인 최만징(崔萬澄)에 대해서는 효행(孝行)으로써 아울러 증직(贈職)하고, 부평(富平)의 사인 남익호(南益祜)의 처 김씨와 춘천(春川)의 사인 황기언(黃基彦)의 처 김씨와 연풍(延豊)의 사인 윤학렬(尹鶴烈)의 처 송씨와 보령(保寧)의 사인 이조원(李朝源)의 처 심씨에 대해서는 열행(烈行)으로써 아울러 정려(旌閭)하였으며, 춘천의 유학(幼學) 최광한(崔光漢)의 처 이씨에 대해서는 효행으로써 복호(復戶)하였다.
 
【영인본】48책 370면【분류】*인사-관리(管理)/*군사-군역(軍役)/*윤리-강상(綱常)
 
14)순조 32권, 32년(1832 임진/청 도광(道光) 12년) 4월 13일 기축 2번째기사

●예조에서 각 식년에 충·효·열에 대해 장계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하여 초계하다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에 서울과 외방에서 충(忠)·효(孝)·열(烈)에 대해 장계(狀啓)로 정부에 보고한 것을 분등(分等)하여 초계(抄啓)하였다.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서울에 사는 고(故) 봉사(奉事) 김재건(金載健)·고 학생(學生) 윤자영(尹滋榮), 수원부의 고 가선(嘉善) 최일황(崔一晃), 개성부의 고 진사(進士) 전성빈(全聖賓)·고 무급제(武及第) 문기영(文基永)·고 사인(士人) 문상목(文尙穆)과 이양춘(李瀁春), 공주(公州)의 고 부사 민진강(閔鎭綱), 홍산(鴻山)의 고 사인 강세욱(康世郁), 연기(燕歧)의 고 사인 유시채(柳始采), 곡성(谷城)의 고 사인 안효천(安孝天), 함평(咸平)의 고 사인 안봉윤(安鳳胤), 전주(全州)의 고 사인 최성전(崔性全), 선산(善山)의 고 가선 강윤하(姜允河),

안동(安東)의 고 진사 김정근(金正根), 삼가(三嘉)의 고 사인 김시경(金時卿), 횡성(橫城)의 고 사인 서계성(徐繼聖), 토산(兎山)의 고 학생 박태겸(朴泰謙), 배천(白川)의 증(贈) 참의(參議) 이익채(李益采), 평산(平山)의 고 학생 서경유(徐景裕), 평양의 고 사인 김득남(金得南)과 그의 아우인 김득창(金得昌), 함흥의 고 학생 박상유(朴尙裕)와 고 오위 장(五衛將) 이광복(李光福), 경흥(慶興)의 한량(閑良) 정승구(鄭陞九), 안변(安邊)의 고 사인 최진홍(崔鎭弘)이다.】 효녀 정려질(孝女旌閭秩)【남평(南平)의 고 사인(士人) 오주학(吳柱學)의 딸 12세의 어린아이다.】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서울에 사는 고 교리(校理) 이윤겸(李允謙)의 처 조씨(趙氏), 춘천(春川)의 고 사인 임수강(林壽崗)의 처 김씨, 해주(海州)의 고 사인 오재현(吳載顯)의 처 이씨이다.】 열녀 정려질(烈女旌閭秩)【서울에 사는 고 통덕랑(通德郞) 허주(許澍)의 처 유씨(柳氏)와 고 급제 신필조(申弼朝)의 처 이씨·고 사인 이인형(李寅衡)의 처 임씨(林氏)·고 학생 유창(柳昶)의 처 이씨·고 학생 채동수(蔡東秀)의 처 권씨·고 보덕(輔德) 이경삼(李敬參)의 처 신씨(申氏)·고 학생 김이휴(金履休)의 처 이씨·

고 진사 이종구(李鍾九)의 처 남씨, 수원부의 고 사인 송낙수(宋洛秀)의 처 정씨(鄭氏), 강화부의 고 유성필(劉聖弼)의 처 이씨, 개성부의 고 사인 임정집(林挺㠎)의 처 임씨와 고 학생 고명암(高命巖)의 처 김씨·고 사인 장점수(張漸秀)의 처 이씨·아병(牙兵) 최중옥(崔重玉)의 처 배성(裵姓), 고양(高陽)의 고 사인 유익환(兪益煥)의 처 이씨와 고 사인 정수관(鄭遂觀)의 처 이씨, 용인(龍仁)의 양인(良人) 최재관(崔在寬)의 처 김성(金姓), 김포(金浦)의 고 학생 양종오(梁鍾五)의 처 안씨,

시흥(始興)의 고학생 장석태(張錫泰)의 처 이씨, 영평(永平)의 고 사인 김의효(金義孝)의 처 이씨, 남양(南陽)의 고 사인 윤유무(尹惟懋)의 처 홍씨, 안산(安山)의 고 사인 이애영(李昹永)의 처 유씨(柳氏), 장단(長湍)의 고 사인 박수홍(朴壽泓)의 처 황씨, 죽산(竹山)의 고 사인 최학주(崔學周)의 처 권씨, 공주의 고 사인 이정원(李晶遠)의 처 오씨(吳氏)와 고 생원(生員) 한득연(韓得衍)의 처 박씨, 서원(西原)의 고 사인 송일기(宋一琦)의 처 정씨(鄭氏),

홍주(洪州)의 고 사인 이붕호(李鵬浩)의 처 김씨, 괴산(槐山)의 고 사인 이헌규(李獻圭)의 처 박씨, 아산(牙山)의 고 학생 김창한(金昌漢)의 처 강씨(姜氏), 광주(光州)의 고 사인 박성립(朴性立)의 처 이씨, 고부(古阜)의 고 사인 김윤문(金允文)의 처 이씨(李氏)·고 사인 이문방(李文邦)의 처 노씨(盧氏)·고 사인 김찬영(金瓚榮)의 처 송씨, 동복(同福)의 고 공생(貢生) 오시현(吳時炫)의 처 김성(金姓), 부안(扶安)의 고 사인 김풍하(金豊夏)의 처 박씨, 태인(泰仁)의 고 사인 김도익(金道益)의 처 권씨, 고산(高山)의 고 사인 국치권(鞠致權)의 처 임씨(任氏), 남평(南平)의 고 사인 오주학(吳柱學)의 처 김씨, 나주(羅州)의 고 사인 정영유(鄭榮裕)의 처 염씨(廉氏),

능주(綾州)의 고 사인 배순우(裵舜祐)의 처 오씨, 안의(安義)의 고 사인 임한신(林翰臣)의 처 박씨, 함양(咸陽)의 증 참판 권수룡(權壽龍)의 처 강씨, 경주의 고사인 김성극(金聲極)의 처 손씨, 진주의 고 사인 조윤(曹玧)의 처 이씨, 대구의 고 향리(鄕吏) 이항언(李恒彦)의 처 홍성(洪姓)·고 사인 정광일(鄭匡一)의 처 송씨, 선산(善山)의 고 업유(業儒) 박원택(朴元澤)의 처 박성(朴姓), 삼가(三嘉)의 고 사인 김시경(金時卿)의 처 정씨(鄭氏), 예안(禮安)의 고 사인 이만휘(李晩徽)의 처 이씨, 안동의 고 향리 김창유(金昌裕)의 처 서성(徐姓), 낭천(狼川)의 고 한량 장풍훈(張豊薰)의 처 박성(朴姓), 평해(平海)의 고 유학(幼學) 남태양(南泰陽)의 처 차씨(車氏),

홍천(洪川)의 고 사인 박윤형(朴潤亨)의 처 박씨·고 학생 이근봉(李根鳳)의 처 송씨, 횡성(橫城)의 고 사인 서계성(徐繼聖)의 처 노씨·증 참의 서예원(徐禮元)의 출가(出嫁)하지 않은 딸·고 사인 정준제(鄭俊濟)의 처 김씨, 원주의 고 사인 최윤제(崔允濟)의 처 이씨, 황강(黃岡)의 고 사인 홍태규(洪泰奎)의 처 조씨(趙氏)·고 사인 조석진(趙錫瑨)의 처 안씨(安氏), 곡산(谷山)의 고 사인 김인석(金璘錫)의 처 손씨(孫氏), 해주(海州)의 고 사인 신재일(申在一)의 처 김씨·고 사인 이시룡(李時龍)의 처 정씨·고 사인 전시윤(全時潤)의 처 김씨, 강계(江界)의 고 양인(良人) 이봉룡(李奉龍)의 처 박성(朴姓), 의주(義州)의 고 사인 이대흡(李大洽)의 처 한씨·

고 사인 독고주(獨孤籌)의 처 최씨, 태천(泰川)의 고 사인 김규덕(金圭栢)의 처 백씨, 개천(价川)의 고 사인 김이징(金利徵)의 처 김씨, 평양의 고 사인 박도상(朴道常)의 처 이씨, 성천(成川)의 고 사인 이암석(李黯錫)의 처 장씨, 덕원(德源)의 고 사인 강이호(姜履琥)의 처 정씨, 북청(北靑)의 고 학생 정태방(鄭泰邦)의 처 안씨, 온성(穩城)의 고 양인(良人) 김경좌(金景佐)의 처 장성(張姓), 안변(安邊)의 한량(閑良) 신익신(申益愼)의 처 이성(李姓)·고 사인 최진홍(崔鎭弘)의 처 정씨(鄭氏), 함양(咸陽)의 고 사인 박창건(朴昌建)의 처 김씨, 후주(厚州)의 고 사인 허임(許任)의 처 최씨, 홍원(洪原)의 고 사인 김윤항(金允恒)의 처 강씨(姜氏)이다.】 절부 정려질(節婦旌閭秩)【익산(益山)의 고 사인 소전(蘇全)의 처 민씨, 자산(慈山)의 박씨(朴氏) 딸이다.】

충비 정려질(忠婢旌閭秩)【삼척(三陟)의 사비(私婢) 창분(昌分)이다.】 충신 증직질(忠臣贈職秩)【울산(蔚山)의 고 통정(通政) 이응춘(李應春)과 그의 아들인 고 훈련정(訓鍊正) 이승금(李承金)은 왜변(倭變) 때에 부자(父子)가 창의(倡義)하여 이응춘은 개운포(開雲浦)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이승금은 힘쓴 공적이 많은 자이다. 삼가(三嘉)의 고 부정(副正) 김난손(金蘭孫)은 왜변 때에 창의하여 봉성산(鳳城山) 밑에서 전사하였다. 양산(梁山)의 고 학생 정호인(鄭好仁)은 왜변 때에 성묘(聖廟)에 들어가서 오성(五聖)의 위판(位板)을 안고 나오다가 사로잡히게 되어 9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자이다.】 효자 정려질(孝子旌閭秩)

【울에 사는 고 첨지(僉知) 최상유(崔尙裕), 개성부의 고 사인 한태진(韓泰鎭)·홍우적(洪禹績)·전기대(全氣大)·한경의(韓敬儀), 양성(陽城)의 고 학생 서명채(徐命埰), 마전(麻田)의 고 진사(進士) 정빈(鄭贇), 양지(陽智)의 고 학생 고이명(高履明), 가평(加平)의 고 학생 박휼(朴霱), 용인(龍仁)의 고 학생 오명철(吳命喆), 여주(驪州)의 고 참봉(參奉) 구규석(具圭錫), 장단(長湍)의 고 사인 이덕윤(李德潤), 안성(安城)의 고 사인 유한우(兪漢佑), 온양(溫陽)의 고 사인 김명성(金命性), 문의(文義)의 고 사인 김추진(金秋鎭), 연기(燕歧)의 고 사인 유시명(柳始明), 천안(天安)의 고 사인 이필형(李弼亨), 한산(韓山)의 고 통덕랑 민옥(閔鈺)과 그 아들 고 사인 민심(閔深), 목천(木川)의 고 사인 유주석(柳疇錫), 영광(靈光)의 고 사인 신곤(辛錕),

남원(南原)의 고 학생 이문주(李文胄), 고부(古阜)의 고 사인 김도기(金道器), 만경(萬頃)의 고 사인 임명항(任命恒)·고 진사 남궁제(南宮躋), 김제(金堤)의 고 사인 조유덕(趙裕德), 장성(長城)의 고 사인 변상현(邊相賢), 전주의 고 부장(部將) 이형원(李馨遠)·고 사인 김운덕(金運德), 안동의 고 사인 김시기(金始器)·고 장사랑(將仕郞) 신탁(申晫), 안의(安義)의 고 사인 임한신(林翰臣), 하양(河陽)의 고 사인 배이인(裵爾仁), 진주의 고 사인 조명훈(曹命勳), 상주의 고 학생 성태주(成泰柱), 금산(金山)의 고 처사(處士) 이겸준(李謙峻), 춘천의 고 사인 이수강(李壽崗), 원주의 고 학생 이한걸(李漢傑), 해주의 고 사인 박서동(朴瑞東), 금천(金川)의 고 사인 심경지(沈景之), 장연(長淵)의 고 학생 강익주(姜翊周)이다.】
 
【영인본】48책 376면【분류】*인사-관리(管理)/*윤리-강상(綱常)

15)순조 33권, 33년(1833 계사/청 도광(道光) 13년) 10월 2일 기해 3번째기사

●목사·현감·군수의 실정과 선정에 대해 암행 어사 이시원이 서계하다
경기 암행 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서계하여, 여주 목사(驪州牧使) 서유소(徐有素), 전 목사(牧使) 민치성(閔致成), 안산(安山) 전 군수(郡守) 홍철(洪喆), 양성(陽城) 전 현감(縣監) 장섭원(張燮元),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상필(柳相弼)·전 목사(牧使) 심영석(沈英錫), 양근 군수(楊根郡守) 조진강(趙鎭剛), 교하 군수(交河郡守) 김이주(金履疇), 적성 현감(積城縣監) 이선영(李善永), 파주 목사(坡州牧使) 오치훈(吳致勛), 죽산 부사(竹山府使) 이현기(李顯夔), 부평(富平) 전 부사(府使) 임현철(林顯喆), 김포(金浦) 전 군수(郡守) 이시좌(李時佐),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유승(李儒勝), 음죽(陰竹) 전 현감(縣監) 오순상(吳淳常), 포천 현감(抱川縣監) 원유오(元有五), 개성 경력(開城經歷) 이인승(李仁承), 광주 판관(廣州判官) 남지구(南芝耉), 중림 찰방(重林察訪) 김석귀(金錫龜), 경안 찰방(慶安察訪) 성노진(成老鎭),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익수(李益秀),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귁(李漍)·전 현령(縣令) 박제륜(朴齊崙), 전 수사(水使) 이정회(李鼎會), 수원(水原) 전 중군(中軍) 신명원(申命源) 등이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輕重)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게 하였다. 또 마전 군수(麻田郡守) 홍시모(洪蓍謨), 양천 현령(陽川縣令) 김진교(金晉敎)의 잘 다스린 실상을 말하니, 모두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또 전전 감사(監司) 이희준(李羲準)을 논하여 이르기를,
 
“주전(鑄錢)하여 횡재한 장열(張說)처럼 되려다가 스스로 왕안석(王安石)의 나라를 그르친 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축하여 둔 것을 두루 살피는 것은 특별히 사목(事目)에 실려 있어 법의 뜻이 지극히 중한 것인데, 8천 8백 55냥 5전 8푼이 모두 주소(鑄所)에서 소모(消耗)하는 데에 돌아갔으며, 심지어 막중한 능역(陵役)의 비용을 부민(富民)에게 꾸도록 하였으니,

일의 대체를 매우 손상시킨 것입니다. 칙사(勅使)의 공궤에 쓰는 쌀을 조치(措置)하는 것은 그 뜻이 미리 마련하여 두는 데 있거늘, 비국(備局)에서 구획한 돈 2만 3천 6백 47냥 2전 4푼이 다 건몰(乾沒)하는 데로 들어갔으며, 감영의 곡식을 돈으로 마련한 1만 4백 16냥 7전 2푼과 형조와 한성부에서 감모(減耗) 몫으로 받은 쌀을 돈으로 마련한 1천 2백 27냥 8전을 주소(鑄所)에 꾸어준 것으로 중기(重記) 가운데에 기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별달리 획급한 곡식을 보충할 때에 부족되는 몫 8백 63석 13두 4승을 감영의 환곡(還穀)의 원곡(原穀)을 가지고 바꾸어 획급하였는데, 이미 감모 몫이 아니다 보니 자연히 허류(虛留)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전(歲前)에 사사로이 구급하였다는 몫 1천 20석은 공곡(公穀)을 떼어 쓴 것인데 또한 구처(區處)할 곳이 없습니다.

간사한 사기꾼들인 이선영(李善永)·이유빈(李有斌)을 잘못 믿고, 경솔하게 동혈(銅穴)을 개발케 하여 도처에 구멍을 뚫어 단지 산천(山川)의 기운만 새게 하였고 애초에 분전(分錢)의 이익도 얻지 못하였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은 돈과 재물을 탕진한 것만이 아닙니다. 윗 조항의 여러 조목들은 물의가 시끄럽게 파다하니, 체면이 중하다는 데 핑계대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개성(開城)의 전전 유수(留守) 이정신(李鼎臣)은 사대부의 풍모와 기절(氣節)이 전혀 없어, 스스로 분사(分司)의 체모를 잃어버리고 거간꾼의 무리들을 불러들여 버릇없이 희롱하는 데 맡겨 두었으며, 창기(娼妓)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동거하여 드디어 어지럽고 음탕스러운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뇌물의 문을 크게 열어놓아 천리나 되는 만부(灣府)의 사람이 앉아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사사로운 의견이 거침없이 작용하여 저잣거리의 젖내나는 아이들이 함부로 향시(鄕試)에 합격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간사한 비장 이인빈(李寅斌)·이계연(李季淵) 등이 정사(政事)의 체통을 어지럽히고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행하여 도시(都試)에 합격하는 것도 돈이 아니면 얻지 못하였고, 인삼 장사꾼들이 국경(國境)을 나가는데도 뇌물을 바치고서야 다닐 수 있었으며, 교활한 이교(吏校)들이 그의 지시를 받아 부유한 백성들이 그 토색질에 시달렸습니다.

간장(奸贓)이 낭자하여 유리(由吏)들의 초사(招辭)에 의하여 드러난 것이 1만 8천 4백여 냥이나 되니, 수치스러운 일치고는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법을 무너뜨리고 환상(還上)의 모곡(耗穀)을 함부로 받아들인 것은 실로 가난한 백성들의 뼈저린 원망을 부르게 되었고 금령을 무릅쓰고 족징(族徵)의 길을 다시 열어놓은 것은 바로 총애하는 아전들이 축낸 것을 거두어들이는 계책이 되었으니, 비방하는 의논이 분연(紛然)하였습니다.”
 
하였고, 별단(別單)을 올려 또 논하기를,
 
“강화(江華)는 보장(保障)의 땅입니다. 일의 대체가 자연히 특별한 곳인데 군량을 좀먹고 나라 창고의 재물을 다 써버렸으니, 그 폐단의 근원을 거슬러 궁구하면 무자년과 기축년의 2, 3년간보다 더 심했던 것입니다. 간사한 비장(裨將) 정운시(鄭雲始)는 악독한 겸인(傔人) 권응호(權應祜)와 어울려서 그 당시의 유수(留守) 신위(申緯)를 꾀어 그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를 깨뜨리고, 불법과 의롭지 않은 일을 공공연히 행하였으며, 심지어는 몰래 은밀한 함정을 파놓고 사람들을 몰아넣어 뇌물을 요구하였으니,

풍속과 교화를 더럽히고 어지럽힌 것은 다시 말할 수도 없고 여론이 비등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만약 중한 법으로 처단함으로써 크게 징계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사대부의 벼슬하는 사람들이 경(輕)한 경우는 그들에게 속고 가리는 바가 될 것이며, 중(重)한 경우는 그들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말류에 생기는 화단은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모두 조사를 행한 뒤에 대신에게 순의(詢議)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희준은 배천군(白川郡)에 귀양보냈고, 신위는 평산부(平山府)에 귀양 보냈으며, 이정신은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또 수원 전 유수 서준보(徐俊輔), 광주 전 유수 이석규(李錫奎)·박기수(朴綺壽), 강화 전 유수 홍명주(洪命周), 개성 전 유수 신재식(申在植) 등이 잘 살피지 못한 과실을 논하니, 서준보·이석규·홍명주는 모두 견책하여 파면시키고, 박기수·신재식은 문비(問備)하게 하였다. 그리고 별단(別單)을 올려, 능(陵)의 수목(樹木) 벌채를 금지하도록 엄하게 신칙할 것과 각 고을의 진식(賑式)을 바로잡을 것과

광주·강화에서 군량과 나라 재물을 독촉하여 받아들일 것과 순·고(巡雇) 두 관청에서 환모(還耗)를 돈으로 대신 받아들일 것과 순영(巡營)에서 진 빚을 탕감하여 줄 것과 여러 읍에서 재물을 축낸 아전들을 징계할 것과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는 것과 민고(民庫)에서 함부로 내주는 것과 군정(軍政)에서 부역이 거듭 부과되는 폐단을 말하니,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영인본】48책 401면【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인사-관리(管理)/*사법-탄핵(彈劾)/*사법-행형(行刑)/*군사-병참(兵站)/*재정-국용(國用)/*금융-화폐(貨幣)/*교통-육운(陸運)/*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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