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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1-1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1-19)

 1)고종 1권, 1년( 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1월 23일 을축 1번째기사

 ●비변사에서 영암과 나주의 조운선이 파손된 사건의 문제점을 보고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영암(靈巖)과 나주(羅州)에서 취재(臭載)한 일로 묘당(廟堂)에서 품처하게 하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취재된 데에는 의심스러운 일이 아주 많습니다. 선적(船積)한 곡식 수량에 대한 공술(供述)이 각기 차이 나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모래톱에서 침몰된 것은 애당초 배가 통째로 물 속에서 뒤집힌 것이 아니니 설혹에 젖었더라도 석수(石數)는 그대로 있기 마련이므로 건져냈는지의 여부 애당초에 논할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건져내지 못하였다는 수량이 이처럼 많은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싣지도 못하였다는 용안(龍安)의 곡식이 감합(勘合)이 그대로 있는 것이 그 세 번째이고, 7월에 선적하여 10월에 비로소 통진(通津)에 도착한 것이 그 네 번째입니다. 구구절절 어긋나고 의심스러우니 농간을 부린 진짜 증거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자전의 하교가 준엄하고 조법(漕法)이 지극히 중하니, 그들을 징계하는 정사에 있어서 선주(船主)와 사공(沙工)은 응당 일률(一律)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다시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김운천(金云千)과 채원서(蔡元西) 두 놈은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잡아 올리게 해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형전을 시행하고 곁꾼〔格軍〕들은 모두 한 차례씩 엄히 형신하여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여산(礪山)과 용안(龍安)의 색리(色吏)는 이름을 빌려 몰래 떠나 각각 엄히 한 차례 형신을 하여 정배(定配)하고, 여산의 색리로 뒤를 따라오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뒤늦게 자수한 자는 공모한 자취가 뚜렷하게 있으니 엄히 두 차례 형신한 뒤에 도배(島配)해야 할 것입니다.

곡식을 맡은 관리들이 잘 단속하지 못한 것과 지방관(地方官)들이 잘 살피지 못한 것도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여산·김제(金堤)·임피(臨陂)·용안(龍安)의 수령(守令)과 통진(通津)의 전전 수령도 모두 해부(該府)에서 나감(拿勘)해야 할 것입니다. 김제와 임피의 가색리(假色吏)들이 애당초 배를 타지 않은 것을 일이 매우 해괴하니, 문목(問目)에 이 첨가하여 공초를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133면【분류】 *재정-국용(國用) / *교통-수운(水運) / *신분-중인(中人)

 2)고종 1권, 1년( 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1월 27일 기사 3번째기사

 ●대왕대비가 죄수를 마음대로 풀어 준 민희경의 처벌을 명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일이 감영(監營)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라면 비록 보통의 죄수라 하더라도 판결을 내리기 전에 고을에서 제멋대로 석방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이 놈의 범죄가 어떠한 것인데 그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나다니게 하였단 말인가?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체로 오늘날 공무를 맡아 관원으로 있는 자들이 법이란 한 글자를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이 내리기 전에 도망쳤다는 말은 작은 고을의 수령(守令)에게도 감히 고할 수 없는 말인데, 지금 이 사건을 놓고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통진 부사(通津府使) 민희경(閔羲敬)은 의금부(義禁府)에서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조사하여 공초(拱招)를 받들어 들이도록 하라.

해부(該府)의 아전(衙前)과 군교(軍校) 중에는 반드시 부화뇌동하여 간사한 짓을 한 자가 있을 것이니, 감영의 뜰에 잡아다 놓고 끝까지 신문한 다음 치계(馳啓)하고, 도망친 자도 엄하게 기찰해서 며칠 안으로 체포하라고 양 포도청(捕盜廳)에 아울러 분부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134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행형(行刑) / *왕실-비빈(妃嬪)

 3)고종 1권, 1년( 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2월 5일 병자 7번째기사

 ●대왕대비가 죄수를 마음대로 풀어준 민희경의 처벌을 명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조재응(趙在應)이, ‘죄수를 막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신중히 하여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취재(臭載)한 선주(船主) 김운천(金云千)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이처럼 죄인이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만들었으니, 통진 전 부사(通津前府使) 민희경(閔羲敬)의 죄상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처분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이 경기 감사의 사계(査啓)를 보니, 해당 부사(府使)가 임소에 있을 때 말미를 주어 도망치게 한 것이 분명하여 숨길 수 없다. 그런데도 감히 공관(空官)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핑계를 댄 것을 본래의 죄 이외에 이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응당 법조문을 더 적용해야 하겠지만, 우선 죄는 되도록 가볍게 다스리는 의리에 붙이겠다. 민희경을 물간사전(勿揀赦前) 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135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교통-수운(水運)

 4)고종 2권, 2년( 1865 을축 / 청 동치(同治) 4년) 3월 28일 계해 3번째기사

 ●의정부에서 양근, 통진부, 연천 지방의 조세 포흠에 대해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조재응(趙在應)의 보고를 보니, ‘양근군(楊根郡)의 환총(還總)의 절미(折米)가 1만 6,400여 석(石)이지만 점차 포흠(逋欠)이 되어 상납(上納)할 것과 고을의 경비로 쓸 것을 전혀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특별히 10년 동안만 납부 기일을 그냥 미루어 주며 조세와 대동미(大同米)도 임술년(1862)에 미납한 몫을 시작으로 환곡(還穀)의 이자 납부 기한을 그냥 미루어 주는 기간 동안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도록 해 주소서.

통진부(通津府)는 각종 상납을 아전(衙前)과 노복과 영(令)이 전후하여 포흠한 것이 거의 만 금(金)에 가깝고 작년에 납부했어야 할 조세와 대동미도 그 무리들의 손에 의해서 소진(消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개가 빈털터리여서 징수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갑자년(1864)부터 병인년(1866)까지의 몫을 모두 상정례에 준하여 상납할 것을 허락해 주소서. 

연천현(漣川縣)에서도 병조(兵曹)에 바칠 군전(軍錢)을 미납한 것이 3,000여 냥(兩)이고 그 밖의 다른 공전(公錢)을 포흠한 것도 거의 3,000냥이라는 거액이니 그 고을의 조세와 대동미도 10년 동안만 상정례에 준하여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백성에게서 받아내어 나라에 바치는 물건은 고을 구실아치들의 개인적인 저축이 아니고 또 수령(守令)의 사사로운 재산도 아니건만 수령과 구실아치들이 서로 거두어들여 떼어먹는 것을 능사로 여기다가 막상 상납할 도리가 없으면 이자를 면제해 달라, 상정례에 준하여 돈으로 대납하게 해 달라고 말하는데 불과하니, 이것이 무슨 모양입니까? 

지금 이 한 장의 첩보(牒報)에서 언급한 세 고을의 일만 보더라도 법과 규율이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으며, 그 세 고을의 고질적인 폐단이 경기(京畿) 내에서 제일 심하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에서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더구나 이보다 앞서 여러 고을에 대하여 임시방편으로 허락해 준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양근(楊根)의 환곡에 대해서는 5년 동안만 이자를 면제해주고 배분하여 물게 하며 조세도 5년 동안만 상정법에 준하여 대납하게 하고, 통진(通津)의 조세도 3년 동안만 상정법에 준하여 대납하게 할 것이며, 연천(漣川)의 조세도 5년 기한으로 상정법에 준하여 대납하게 허락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일을 벌일 때에는 언제나 말을 할 때만 못한 법이고 일이 일단 지나간 다음에는 곧바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또다시 전처럼 질질 끌면서 특별히 허락해준 효과가 없게 만들면 해당 수령에게 금고(禁錮)의 형률(刑律)을 적용하며 포흠죄를 범한 여러 놈들은 조사하여 형배(刑配)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181면【분류】 *재정-전세(田稅)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재정-공물(貢物)

 5)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6월 18일 을사 2번째기사

 ●전최에서 성과를 보인 수령들에게 시상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관리들의 근무성적 평가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수령(守令)들을 등급을 나누어 복계(覆啓)하니,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휘중(李彙重),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명석(李明錫), 김해 부사(金海府使) 허전(許傳),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남보(李南輔),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병우(金炳愚), 공주 판관(公州判官) 민치서(閔致序), 김제 군수(金堤郡守) 이건하(李乾夏), 금산 군수(金山郡守) 김병연(金秉淵), 용강 현령(龍岡縣令) 유초환(兪初煥),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승겸(李承謙)에게는 모두 새서(璽書)와 표리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다.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성구(金聖求), 아이 첨사(阿耳僉使) 조리석(趙履錫), 혜산 첨사(惠山僉使) 정보원(鄭輔源)에게는 모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으로 잡아주도록 하였다. 경주 영장(慶州營將) 구명현(具明鉉)과 남병영 우후(虞侯) 김헌조(金憲祖)에게는 모두 변경에서 근무한 이력을 허용하였다. 고창 현감(高敞縣監) 오영운(吳永運), 남해 현감(南海縣監) 홍기석(洪冀錫)은 모두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여 주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유창로(柳昌魯), 보성 군수(寶城郡守) 신석원(申錫源), 옥구 현감(沃溝縣監) 이창호(李昌鎬), 양덕 현감(陽德縣監) 신계(申棨)에게는 모두 특별히 품계를 가자(加資)하고 영장의 이력을 허용하였다.

 전라 좌수영(全羅左水營)의 우후(虞侯) 홍순학(洪淳學)은 수령(守令)으로 임명해 보냈으며, 충주 목사(忠州牧使) 민우세(閔禹世), 정산 현감(定山縣監) 황지인(黃芝仁), 제원 찰방(濟原察訪) 김영묵(金瑛默), 금정 찰방(金井察訪) 홍기종(洪夔鍾), 유원 첨사(柔遠僉使) 장태익(張泰翼), 백치 첨사(白峙僉使) 이유형(李裕衡), 서평포 만호(西平浦萬戶) 이인철(李仁哲)은 모두 임기가 만료된 후 다시 1년 동안 그 벼슬을 더 맡도록 하였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조용재(趙容在), 무주 부사(茂朱府使) 윤성선(尹性善),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온순(金蘊淳),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갑근(金甲根), 황간 현감(黃磵縣監) 김병헌(金炳憲), 임실 현감(任實縣監) 서증보(徐曾輔)에게는 모두 별천(別薦)의 예를 시행하였다.

 함흥 판관(咸興判官) 황종규(黃鍾奎), 청풍 부사(淸風府使) 조진운(趙鎭運), 고양 군수(高陽郡守) 민태호(閔台鎬), 김포 군수(金浦郡守) 정기화(鄭夔和), 청도 군수(淸道郡守) 김석근(金奭根), 영천 군수(榮川郡守) 서광두(徐光斗),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학재(李鶴在), 양성 현감(陽城縣監) 이민항(李敏恒), 연천 현감(漣川縣監) 유남규(柳南珪), 옥과 현감(玉果縣監) 김도근(金度根), 용안 현감(龍安縣監) 유택동(柳宅東), 의령 현감(宜寧縣監) 서유영(徐有英), 신령 현감(新寧縣監) 윤직의(尹稷儀), 비안 현감(比安縣監) 조명교(趙命敎)는 모두 승진시켜 주었다. 서흥 부사(瑞興府使) 서원보(徐元輔), 영해 부사(寧海府使) 남종학(南鍾鶴), 삭녕 군수(朔寧郡守) 김병훈(金秉薰), 가평 군수(加平郡守) 김진(金瑨), 마전 군수(麻田郡守) 조백승(曺百承), 영평 군수(永平郡守) 이헌경(李憲絅), 낙안 군수(樂安郡守) 유완근(柳完根), 합천 군수(陜川郡守) 이승락(李承洛), 풍기 군수(豐基郡守) 이용하(李龍夏), 창평 현령(昌平縣令) 이종신(李種信), 기장 현감(機張縣監) 장덕오(張德五), 청안 현감(淸安縣監) 장봉규(張鳳逵), 대동 찰방(大同察訪) 진병섭(陳秉燮), 장수 찰방(長水察訪) 김택기(金宅基), 자여 찰방(自如察訪) 정종학(鄭鍾學), 송라 찰방(松羅察訪) 임수동(林秀東), 창락 찰방(昌樂察訪) 장석묵(張錫默), 황산 찰방(黃山察訪) 김경흡(金慶洽), 경양 찰방(景陽察訪) 이태영(李泰永), 벽사 찰방(碧沙察訪) 천우현(千禹鉉), 연원 찰방(連原察訪) 백홍수(白弘洙), 성환 찰방(成歡察訪) 이택(李澤)에게는 모두 아마(兒馬)를 하사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서북 첨사(西北僉使) 김석희(金錫禧), 안의 첨사(安義僉使) 오영준(吳英俊), 고성 첨사(固城僉使) 오성초(吳聖初),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석현(李錫玹), 서생 첨사(西生僉使) 이면식(李勉植), 덕포 첨사(德浦僉使) 이두현(李斗賢), 풍산 만호(豐山萬戶) 강효준(康孝俊),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 송계묵(宋桂默), 소기 만호(所己萬戶) 장남(張楠), 보산 별장(保山別將) 장익기(張益箕), 가산 별장(架山別將) 한백규(韓百揆),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 장우철(張禹喆), 운총 권관(雲寵權管) 조지현(趙贄顯), 진동 권관(鎭東權管) 이용헌(李龍憲),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 이장회(李長會)에게는 모두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상으로 베풀었다.

 【영인본】1책 221면【분류】*인사-관리(管理)/*인사-임면(任免)/*왕실-사급(賜給)

 5)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6월 18일 을사 2번째기사

 ●전최에서 성과를 보인 수령들에게 시상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관리들의 근무성적 평가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수령(守令)들을 등급을 나누어 복계(覆啓)하니,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휘중(李彙重),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명석(李明錫), 김해 부사(金海府使) 허전(許傳),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남보(李南輔),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병우(金炳愚), 공주 판관(公州判官) 민치서(閔致序), 김제 군수(金堤郡守) 이건하(李乾夏), 금산 군수(金山郡守) 김병연(金秉淵), 용강 현령(龍岡縣令) 유초환(兪初煥),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승겸(李承謙)에게는 모두 새서(璽書)20) 와 표리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다.

 장연 현감(長淵縣監) 김성구(金聖求), 아이 첨사(阿耳僉使) 조리석(趙履錫), 혜산 첨사(惠山僉使) 정보원(鄭輔源)에게는 모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으로 잡아주도록 하였다. 경주 영장(慶州營將) 구명현(具明鉉)과 남병영 우후(虞侯) 김헌조(金憲祖)에게는 모두 변경에서 근무한 이력을 허용하였다. 고창 현감(高敞縣監) 오영운(吳永運), 남해 현감(南海縣監) 홍기석(洪冀錫)은 모두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여 주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유창로(柳昌魯), 보성 군수(寶城郡守) 신석원(申錫源), 옥구 현감(沃溝縣監) 이창호(李昌鎬), 양덕 현감(陽德縣監) 신계(申棨)에게는 모두 특별히 품계를 가자(加資)하고 영장의 이력을 허용하였다.

 전라 좌수영(全羅左水營)의 우후(虞侯) 홍순학(洪淳學)은 수령(守令)으로 임명해 보냈으며, 충주 목사(忠州牧使) 민우세(閔禹世), 정산 현감(定山縣監) 황지인(黃芝仁), 제원 찰방(濟原察訪) 김영묵(金瑛默), 금정 찰방(金井察訪) 홍기종(洪夔鍾), 유원 첨사(柔遠僉使) 장태익(張泰翼), 백치 첨사(白峙僉使) 이유형(李裕衡), 서평포 만호(西平浦萬戶) 이인철(李仁哲)은 모두 임기가 만료된 후 다시 1년 동안 그 벼슬을 더 맡도록 하였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조용재(趙容在), 무주 부사(茂朱府使) 윤성선(尹性善),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온순(金蘊淳),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갑근(金甲根), 황간 현감(黃磵縣監) 김병헌(金炳憲), 임실 현감(任實縣監) 서증보(徐曾輔)에게는 모두 별천(別薦)의 예를 시행하였다.

 함흥 판관(咸興判官) 황종규(黃鍾奎), 청풍 부사(淸風府使) 조진운(趙鎭運), 고양 군수(高陽郡守) 민태호(閔台鎬), 김포 군수(金浦郡守) 정기화(鄭夔和), 청도 군수(淸道郡守) 김석근(金奭根), 영천 군수(榮川郡守) 서광두(徐光斗),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학재(李鶴在), 양성 현감(陽城縣監) 이민항(李敏恒), 연천 현감(漣川縣監) 유남규(柳南珪), 옥과 현감(玉果縣監) 김도근(金度根), 용안 현감(龍安縣監) 유택동(柳宅東), 의령 현감(宜寧縣監) 서유영(徐有英), 신령 현감(新寧縣監) 윤직의(尹稷儀), 비안 현감(比安縣監) 조명교(趙命敎)는 모두 승진시켜 주었다. 서흥 부사(瑞興府使) 서원보(徐元輔), 영해 부사(寧海府使) 남종학(南鍾鶴), 삭녕 군수(朔寧郡守) 김병훈(金秉薰), 가평 군수(加平郡守) 김진(金瑨), 마전 군수(麻田郡守) 조백승(曺百承), 영평 군수(永平郡守) 이헌경(李憲絅), 낙안 군수(樂安郡守) 유완근(柳完根), 합천 군수(陜川郡守) 이승락(李承洛), 풍기 군수(豐基郡守) 이용하(李龍夏), 창평 현령(昌平縣令) 이종신(李種信), 기장 현감(機張縣監) 장덕오(張德五), 청안 현감(淸安縣監) 장봉규(張鳳逵), 대동 찰방(大同察訪) 진병섭(陳秉燮), 장수 찰방(長水察訪) 김택기(金宅基), 자여 찰방(自如察訪) 정종학(鄭鍾學), 송라 찰방(松羅察訪) 임수동(林秀東), 창락 찰방(昌樂察訪) 장석묵(張錫默), 황산 찰방(黃山察訪) 김경흡(金慶洽), 경양 찰방(景陽察訪) 이태영(李泰永), 벽사 찰방(碧沙察訪) 천우현(千禹鉉), 연원 찰방(連原察訪) 백홍수(白弘洙), 성환 찰방(成歡察訪) 이택(李澤)에게는 모두 아마(兒馬)를 하사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서북 첨사(西北僉使) 김석희(金錫禧), 안의 첨사(安義僉使) 오영준(吳英俊), 고성 첨사(固城僉使) 오성초(吳聖初),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이석현(李錫玹), 서생 첨사(西生僉使) 이면식(李勉植), 덕포 첨사(德浦僉使) 이두현(李斗賢), 풍산 만호(豐山萬戶) 강효준(康孝俊), 지세포 만호(知世浦萬戶) 송계묵(宋桂默), 소기 만호(所己萬戶) 장남(張楠), 보산 별장(保山別將) 장익기(張益箕), 가산 별장(架山別將) 한백규(韓百揆),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 장우철(張禹喆), 운총 권관(雲寵權管) 조지현(趙贄顯), 진동 권관(鎭東權管) 이용헌(李龍憲),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 이장회(李長會)에게는 모두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상으로 베풀었다.

 【영인본】 1책 221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왕실-사급(賜給)

[註 20]새서(璽書) : 어새(御璽)를 찍은 유서(諭書). ☞

 6)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7월 22일 무인 2번째기사

 ●평안 감사 박규수가 이양선에 평양 감영의 중군이 억류되었다고 보고하다

평안 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방금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큰 이양선(異樣船) 1척이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어제 유시(酉時) 쯤에는 그들 6명(鳴)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 중군(巡營中軍)은 그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갑자기 오더니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어갔고 중군을 그들의 배 안에 억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윤(庶尹)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날 사시(巳時) 쯤에 그들의 배가 또 출발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와 조총을 마구 쏘아댔으며 황강정(黃江亭) 앞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 5명은 작은 푸른빛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하여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온 성안의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이에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쯤에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의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가지고 돌아왔는데, 중군이 찼던 인장이 물에 떨어져 분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군이 잡혀갈 때 따라간 시종 유순원(兪淳遠)과 통인(通引) 박치영(朴致永)은 그들이 배에서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군이 자기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치를 끼친 데 대해서는 더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파출(罷黜)시키고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중군(中軍)이 그들 배에 붙잡혀가 곤욕을 당한 것은 그 잘못한 바를 논하여 마땅히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밖에 벌어져 미처 손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우직하고 지략이 부족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수치를 끼친 것은 크니, 그 벼슬에서 체차시키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양주태(梁柱台)를 차하(差下)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되, 조정에 사직하는 것은 그만두고 역마(驛馬)를 주어 밤을 새워 내려가게 하라. 

퇴직 장교 박춘권이 앞장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배에 뛰어들어가 중군을 구출해서 돌아온 것으로 말하면, 그 공로가 가볍지 않으며 매우 가상(嘉尙)한 일이다. 그런 만큼 은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어서 특별히 상가(賞加)하니 오위장(五衛將)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225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교통-수운(水運) / *외교-미국[美] / *군사-군기(軍器) / *군사-전쟁(戰爭)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7)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8월 13일 기해 3번째기사 

●영종 방어사가 이양선 1척이 부평지경에 들어섰다고 보고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영종 방어사(永宗防禦使)의 장계 등본을 보니, 이양선(異樣船) 한 척이 부평(富平)의 경계 내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방수(防守)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새로 제수된 통진 부사(通津府使)를 당일로 하직 인사를 하게 하고 경기 연해 수령(守令)들 중에서 만약 서울에 올라와 있는 자가 있으면 모두 밤을 무릅쓰고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229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교통-수운(水運) / *인사-임면(任免) 

8)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8월 16일 임인 5번째기사 

●역관을 보내어 월곶진에 정박한 이양선의 내막을 알아보게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월곶진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고 있던 이양선(異樣船) 2척이 갑자기 닻을 올리고 곧바로 통진(通津) 일대로 향해 갔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양선이 근해에 출몰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며 오늘은 곧바로 서울의 가까운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애초에 그들의 정세를 탐문하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 막지도 못하여 한결같이 그들 마음대로 날뛰게 하면서 감히 어쩌지를 못하니, 과연 변정(邊情)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입니까? 

변방을 중하게 지키는 도리로 볼 때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중군(中軍) 이일제(李逸濟)를 파출시키고 그 후임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하여 밤을 새워 내려가도록 하소서. 그리고 해당 수신(守臣)도 또한 경고를 주지 않을 수 없으니 무거운 쪽으로 추고(推考)하소서. 

저들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정세를 탐문하는 일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사정에 밝은 역관(譯官) 두 사람을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골라서 차임하도록 하여, 성화같이 내려 보내어 그들이 정박하고 있는 곳에 따라가서 엄한 말로 효유하여 즉시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229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교통-수운(水運) /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임면(任免)

 9)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8월 20일 병오 4번째기사

 ●훈련 도감 중군 이용희가 이양선이 아직 석곡에 정박하고 있다고 하다

훈련 도감(訓練都監)에서, ‘중군(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양선(夷洋船)이 어제 해시(亥時) 경에 김포(金浦) 석곡(石谷)에 가서 정박하였는데 아직까지 전진할 기미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또 서강(西江)에 나가 진을 치고 있던 장졸들에 대하여 지금 우선 계엄을 풀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1책 231면【분류】*외교-프랑스[法]/*군사-군정(軍政)/*군사-중앙군(中央軍)/*교통-수운(水運)

 10)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7일 계해 6번째기사

 ●경기 감사와 통진 부사, 덕포 첨사가 팔미도에 정박한 이양선의 이동을 보고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치선(兪致善)이, ‘영종 첨사(永宗僉使) 심영규(沈永奎)가 올린 등보(謄報)에 의하면, 「이달 5일 오시(午時) 경에 이양선(異樣船) 3개의 돛을 단 배 3척과 2개의 돛을 단 배 4척이 신의 수영(水營)의 경내에 있는 팔미도(八尾島) 외해(外海)에서부터 부평 경계의 물치도(勿雉島)와 호도(虎島) 사이에 가서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시와 방비를 계속 강화하도록 엄히 신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공렴(李公濂)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이양선 3척이 이달 6일 사시(巳時) 경에 응도(鷹島)에서 출발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왔는데 2척은 이미 본부(本府)의 죽진(竹津) 앞바다를 지났고, 1척은 손돌목 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부의 감시하던 장수와 교리(校吏) 등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위로 올라간 3척 외에 자그마한 배 1척과 먼저 올라간 배와 같은 배 1척이 또 그 뒤를 따라 올라왔는데, 이미 강화의 기포(圻浦)를 지나갔으며 큰 배 1척은 응도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덕포 첨사(德浦僉使) 이두현(李斗賢)이 올린 첩정(牒呈)의 내용에서는, 「이달 6일 사시경에 이양선 4척이 갑자기 물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2척의 배는 경강(京江)의 세미 운반선보다 거의 배나 컸습니다. 1척의 배에는 그 뒤를 따르는 작은 종선(從船)이 8척이었고, 1척의 배에는 그 뒤를 따르는 작은 종선이 7척이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경강선(京江船)의 종선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배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2척의 배는 경강의 조선(漕船)보다 약간 컸는데 두 척이 모두 일시에 물을 거슬러 올라가 본 진(鎭)의 앞바다를 지나갔으며 이어 갑곶 앞바다를 향해 나갔습니다. 큰 배 4척과 자그마한 종선 15척은 오늘 사시에 올라갔으며 부평(富平) 일대에 가서 정박하고 있는 3척의 배는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2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교통-수운(水運)

 11)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8일 갑자 14번째기사

 ●경기 감사 유치선이 이양선 1척이 응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고 보고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치선(兪致善)이, ‘이양선(異樣船)에 있는 여러 놈들이 각기 작은 배를 타고서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바람에 문정(問情)하지 못하였습니다. 통진(通津) 일대로 올라갔던 저들의 배 1척이 7일 유시(酉時)에 다시 내려와서 응도(鷹島)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3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군사-군기(軍器) / *교통-수운(水運)

 12)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8일 갑자 3번째기사

 ●이양선이 강화도에 침범하였으므로 장녕전의 어진을 백련사에 임시로 모시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에, “이달 7일 미시(未時)에 저들이 동쪽 성에 돌입하여 총을 마구 쏘아대는 바람에 우리 쪽 사람 중에 부상당했거나 죽은 사람이 2인입니다. 파수군(把守軍)들이 저지하지 못하여 추악한 무리들은 성을 파괴하고 넘어 들어와 온 성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본 후에 다시 나가 버렸습니다.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급하게 되었습니다. 장녕전(長寧殿)에 모셔 둔 두 어진(御眞)을 임시로 본 부(府) 서문(西門) 밖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에 옮겨 놓았습니다.

 신이 관방(關防)에 있으면서 방어를 잘 하지 못하여 저 추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렇듯 창궐하게 하였으니, 두렵고 황송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하였다. 또 ‘이양선(異樣船)에서 육지에 올라 산에 오른 경로는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배가 그냥 정박하여 있으면서 밤을 새울 의향이 있는 듯하기에 본 부 경력(經歷) 김재헌(金在獻)을 문정(問情)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그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문정을 하기 위해 나가는 길인데 저들 수십 명이 중도에서 길을 막아서며 당현(堂峴) 고개의 길 옆에 있는 시골집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문정하려는 사유를 글로 써서 보여 주었더니 저들은 손을 내저으며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갑곶진(甲串津) 해문(海門)에 있는 농가로 끌고 갔는데 저들 수백 명이 창과 총을 각각 가지고 모여들어서는 쭉 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글로 써서 묻기를, 『당신들이 수만 리 풍파를 헤치고 왔는데 앓는 사람은 없습니까?』라고 하니, 저들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글로 써서 보이기를,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저들은 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쓴 글을 우리의 문정서(問情書)와 함께 저들 배로 보냈는데 우리나라의 글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저들이 우리에게 배에 올라가자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그들의 배에 올라갔는데, 무수한 서양인들이 좌우에 늘어섰으며 2층에 있는 배 칸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 방 안에는 등불과 촛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서양인 한 명이 한가운데 앉아 있고 그 곁에 우리나라의 복색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우리나라 말로 묻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지방관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묻기를,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문정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묻기를, 『금년 봄에 당신네 나라에서는 무엇 때문에 서양사람 9명을 죽였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사실 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이 도성에 잠복해 있으면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남의 재물과 돈을 빼앗았으며 암암리에 반역 음모를 꾸몄으므로, 나라의 법에 비추어 사형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이 만일 당신네 나라에 들어가서 이와 같이 불법을 자행하였다면 당신네 나라에서도 역시 사형에 처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죽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사(通使)로서 문정(問情)하러 온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빨리 배를 돌려 가십시오.』라고 하자, 저들이 칼을 빼들고 가라고 독촉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다시 육지에 올라와 진영의 해문 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추악한 자들이 칼과 창을 뽑아들고 길 가운데 막아서서 음식물을 요구하였습니다. 때문에 소 3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로 써서 보였는데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부득이 소 5척(隻), 돼지 5마리, 닭 10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보였더니 저들은 그제야 비로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들의 배 3척은 갑곶진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데, 10척의 종선(從船)을 타고 마음대로 육지에 내려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으며 온 산과 들을 마구 돌아다녔습니다. 배 모양이며 연통이며 기계들은 지난번 올라왔던 배 모양과 같았으며 배 안에 있는 서양인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광성보 별장(廣城堡別將) 김준모(金濬模)의 보고를 보면, 「이양선 4척 가운데서 3척은 이미 지나가고 뒤에 떨어졌던 1척의 배가 또 들어와서 본 진(鎭)의 건너편에 있는 통진(通津) 지방의 사오서(沙五嶼)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3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기(軍器) / *사법-치안(治安) / *교통-수운(水運) / *농업-축산(畜産)

 13)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9월 9일 을축 12번째기사

 ●강 연안의 고을들에 적의 상황을 순찰하도록 하다

총융청(總戎廳)에서 ‘이번에 강 연안을 순찰하고 방수(防守) 할 때, 연로(沿路) 각 고을의 척후(斥候)·보경(報警) 등 문제를 신중하고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신이 있는 총융청(總戎廳)에서 우선 양천(陽川), 김포(金浦), 통진(通津), 고양(高陽), 교하(交河), 파주(坡州), 장단(長湍) 등의 고을에 전령(傳令)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영인본】1책 234면【분류】*군사-군정(軍政)

 14)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10일 병인 12번째기사

 ●강화도에 침입한 적의 상황을 보고하지 않은 부사 이공렴을 문책하다

또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를 잃은 후 적들의 실태의 허실에 대해 전혀 보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통진(通津)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며칠이 되도록 한 번도 치보(馳報)를 보내지 않았으니, 일의 소홀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해당 부사(府使) 이공렴(李公濂)을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대임으로 부호군(副護軍) 신재지(愼㘽芝)를 차하(差下)하여 즉시 내려보내소서. 비록 도신(道臣)을 놓고 말하더라도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일이므로 문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월봉(越俸)의 법을 시행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234면【분류】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사법-행형(行刑)

 15)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11일 정묘 7번째기사

 ●선봉 중군 이용희가 서양 외적의 정황을 보고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방금 선봉 중군(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달 10일 술시(戌時)에 보내온 보고를 보니, 「대진(大陣)이 당일 신시(申時) 경에 통진(通津) 부근의 양릉교(陽陵橋)에 도착하니, 해당 부사(府使) 이공렴(李公濂)이 인부(印符)를 싸가지고 혼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를, 『어제 오시(午時) 경에 양적(洋賊) 50여 명(名)이 각기 총 칼을 가지고 마을에 돌입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소와 가축, 의복들을 남김없이 모두 가져갔고, 이어서 관사(官舍)에 들어가 공사전(公私錢) 6, 700냥(兩)을 모두 가지고 갔으며, 심지어는 관복과 여러 가지 기구들까지도 모두 남김없이 가져갔습니다.

관가에는 이속(吏屬)들이 모두 도망쳐 버렸고, 여염(閭閻)에는 남녀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외촌(外村)의 백성들까지도 소문을 듣고 모두 도망쳐 흩어져 버렸는데, 부사가 홀로 있다가 앉아서 살해당하면 안 되겠기에 부득이 걸어서 산에 올라가 잠시 피하여 5, 6리밖에 있는 민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지금 막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듣고보니 몹시 놀랍고 통분스러워 우선 몇 명의 군교를 급히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미복(微服)으로 먼저 가서 앞길의 좌우를 자세히 살펴 적정(賊情)의 허실과 복병(伏兵)의 유무를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몇 명의 군교를 먼저 보내어 좌우 촌락으로부터 고을 안까지 먼저 돌아다니면서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타일러주도록 하고, 대진(大陣)이 이어서 바로 진군하였습니다. 유시(酉時) 경에 해부(該府)의 앞길에 도착하여 방진(方陣)을 치고서 변고에 대비하였습니다. 대군(大軍)이 도착하자 뭇 사람들이 다같이 기뻐하면서 삼삼오오(三三五五) 백성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는데 그 중 한두 백성이 와서 고하기를, 『어제 양적(洋賊)이 마을로부터 차츰 문수 산성(文殊山城)으로 올라갔는데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마치 험지(險地)를 점거할 의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으니 고을에서 10리쯤 된다고 하였습니다. 장수에게 순시하게 하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군졸들에게도 음식을 먹이면서 한편으로는 환란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한편으로는 환란을 제어 할 방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4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기(軍器) / *재정-잡세(雜稅)

 16)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12일 무진 7번째기사

 ●선봉 이용희가 양이들이 문수 산성에 들어갔다가 철수하여 돌아갔다고 보고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방금 선봉(先鋒) 이용희(李容熙)의 보고를 보니, 「11일 신시(申時)에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들어갔던 양이(洋夷)들이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는 모두 철수하여 배들도 통진(通津)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지만, 산에 올라가 감시한 것에 의하면 쌍(雙) 돛을 단 배 2척이 갑곶진(甲串津)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다가 1척은 남쪽을 향해 떠나가고 1척은 월곶진(月串津)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대체로 배가 있어야 강을 건너 접전할 수 있는데 바다를 따라 오르내려도 거룻배 하나 없어서 우선 통진(通津)에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5면【분류】 *외교-프랑스[法]

 17)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21일 정축 5번째기사

 ●순무영에서 선봉 중군 이용희가 치보를 올리다

순무영(巡撫營)에서, ‘방금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㘽芝)가 보낸 첩정(牒呈)에, 『본부 초입에서 망을 보고 있던 색리(色吏)의 보고에서 돛 없는 흰 색의 큰 이양선(異樣船) 1척이 20일 저녁 조수를 타고 올라와서 영종(永宗) 마서(馬嶼)섬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38면【분류】 *군사-군정(軍政)

 18)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29일 을유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이인기와 이용회를 사형에 처하도록 아뢰다

양사(兩司)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사헌(大司憲) 최우형(崔遇亨), 대사간(大司諫) 송돈옥(宋敦玉), 집의(執義) 김석보(金錫輔), 사간(司諫) 이응진(李應辰), 장령(掌令) 민희식(閔羲軾), 지평(持平) 신헌구(申獻求)·김양연(金亮淵), 헌납(獻納) 이만기(李晩耆), 정언(正言) 조병직(趙秉稷)·황익수(黃益秀)이다.】

 “신 등은 지금 사형을 감하여 도배(島配)한 죄인 이인기(李寅夔)와 이용회(李龍會)에 대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아뢰면서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성토(聲討)하느라 다른 문제는 미처 언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통진(通津)에서 적들이 어지럽게 날뛴 변고도 강화도(江華島)와 다름없습니다.

 아, 저 이공렴(李公濂)으로 말하면 나라에서 일정한 구역을 책임지운 벼슬에 있었으니 의리상 응당 적들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몇 놈의 적들이 쳐들어와서 일시에 날뛰게 되자 쥐구멍을 찾아 숨어버리고 적들이 제멋대로 포악한 짓을 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가 자기 맡은 구역을 버리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에 의하면 다만 원악지 정배(遠惡地定配)의 법조문만을 적용하였으니 이로 인해 국법은 굽혀지게 될 것이고 공론은 점점 거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바라건대 크게 용단을 내려 우선 이공렴에게 죄에 해당하는 법률을 적용함으로써 신하로 나라를 배반하고 구차스럽게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자들에게 징계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을 내렸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아뢰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영인본】 1책 240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19)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9월 29일 을유 6번째기사

 ●선봉 중군 이용희가 이양선의 동향을 보고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달 28일 술시(戌時)에 보내온 급보에 의하면 ‘그날 유시에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㘽芝)의 공문과 문수 별장(文殊別將) 신도혁(申道爀)의 보고를 접수하였습니다.보고하기를,

「오늘 신시(申時) 쯤에 갑곶진에 정박하고 있던 작은 이양선(異樣船) 2척이 계수 돈대(鷄壽墩臺)에까지 가서 사방을 감시한 다음 도로 갑곶진으로 갔으며 큰 이양선 1척은 하류 쪽으로 향해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연달아 접수한 덕진 첨사(德津僉使)의 급보에서는, 「큰 이양선 1척이 아래로 내려와 본 진영 앞바다를 통과하여 부평(富平) 일대로 향해 갔다.」고 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40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군사-군정(軍政)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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