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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20-2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20-29)

20)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0월 5일 경인 1번째기사

●순무영에서 갑곶진에 정박하고 있던 이양선이 부평 일대로 향해 갔다고 보고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㘽芝)의 보고에 의하면 당일 진시(辰時)에 갑곶진(甲串津)에 정박하고 있던 크고 작은 이양선(異樣船) 전부가 닻을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 덕적진(德積津) 앞바다를 지나 부평(富平) 일대로 향해 갔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242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

21)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0월 15일 경자 3번째기사

●이양선의 문제로 일본에 편지를 보내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양 배의 상황을 이미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은 이후로 변경의 상황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 서로 통보하였습니다. 예전 경신년(1860)에는 서양 교인(敎人)들을 철저히 막는 일을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동무(東武)의 뜻에 따라 편지로 우리나라에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이 서양 오랑캐들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출몰하니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통영(統營)의 외양(外洋)에서 출몰하는 배들이 일본에 사단을 끼치는 일이 꼭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 방도에 있어서는 일에 앞서 통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요사이 겪은 일의 전말을 자세히 적어 동래에 있는 왜관(倭館)에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보내며 이어 동무에게 전달되게 함으로써 변방 방어를 튼튼히 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두터이 가지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임면호(任冕鎬)가 일본국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편안히 지낸다니 위안되고 안심된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와 귀국은 좋은 관계를 맺어온 지 300년 동안에 무릇 변방 방어와 관련한 정사나 변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알려주지 않은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그 방도를 내놓는 이유는 경신년(1860)에 귀국의 서계(書契)의 경우는 바로 옛 조약을 거듭 밝히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다.
 
서양의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이 멀리 겹겹이 가로놓인 넓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무역할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무력을 서로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해가 점점 더 참혹해지고 있다.
 
올봄에 있었던 사건에 관련된 남종삼(南鍾三)과 홍봉주(洪鳳周)라는 자들은 높은 관리로서 임금 가까이에 있는 반열에 있기도 하였고 대대로 관리 노릇을 한 후손들로서 사교(邪敎)를 전습하며 비적 무리들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서양인들을 끌어들여서 교주(敎主)로 받들어 모셨다. 이미 오래 전에 물들어 갈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간사한 자취가 수색 체포할 때에 발각되어 고약한 무리들이 다같이 법에 의하여 처단당하였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1척의 서양 배가 먼저 호서(湖西)의 해미현(海美縣) 앞바다에 정박하였고 다음에는 경기(京畿)의 강화부(江華府) 근처에 와서 정박해 있으면서 쉴새 없이 왔다갔다하며 무역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엄한 말로 굳게 거절하고 끝끝내 들어주지 않자 저들은 포기하고 물러갔었다.
 
또 이러한 때에 서양 배 1척이 서해로부터 평양부(平壤府) 양각도(羊角島)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해하고 가축들을 죽였다. 그래서 도신(道臣)이 화공(火攻) 전술을 써서 모두 무찔렀다.
 
8월 16일에 2척의 서양 배가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경강(京江)에 들어와 사흘 밤을 묵고 돌아갔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사정도 알 수 없었고 거동도 따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제멋대로 오가다가 9월 6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 30여 척이 또 경기 일대에 도착하여 혹 부평부(富平府) 앞바다에 정박하기도 하고 혹은 강화부의 갑곶진(甲串津)으로 곧바로 향하여 망루(望樓)를 파괴하고 공해(公廨)를 불태워 버리고 백성들을 살해하고 소와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사고(史庫)에 있는 책들을 배로 모두 약탈하여 실어갔다.
 
우리는 순무사(巡撫使) 이경하(李景夏)로 하여금 도성을 엄히 방어하게 하였고,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는 통진부(通津府)에, 좌선봉장(左先鋒將) 정지현(鄭志鉉)은 제물진(濟物鎭)에, 우선봉장(右先鋒將) 김선필(金善弼)은 부평부(富平府)에, 유격장(遊擊將) 한성근(韓聖根)은 문수산성(文殊山城)에, 유격장 양헌수(梁憲洙)는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유격장 이기조(李基祖)는 광성진(廣城鎭)에, 총융사(總戎使) 신관호(申觀浩)와 소모사(召募使) 이원희(李元熙)는 양화진(楊花津)에, 소모사 정규응(鄭圭應)은 서강(西江) 어귀에, 어영청 중군(御營廳中軍) 권용(權)과 경기 중군 백낙현(白樂賢)은 행주(幸州) 어귀에,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는 여현(礪峴) 어귀에, 초토사(招討使) 한응필(韓應弼)은 연안부(延安府)에, 방어사(防禦使) 유환(柳晥)은 파주목(坡州牧)에, 도호사(都護使) 신숙(申橚)은 장단부(長湍府)에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저들에게 격문을 보내 싸움을 청하고 약속한 날짜에 보니, 적들은 그 무리를 모두 모아서 포구에 집결해 있으면서 서로 맞붙어 싸움할 생각은 없이 우리 연해와 포구의 배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간간이 혹은 몰래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 여러 성을 습격하였는데 번번이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 의해 격퇴당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무기와 의장(儀狀)들을 수리하고 벼리기도 하고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또 삼로(三路)의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공격하게 하였는데 10월 12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들은 이어 즉시 무리를 거두어 외양(外洋)을 향해 물러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적의 침입을 받은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랫동안 태평스럽게 지내 군정(軍政)이 해이해지고 군사 방비가 허술해져 장구한 계책을 써서 놈들을 제압하여 하찮은 배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2, 3차 싸움에서 이기고 다소나마 적들을 섬멸하기는 했지만 진실로 무력을 크게 떨쳐 멀리에서 온 저들을 두렵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오랑캐들의 사정도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있었으므로 목전의 다급함을 늦추고 앞으로의 근심거리를 영원히 없앨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해서 알려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 동남쪽의 해변으로 말하자면 귀국의 여러 주(州)들의 해변과 서로 소와 말도 환히 변별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으며, 두 나라 경계에서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거의 들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여름과 가을에서부터 요사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돛단배들이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해 갔는데 그 배들은 운도(雲島)와 연도(烟島) 사이에서 출몰하고 있어 변경을 지키고 있는 관리들의 급보가 매일 오고 있으니, 저 오랑캐들이 장차 사단을 일으키려는 것인데 귀국에서 방비를 갖추고 변란에 대처하고 있는가? 모르겠거니와 귀국에서 이미 군사 방비를 갖추었으므로 저 오랑캐 놈들이 날뛰다 패배하였는가?

또 저들 쪽에서 방자하고 횡포하게 날뛰면서 몰래 기회를 노리며 이를 갈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침략할 틈을 엿보고 있는데도 귀국에서 혹 그 교묘하고 음흉한 정상을 알아차려 그 기세를 미리 꺾지 못한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몹시 걱정하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에 전말을 들어 써 보내니 위에서 쓴 사유를 동무에게 전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펴주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하였다.
 
【영인본】 1책 244면【분류】 *외교-영국[英] / *외교-프랑스[法] / *외교-왜(倭) / *사법-치안(治安) 
 
 22)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0월 20일 을사 1번째기사

●출정했던 군사들에게 호궤하고 시상하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전투에 나갔던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고 이어 상을 베풀었다.하교하기를,
“선전관(宣傳官)들은 각 장수들과 군사들이 있는 곳에 각각 나누어 나가서 위문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승지(承知)는 자원하여 전투에 나갔던 사람들을 위문해 주어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전투에 나갈 때 자원하여 나간 보부(褓負)들의 공이 많다고 하니, 두목들에게 다같이 체가(帖加)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싸운 군사들 중에 자원하여 나간 자에게는 집을 하사하며, 향군의 포수(砲手)들은 다같이 각 해당 고을에서 잡역(雜役)을 면제해주게 하라. 자원하여 전투에 나간 반민(泮民)의 두목과 3명의 소임(所任)에게 다같이 체가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강화도(江華島)에 서양 오랑캐들이 침입한 것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해사(廨舍)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조그마한 비축마저 모두 약탈당하여 관청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슬프고 처참한 것뿐이니, 한바탕 큰 액운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나 한 몸을 바친 군사들은 첫째도 나라를 위하여 죽었고 둘째도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이다. 오직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지 자기 몸은 생각할 줄 몰랐으니, 떳떳한 양심을 다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령들이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측은하니, 어떻게 위로해야 하겠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에게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주도록 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같이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뜻을 보이게 하라.”하였다. 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議政府)의 당상(堂上官), 순무사(巡撫使)를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달 남짓이나 진을 치고 있으며 별 탈 없이 오고갔는가?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잔 뒤에, 군졸들도 또한 병을 앓지는 않았는가?”하니, 순무사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탈 없이 오갔으며, 군병들도 병 없이 돌아왔습니다.”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서양 배들은 돛을 돌려 퇴각했고 관군(官軍)도 방금 철수하여 위아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 때일수록 위태로운 때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비단 이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방어하는 대책을 힘을 다하여 강구하여야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병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잘 수리하고 마련하여 대비해 놓고 군사 대오를 단속하여 때가 닥쳐 군색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인(聖人)은 반드시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비용을 절약하지 않으면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들이게 되며, 무겁게 거두어들이면 백성들을 해치게 되고, 백성들을 해치게 되면 나라의 근본이 든든하지 못하게 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군영(軍營)에서 일상 쓰는 물품들에 대해 어찌 부족하게 될까 걱정하겠습니까?”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매우 절실하니, 응당 명심하겠다.”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경재(李景在)가 아뢰기를,
“서양 배가 퇴각하자마자 마침 우레가 치는 이재가 뒤따라 나타났으니,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외적을 물리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안을 잘 닦는 것은 근본입니다. 안은 닦는 것의 근본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은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건대 병은 조금 나아졌다고 안심하는 데에서 덧나고 전쟁은 승리했다고 자만하는 데에서 버릇이 되니,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경계하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경계하고 반성하소서. 재앙을 돌려 복으로 만들고 위험을 편안하도록 전환시키는 것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삼사(三事)에 있은 지 지금까지 이미 몇 년이 되었습니다. 요즘 서양 적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신이 의정부(議政府)에서 일을 보기 시작한 초기부터인데 지금까지도 시종 그러합니다. 위에서는 수고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지고 있는데도 신은 위로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주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의정부에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의 말이나, 한 가지의 일도 도움을 준 것이 없습니다.

이것만도 벌써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속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적들이 물러간 뒤에 뚫어진 배를 수리하고 무기들을 정리하는 것은 신과 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그 허물이 보좌하는 정승에게 있습니다. 빨리 신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 사직하는 말은 너무 지나치다. 다시는 이 일을 가지고 말하지 말라.”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강화도(江華島)는 왕도의 배경(陪京)인데 약탈을 겪은 뒤에 남은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령(守令)에게 분부하여 안착하여 모여 살도록 잘 위문하는 데 관계되는 방도를 마음을 다하여 계획하여 조치하도록 하되, 편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낱낱이 장문(狀聞)하여 실제의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급선무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해당 수령에게 관문(關問)하여 좋은 쪽으로 계획하여 조처하게 하라.”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군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하며 무기들이 견고하고 날카로운 것은 외적을 물리치기는 데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안을 닦는 요점은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인데, 또한 오직 전하가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가 안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신료들을 자주 만나 정사의 잘잘못을 토론한다면 하늘의 이치는 저절로 밝아지고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양의 좀도적들도 감히 다시는 그들의 흉악함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을 닦아 외적을 물리친다는 것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서양 배가 멀리 도망친 것은 실로 지금에 있어서는 다행이지만 적들의 실정은 예측할 수 없어서 후환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사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조금 늦출 수 없는 만큼, 방어를 엄격히 하고 군사들을 뽑으며 무기를 수리하고 군량을 저축하여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사설(邪說)을 다스리는 방도는 그 근본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외적들이 침입해 올 경우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길 것이므로 더욱더 엄격히 신칙하여 수색하고 체포해야 합니다. 이어서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응당 깊이 명심할 것이다. 그러나 사직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실로 이러한 때에 말할 일이 아니다.”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순무영(巡撫營)을 파하도록 하라.”하였다. 순무영(巡撫營)에서 군량을 도운 선비들과 백성들에 대하여 기록한 문건을 올렸다.
 
【유학(幼學) 이중윤(李重允)이 소 3척(隻), 이해조(李海祚)가 돈 1만 냥(兩), 이용하(李容夏)가 소 2척, 이석주(李錫柱)가 소 1척과 짚 2파(把), 민승진(閔升鎭)이 소 1척, 소임(所任) 탁성종(卓聖宗)이 땔나무 4태(駄) 3부(負)와 말먹이 콩 1태(駄)와 마초(馬草) 1태, 한량(閑良) 조인갑(趙仁甲)이 땔나무 300속(束), 유학(幼學) 민덕용(閔德容)이 썬담배 2두(斗)와 짚 20파(把)와 홍시 12첩(貼)과 곶감 1첩과 삶은 밤 1두(斗)와 소 1마리, 소임 김영업(金永業)이 땔나무 7태와 말먹이 콩 25속과 짚 14파, 고잠위(高潛位)가 땔나무 8태와 말먹이 콩 1태와 마초 1태와 남초(南草) 8파, 출신(出身) 박인영(朴麟英)이 백미(白米) 1석(石)과 소 2척과 짚 5파, 유학(幼學) 김사훈(金思薰)이 소 1마리, 정대주(丁大柱)가 말먹이 콩 3두와 짚 2파, 김정현(金定鉉)이 말먹이 콩 3두와 짚 5파, 심능태(沈能泰)가 소 5척과 짚 5파, 이지영(李枝榮)이 소 3척, 이상봉(李相鳳)이 소 1척, 장영규(張永奎)가 생밤 15두와 짚 5파, 장한운(張漢雲)이 쌀 3두와 장(醬) 1독과 땔나무 1태, 김순쇠(金順釗)가 짚 3파, 최흥상(崔興商)이 짚 3파, 김용대(金用大)가 짚 17파와 땔나무 5태와 썬 담배 3석과 콩 3속, 이한형(李漢衡)이 백미 2석과 소 1척, 한상혁(韓橡爀)이 말먹이 2석과 말먹이 콩 15속과 짚 10파, 김호복(金好福)이 땔나무 200속과 곡초(穀草) 100속과 푸른콩 70속, 백남승(白南升)이 소 2척, 백남항(白南恒)이 소 2척, 정중검(鄭重儉)이 관솔 3,000자루〔柄〕과 민어 10마리〔尾〕, 김윤칠(金允七)이 관솔 2,000자루, 이복현(李福賢)이 백하 젓〔白鰕醢〕 5옹(甕)과 토장(土醬) 1옹, 이승준(李承準)이 갑옷과 투구 1건(件), 홍종연(洪鍾淵)이 돈 10냥, 김용구(金龍九)와 김홍구(金鴻九)가 각각 쌀 20석씩, 김명구(金命九)가 쌀 5석, 노희호(盧羲鎬)가 돈 200냥, 정용혁(鄭龍爀)이 콩 5석, 김순주(金舜柱)가 돈 100냥, 이석범(李錫範)이 돈 100냥, 임봉장(林鳳章)이 소 2척, 이의상(李義祥)이 굴젓 3옹과 백하젓 반옹과 조기 3속(束)과 육장 2옹과 청주 10분(盆)과 삶은 고기 10근(斤)과 짚 10근, 현제승(玄濟昇)이 돈 500냥과 쌀 10석, 김기석(金基碩)이 쌀 1석, 이성선(李性善)이 소 5척, 현탁(玄鐸)이 돈 100냥, 김인성(金麟性)이 정육(正肉) 300근과 절편 2,400개(介)와 탕(湯) 3옹과 청주 30분, 하정일(河靖一)이 황소 2척, 종친부(宗親府)의 서리(書吏) 등이 황소 3척, 권두(權頭) 등이 소 1척, 사령(使令) 등이 소 2척, 정덕환(鄭德煥)이 백미 5석,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고직(庫直) 김도익(金道瀷)이 백미 10석, 의정부(議政府) 서리 등이 백미 10석과 황두(黃豆) 10석, 사령 등이 황두 10석, 안응환(安膺煥)이 소 2척, 장순규(張淳奎)가 백미 30석, 김진유(金鎭裕)가 소 10척, 이복현(李福賢)이 백미 20석, 권영두(權永斗)가 소 1척과 짚 6파, 신재학(申在學)이 소 4척과 간장(艮醬) 3분과 짚 50파, 봉성리(奉城里) 백성들이 흰 절편〔白餠〕 34기(器)와 소 1척과 장(醬) 70완(椀), 차윤행(車允行)이 돈 100냥, 김중효(金重孝)가 쌀 10석, 조인식(曺仁植)이 돈 100냥, 박계환(朴啓煥)이 돈 100냥, 천의현(千義賢)이 돈 300냥, 이석엽(李碩燁)이 돈 300냥, 이병제(李秉悌)가 돈 200냥, 이흡(李洽)이 소 1척과 침시(浸枾) 3접과 홍시 1접, 박명각(朴命珏)이 땔나무 820동(同), 전류리(顚流里) 백성들이 쌀 3석과 마초와 콩 4태, 등산리(登山里) 백성들이 말먹이 마른 짚 4석과 청절태(靑絶太)콩 2석, 이익수(李益秀)가 땔나무 1태와 짚 2파, 김홍윤(金弘潤)이 땔나무 300동, 서명동(西明洞) 백성들이 말먹이 푸른콩 161속과 땔나무 170속과 짚 5파, 김명손(金命孫)이 땔나무 3태, 염진옥(廉振玉)이 땔나무 248동, 이용한(李龍漢)이 쌀 1석과 소 1척, 이삼현(李參鉉)이 소 1척, 안기선(安起善)이 땔나무 1태, 유치종(兪致宗)이 땔나무 1태, 김판손(金判孫)이 땔나무 104동, 김재석(金才石)이 땔나무 84속, 한재두(韓在斗)가 소금 6석과 박 2개와 짚 3파, 심규지(沈奎之)가 땔나무 22동, 조한영(趙漢永)이 땔나무 30속, 양인영(梁仁榮)이 땔나무 1태, 박연쇠(朴連釗)가 땔나무 1태, 오응주(吳應周)가 땔나무 1태, 이재택(李在澤)이 소 1척, 최호대(崔虎大)가 소 1척, 이해두(李海斗)가 소 1척과 돼지 2구(口), 김학준(金學準)이 돈 200냥, 김완조(金完祖)가 돈 200냥 김우정(金禹鼎)이 돈 100냥, 유재소(劉在韶)가 쌀 5석, 김진한(金鎭漢)이 돈 100냥, 김응상(金應相)이 소금 5석, 홍장현(洪璋炫)이 소 1척과 절편 1,000개, 김귀성(金貴星)과 이예숭(李禮崇)이 각각 소 1척씩, 정헌교(鄭憲敎)가 쌀 5석, 김재수(金在洙)가 쌀 3석과 콩 2석, 천상호(千相鎬)가 돈 50냥, 훈련원(訓鍊院) 서리 등이 쌀 5석, 문의설(文義說)이 쌀 10석, 호리(戶吏) 김두식(金斗植)이 쌀 5석, 최석우(崔錫祐)가 쌀 5석, 통진(通津)의 권봉헌(權鳳憲)이 술 5옹과 소 2척과 홍시 4접과 지게미와 쌀겨 4석, 조한영(趙漢永)이 재차 소 1척과 말먹이 콩 10속, 이상석(李相錫)과 이규영(李圭永)이 각각 소 1척씩, 민용식(閔龍植)이 땔나무 70속, 김상욱(金相郁)이 땔나무 70속, 이종헌(李宗憲)이 땔나무 70속, 양존리(陽存里) 백성들이 땔나무 180속과 마초 20속, 대파리(大坡里) 백성들이 땔나무 200속, 장한운(張漢雲)이 지게미와 쌀겨 6석과 땔나무 1태, 이길원(李吉遠)이 민어 12미와 조기 5속과 준치 2속 3미, 이기원(李紀遠)이 민어 12미와 조기 5속과 준치 2속 3미, 최광윤(崔光潤)이 땔나무 3태, 최우영(崔遇永) 침채(沈菜) 10통(桶)과 콩 3태, 김득연(金得淵)이 말먹이 콩 4속과 지게미와 쌀겨 3두, 이돌이(李乭伊)가 말먹이 콩 22속, 이상석(李相錫)이 소 1척과 짚 17파, 이규영(李圭永)이 소 1척, 사초리(沙草里) 백성들이 탁주 19분, 하은동(霞隱洞) 백성들이 탁주 24분, 민희복(閔羲復) 콩 2태, 황진원(黃進源)이 침시(沈枾) 1,000개와 굴젓 1분, 박한영(朴漢英) 쌀 10석, 백지연(白之延)이 쌀 3석과 토장 3분, 이응수(李膺秀)가 32명의 장수와 군사들의 군량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으며, 오전(五廛) 시민(市民)들이 돈 1,000냥, 염재진(廉在鎭)이 소 2척, 정재흔(鄭在昕)이 돈 100냥, 이준수(李俊壽)와 이정우(李鼎禹)가 돈 100냥, 강태현(姜泰鉉)이 쌀 5석, 이인석(李仁石)이 쌀 5석, 승정원(承政院) 서리들이 소 2척, 사령들이 소 2척, 선혜청(宣惠廳) 서리 오도열(吳道烈) 등이 쌀 20석과 황두 20석, 고지기〔庫直〕 고진대(高鎭垈) 등이 쌀 20석과 황두 20석, 사령 윤창엽(尹昌燁) 등이 쌀 10석과 황두 10석, 수진궁 장무(壽進宮掌務) 이승업(李承業)이 돈 200냥, 마서리동(麻西里洞) 백성들이 땔나무 59속과 푸른 콩 20속과 지게미와 쌀겨 2석, 절과리(折過里)에서 탁주 29동이, 권병두(權炳斗)가 말먹이 콩 1태, 권병헌(權秉憲)이 말먹이 콩 1태, 박치서(朴致西)가 말먹이 콩 1태, 박태삼(朴太三)이 말먹이 콩 1태, 이준영(李俊永)이 말먹이 콩 1부와 담배 4파, 민희달(閔羲達)과 임윤득(林允得)이 껍질 콩〔及太〕 10속과 마초 6속과 지게미와 쌀겨 1석, 당포동(唐浦洞) 백성들이 말먹이 콩 1석과 지게미와 쌀겨 3석과 땔나무 10태, 진계환(秦繼煥), 강화순(姜和淳), 차윤행(車允行)이 각각 돈 100냥씩, 손형수(孫瀅洙)가 소 2척과 민어 10미(尾), 이종철(李宗哲)이 간장 1옹과 백하젓 1분, 백낙선(白樂善)이 돈 100냥과 쌀 5석과 소 2척, 진계환(秦繼煥), 김경수(金景遂), 강화순(姜和淳)이 각각 돈 100냥씩, 박민호(朴敏浩)가 돈 100냥, 박대영(朴大永)이 돈 300냥, 백목전(白木廛) 시민(市民)이 돈 2,000냥, 유연철(劉淵哲)이 돈 100냥, 홍취원(洪就源)이 쌀 5석과 황두 2석, 규장각 사령(奎章閣使令)들이 소 1척, 의금부 나장(義禁府羅將)들이 황두 10석, 김득헌(金得憲)이 쌀 5석과 돈 100냥, 최치두(崔致斗)가 돈 100냥, 이승간(李承幹)이 소 10척, 이운상(李雲祥)이 소 4척, 이소영(李紹榮)이 북어(北魚) 20쾌(快)와 진장(眞醬) 1분 10완, 소기름으로 만든 초〔肉燭〕 500병(柄), 동을산리(冬乙山里)에서 탁주 11분, 천암회(千巖回)가 땔나무 700동, 심능예(沈能藝)가 침시 600개와 소금 12두, 이동성(李東成)이 쌀 2석과 소 1척, 윤무성(尹茂性)이 황두 10석, 송응준(宋應駿)이 황두 10석, 선혜청 서리(宣惠廳胥吏) 윤의석(尹義錫)이 황두 10석, 병조(兵曹) 서리 석찬영(石燦永)이 쌀 5석, 윤영삼(尹營參)이 소 1척과 당미(唐米) 1석과 짚 5파, 정계성(鄭繼聖)이 쌀 5석, 윤영호(尹營浩)가 소 1척과 좁쌀 1석과 짚 10파, 김인풍(金仁豐)이 돈 100냥, 전기홍(田基弘)이 돈 20냥, 온수동(溫水洞) 백성들이 소 1척과 짚 54파, 고계철(高啓哲)이 송아지 1마리, 양충환(梁忠煥)이 소 1마리와 짚 100근과 소기름으로 만든 초 2,000병과 배 200개, 김영효(金永孝)가 소 1척과 짚 20근, 이군옥(李群玉)이 조기 5속과 어란(魚卵) 5부(五部), 박효진(朴孝鎭)이 조기 2속과 우유(牛油) 1분, 유진여(劉振汝)가 가는 젓〔細醢〕 1분이, 강재일(姜在逸)이 소 1척과 탁주 1옹, 송아리(松牙里)에서 지게미와 쌀겨 10석과 콩 10두, 늑동리(勒洞里)에서 콩 2석과 지게미와 쌀겨 4석, 총융청(總戎廳)의 백남승(白南升)이 재차 소 3척, 이복현(李福賢)이 재차 백하젓 3옹, 어물전(魚物廛)의 시민(市民)이 민어 100미와 미역 100동, 전 수문장(守門將) 이제현(李濟鉉)이 쌀 30석과 소 2척, 전 오위장(五衛將) 박시전(朴時銓)과 유학(幼學) 권기주(權基周)가 쌀 100석을 바쳤다.】
 
【영인본】 1책 245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재정-역(役) / *왕실-사급(賜給) / *군사-휼병(恤兵) / *정론-간쟁(諫諍) / *군사-전쟁(戰爭) / *왕실-국왕(國王) / *군사-병참(兵站)

23)고종 3권, 3년( 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0월 22일 정미 2번째기사

●양이가 침입하였을 때 문묘의 신위를 옮겨 모신 이동학에게 가자하라고 명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치선(兪致善)의 〖장계 등본을〗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㦳芝)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지난달 9일 서양 오랑캐가 쳐 들어와 약탈을 감행하며 남의 신주(新主)를 불태울 때에 당장(堂掌) 이동학(李東學)은 화가 성묘(聖廟)에 미칠까 염려하여 오성(五聖)의 위판(位版)을 여금산(如金山) 석실(石室) 안에 임시로 모셔두었습니다. 지금 환안(還安)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위안제(慰安祭)에 쓸 향과 축문을 속히 내려보내고, 이동학에게 낭관의 품계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246면【분류】 *외교-프랑스[法] / *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어문학-문학(文學) 
  
24)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10월 25일 경술 3번째기사

●김포, 양천, 고양, 시흥의 군포 가운데 3분의 1을 탕감해 주다
전교하기를,“지난번 서양 오랑캐들이 침입하였을 때에 통진(通津) 역시 그 피해를 받아 를 약탈당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당한 것은 큰 액운이었다. 그런데도 40일 동안 대진(大陣)의 군사들을 도와준 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갖은 고초를 겪은 실상이 눈에 선하여 한밤중에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자주 일어나곤 한다.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예에 따라 돌봐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영에 바치는 포(布) 가운데서 통진은 금년분 전량을 탕감해 주고, 김포(金浦), 양천(陽川), 고양(高陽), 시흥(始興)에 대해서는 3분의 1을 특별히 탕감해 주어서 조정에서 후하게 구휼해주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인본】1책 247면【분류】*구휼(救恤)/*재정-공물(貢物)

25)고종 4권, 4년( 1867 정묘 / 청 동치(同治) 6년) 1월 25일 경진 6번째기사

●호조에서 새로 주조한 돈을 내려서 진해와 성첩과 무기를 수리하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의익(李宜翼)이 의 보고한 바를 보니, ‘통진부(通津府)의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바로 관방(關防)의 요충지인 만큼 진해(鎭廨)와 성첩(城堞)과 무기 등의 허다한 수리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호조(戶曹)에서 새로 주조한 돈 가운데에서 1만 냥(兩)을 절계(折計)하여 획송(劃送)하여 차례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257면【분류】 *금융-화폐(貨幣) / *군사-군정(軍政) 
 
 26)고종 4권, 4년( 1867 정묘 / 청 동치(同治) 6년) 7월 4일 을묘 1번째기사

●문수 산성이 무너져 보수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문수 산성(文殊山城)이 모두 무너졌다고 하였다. 새로 쌓은 성첩(城堞)이 몇 달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모두 무너졌다고 하니, 공력을 다하지 않고 단지 겉치레만 일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도에서 군사 장비를 일신(一新)했다는 것도 한갓 명목에 그칠 우려가 없지 않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해당 부사(府使) 이방희(李邦熙)는 용서하기 어려우니 귀양 보내는 형벌을 시행하고 감독한 여러 사람들은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경중을 나누어서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성첩의 수축은 한시가 급하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대신으로 울진 현령(蔚珍縣令) 백낙선(白樂善)을 특별히 제수(除授)하여 즉시 내려보내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거행하여 기한 안에 완공한 것을 보고하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268면【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27)고종 4권, 4년(1867 정묘/청 동치(同治) 6년) 9월 17일 정묘 2번째기사

●경기 암행어사 박제관을 소견하다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박제관(朴齊寬)을 소견(召見)하였다. 올린 서계(書啓)에,
“개성부 전 유수(開城府前留守) 이승보(李承輔),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승로(李承老), 인천 부사(仁川府使) 조운섭(趙雲涉), 이천 부사(利川府使) 장익(張瀷), 가평 군수(加平郡守) 김진(金瑨), 파주 전 목사(坡州前牧使) 조희풍(趙羲豐), 남양 전 부사(南陽前府使) 정태호(鄭泰好),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㘽芝), 지평 전 현감(砥平前縣監) 유치도(兪致道), 음죽 전 현감(陰竹前縣監) 김순근(金恂根), 영화 찰방(迎華察訪) 박연용(朴演鏞) 등에게는 죄를 주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 지평 현감(砥平縣監) 정기석(鄭箕錫)에게는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주며, 양근 전 군수(楊根前郡守) 박효헌(朴孝憲), 고양 전 군수(高陽前郡守) 민태호(閔台鎬),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익현(金翼鉉), 파주 목사 유환(柳晥), 교동 부사(喬桐府使) 이근영(李根永), 김포 군수(金浦郡守) 윤영하(尹永夏), 고양 전전 군수(高陽前前郡守) 고석현(高奭鉉) 등에게는 차등 있게 포상(褒賞)하소서.”하였다.
 
【영인본】1책 273면【분류】*왕실-국왕(國王)/*왕실-사급(賜給)

28)고종 4권, 4년( 1867 정묘 / 청 동치(同治) 6년) 11월 1일 경술 4번째기사

●부평, 통진, 풍덕의 포수에게 도시를 쳐서 1명씩 뽑아 직부전시하도록 명하다
부평(富平)·통진(通津)·풍덕(豐德)의 포수들을 매년 가을마다 도시(都試)에서 우수한 사람 1명을 뽑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진무사(鎭撫使)가 장청(狀請)한 것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의 계사(啓辭)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인본】 1책 275면【분류】 *인사-선발(選拔)
 
29)고종 5권, 5년( 1868 무진 / 청 동치(同治) 7년) 10월 15일 무오 2번째기사

●경기 암행어사의 서계에 따라 지방관을 죄주거나 표창하다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정순조(鄭順朝)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에 의하여, 죽산 전 부사(竹山前府使) 정형기(鄭亨基), 통진 전 부사(通津前府使) 백낙선(白樂善), 부평 부사(富平府使) 서광두(徐光斗), 진위 현령(振威縣令) 송병찬(宋秉瓚) 등에게 죄를 주고, 안성 군수(安城郡守) 정기석(鄭箕錫), 영평 전 군수(永平前郡守) 이헌경(李憲絅), 용인 현령(龍仁縣令) 박용민(朴容珉),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헌문(李憲文), 과천 현감(果川縣監) 이병제(李秉悌), 적성 현감(積城縣監) 조운주(趙雲柱), 음죽 현감(陰竹縣監) 김두하(金斗河) 등에게는 모두 표창으로 승서(陞敍)하였다.
 
【영인본】 1책 303면【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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