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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30-3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30-39)

30)고종 7권, 7년( 1870 경오 / 청 동치(同治) 9년) 7월 18일 임오 2번째기사

●통진 부사 백낙선이 군사 기재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정배하도록 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 백낙선(白樂善)이 성첩(城堞)을 수리하고 관청 건물을 세우며 군기(軍器)를 갖춘 것이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그 죄상에 대해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전날 보고 된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전 부사 백낙선을 즉시 정배(定配)시키고 제반 일들은 다시 영건(營建)하여 전날의 보고와 부합되게 한 뒤에 경기 감영에서 치계(馳啓)하여 보고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337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군사-지방군(地方軍)
 
31)고종 7권, 7년( 1870 경오 / 청 동치(同治) 9년) 윤10월 22일 갑신 5번째기사

●선혜청 창고의 쌀을 획하하여 통진 등 8개 고을의 흉년을 구제하도록 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올린 장계(狀啓)에, “통진(通津) 등 8읍(邑)이 가뭄 피해를 입은 결과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내년 봄에 진휼(賑恤)을 설행하여야 하겠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진자미(賑資米)를 특별히 획하(劃下)하라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기내(畿內)의 몇 개 읍이 흉년이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 밤낮 근심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고 있다. 농사를 망치고 생계를 잃은 저 불쌍한 백성들이 무슨 수로 살아가겠는가? 이번에 곡식을 청한 일은 하루가 급한 문제이니, 선혜청(宣惠廳)에 저치된 유고미(留庫米) 중에서 2,000석(石)을 특별히 획하하여 진휼에 정성을 다해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혜택을 받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344면【분류】 *구휼(救恤) / *재정-창고(倉庫)
 
32)고종 7권, 7년(1870 경오/청 동치(同治) 9년) 윤10월 4일 병인 2번째기사

●러시아에 도망가 있는 백성들을 돌려오는 문제로 북경에 공문을 보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보고한 것을 보니, ‘도내(道內)의 우심읍(尤甚邑)은 통진(通津), 교동(喬桐), 풍덕(豐德), 장단(長湍), 교하(交河), 파주(坡州), 고양(高陽), 영종(永宗) 등 8개의 읍진(邑鎭)인데, 요호(饒戶) 및 재해를 당하지 않은 백성들에게는 규례대로 거두어들이고, 기호(饑戶)로 뽑힌 집은 바쳐야 할 환자〔還上〕를 모두 우선 정퇴(停退)하고, 지차읍(之次邑) 중에서 양주(楊州)는 절반은 본색(本色)으로 내게 하고 절반은 대전(代錢)하게 하며,

포천(抱川), 적성(積城), 마전(麻田)은 본색과 소미(小米), 황두(黃豆)를 가리지 말고 백성들의 희망에 따라서 거두어 들이고, 김포(金浦)의 경우는 우선 요호 및 재해를 당하지 않아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집부터 규례대로 독촉하여 받아 내고 가난한 백성 가운데 재해를 유난히 심하게 입어서 받아낼 도리가 없는 자들을 뽑아 특별히 정퇴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도신(道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이미 묘당(廟堂)에서 품처하라는 명이 이미 있었고, 말씀이 간곡하여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실정과 백성들의 힘을 살펴보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청한 대로 시행하게 하여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수현(金壽鉉)과 북병사(北兵使) 김기석(金箕錫)의 장계를 보니, ‘비류(匪類)를 데려올 치사원(差使員)이 훈춘〔琿春〕으로 달려가보니 협령(協領)이 벌써 두 번이나 러시아 변경 지역에 가서 먼저 기미를 탐지하였다고 하면서 함께 가지 않으려하고 또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쇄환(刷還) 등의 절차는 삼가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해당 아문(衙門)의 이문(移文)과 문답기(問答記)를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류를 데려오는 일은 실로 중국에서 권고하였고 데려올 날짜는 또 협령이 보고한 것에 따라 그에 맞춰 갔는데, 이제 와서 협령이 함께 가지 않으려고 하고 이어 또 가지 말라고 만류하여 마지않으므로 사세를 참작건대도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쇄환 등의 절차는 우선 내버려두고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또한 사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보내야 하니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을 짓게 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1책 342면【분류】*외교-러시아[露]/*재정-전세(田稅)/*호구-이동(移動)/*어문학-문학(文學)

33)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월 25일 을묘 2번째기사

●경기 연해의 각군에 포군을 두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진무영(鎭撫營)에 별무사(別武士) 401인(人), 별효사(別驍士) 201인, 효충사(效忠士) 103인, 장의사(壯義士) 223인, 승군(僧軍) 21인, 우방어영(右防禦營)의 교동부(喬桐府)에 포병(砲兵) 100인, 전영(前營)의 부평부(富平府)에 포군(砲軍) 300인, 좌영(左營)의 통진부(通津府)에 의포사(義砲士) 256인, 우영(右營)의 풍덕부(豐德府)에 별포사(別砲士) 203인, 후영(後營)의 연안부(延安府)에 화포군(火砲軍) 50인, 백천군(白川郡)에 포군 50인, 덕포진(德浦鎭)에 포병 44인, 문수 산성(文殊山城)에 별포군(別砲軍) 25인을 이미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좌방어영(左防禦營)의 영종진(永宗鎭)에는 별무사 200인, 별총군(別銃軍) 200인 외에 의익사(義翊士) 105인을 이번에 가설(加設)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353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34)고종 8권, 8년(1871 신미/청 동치(同治) 10년) 3월 20일 경술 4번째기사

●전국의 서원 중에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다
예조(禮曹)에서, ‘한 사람에 대해 중첩하여 세운 서원(書院)을 헐어버리는 문제는 두 차례의 하교에 따라 신 조병창(趙秉昌)이 대원군(大院君) 앞에 나아가 품의(稟議)한 결과, 「성묘(聖廟)의 동쪽과 서쪽에 배향하는 제현(諸賢)과 충절(忠節)과 대의(大義)를 남달리 뛰어나게 지킨 사람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를 그만두며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미 사액(賜額)하여 계속 남겨두어야 할 47개의 서원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계하(啓下)한 뒤 각도(各道)에 행회(行會)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경기(京畿)의 개성(開城) 숭양 서원(崇陽書院), 용인(龍仁) 심곡 서원(深谷書院), 파주(坡州) 파산 서원(坡山書院), 여주(驪州) 강한사(江漢祠),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김포(金浦) 우저 서원(牛渚書院), 포천(抱川) 용연 서원(龍淵書院), 과천(果川) 사충 서원(四忠書院), 양성(陽城) 덕봉 서원(德峰書院), 과천(果川) 노강 서원(鷺江書院), 고양(高陽) 기공사(紀功祠), 충청도(忠淸道)의 연산(連山) 돈암 서원(遯巖書院), 홍산(鴻山) 창렬사(彰烈祠), 청주(淸州) 표충사(表忠祠), 노성(魯城) 노강 서원(魯岡書院), 충주(忠州) 충렬사(忠烈祠), 전라도(全羅道)의 태인(泰仁) 무성 서원(武城書院),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 장성(長城) 필암 서원(筆巖書院), 경상도(慶尙道)의 경주(慶州) 서악 서원(西嶽書院), 선산(善山) 금오 서원(金烏書院), 함양(咸陽) 남계 서원(藍溪書院), 예안(禮安) 도산 서원(陶山書院), 상주(尙州) 옥동 서원(玉洞書院),

안동(安東) 병산 서원(屛山書院), 순흥(順興) 소수 서원(紹修書院), 현풍(玄風) 도봉 서원(道峯書院), 경주 옥산 서원(玉山書院), 상주(尙州) 흥암 서원(興巖書院),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 진주(晉州) 창렬사(彰烈祠), 고성(固城) 충렬사(忠烈祠), 거창(居昌) 포충사(褒忠祠), 강원도(江原道)의 영월(寧越) 창절 서원(彰節書院), 철원(鐵原) 포충사(褒忠祠), 금화(金化) 충렬 서원(忠烈書院),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청성묘(淸聖廟), 배천(白川) 문회 서원(文會書院), 장연(長淵) 봉양 서원(鳳陽書院), 함경도(咸鏡道)의 북청(北靑) 노덕 서원(老德書院), 평안도(平安道)의 영유(永柔) 삼충사(三忠祠),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 영변(寧邊) 수충사(酬忠祠), 평양(平壤) 무열사(武烈祠), 정주(定州) 표절사(表節祠)이다.】
 
【영인본】1책 358면【분류】*사상-유학(儒學)/*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35)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4월 14일 계유 4번째기사

●이양선이 포를 쏘면서 손돌목을 지나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의 보고에, 「좀 작은 이양선(異樣船) 2척(隻)이 4척의 종선(從船)을 거느리고 오늘 미시(未時)쯤에 곧바로 손돌목〔孫石項〕 쪽으로 향하였으므로 광성진(廣城津)에서 먼저 대포를 쏘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사가 약속대로 그에 호응하여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니, 그 배들도 이 대포소리를 듣고 대포를 마구 쏘면서 거침없이 손돌목을 지나갔습니다.

이번에 방어한 일을 돌이켜보면 매우 송구스럽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하였습니다. 요해지의 길목으로는 손돌목 만한 데가 없고 방어대책도 미리 세웠건만 초기에 격침시키지 못하고 결국 놓쳐버렸으니 군사 지휘체계를 놓고 볼 때 대단히 해괴한 일입니다. 해당 부사 홍재신(洪在愼)을 우선 파출(罷黜)시키소서.’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우선 용서하여 죄명을 지닌 채 거행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362면【분류】 *외교(外交)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36)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4월 15일 갑술 4번째기사

●이양선을 경계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인천(仁川)은 양선(洋船)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직통길이므로 여기에 군사를 더 늘여 방어하고 계엄 상태도 한층 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사 1초(哨)와 수어영(守禦營)의 별파진(別破陣) 50명(名)을 인천 부사(仁川府使) 구완식(具完植)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서울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본 삼군부에서 비밀 계(啓)를 가지고 군사를 동원시키며, 지방의 군영들에 대해서는 병부(兵符)를 발송하거나 병부를 맞추어볼 때에도 비밀리에 거행하게 할 것입니다.
화약 1,000근(斤)과 탄환 1만 5,000개에 대해서는 각 군영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분배하여 내려 보낼 것입니다.

듣자니, 통진(通津)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니 호조(戶曹)의 저류미(儲留米) 300석(石)을 주교사(舟橋司)에서 운반해가도록 분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병부를 발송할 필요 없이 지금은 비밀 보고서를 가지고 본 삼군부에서 조용히 군사를 동원시키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영인본】 1책 362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外交)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병참(兵站)  
 

37)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4월 15일 갑술 5번째기사

●이양선이 포를 쏘아 포군 오삼록이 졸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가, ‘통진 부사(通津府使)의 보고에, 「저들의 배들이 광성진(廣城津)에 와서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이 진의 성(城)을 향하여 대포를 수없이 마구 쏘아댔으며 얼마 있다가 모든 배가 도로 내려가다 손돌목〔孫石項〕에 이르러 또 대포와 조총을 쏘아댔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빗발치듯하였습니다. 덕포(德浦)의 포군(砲軍) 오삼록(吳三祿)이 대포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이어 죽었습니다. 그 배들은 차츰 도로 내려가 모두 전과 다름없이 호도 앞바다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362면【분류】 *외교(外交) / *군사-전쟁(戰爭)

38)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4월 24일 계미 5번째기사

●서양인들과 광성진에서 교전하였으나 아군이 이기지 못하고 광성진을 잃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통진(通津)의 진지에서 보고한 내용 중, 「적의 괴수가 북쪽으로 대모산(大母山)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육지로 대포를 실어다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마구 쏘아대고 소총으로도 일제히 쏘아댔습니다.

그리고 미시(未時)에는 적의 괴수가 광성진(廣城津)으로 꺾어 들어가서 성과 돈대(墩臺)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광성진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대어 한바탕 혼전을 벌였는데 한참 뒤에 광성진은 붕괴되고 적들이 광성진의 위아래 돈대를 차지하였습니다.
 
덕진(德津)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賊船)도 광성진을 향하여 기동하므로 손돌목〔孫石項〕 남성두(南星頭)에서 연이어 대포를 쏘니 적선도 그대로 닻을 내리고 대포를 무수히 난발하여 손돌목의 성이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적들은 광선진을 탈취하고 그곳 진사(鎭舍)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벙거지를 실어갔습니다. 그리고 손돌목을 내려다보니 성안에서도 대포를 쏘았습니다.

바다와 육지로 공격해오니 적은 수의 군사가 의지하여 무기를 사용할 곳이 없었고, 좌우가 이미 서로 의탁할 형편이 못된 조건에서 막아낼 길이 전혀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덕포진(德浦鎭)에다 진지를 옮겼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363면【분류】 *외교-미국[美] / *군사-전쟁(戰爭)
 
39)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5월 21일 경술 2번째기사

●표창에서 빠진 군사들에게 휼전을 베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의 장계(狀啓)를 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홍재신(洪在愼)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들면서 아뢰기를, 「전번에 양이(洋夷)와 서로 싸움이 붙었을 때, 포군(砲軍) 강선도(姜善道)는 대포를 쏘아 적함의 갑판을 부수고, 차재준(車載俊)·하도현(河道鉉)·방대진(方大振) 등은 총으로 서양놈 두 놈을 죽였으니 장려하는 정사에 있어서 응당 포상(褒賞)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포로 선판(船板)을 부수고 총으로 서양놈을 죽여 저 더러운 놈들로 하여금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니, 군사를 철수한 다음 상등례(上等例)에 따라 삼군부에서 넉넉하게 시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366면【분류】 *군사-휼병(恤兵) / *인사-관리(管理)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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