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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40-4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40-49)

40)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5월 22일 신해 2번째기사

●진무영과 연해 각 진의 계엄을 해제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서양놈들이 이제는 멀리 달아나고 전혀 자취가 없는 상황에서 허다한 군사들이 한 달이 넘도록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사실 민망한 일입니다. 진무영(鎭撫營)의 대진(大陣) 및 영종(永宗)·교동(喬桐)·인천(仁川)·부평(富平)·통진(通津)·풍덕(豐德)을 비롯한 각진(各鎭)은 모두 표신(標信)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본부(本府)에서 통지하여 강화도와 통진에서 영솔하고 있던 군사는 경기 중군(京畿中軍) 양주태(梁柱台)로 하여금 인솔하여 올라오게 하고, 영종과 인천에서 영솔하고 있던 군사는 출정한 장사(將士) 이재정(李在靖)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올라오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366면【분류】 *군사-군정(軍政)

41)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5월 25일 갑인 3번째기사

●강화도에 군사를 증원하고 보루를 튼튼히 할 것을 명하다
전교하기를, “심도(沁都)에 군사를 늘리고 보루(堡壘)를 튼튼히 하는 것은 양이(洋夷)들을 막는 방도이다. 무릇 군무(軍務)의 절제는 한결같이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규례대로 마련하여, 무부(武府)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의처(議處)하고 진무사(鎭撫使)와 의견을 교환하여 십분 합당하게 하라.

손돌목〔孫石項〕의 좁은 입구에 포(砲)를 설치하여 방어하는데 있어서는 각진(各鎭)의 군사도 수효를 늘려 마련하고 통진(通津), 덕포(德浦)의 군사도 진무영(鎭撫營)의 원래 군액(軍額)으로 첨부하도록 분부하라. 이렇게 하는 의도는 뒷날의 우환을 막기 위한 것이니 대신(大臣)과 장신(將臣)은 하나하나 강구하여 심도의 좁은 입구를 견고하게 하여 다시는 서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하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양추(洋醜)가 이미 물러갔다.

이때는 공자(孔子)의 학문을 더욱 천명하는 것이 마땅하니, 문묘(文廟)의 전배(展拜)를 내일 거행하겠다.”하고, 또 전교하기를,
“음관(蔭官)을 이미 수용(收用)하였으니, 이때에는 무신(武臣)도 가려서 등용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장신은 병법과 군무에 숙련한 사람을 각기 몇 명씩 천거하여 음직(蔭職)을 별도로 천거하는 규례대로 하도록 무부(武府)에 분부하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심도에 이미 군사를 증강하였다. 말을 마련하는 문제도 조정에서 유념해야 할 일이다. 제주의 공마(貢馬)를 평년에는 30필(匹), 식년(式年)에는 50필을 떼어 보내도록 사복시(司僕寺)에 분부하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기복(起復)하여 출정한 이재정(李在靖)이 거상 기간이 이미 끝났다고 들었다. 임기가 거의 찬 초사(初仕)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어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망(擬望)하여 들이게 하라.”하였다.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하비(下批)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포도청(捕盜廳)에서 거행하는 일이 근래에 매우 소홀하여 사도(邪徒)들이 끝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양이(洋夷)들의 침략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포도대장(捕盜大將)들이 제대로 직책을 수행했다고 하겠는가? 우선 엄중히 추고(推考)하고, 앞으로 더욱 잘 살펴서 나쁜 무리의 종자가 남아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이렇게 하교한 후에는 비단 사도들을 다스리는 데 허실을 살필 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문제로 인하여 만일 죄도 없이 뜻밖의 재앙을 당한다면 이것은 옥석(玉石)이 함께 타는 것이니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두 포도대장은 이 전교를 듣고 각별히 두렵게 생각하라. 경포청(京捕廳)에서도 오히려 이런 폐단이 있는데, 더구나 외도(外道)의 진영(鎭營)에서 도적을 소탕하는 정사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내용으로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의 각 진영에 신칙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367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
 
42)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6월 1일 경신 3번째기사

●싸움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를 평가하여 표창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올린 장계(狀啓)에, ‘본영(本營)의 중군(中軍) 이봉억(李鳳億), 천총(千總) 김현경(金鉉暻), 별무사(別武士) 별장(別將) 유준(劉俊)이 분발하여 화포를 쏘며 한바탕 싸움을 벌여 적선을 파손시키고 서양군사 2명을 죽였으니 이것은 손돌목〔孫石項〕에서의 한차례 승리였습니다.

초지진 첨사(草芝鎭僉使) 이렴(李濂), 별효사 별장(別驍士別將) 김양규(金陽奎)가 깊은 밤에 군사를 모아 곧바로 적진에 돌입하였으니, 비록 장수의 목을 벤 공로는 없다고 하더라도 남달리 뛰어난 대담성을 볼 수 있으니 마땅히 표창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광성(廣城)이 함락당할 때 중군 이하가 절개를 지켜 죽은 일은 이미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는 은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별장 박치성(朴致誠)은 적의 무리가 돌입할 때 자기 혼자서는 당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인신(印信)을 품고 강에 몸을 던져 칼로 자결하였습니다. 유예준(劉禮俊)도 광성이 함락당할 때 중군을 엄호하다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적선에 잡혀 갔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는 것을 여러 군사들이 다같이 보았습니다.

중군의 겸종(傔從) 임지팽(林之彭)은 식량을 타먹는 군교도 아니고 또 군적에 등록된 군사도 아니지만 끝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청지기 김덕원(金德源)은 인신을 몸에 감추고 위험을 무릅쓰며 뛰쳐나왔으니, 모두 전장(戰場)에서 죽었거나 부상당한 장교와 병졸과 함께 1등급에 놓아야 합니다. 전장에서 죽은 군사들에게 별도로 특별한 은전을 베푼 연후에야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므로 사실대로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냅니다.
 
덕포진(德浦鎭)의 포수(砲手) 강선도(姜善道)가 대포로 양선(洋船) 파손시키고 통진(通津)의 포수 차재준(車載俊) 등 세 사람이 총으로 두 놈의 적을 죽인 것은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좌영장(左營將) 홍재신(洪在愼)은 미리 포수를 매복시켰다가 먼저 두 놈의 적을 죽임으로써 배에 가득한 적들을 일시에 혼비백산케 하였습니다.

덕포 전 첨사(德浦前僉使) 박정환(朴廷煥)은 백발의 늙은 장수로 전진(戰陣)에 임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대포를 지휘하여 적선을 부쉈으니 포상(褒賞)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당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번에 양이(洋夷)들이 기승을 부릴 때 무릇 포상할 만한 조그마한 공로라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별도로 뜻을 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하는 조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적선이 손돌목에 침입하였을 때 중군 이봉억(李鳳億)이 미리 시설을 해두었던 것은 탁월한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었고,

외로운 군사들을 단속(團束)하여 한마음으로 명령을 따르게 하고 대포와 총을 쏘아대며 용기를 떨쳐 싸우게 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니, 그 큰 공로가 성대하여 기록할 만합니다. 지금 비록 체차(遞差)되어 돌아갔지만 가자(加資)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적도들이 초지진에 상륙하였을 때 해당 첨사 이렴은 적의 예봉을 잘 피하여 3리쯤 물러나 지키다가 밤이 깊어지자 군사를 모아 적진에 포를 쏜 것 또한 뒷수습을 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특별히 가자해 주소서. 별효사 별장 김양규가 분주하게 힘을 쓴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또한 상가(賞加)해 주소서. 광성진 별장(廣城津別將) 박치성은 인신을 품고 주머니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떳떳이 의(義)에 나갔으니 뛰어난 절개가 분명하나 이미 증직(贈職)의 은전을 베풀었으니 특별히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러한 기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별무사 별장(別武士別將) 유예준은 첫 승리에서 공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성진이 함락될 때 앞뒤에서 막고 지키다가 끝내 탄환에 맞아 쓰러졌고 포로로 붙잡혔을 때도 의연하게 굴하지 않았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특별히 상가해 주소서. 중영(中營) 청지기 김덕원은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인신을 품고 있다가 바쳤으니 본영으로 하여금 상당과(相當窠)에 차급(差給)하게 하소서.

중군의 겸종 임지팽은 백리(百里) 밖까지 주장(主將)을 따라가서 위험한 고비에서 주선하다가 값지게 한목숨을 바쳤으니 자질(子姪)을 방문(訪問)하여 수용(收用)하소서. 전장에서 죽은 무사들과 덕포진의 포수 오삼록(吳三錄)은 만일 아들이 있다면 본영으로 하여금 한 사람 한 사람 수용하게 하소서. 좌영장(左營將) 통진 부사(通津府使) 홍재신(洪在愼)은 기묘한 전법을 써서 적을 섬멸하여 흉적들이 놀라 달아나게 하였으니 가자해 주소서. 덕포진 첨사 박정환은 포를 쏘아 적의 배를 부수고 지휘를 잘 하였으니 상가해 주소서.
 
서울과 지방의 군졸들의 분등(分等)과 성책을 가져다 보니 비록 서울에서 분등한 것과 조금 다른 점은 있으나 공로를 평가하여 상을 줌에 있어서는 반드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 비교적 가까우니 모두 성책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368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군사-휼병(恤兵) / *군사-전쟁(戰爭) / *군사-관방(關防) / *왕실-사급(賜給)

43)고종 8권, 8년( 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12월 2일 정사 1번째기사

●박영보에게 기근 구제사업에 힘쓸 것을 명하다
진강(進講)을 마쳤다. 강관(講官)【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에게 하교하기를,“일전에 장계(狀啓)를 보았다.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진휼 정책을 지난해의 규례대로 하는가?”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재해를 입은 고을들이 금년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지난해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한 것은 8개의 고을과 진이었는데, 이번에는 11개의 고을과 진이며 굶주리는 인구는 지난해에 비하여 거의 1만 명가량 더 많습니다. 진제장을 설치하는 규례는 모두 지난해의 규례대로 하고 있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언제부터 진제장을 설치하며 며칠 간격으로 나누어주는가?”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11개 고을과 진 중에서 교동(喬桐)이 제일 심하기 때문에 여기는 벌써 진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통진(通津)이 그 다음이므로 여기는 세전(歲前)에 진제를 시작하며 그 나머지 고을은 세후(歲後)에 시작하겠습니다. 20일에 한 번씩 분급(分給)하는데 남자 어른은 쌀 1말을, 여자 어른과 노약자들은 이에 비하여 조금 줄여 나누어주겠습니다.
 
진휼 자금 때문에 한창 우려하고 있는데 전 부사(前府使) 이재선(李載先)이 조(租) 500석(石)을 바쳐왔으므로 이미 교동에 보내어 진휼하게 하였으며, 전 현감(前縣監) 한봉교(韓鳳敎)는 1만 냥의 돈을 내어 진휼에 보충하게 하였으므로 각 읍에 나누어 보냈는데 도움이 되는 바가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흉년이 들고 올해에 또 그러하니 백성들의 형편이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진휼하는 정사에 반드시 실효가 있은 후에야 흉년 구제를 할 수 있다.”하니, 박영보가 아뢰기를,
“이 때문에 밤낮 걱정하면서 죽거나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하지만 맡은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영인본】 1책 381면【분류】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호구-호구(戶口)

44)고종 10권, 10년( 1873 계유 / 청 동치(同治) 12년) 5월 19일 병신 2번째기사

●해미 현감 강윤과 통진 부사 홍재신을 바꾸어 임명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각영(各營)의 군기(軍器)를 금위영(禁衛營)에 국(局)을 설치하여 만들고 있는데 본부(本府)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국(訓局) 본청(本廳)의 장무관(掌務官) 강윤(姜潤)이 지금 해미 현감(海美縣監)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번잡한 일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기 어려우므로 해미 현감 강윤과 통진 부사(通津府使) 홍재신(洪在愼)을 서로 바꾸어서 그로 하여금 간역(看役)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412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45)고종 10권, 10년(1873 계유/청 동치(同治) 12년) 8월 5일 신사 1번째기사

●익산군, 강진현, 김포현 등에 포군을 두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익산군(益山郡)에 별포군(別砲軍) 20명, 김포현(金浦縣)에 화포군(火砲軍) 20명, 강진현(康津縣)에 별포사(別砲士)를 가설(加設)한 결과 도합 100명, 옥과현(玉果縣)에 화포군 20명, 동복현(同福縣)에 포군(砲軍) 20명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1책 416면【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46)고종 10권, 10년( 1873 계유 / 청 동치(同治) 12년) 9월 27일 임신 1번째기사

●강화 군영의 군사 대오의 규율을 잘 잡은 정기원, 김선필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지금 적간(摘奸)하러 갔던 중사(中使)와 군직 선전관(軍職宣傳官)의 서계(書啓)를 보니, 강화 군영(江華軍營)의 많은 부대에서 군마(軍馬)를 성심껏 조련하고 군사 대오(軍士隊伍)의 규율도 있으며 군영도 다시 채색하였다고 한다. 전후의 수령(守令)들이 성의를 다하여 부지런히 수고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전 진무사(前鎭撫使) 정기원(鄭岐源)과 진무사(鎭撫使) 김선필(金善弼)의 아들이나 조카들 중에서 이름을 알아보고 임기가 거의 찬 참봉(參奉) 자리를 내어 조용(調用)함으로써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각 읍과 진에서 포병(砲兵)을 설치하여 항상 조련하는 일은 비록 직분 안에 속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듣기에 또한 가상한 일이니, 영종 전 첨사(永宗前僉使) 이유증(李儒增), 첨사(僉使) 이병숙(李秉淑), 통진 전 부사(通津前府使) 홍재신(洪在愼), 인천 부사(仁川府使) 구완식(具完植), 부평 부사(富平府使) 이정하(李貞夏)에게 각각 대궐 안에서 내려 보내는 사슴가죽〔鹿皮〕 1령(領)씩을 사급(賜給)하도록 하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진무사 이하 관리들에게 방금 뜻을 보여주었으니, 군사들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내탕금(內帑金) 3,000냥을 내려 보내니, 무부(武府)에서 적당히 나누어 보내어서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도록 분부하라.”하였다.
 
【영인본】 1책 417면【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47)고종 11권, 11년( 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3월 20일 임술 2번째기사

●용진 아래의 세 진에 포대를 새로 세우는 일을 의논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용진(龍津) 이하 세 진을 지키기 위하여 포대를 새로 세웠고 병제를 부(部)로 나누고 민병(民兵)을 성정군(城丁軍)으로 하는 것은 모두 옛 제도를 답습하여 적절히 변통하겠습니다.

교동(喬桐)과 통진(通津)에 병력을 더 보충하여 방비하는 것은 응당 강구해야 하겠는데, 판관(判官)을 수성 장수(守城將帥)로 하비(下批)하고 중군(中軍)이 하방(夏防)하는 것의 여부는 품처하도록 창설하는 제도와 관계되는 만큼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를 새로 세우는 것은 적정을 감시하는 데에 중요하고 군졸을 부로 나누는 것은 대오(隊伍)를 편성하는 법이며 민병을 성정군으로 하는 것은 보갑제도(保甲制度)입니다. 옛날을 상고하고 오늘날을 참작해서 좋은 쪽으로 변통하였으니, 반드시 앞날을 고려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판관을 수성 장수로 하비하는 것은 원용할 만한 전례가 많으니 윤허를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중군이 하방하고 교동과 통진에 군사를 보충하여 방어하는 것도 타산이 있을 듯하니,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452면【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48)고종 11권, 11년( 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7월 17일 정사 1번째기사

●새로 만든 대포, 중포, 소포를 진무영과 영종 등에 나누어 보내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새로 만드는 군기(軍器) 중에서 대포(大砲)·중포·소포를 먼저 만드는 대로 진무영(鎭撫營)과 영종(永宗)·인천(仁川)·통진(通津)에 나누어 보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인본】 1책 469면【분류】 *군사-군기(軍器) / *군사-지방군(地方軍)

49)고종 11권, 11년( 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11월 20일 기미 1번째기사

●통진 경계의 안행동 등에 포대를 설치하게 하다
일강(日講)을 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의 별단(別單)과 관련하여 통진(通津) 경계의 안행동(雁行洞)에 진을 설치하는 것의 편리 여부를 강화 진영(鎭營)에 관문으로 물었습니다.

지금 해당 수령의 장계(狀啓)를 보니, ‘암행어사의 논의가 타당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덕포(德浦)가 있어 거리가 가깝고 편리하니 망을 보는 일은 본진의 진장(鎭將)이 겸해서 담당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안행동을 비롯한 여러 곳에는 별도로 포대(砲臺)를 설치하는 것이 진을 두는 것보다 나으니 묘당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안행동이 덕포와 가깝다는 것은 사실 장계의 내용과 같고 포대를 설치하는 것은 많을수록 좋으니 이번 요청이 실로 매우 좋습니다. 해당 고을에 통지하여 성심껏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1책 483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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