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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종실록(60-69)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김포이야기 <김포실록>

26. 고종실록(60-69)

60)고종 20권, 20년( 1883 계미 / 청 광서(光緖) 9년) 2월 26일 정축 1번째기사

●통진의 선혜청 대동미를 돈으로 대납하도록 김홍집이 보고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의 보고를 보니, ‘통진(通津)에서 신사년(1881)에 선혜청(宣惠廳) 대동미(大同米)를 상납하지 못한 것이 755석(石)입니다. 그러나 올해 같은 흉년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모두 다 구제를 바라는 만큼 본색(本色)으로 받아들일 길이 전혀 없습니다.

신사년의 결가(結價)대로 매 석당 11냥 8전씩 쳐서 특별히 대납하도록 허락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을에서 구제 정사가 한창이고, 춘궁기에 백성들의 사정도 돌봐주어야 합니다. 지금 본색으로 받아낸다는 것은 과연 수행할 수 없는 일이니 신사년조의 시가(時價)에 따라 보고한 대로 돈으로 상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2책 89면【분류】 *재정-전세(田稅) / *금융-화폐(貨幣)

61)고종 20권, 20년(1883 계미/청 광서(光緖) 9년) 6월 22일 경오 7번째기사

●조선국에서 일본인이 통행할 수 있는 이정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다
조선국에서 일본인이 통행할 수 있는 이정(里程)에 관한 약조〔朝鮮國閒行里程約條〕가 의정(議訂)되었다.
 
〈한행이정약조(閒行里程約條)〉
 
제1조
양국 정부는【조선력(朝鮮曆) 임오년(1882) 7월 17일,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15년 8월 31일】 각 전권 대신(全權大臣)들이 의정(議訂)한 속약(續約) 제1관의 취지에 근거하여 조선국의 인천(仁川), 원산(元山), 부산(釜山) 세 항구에서 금년에 확장해야 할, 통행할 수 있는 이정(里程)을 피차의 위임받은 대신들이 의정하고 아래에 열거한다.
 
제2조
인천항(仁川港)은 동쪽으로 안산(安山), 시흥(始興), 과천(果川)까지, 동북쪽으로는 양천(陽川), 김포(金浦)까지, 북쪽으로는 강화도(江華島)까지로 한다.
 
원산항(元山港)은 서쪽으로 덕원부(德源府) 관할의 마식령(馬息嶺)까지, 남쪽으로 안변부(安邊府) 관할의 옛 고룡지원(古龍池院)까지, 북쪽으로 문천군(文川郡) 관할의 업가직(業加直)까지로 한다.
 
부산항(釜山港)은 동쪽으로 기장(機張)까지, 서쪽으로 김해(金海)까지, 남쪽으로 명호(鳴湖)까지, 북쪽으로 양산(梁山)까지로 한다.
 
이상 지정된 각지의 경계는 양국 관리들이 함께 표를 세워 사방의 한계를 명확히 한다.
 
제3조
조선력 갑신년(1884), 일본력 명치(明治) 17년에 다시 확장할 이정의 경계는 기일이 되기를 기다려 양국의 위원이 의정하여 이 약조의 부록으로 삼는다.
 
제4조
이 이정 내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마음대로 총을 쏘고 사냥하는 것을 허가한다. 단, 인가에 접근한 곳과 조선 정부가 제한 금지하는 곳에서는 총을 쏠 수 없다.
 
제5조
일본인이 이정 내에서 폭행하거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있을 경우 지방 관리가 체포하여 일본 영사관에 넘기거나 혹은 해처(該處)에 억류해두고 영사관에게 알려서 처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억류하여 호송할 때에 학대하거나 가혹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억류는 영사관에 왕래하는 시각을 한도로 삼는다.
 
제6조
이 이정 내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사람에게 폭행을 하는 일이 있을 경우 지방관은 곧 관리를 속히 파견하여 구제하여 보호하고 폭행한 사람을 엄격히 처벌한다.
 
제7조
일본인이 통행하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갈 수 없게 되거나 혹 중도에서 병이나 사고가 나서 갈 수 없게 된 경우에는 연로(沿路)의 인민이 그의 청을 들어 가마와 말을 삯내어 주거나, 자기 집에서 쉬게 하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단 가마와 말의 비용과 숙박비 등은 해당 일본인이 청산한다.
 
제8조
조선 정부는 제4조 이하 각 조항을 이정 내의 향촌 및 도로의 인민에게 제시하고 효유하여 다 같이 준봉하도록 한다.
에 양국이 위임한 대신들은 기명(記名)을 하고 도장을 찍어 믿음으로 지킨다는 것을 밝힌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2년 6월 22일
전권 대신(全權大臣)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
대일본국 명치(明治) 16년 7월 25일
전권 대신(全權大臣) 변리 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영인본】2책 96면
【분류】*외교-일본(日本)/*무역(貿易)/*사법-치안(治安)/*어문학-문학(文學)

62)고종 20권, 20년(1883 계미/청 광서(光緖) 9년) 11월 15일 임진 1번째기사

●김집 등을 문묘에 배향하는 일 등에 관하여 김병국이 아뢰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을 도와서 이끌어주는 것은 가장 급선무입니다. 일찍 정양(正養)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학문을 강론하는 한 가지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서연(書筵) 이외에 자주 빈객(賓客)들을 접촉하고, 날마다 곁에 있는 신하들과 가까이 지내어 문필의 재능을 키워나가고, 유예(遊藝)에 시간을 팔지 않는다면 밝은 공적이 얼마 안가서 성취될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전하는 깊이 유념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아뢴 바는 참으로 절실하다.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방도는 사부(師傅)에게 달려있으므로 나는 경들에게 또한 큰 기대를 하고 있다.”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두 선정(先正)을 문묘에 배향하는 은전은 사실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중외(中外)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재를 만들어내는 방도는 어떻게 고무하고 진작하는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한결같이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일상적으로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수재나 남달리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우리 왕조에서는 〖인재 양성의 방도를〗 완전하게 구비해놓았습니다. 안으로 서울에서 밖으로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을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위로는 국학(國學)에서부터 아래로는 향숙(鄕塾)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의 모범에 의거하여 공부를 장려하는 일정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만일 배양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인재를 만들어내겠는가? 아뢴 대로 경향(京鄕)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김병국이 아뢰기를,
 
“두 선정을 문묘에 배향할 길을 이미 받아놓았습니다.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에게 영의정(領議政)의 직임을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한 임징하(任徵夏)는 대대로 충성과 효성을 전해왔고, 절개와 의리를 자임하였습니다. 병오년(1846)에 한번 상소 올린 것이 도리어 흉악한 당적들의 모해를 당하였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억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아경(亞卿)만을 추증하는 데만 그칠 수 없으니 특별히 팔좌(八座)를 더하고, 이어서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조 참판을 추증한 이봉수(李鳳秀)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우리 정조(正祖)께서 특별히 《근사록(近思錄)》 한 부를 하사하였습니다. 아울러 당시의 여러 현인들이 모두 체(體)와 용(用)이 융합됨을 허여하였으니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볼 수 있습니다. 음직으로 벼슬길에 잠깐 올랐다가 곧 물러갔습니다. 그의 아들이 현귀해져서 이미 아경을 추증하였지만, 조정에서는 마땅히 높이 표창하여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은전을 시행하여 정경(正卿)이나 좨주(祭酒)를 더 추증하소서.
 
고(故) 현감(縣監) 김명희(金命喜)는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사람이 간결하여 선비들에게 추중(推重)되었는데 보잘것없는 음직(蔭職)에 묻혀있어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쉽게 여기고 있으니 또한 장려하여 후진을 권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도헌(都憲)이나 좨주에 초증(超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은 포의(布衣) 때부터 공훈이 이미 드러났으며, 태보(台輔)에 오르자 명성과 덕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보답해주는 뜻으로 사손(嗣孫)을 등용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당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손의 이름을 알아보고 나이에 구애하지 말고 임기가 가까운 초사(初仕)의 자리를 만들어 검의(檢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선치(善治)한 수령(守令)들을 사실대로 보고할 일에 대하여 연석(筵席)에서 아뢴 일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의 계(啓)가 지금 이미 올라왔습니다.

춘천 전 부사(春川前府使) 김명진(金明鎭), 철원 전 부사(鐵原前府使) 양주성(梁柱星), 덕원 부사(德源府使) 정현석(鄭顯奭), 광주 목사(廣州牧使) 유치희(兪致喜), 서흥 부사(瑞興府使) 조석영(趙奭永)은 모두 새서(璽書)와 표리(表裏)의 은전을 시행하고, 영평 전 군수(永平前郡守) 박제성(朴齊性), 김포 전 군수(金浦前郡守) 조준구(趙駿九), 서천 군수(舒川郡守) 김익성(金益成), 김제 군수(金提郡守) 조필영(趙弼永), 신계 전 현령(前新溪前縣令) 서기보(書記補)는 모두 별천(別薦)을 시행하고, 각도(各道) 암행어사(暗行御史)들의 계에서 표창을 청한 여러 사람들 중 별단(別單)의 학문과 덕행이 걸출하고 이채로운 사람들은 전조(銓曹)로 하여금 각별히 수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제사(諸司)에서 관리를 축소할 때 음직(蔭職)으로 7, 8품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은 임기가 차는 대로 승급시켜 참상(參上)으로 만드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습니다. 일찍이 직장(直長), 봉사(奉事) 및 교관(敎官), 부도사(部都事), 감역관(監役官)으로 재임 중에 사고를 당한 사람은 구분하여 처리할 길이 없습니다.

매번 6월과 12월에 진행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 때에 참봉(參奉)으로서 사고를 당한 사람을 견복(甄復)하는 자리를 융통하여 추천하는 것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사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아룁니다만, 일이 관제(官制)와 관계되는 문제이니 연석(筵席)에 나와 있는 대신들과 전관(銓官)들에게 물어보소서.”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아뢰기를,
 
“음직 참하관으로서 사고를 당한 사람을 견복할 자리가 없는 것은 과연 답답한 일입니다. 이번에 이와 같이 변통하는 것은 순차적으로 진엄(振淹)하는 방도에 진실로 합당합니다.”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종운(洪鍾雲)이 아뢰기를,
“대신이 이미 아뢰었으니 신은 더 진달할 의견이 없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대신과 전관의 뜻이 이러하니 그대로 하라.”하였다.
 
【영인본】2책 127면
【분류】*왕실-경연(經筵)/*사상-유학(儒學)/*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인사-관리(管理)/*인사-선발(選拔)/*인사-관리(管理)

63)고종 21권, 21년( 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10월 12일 계미 3번째기사

●일본 사람들의 한행 이정 약조 부록을 체결하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국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도로 이수(里數)에 관한 약조가 체결되었다.
 
〈한행 이정 약조 부록(閒行程里約條附錄)〉
 
이에【조선력(朝鮮曆) 계미년(1883) 6월 22일,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16년 7월 25일】 체결된 본 조약 제3조에 근거하여 양국 위원(委員)이 회동하여 의정하고 금년에 다시 확충한 이정(里程) 경계를 아래에 열거한다.
 
인천항(仁川港)
남쪽 한계 남양(南陽)·수원(水原)·용인(龍仁)·광주(廣州)
동쪽 한계 서울 동쪽 중랑포(中浪浦)
서북 한계 파주(坡州)·교하(交河)·통진(通津)·강화(江華)
서남 한계 영종(永宗)·대부(大阜)·소부(小阜)의 각 섬
원산항(元山港)
북쪽 한계 영흥(永興)
서쪽 한계 문천(文川)의 끝지역
남쪽 한계 회양(淮陽)·통천(通川)
부산항(釜山港)
동쪽 한계 남창(南倉)
북쪽 한계 언양(彦陽)
서쪽 한계 창원(昌原)·마산포(馬山浦)·삼랑창(三浪倉)
남쪽 한계 천성도(天城島)
이에 양국이 위임한 대신(大臣)들이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어 조선국에서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이정 약조의 부록을 만들어 성실히 준수할 것을 밝힌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93년 10월 12일
위임대신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홍집(金弘集)
대일본국 명치(明治) 17년 11월 29일
위임대신변리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영인본】 2책 174면【분류】 *외교-일본(日本) / *교통-육운(陸運)  
 

64)고종 21권, 21년( 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4월 14일 무오 1번째기사

●해안을 방어하는 일에 관하여 민영목이 상소하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민영목(閔泳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해안을 방어하는 법은 바다를 차단하여야 하는 만큼 전적으로 수군(水軍)을 의지해야 하는데, 지금 관할하는 것은 단지 육군(陸軍)뿐이니 아주 허술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연안의 경계에 있는 수군에게 해방(海防)의 통제를 따르게 한 뒤에야 바다와 육지의 방비가 바야흐로 모두 완비된다고 봅니다.
 
교동(喬桐)은 외딴 섬에 위치해 있어서 통어사(統禦使)의 명칭은 명색뿐이고 실속이 없는데다가 또 해방영(海防營)에 소속되어 있으니 체제가 서로 모순됩니다. 수군 절제사가 때에 따라 바꾼 전례가 한 번만이 아닌 만큼, 참작하여 변통하는 것이 때와 형편에 알맞을 것입니다. 남양(南陽)의 대부도(大阜島)는 영흥도(靈興島)와 덕적도(德積島) 사이에 끼여 있어서 선박들이 왕래하는 요충지이고, 둘레에 있는 아홉 섬의 1,000호에 가까운 백성들은 물길에 익숙합니다.

요해처에 대(臺)를 만들고 포(礮)를 안치하면 영흥도, 덕적도와 함께 앞뒤에서 적을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의 진영을 만들고 별장(別將)을 두되 신의 아문(衙門)에서 추천하여 차명하고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청과 아전·군졸은 아직도 목관(牧官) 때 설치해 둔 것이 있어서 그대로 쓸 수 있는 만큼 번거롭게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병비(兵備)가 거의 완전할 것입니다.
 
연안 고을의 포군(礮軍)은 원래 정원이 1,870명이지만 군사 훈련을 견딜 만한 사람은 겨우 3분의 2이고, 그 밖에는 불때고 심부름하는 무리인데 또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영방(營房)을 설치하고 계기(械器)를 수집하며 조련하는 방도를 차례로 거행하되, 총리아문(總理衙門)의 포아병(礮牙兵), 수어영(守禦營)의 별파진(別破陣), 진무영(鎭撫營)의 새로 조련하는 군병은 원래 각각 지급하여 교습하는 것이 이미 제도로 된 만큼 이제 변동하여 소란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때때로 조련하고 신칙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것입니다.
 
경기(京畿) 연안의 한 방면의 수로는 서쪽으로 풍덕(豐德)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통진(通津)을 경유하며 육로는 인천(仁川)의 제물포항(濟物浦港)과 남양(南陽)의 마산포(馬山浦)를 경유하는 것이 모두 서울로 가는 직통길입니다. 해구 방어는 강화영에 넘겨 전적으로 육지 수비를 담당케 할 것입니다.

해방영이 현재 부평(富平)에 주둔하고 있는 만큼 풍덕과 남양에 응당 두 갈래의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호응하고 연락하게 해야겠는데, 군병이 나뉘어져 세력이 약해지는 것은 병법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으면 두 곳에 따로 본토의 용사(勇士)로 각각 2, 3대(隊)로 묶어 식견과 사려가 있고 군사 일에 익숙한 사람을 선발해서 오래도록 해읍(該邑)을 맡게 하여 편리할 대로 훈련을 시키도록 해야 위급할 때에 효력을 얻기 쉬울 것입니다.
 
옛날에는 군병이 전부(田賦)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병을 양성하는 비용이 없었으나 후세에는 바뀌어 장정(長征)을 하므로 운반하여 공급하는 일이 모두 고을 수령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일의 형편이 그러하니 연안을 방어하는 병사와 장리(將吏)가 대략 2,000인인데, 사목(事目)에서 확정한 포군의 군량이 800여 섬이고 사창(社倉) 모곡(耗穀)이 6,000냥이어서 한 달도 지탱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의혹을 가지고 있으니 빨리 규정을 정해야 합니다.

병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량은 원래 나오는 근본이 있어야 늘 이어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국가의 과세를 계산해서 세액(歲額)을 획부(劃付)하여 군량을 넉넉히 보장하소서. 군병이 먹을 것이 넉넉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에서 명령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군량을 넉넉하게 하는 데에는 둔전(屯田)만한 것이 없는데 둔전은 반드시 놀고 있는 땅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인천, 남양, 장봉(長峯) 등지에 있는 목장은 말떼가 거의 없는데, 토지는 모두 비옥하고 넓어서 개간할 만합니다. 목장을 옮기거나 없애고 그 땅에 둔전을 경영하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소속된 토지의 총 결수(結數)도 다같이 이부(移付)하고, 급하지 않은 자금은 덜어내어 실용한다면 진실로 양쪽으로 이익이 되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영과 진 사이에 군량과 자금이 설사 대준다 하더라도 기계와 의장(衣裝) 운송하는 비용을 일 년 동안 계산하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 재물을 늘리는 방도가 없으면 문득 군용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어로세, 염전, 선박세 세 가지 세금을 이전에 떼어 주심을 받았으나 징수하는 돈이 많지 않습니다.

각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을 떼 주고 경기 감영(京畿監營)에서 잉여를 취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있으나 망정결(望定結)이 다른 도(道)에 있는 것이 아직도 많으니 일체 다 경기(京畿)에 소속시키고 전후의 잉여금의 수효를 통계내어 정식에 있어서 공적 비용 외에 다 해방(海防)에 주는 것으로 해마다 상례를 삼는다면, 경상비용을 더 허비하는 것이 없을 것이고 저축한 것으로 경비를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해롭게 하지 않고 재물을 손상하지 않는 데에는 이보다 편리한 것은 없습니다.
대체로 여기에 진술한 것은 다 시급하고 절실한 사정에 관계되니 묘당(廟堂)에서 자세히 조사해서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은 바로 방어하는 일에 절박하고 시급한 것들이다. 묘당에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하였다.
 
【영인본】 2책 143면
【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병참(兵站) / *재정-잡세(雜稅) / *재정-전세(田稅) / *정론-정론(政論)
 
65)고종 21권, 21년( 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4월 27일 신미 1번째기사

●창녕현의 조운선이 침몰한 일에 관하여 선혜청에서 보고하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창녕현(昌寧縣)의 임오년(1882) 조(條) 대동미(大同米)를 실은 배가 통진(通津)에 이르러 파선한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래에 조운법(漕運法)이 해이해져 농간을 부리고 고의로 파선시켜 항상 통분하였는데, 이 배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갇혀 있는 선주(船主) 하명추(河命樞)는 파선시킨 곳의 지방관으로 하여금 통진부(通津府)에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게 하고, 하남갑(河南甲)은 이미 도망쳤으니 두 도(道)의 진영으로 하여금 체포한 뒤에 등문(登聞)하게 하되, 파선시킨 조 이외에 범장(犯贓)한 곡물도 모조리 본색(本色)으로 징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2책 144면
【분류】 *교통-수운(水運) / *재정-공물(貢物) / *사법-재판(裁判)

66)고종 21권, 21년( 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8월 10일 신사 2번째기사

●창녕현의 선혜청 미태를 돈으로 대납하도록 의정부에서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강하(趙康夏)가 올린 보고를 보니, ‘창녕현(昌寧縣)의 신사년(1881)과 임오년(1882) 조(條)의 선혜청(宣惠廳)의 미태(米太) 가운데 764석(石) 남짓은 바로 통진(通津)의 고의로 배를 파손시킨 사공(沙工) 하명추(河命樞)와 하남갑(河南甲)이 바쳐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하명추는 이미 처단되었고 하남갑은 그길로 도망쳐 달아나서 받아낼 길이 없으니, 특별히 고을과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해서 상정가(詳定價)로 대납(代納)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정공(正供)은 제도를 세운 본의가 매우 중하여 조정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노릇이기는 하지만 한편 생각할 때에 해읍(該邑)이 극도로 피폐하고 죄를 저지른 사공도 이미 벌을 받았으니 이것은 응당 변통해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보고한 내용대로 시행해서 속히 장부를 깨끗이 정리하게 하고, 도망친 놈은 기어코 잡아내어 법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2책 167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교통-수운(水運)

67)고종 24권, 24년( 1887 정해 / 청 광서(光緖) 13년) 11월 14일 정묘 3번째기사

●의정부에서 통진부의 포량미를 강화진 심영에 바치게 할 것을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명진(金明鎭)의 보고를 보니, ‘통진부(通津府)에서 심영(沁營)으로 포량미(砲糧米)를 바칠 때는 애당초 운반비를 별도로 구획한 적이 없었는데, 부평 해방영(富平海防營)에 이속(移屬)되자 선잡비미(船雜費米) 8홉〔合〕씩을 민간에서 더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다시 해영(該營)이 서울로 이설된 것 때문에 각종 비용이 따라서 불어나 앞으로 더 많이 징수해야 할 형편이 되었으니 또한 백성들의 원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전대로 심영(沁營)에 다시 소속시키고, 해방영(海防營)에 바치던 것은 편의대로 가까운 경기의 다른 고을에 이획(移劃)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잡비를 계속 더 징수하는 것은 백성과 고을에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니 변통하는 방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통진부(通津府)의 포량미(砲糧米)를 올해부터 전처럼 심영(沁營)에 도로 보내고 해방영(海防營)에 바치던 것은 그 수량을 계산해서 서울과 거리가 가까운 고을로 바꾸어 지정하도록 해도와 해영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2책 279면
【분류】 *물가·임금-운임(運賃)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68)고종 24권, 24년( 1887 정해 / 청 광서(光緖) 13년) 1월 30일 무오 2번째기사

●경기 감사 김명진이 각 능에 함부로 나무를 찍는 등의 변고에 대해 해당 수신을 신문하여 처결하도록 하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명진(金明鎭)이 장계(狀啓)하기를, “각 능(陵園)에 함부로 나무를 찍고 몰래 장사지내며 농지를 개간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계미년(1883) 이후부터 병술년(1886) 봄까지 해마다 봄가을에 봉심(奉審)하였습니다. 가승지(假承旨)와 지방관들인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주흥(李周興)·윤홍대(尹弘大)·심의홍(沈宜弘)·민상능(閔相能),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동현(李東鉉)·이응진(李應辰)·임상호(任尙鎬)·이인만(李寅晩)·현제보(玄濟普), 풍덕 부사(豐德府使) 이문영(李文永)·박난수(朴蘭壽), 양주 목사(楊州牧使) 신태운(申泰運)·신석년(申錫年)·이태진(李泰鎭)·조영하(趙榮夏)·박정화(朴鼎和)·윤성진(尹成鎭)·박희방(朴熙房)·임순헌(林淳憲), 죽산 부사(竹山府使) 이동수(李東洙)·방천용(方天鏞), 남양 부사(南陽府使) 조희순(趙羲純),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긍주(李兢柱), 통진 부사(通津府使) 서형순(徐珩淳)·심헌지(沈憲之), 부평 부사(富平府使) 허진(許璡) 등이 봉심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흐리멍덩하게 검속(檢束)하지 못한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개성(開城)·광주(廣州)·수원(水原)의 각 해당 유수들은 의례적으로 봉심하나 이미 본영 관할이 아니어서 일체 현고(現告)하지 못하겠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고 처결하게 하라. 살피지 않은 해당 수신(守臣)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현고를 받고 일체로 잡아다가 신문하고 처결하게 하라.”하였다.
 
【영인본】 2책 261면【분류】 *농업-개간(開墾) / *사법-행형(行刑)

69)고종 28권, 28년( 1891 신묘 / 청 광서(光緖) 17년) 10월 24일 을묘 1번째기사

●통진부, 양근군, 풍덕부에 5년간 조세를 면제하도록 명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전 감사(京畿前監司) 조병식(趙秉式)의 장계(狀啓)를 보니, 통진부(通津府)에서 강략결(江落結) 12결(結) 83부(負) 2속(束)과 양근군(楊根郡)에서 태락결(汰落結) 1결 8부 4속과 풍덕부(豐德府)에서 포락결(浦落結) 39결에 대해서 이미 10년간 조세(租稅)를 감면받았으나 하나도 환기(還起)한 것이 없어 백성들의 사정이 딱하게 되었으니, 모두 10년간 더 조세를 정지하여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포락되어서 이미 개간할 진흙이 생겨난 것이 없는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억울하게 징수하는 것은 실로 돌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 세 고을의 허결(虛結) 52결 92부 6속에 대해서는 특별히 5년간 조세를 정지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고 감영(監營)과 고을에 각별히 신칙하여 총 면적대로 기경(起耕)하도록 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헌영(李永)의 장계를 보니, ‘목화농사가 몹시 흉작이 되었다는 상황을 자세히 진달하고 도내(道內)의 열읍(列邑)에서 각영(各營)과 각 아문(衙門)에 납부할 군포(軍布)와 악공 보포(樂工保布)를 모두 순전(純錢)으로 대봉(代捧)하게 하고, 친군영(親軍營)에 납부할 포보포(砲保布)는 5분의 4까지 대봉하도록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군수물자가 바닥난 것은 비록 더없이 딱한 일이지만 백성의 힘으로 갖추기 어려운 것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병조(兵曹)와 각 영에 납부할 것은 3분의 1까지를 전(錢)으로 대봉하게 하고, 각사(各司)에 납부할 것은 순전으로 대봉하게 하되, 포보포는 사체(事體)가 매우 다르니 그만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민정식(閔正植)의 장계를 보니, 거문도(巨文島)의 진결(陳結) 21결 40부 4속에 대한 조세(租稅)를 특별히 상정례(詳定例)로 영구히 대납(代納)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총면적을 회복할 때까지만 특별히 상정례로 대납하게 하고 기필코 점차 환기하도록 신칙하여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영인본】 2책 399면
【분류】 *군사-군역(軍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전세(田稅)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김진수 발행인  js@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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